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5 Oxygan the Close Beta Test
"뭐야 근밀도강화의 축복이 담긴 탄생석을 받아서 역도 금메달까지 먹은 내가 왜 둔기전사가 아니라 원소술사로 전직해야하는건데 진짜 장난하나!"
"맞아. 나도 몸쓰는 거랑은 하등 상관없는 탄생석인데 맨손 격투가를 하게 생겼다고!"
"하하하! 나중에 얼마든지 자유롭게 다른 직업으로 전직이 가능하니 지금은 일단 이 GM너굴맨의 판단을 믿어주시오!"
시간이 지나 절대 줄어들것 같지 않던 줄이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할때쯤 나는 프록시마라고 하는 행성의 문화적, 환경적 특성에 관해서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 귀동냥에 의지한 분석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도 있겠지만 큰흐름으로 따져보면 프록시마의 과학 문명 수준이나 신비문명 수준은 지구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다는 것이였다.
물론 단일대륙, 단일정부, 단일종교의 삼위일체는 지구완 전혀 다른 방향의 역사를 쌓아올리게 만들었지만 문명수준만 따지면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탄생석(誕生石, Birthstone)의 존재로 인해 신비문명 레벨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기적과 같은 현상이 펼쳐지곤 했다.
해수감응의 축복이 담긴 탄생석의 소유자가 모세마냥 실제로 바다를 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지능상승의 축복을 받은 고양이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고한다. 즉 무공과 술법같은 신비학문은 전혀 발달하지 않은 주제에 판타스틱하기 그지없는 사건사고들이 일상화 되어 있었던 것.
그야말로 지구가 강에서 문명이 시작해서 강에서 끝났다면 프록시마는 탄생석으로 시작해서 탄생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신비문명에 있어선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지구에 비한다면 여러가지로 연구가치가 높은 행성이였으니 엔도미야가 VOT 온라인의 첫 무대로 프록시마를 선택한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바꿔말하면 나한테도 제법 연구가치가 높다는 사실이지.'
앙그릿사의 보석술법처럼 종족적 재능과 고도의 술법적 이해가 동반되어야반 가치를 발하는 비취보석과 달리 탄생석은 그냥 지니고 있는것 만으로도 힘을 발한다. 영력 향상에 있어서 어느정도 임계점에 도달한 나로서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탄생석이라는게 타인의 것을 빼았아도 효력이 발휘하는지 프록시마 행성 주민이 아닌 외계인(?)도 탄생석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건 지금 당장은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였다. 하지만 탄생석의 원리가 무엇인지 정말 신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내린 축복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신비문명의 조화인지 확인할 수 만 있어도 향후 스펙업에 큰 도움이 될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렇게 탄생석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GM너굴맨의 앞에는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GM너굴맨은 경찰관들이 사용하는 음주측정기 같은 기기를 요란스럽게 흔들더니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티딕, 티딕, 티딕, 티딕, 티딕, 티딕, 티딕, 티딕, 티딕, 티딕, 티디딕!!!
"자 그러면 마지막 모험가분의 재능을 한번 측정... 어라라 이게 왜 이러지? 벌써 고장이 났나? 영력 스텟이 공이 하나요, 둘이요, 셋?"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안그래도 시간이 늦어졌는데 빨리 제가 전직해야할 직업을 알려주시죠."
"으흐으으으음... 그럼 일단 방패전사쪽으로 가계시지요. 나중에 혹시라도 변동사항이 있으면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계에서 온 모험가분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직업편성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남은건 심연의 몬스터들과 맞서 싸우며 여러분들의 직업레벨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역량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 심연의 대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겠지요. 이 GM너굴맨이 끝까지 응원하겠소이다! 워어어어어프!!"
위이잉!(x99)
GM너굴맨이 두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워프를 외치자 각 직업편성별로 나눠져 있던 유저들이 동시에 순간이동 되었다. 하지만 이제 막 방패전사 라인쪽으로 향하려던 나는 여전히 남아 넓디 넓은 튜토리얼 방에 GM너굴맨과 단둘이 남게 되었는데 어느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 팔짱을 끼고 상황의 추이를 지켜봤다.
한동안 만세포즈를 이어가던 GM너굴맨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진짜 가죽인줄 알았던 너구리배의 지퍼를 가르며 육중한 미니건을 꺼내들었다.
철컥!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프록시마에서 반신급의 영력 소유자라니 듣도보도 못한 이야기라구요."
"나말이야? 글쎄. 여신칼날단의 떠오르는 신성 서열 27위 아크리퍼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여신칼날단이라면... 설마 엔도미야님께서 베타 테스터로 선택한? 하지만 서버 게이트웨이쪽에서 일하는 GM들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뭐 그 친구들이 농땡이라도 피웠나보지. 뭐 정 의심스러우면 그쪽에 연락해서 다시 한번 조사해보던가. 아니면 뭐 엔도미야한테 직통으로 보고해도 난 딱히 상관없다고."
"엔도미야님은 그렇게 뵙고 싶다고 쉽게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한번 서버 게이트웨이측에 연락을 해볼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혹시나 싶어서 말하지만 괜히 허튼짓을 하면 제 미니건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겁니다."
"어이쿠 무서워라!"
내가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나자빠지는듯한 몸짓을 취하자 GM너굴맨이 도끼눈을 하며 노려보더니 이내 홀로그램 화면을 띄워 뭔가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전혀 꿀릴게 없었던 나는 코를 파면서 결과를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GM너굴맨이 머쓱한 표정으로 미니건을 다시 뱃가죽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플래닛 아이피 조사결과 귀하는 용제성 출신이신걸로 확인이 됐습니다. 당연히 원칙적으론 프록시마외의 행성에서 VOT 온라인에 우회접속을 할 경우 서버 게이트웨이 측에서 거르게 되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VOT 온라인 접속캡슐 분출 자체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속된말로 농땡이를 친 모양이더군요. 뭐 자기들 말로는 여신칼날단 서열 9위 앙그릿사님의 VOT 단말기 맥어드레스에 한정해서 따로 신호를 받기로 했다던데..."
"앙그릿사라면 용제성의 새끼 드래곤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베테 테스터 일은 못하겠다고 하더군. 확실히 이런 MMORPG 온라인 게임 테스터야 나같은 개백수한테나 잘 어울리는 일 아니겠어?"
"흠흠, 역시 같은 행성 출신이라 어느정도 교류가 있으셨군요. 아무튼 좋습니다. 그러면 VOT 온라인의 베타 테스터로서 귀하가 심연의 대륙에 입장하는걸 허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 참 듣던중 반가로운 소리로군. 그런데 설마 진짜 내가 방패전사로 레벨 1부터 시작해야하는건 아니겠지? 아무리 나중에 전직이 가능하다지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재능 낭비라고."
"물론 방패전사야 제가 시간을 벌려고 잠깐 거짓말을 한것 뿐이지요. 귀하 그러니까 아크리퍼님께서는 그 재능을 십분 살려서 강령술사 전직 NPC로 일하게 되실겁니다."
"그래 강령술사 전직 NPC야 말로 내게 딱 어울리는... 아님 잠깐 지금 뭐라고?"
문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 당황한 내가 뭐라고 항의하는 것도 잠시. GM너굴맨이 또 다시 만세포즈를 취하더니 부지부식간에 나를 워프로 날려버렸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새하얗던 튜토리얼 룸과 달리 시커멓기 그지없는 돌탑이였는데 군데 군데 자리한 양초가 아니였다면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다른 유저들과 함께 레벨 1부터 찬찬히 레벨링 과정을 거칠줄 알았던 나는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머리를 긁적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VOT 온라인(지구 버전) 시절 B급 영력을 타고난 덕분에 강령술사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내가 Ex급의 영력을 가지고 또 강령술사로 전직한다?
그야말로 치트키를 열몇개씩 쓰고 게임을 하는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막말로 밸런스를 위해서라면 내 직업이 방패전사로 고정(사실 그래봤자 치트키가 한두개로 줄어드는것 뿐이겠지만)되도 할말이 없는 수준이였다. 그런데 설마하니 아예 유저 자격을 박탈하고 NPC로 살아가게 만들줄이야!
'뭐 NPC라고 해서 VOT 온라인의 세계를 탐구하지 못하는건 아니니까 일단 가볼까.'
과거 나를 VOT 온라인(지구 버전)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용린혁 어르신처럼 소위 게임내 꼼수를 찾아내는건 비단 유저만이 아니였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애처롭게 타오르는 촛불에 의지해 돌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런 제반사항도 알려주지 않고 강령술사 전직 NPC로서 살아가라며 이곳으로 보냈으니 뭔가 따로 안배된 장치가 있으리라. 하염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돌탑의 꼭대기층에 도착한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낡은 목제문을 열어재꼈다. 끼이이이익!거리는 소리에 안에 있던 세쌍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나는 그중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