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옥사건 더 디파일러-570화 (570/599)

vol.15 Oxygan the Close Beta Test

가끔 보면 꼭 있단 말이지. 잘나가다가 끝에 가서 뇌절하는 인간들. 나는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다가 뜬금없이 왕정국가를 언급한 올백머리남때문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결국 지금의 권력체계를 무너트리고 자기가 헤게모니를 쥐겠다는 수작이잖아!

"오해하지는 마라. 내가 왕이 되겠다는건 아니니까. 왕이 될분은 따로 계시다."

"설마싶어 말하지만 그 왕 후보자가 네놈의 조카나 삼촌은 아니겠지?"

"그럴리가. 애초에 내게 가족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내 친지가 아니며 심지어는 같은 인간조차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프록시마를 평화롭게 다스리기에 적합한 분이시지. 뭐 이건 지금 단계에서 논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니 앞선 제안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봐줬으면 좋겠군. 그저 미친 몇몇 과학자들의 개인적 일탈인줄 알았던 인간통합실험을 통합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부활시키다니 뭔가 냄새가 나지 않나?"

"글쎄. 지금의 이야기만으론 인간통합실험이란게 염라대왕님의 특별의뢰와 어느정도 연관성이 있는 확정지을 수 없겠는데? 하지만 충분히 조사할만한 가치는 있을것 같군. 그래서 지금 본녀와 동맹이라도 맺자는건가?"

"뭐 그런셈이지. 마음같아선 아나키스트 멤버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건 당신이 허락할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야. 아니면 동맹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상호불가침 조약정도는 맺고싶군. 눈에 보이지않는 하수인을 수백마리씩 부리는 꼭두각시술사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거든."

"상호 불가침조약이라...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네 요구대로 본녀가 아나키스트 멤버가 되면 간단한 것을. 어디보자 코드네임은 좀비걸Z가 어떠한가?"

"흐음. 본래 전투조는 알파벳이 접두사가 아닌 접미사로 붙는게 규칙이지만 애초에 송제시왕 당신의 존재가 이레귤러 그 자체이니 딱히 상관은 없겠지. 하지만 아나키스트 멤버가 된 순간 리더인 내 명령에 복종해야한다는 규칙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과연 한때 지옥의 왕이였다는 당신이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있을까?"

"뛰는놈위엔 나는놈이 있다고 어차피 시왕이라고 해봤자 그 위에는 염라대왕님이 있다. 명령을 받는건 익숙해. 애초에 명령때문에 이승에 나온것이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같은 딱봐도 불합리한 명령만 아니라면 협력해주지."

내가 예상외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자 올백머리남이 눈매를 좁히며 의심스럽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 나 또한 올백머리남을 믿을 수 없는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위'사령안으론 인간의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없었기에 차라리 명목상으로나마 아나키스트에 가입해 '인간통합실험'이니 '인간이 아닌 왕'이니 하는 이슈들을 직접 조사할 심산이였던 것이다.

물론 왜 올백머리남이 천우용진에게 아이시클같은 고급인력을 파견했는지에 관한 문제도 놓칠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대화가 통하는 상대일줄은 몰랐군. 엘화이트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날뻔 했겠어."

"뭐 나중에 죽게되면 알게되겠지만 지옥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당연히 내가 지옥에 떨어질 것처럼 말하는군. 뭐 지옥이냐 천국이냐 둘중에 하나라면 나도 지옥에 떨어질거라고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때는 잘 부탁하도록 하지, 송제시왕 아니 좀비걸Z. 지옥에서도 인맥빨이라는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승에 있는 동안은 나도 잘부탁하도록 하지, 리더. 그럼 이만 나는 물러나겠다. 아무리 아나키스트 임시멤버가 됐다고 해도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것처럼 산자와 죽은자의 간극은 큰법. 본녀의 힘이 필요할때만 따로 연락하도록."

라고 말한 내가 더 이상 거리낄게 없어져 이매망량의 물결을 타고 창문을 통해 아지트를 빠져나갔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갔는지 저 멀리서 어렴풋하게나마 동이 터오르고 있었기에 빨리 천우용진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가 걱정되서가 아니라 마스크없이 생얼로 다녀야 하는 내 처지가 걱정되서였다. 괜히 일반인에게 걸렸다간 빨간마스크급의 도시전설이 되기 쉽상이였기에 가급적이면 버려진 일회용 마스크라도 줏어다 쓸 요량이였다. 으흠 그런데 그 한정판 마스크가 찢어진건 어떻게 변명해야하나? 아, 모르겠다 일단 가서 생각하자.

* * * *

"알아보겠다던 일은 어떻게 됬어?"

"그럭저럭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건 그렇고 천우용진님 이 검정색 최고급 세단은 또 뭡니까? 아무리 명절특수를 맞았다고 하지만 택바알바비만으로 구하기엔 다소 비싼 차처럼 보이는데요. 설마 36개월 할부같은걸로 구입하신건 아니겠지요?"

"내, 내 주제에 무슨 차를 사! 애초에 운전면허도 없고. 그게 아니라 갑자기 정부쪽에서 사람이 나와서... 일단 따라와봐."

똑똑.

천우용진이 한껏 긴장한 얼굴로 자취방의 낡은 현관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 또한 덩달아 긴장모드에 들어갔으니 왜냐하면 다른 때도 아니고 아나키스트 그러니까 정부입장에서 보면 소위 반동분자들과 회동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정부인사가 찾아왔기 때문이였다.

설마설마 싶지만 그렇게 은밀히 움직였음에도 누군가에게 행적을 들킨거라면 최악의 경우 지금 당장이라도 천우용진을 데리고 교외로 도망쳐야할 수 도 있었다. 원래부터 이방인인 나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였지만 탄생석 무능력자였어도 시민권 자체는 빨간줄 하나 없이 멀쩡했던 천우용진으로서는 꽤 타격이 크리라.

하여 나는 이매망량으로 훔쳐온 알이 큰 선글라스와 일회용 마스크 그리고 벙거지 모자를 한층 더 깊게 눌러쓴채로 천우용진의 뒤를 따랐다. 아직 확정된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굳이 이쪽에서 도둑이 제발 저리듯 이상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자취방의 좁은 복도를 무슨 던전탐험하듯 조심스럽게 지나치니 선글라스를 쓴 떡대남 사이에 새빨간 입술 밑에 점이 유독 섹시하게 느껴지는 정장녀가 다리를 꼰채로 앉아 있었다.

"우후후! 자기집인데 무슨 노크를 하고 그러시나요, 천우용진님. 그냥 편하게 들어오시면 되지. 어디보자 그쪽의 아리따운 레이디께서는 혹시 천우용진님의 애인되시는분?"

"아니. 이 사람은 그러니까... 내 사이드킥인 좀비걸이다."

"어머나 어쩐지 분위기가 범상치 않더라니! 천용진님 그러니까 히어로일때는 장의사, 데드마스크라고 했던가요? 역시 세상을 홀로 구할 수 는 없는법. 휼륭한 히어로에게는 그에 걸맞는 사이드킥이 필요한 법이지요."

생긴건 섹시함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하이톤인 목소리가 거슬리는 정장녀가 부지부식간에 내 손을 붙잡아오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나키스트 전체와 홀로 대면했을때도 느껴보지 못한 본능적 위기감에 몸을 떨었다. 딱히 뭐라 콕찝어 말할 수 는 없었지만 내 본체로 프록시마에 강림한다고해도 경시할 수 없는 적을 눈앞에 둔 기분이였다.

설마하니 프록시마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나였기에 숨이 턱 막혀왔다. 영혼 회로 연구고 나발이고 분령(分靈)의 소멸까지도 각오한 그때 정장녀가 한껏 자애로운 미소로 내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머, 어머, 어머 손이 왜 이렇게 차가우실까. 요즘 바깥에 날이 많이 춥죠? 알아보니까 이쪽 달동네에는 지반 문제때문에 천연가스 공급 파이프가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네요. 그러다 보니 보일러 설치도 어렵고. 정말이지 나라의 녹봉으로 먹고사는 정부인사로서 시민 여러분들께 심히 죄송스러울 따름이에요."

딱!

본래 프록시마의 주민이 아닌 내가봐도 입에 발린 거짓말을 늘어놓던 정장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떡대 두명이 번개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곤 5분도 채 되지 않아 각자 휘발유로 작동하는 휴대용 난로와 핫팩 한박스를 들고 돌아왔는데 그치들에겐 미안하지만 좀비인 내게는 하등 소용없는 것들이였다.

"이건 약소하나마 제가 준비한 선물들이에요. 부디 이것들을 잘 활용하셔서 이번 겨울은 따듯하게 보내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천우용진님 이제 친애하는 사이드킥과 작별인사도 마쳤으니 슬슬 저희를 따라 히어로 협회로 가시는게 어떻게습니까?"

"자, 잠깐만! 아까는 히어로에게 사이드킥이 꼭 필요하다고 했었잖아. 당연히 좀비걸과 같이 히어로 협회로 가는거 아니였어?"

"예, 그랬었죠. 그래서 히어로 협회에 도착하자마자 천우용진님의 탄생석 능력에 찰떡궁합처럼 잘 어울리는 미모의 사이드킥을 새로 배정해드릴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설마 천우용진님께서 옛정에 얽메이는 타입이실줄은 몰랐군요. 취미로 히어로 생활을 할때라면 모를까 정식 히어로 활동을 할때 그런 마인드는 분명 장애물이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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