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5 Oxygan the Close Beta Test
'흐으음 설마 엔도미야의 의뢰가 VOT 온라인과 관련된 것인줄은 몰랐는데.'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대표적으로 디파일러)에 대한 저항력을 올려주기 위해 엔도미야가 기획한 백신 프로젝트. 그 1기는 전생유적이였고, 2기가 바로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해준 결정적 계기였던 VOT(Vaccine Of Things) 온라인이였다.
그런데 VOT 온라인의 테스트 베드였던 지구가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걸으면서 무산된줄 알았던 2기 백신 프로젝트가 재시동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태여 VOT 온라인 접속 캡슐을 그것도 무선 모델로 개조해서 제작할 이유가 하등없었다.
아무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VOT 온라인이였기에 3기로 넘어갈줄 알았던 백신 프로젝트가 스테이하게된 배경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VOT 접속 캡슐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여 나는 가타부타 따지기전에 일단 한번 접속 캡슐을 직접 구동해보기로 했다.
실제로 서버에 접속이 가능한가 여부는 미지수였지만 엔도미야가 바보가 아니라면 의뢰와 관련해서 뭔가 안배를 해놓았으리라. 익숙한 동작으로 접속 캡슐을 개폐하고 내부에 착석한 뒤 시동 버튼을 누르자 주위 시계가 급변하며 익숙한 홀로그램 문자들을 출력하기 시작했다.
VOT 온라인 베타 접속중...
프록시마력 서기 1102년 베타 캐릭터 작성중...
-튜토리얼 룸 유저 인원수 체크(6/100)
-튜토리얼 룸 유저 인원수 체크(23/100)
-튜토리얼 룸 유저 인원수 체크(51/100)
-튜토리얼 룸 유저 인원수 체크(88/100)
-튜토리얼 룸 유저 인원수 체크(100/100)
"와우! 이거 와전 대박인데. 거의 현실이랑 다를바가 없잖아."
"그러게. 이 증강현실게임 과학기술청에서 만들었다던데 무능한 철밥통들 치곤 제법이잖아."
"그래봤자 어차피 과학기술 계열의 탄생석을 지닌 기술원들만 개고생하고 높으신분들은 골프나 치러 다녔을텐데 뭐."
그렇게 증강현실게임을 접속할때 특유의 부양감에 데자뷰를 느끼는 것도 잠시 나는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금의 VOT 온라인 클래식은 서버 접속이 가능했을뿐만 아니라 다른 유저 또한 존재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인과 관계였지만 지구가사실상 멸망(그것도 반쯤은 나때문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과학기술청이 어쩌구 높으신분이 저쩌구 하는걸보면 딱히 세기말의 세계에 사는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엔도미야가 지구와는 다른 제 3의 행성을 VOT 온라인의 테스트 베드로 선택한건가? 아니 어쩌면 테스트 베드는 지구로 끝이고 제 3의 행성에서 본격적으로 여신칼날단원들을 양산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나는 이 넓직한 흰색 공간 구석에서 얌전히 탐색전을 펼쳤다. 생김새만 따지면 지구인과 크게 다를바 없어 보였지만 VOT 온라인은 전신성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염색이나 타투 추가 같은 기초적인 커스터마이징 정도는 제공했기에 쉽사리 속단할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신체적인 특징과는 별개로 대화 내용에서는 공통적인 화제를 집어낼 수 있었는데 그게 뭔고 하니 '탄생석(誕生石, Birthstone)'이란 단어가 대화 주제와 상관없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었던 것. 그 단어의 뜻만 알아내면 웬지 여기 있는 유저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것도 같았지만 대놓고 물어보면 간첩 취급(남녀노소 불문하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 단어를 언급했기에)을 받을 것 같아 망설이고 있는 그때 흰색 공간의 중심에서 단상이 떠올랐다.
"헤이요~ 이계에서 온 모험가들이여. 이 몸은 GM너굴맨이라고 하오. 대륙을 침략한 심연의 대마왕과 맞서싸우기 위해 기꺼이 소환에 응해주신 모험가분들의 면면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든든하구려. 하지만 심연의 대마왕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니 일단 이계의 모험가 여러분들의 재능을 측정한 후 그에 걸맞는 직업을 추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소. 그러니 모두 질서 있게 한줄로 서서 이 GM너굴맨의 앞에 서주시길 바라오!"
"아앙? 뭐라는거야 저 너구리 자식이. 안그래도 성적은 되는데 치료 관련 탄생석이 없어서 레지던트 면접에서 탈락한것 때문에 열받아 죽겠는데 내가 왜 게임에서조차 재능 측정같은걸 받아야 하냐고!!
"어이어이 학생 뭘 그렇게 열내고 그래. 그냥 게임 초반 튜토리얼 설정 같은거겠지. MMORPG 한두번 해봐?"
그 단상 위에 등장한건 그리즐리 베어와 동급의 덩치를 지녔지만 얼굴이 너구리라 너무 귀엽게 느껴지는 짐승 한마리. 그리고 그 짐승의 직업편성 선언에 약간의 소요가 일어난 것도 잠시 선착순이란 소식에 모든 유저들이 앞다투어 GM너굴맨의 앞으로 달려갔다.
물론 나는 구태여 서두를 필요성을 못느꼈기에 어기적 어기적 걸어 줄의 맨 후미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거 적당히 아무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탄생석의 의미가 무엇인지 캐물어야 겠군. 문맥상의 의미로 살피건데 지구처럼 탄생월에 따른 보석지정(1월의 가넷, 2월의 자수정 그리고 3월 아쿠아마린)과는 다른 개념인게 분명했다.
"저, 저기 아저씨 한가지 여쭤볼게 있는데요?"
"으응? 지금 나한테 물어본겁니까?"
"네! 그 타, 탄생석이라는게 뭐에요?"
찌릿!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머리까지 긁적이며 어수룩한 티를 냈지만 아니나 다를까 반응은 싸늘했다. 내가 질문 대상으로 선택한 3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안경남은 안경테를 고쳐씌우며 나를 무슨 외계인(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아니다) 보듯 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 혹시 외딴 시골 고아원 출신입니까?"
"예? 그, 그걸 어떻게..."
"어쩐지 역시 그랬군요. 하여튼 탄생석관리청이 일하는 꼬라지 하고는. 통합정부청중에서 예산은 제일 많이 타가면서 항상 이렇게 삽질을 한다니까. 두번 설명은 안할테니까 잘들으세요. 탄생석이란건 우리 프록시마 행성의 창세신인 센타우루스님께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피조물들 그러니까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 식물 그리고 곤충에게도 내린 축복이 결정화된 것입니다. 어떤 축복이 내려졌는지에 따라 결정화된 보석의 형태 및 위치도 천차만별인지라 탄생석관리청에서는 보통 출생신고와 함께 탄생석을 감정 및 데이터베이스화하지요. 그리고 그 데이터베이스화된 탄생석 정보는 그 사람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면 아까 GM너굴맨에게 항의를 했던 의대생도?"
"뭐 손만 되면 세포의 재생력을 촉진하거나 암세포를 제거할 수 있는 탄생석을 지닌 이들이 있는 마당에 의대 성적이 아무리 좋아봤자 경쟁력이 떨어지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다행히도 저같은 경우 신체적 접촉을 통해 지식을 전이할 수 있는 탄생석을 타고나서 임용시험도 건너뛰고 편히 선생노릇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침 말이 나온김에 근처의 탄생석관리청 지부로 갈 수 있게 지도 이미지를 전송해드리지요. 가급적이면 고아원 원장 몰래 찾아가서 무료 탄생석 감정을 요청하세요. 아무래도 그 원장이 통합정부에서 지원하는 탄생석 감정사 출장비를 때먹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아니 저는 괜찮..."
내가 손사례를 치는것도 잠시 스스로를 선생님이라고 밝힌 30대 안경남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갑자기 머릿속에 흐릿하게 나마 세계지도 하나가 떠올랐는데 놀랍게도 지구처럼 여섯개의 대륙으로 흩어진게 아니라 하나의 단일대륙에 국가마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로서 이 VOT 온라인이 서비스 되고 있는 행성이 지구가 아님이 100% 확정된 셈이였다.
"엑스표시는 탄생석관리청의 지부, 별표시는 탄생석관리청의 본부를 의미합니다. 탄생석은 인간이 진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이니 속는셈치고 찾아가보세요. 성별, 나이, 체격, 아이큐 그 밖에 모든 재능적 조건도 탄생석 앞에서는 하찮을 뿐... 아니 잠깐만! 그런데 지금 여기는 증강현실게임속 아니였나? 어떻게 내 탄생석인 지식전이의 축복이 발동될 수 있었던거지? 이봐요 혹시 실험삼아 제가 담당하고 있는 교과목의 요약필기를 한번 더 전송받아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아니요. 저는 지금 살짝 두통이 있어서 구석에서 잠깐 쉬고있을게요.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또 한번 내 머리위에 손을 올리려는 30대 안경남을 뿌리치고 나는 줄에서 벗어나 후미도 아니고 완전히 외벽끝으로 향했다. 진짜로 머리가 아픈건 아니였지만 탄생석이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힘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휘젖게 나둘 수 는 없는 노릇이였다. 적어도 탄생석의 시초라는 창세신 센타우루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내기 전까진 섣불리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