vol.15 Oxygan the Close Beta Test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난데없이 히어로 협회 타령을 하는 정장녀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천우용진이 히어로니 사이드킥이니 하는건 어디까지나 뒤늦게 중2병이 와서 그런것일뿐 프록시마에 정말 그런 부류들이 흔해서가 아니였다. 지구와 달리 탄생석 능력이란게 있으니까 그런게 있을법도 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모두가 초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세상이였기에 히어로가 히어로로서 유니크함을 지닐 수 가 없던 것이다.
게다가 행정구역 단위의 체계적인 치안공조는 빌런같은 반사회적 존재가 대놓고 활개치는걸 그리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히어로와 빌런이 빌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운명적인 대결을 펼치는건 그야말로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속에서나 가능한 일. 즉 지금 저 정장녀는 천우용진을 꿰어내기 위해 대놓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였다.
"하지만 좀비걸은 나와 아주 오랫동안 손발을 맞쳐온 파트너인데다가 사이드킥치곤 굉장히 유능해. 미모는 어렸을때 사고를 당해서 좀 흉하긴 하지만 애초에 사이드킥이 미모가 뭐가 중요해!"
"글쎄요. 제가 알기로 천우용진님게서 장의사, 데드마스크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기간은 한달이 채 안되는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요즘같은 미디어 시대에는 히어로나 사이드킥의 미모 또한 중요한 평가요소라구요. 왜냐하면 나중에 인기를 끌었을때 피규어같은 굿즈를 팔아야하거든요. 하지만 천우용진님께서 계속해서 실력있는 사이드킥이라고 하시니까 한번 테스트나 해보죠. 저희 안기청에 최근 들어온 막내 한명이 A랭크 신체강화 능력자인데 아직 실전경험이 부족한편이거든요. 만약 좀비걸양이 그 친구와의 대련에서 이긴다면 같이 히어로 협회로 데려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법, 아쉽지만 떨어지는 수 밖에요."
정장녀의 반협박에 가까운 제안에 천우용진이 내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난데없이 선글라스 떡대남들 중 한명과 대련을 하게된 나는 대련상대의 풍채를 살피곤 헛웃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최근에 들어와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막내가 정장이 터질듯 근육이 발달해가지곤 머리털 한포기 없는 민머리엔 해병 특수부대 167기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였다. 모르긴 몰라도 저정도 피지컬에 A랭크 신체강화 탄생석 능력이 더해진다면 사일런트워커(Silentwalker), 푸스카도 능히 육탄전으로 제압 가능할 수준일 것이다.
그에 반해 지금 이 임시육체는 신체능력만 따지고보면 성인남성은 커녕 성인여성보다도 못한 수준. 당연히 이매망량 900기를 전면에 내세우는게 정석이겠지만 내 육감은 웬지 모르게 정장녀 앞에서 이매망량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될것 같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하여 나는 이전에 저주술사 전직NPC 린다에게서 블라인드 저주 스크롤을 빌릴때 사령안으로 기억해둔 술법형질을 재구현해 싸우기로 했다.
그 밖에도 둔화의 저주나 약화의 저주같은 초급저주술법의 형질을 기억해두었으니 일방적으로 쳐발리지만은 않을터. 물론 그것도 저 대머리남이 순수 육체파 능력자이기때문에 가능한 전략이지 만약 상대가 A급 신체변화 능력자만 됐어도 이매망량없이 싸우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우리 귀여운 막내, 이기면 견습기간을 종료시키고 바로 정식요원으로 승격시켜주겠지만 져버렸다간... 바로 징벌의 방으로 끌려갈 줄 알아!"
"며, 명심하겠습니다. 부청장님!!"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말하지만 설마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일은 없겠지?"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우후후. 불구대천의 원수라니 그건 너무 오버했고 어디까지나 대련이니까 너무 과열되지는 않게 해주세요. 괜히 사상자라도 나오면 내가 귀찮아지니까."
만약 나한테 정장녀같은 상사가 있었다면 입사당일날 그냥 들이박고 회사따윈 때려쳐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병출신 대머리는 집에 부양해야할 가족이라도 있는지 이를 악물고 건물밖 옥상으로 향했다. 잠깐만 그런데 안기청에서 부청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린다는건 저 정장녀가 안전기획 부청장이라는거야? 시부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물이였잖아!
"그럼 어느 한쪽 전투불능 상태가 되거나 항복을 선언할 경우에만 지는걸로 하되 예외적으로 옥상밖으로 떨어지면 장외패가 되는걸로 하겠습니다. 괜히 다른 시민들한테 패를 끼칠 수 는 없으니까요. 그럼 두분다 준비하시고 대련 스타트!"
그렇게 난데없이 달동네 옥상에서 시작된 일생일대의 대련. 나는 시작하자마자 두가지 호재를 맞이했다. 일단 첫번째는 내가 사전에 준비한 알이큰 선글라스 덕분에 위'사령안을 쓰는 모습을 숨길 수 있었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해병 출신 대머리가 지레 쫄아서 선공을 양보했다는 점이였다.
만약 상대가 앞뒤 안가리고 시작하자마자 돌진해왔다면 갈비뼈 두세대는 날아갔을텐데 말이다. 물론 적의 탄생석 능력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머리남같은 스테레오 타입의 능력자가 탐색전을 펼치는건 어찌보면 정석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으니 이번에는 바로 그 신중함이 패착이 되리라.
어둠의 소정령에서 추출한 어둠의 마력을 기반으로 장님의 저주를 위시한 이중, 삼중의 저주를 걸어버리자 대머리남은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끼고 사방팔방에 헛발질을 하기 시작했다. 허나 나는 진즉에 몸을 빼 옥상 가장자리를 빙빙돌며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직도 컨트롤이 버거운 임시육체가 휘청하더니 근처의 장독대를 박살내고 말았다. 와장창! 당연히 큰 소음이 뒤따라 도리어 내가 빈틈을 노출해버리고 말았으니 대머리남이 둔화와 약화의 저주에 걸린 사람이라곤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스피드로 달려와 내게 정권을 꽂아넣었다.
빠드득!!!
"잡았.. 허어억! 죄, 죄송합니다!! 앞이 안보이는 상황에서 힘조절까지 실패하는 바람에. 설마 제가 폐를 꿰뚫어 버린건 아니겠지요? 부청장님 죄송하지만 바로 긴급의료팀을 불러주실 수... 으아아아아악!!!"
이런 내가 너무 방심한건가? 나는 대머리남때문에 뻥 뚫려버린 가슴의 상처를 변이술법으로 급하게 수복하며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이매망량들과 협심해 대머리남을 잡아당겨 지상으로 추락시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패배하는건 둘째치고 좀비의 몸인걸 들켜버릴뻔 했다. 뭐 어쨌든간에 결과적으론 승리를 쟁취했으니 상관없으려나.
"조, 좀비걸이 이긴건가?"
"그래 보이네요. 부상의 정도가 어찌됐든간에 옥상에서 먼저 떨어진쪽은 우리 막내니까요. 정말이지 자기가 먼저 공격을 성공해놓곤 당황해서 어쩌자는건지. 뭐 그에 관한 문책은 징벌의 방에서 이어가는걸로 하고. 좀비걸양을 히어로 협회로 데려가기전에 마지막으로 본인의 의사를 한번 확인해보도록 하죠. 좀비걸양 체급상으론 한참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그 기지는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본인이 천우용진님에게 어울리는 사이드킥이라고 생각하는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묻고싶네요."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안전기획청의 부청장으로 밝혀진 정장녀가 나를 옥상 난간에서 끌어올려주는 척 하면서 물었다. 거기까지는 꽤나 공정한 느낌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였다. 손을 마주잡은 순간 이전에 느꼈던 그 무시무시한 포스가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콸콸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포스를 느낀건 나뿐만이 아니였는지 어느새 잽싸게 다시 옥상 계단까지 올라온 대머리남을 비롯한 다른 안기청 요원들까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통스러워 했다. 나 또한 굉장한 심적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 임시육체는 이미 죽은 몸이였기에 표면상으론 이렇다할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허나 계속해서 이렇게 심적 압박을 받다간 육체와 영혼간의 공조자체가 끊길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르르르... 안기청의 우두머리쯤 되는 인사가 쪼잔한 짓거리를 하는군. 애초에 대련에 응했다는 사실 자체가 히어로 협회로 따라가겠다는 암묵적인 의사표현이였을터. 한입으로 두말을 할셈인가?"
"오호라 아까부터 하도 말씀이 없으시길래 벙어리인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군요. 게다가 웬만한 장정은 씹어먹을 강단까지. 좋아요, 좋아. 그럼 앞으로 잘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안전기획청의 부청장, 선우매향이라고 합니다. 어디한번 서로 힘을 합쳐서 천우용진님을 프록시마 제일의 히어로로 한번 만들어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