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르카니우스, 엑시아 여왕님 명령 받았다. 사리카야 여왕님 나랑 같이 가야한다."
당연히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광경이 펼쳐질거라 예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스스로를 오르카니우스라고 밝힌 범고래 형태의 디파일러가 양손으로 용린은리 사저의 빙검과 사리카야의 주먹을 막아선 것이다. 그 신묘한 무위에 스스로를 엑시아 여왕의 부하라 밝히지 않았다면 디파일러 킹이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복어대장군과 샤힌의 뒤를 잇는 3번째 로열나이트란 말인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중 하나가 남이 명령질하는거랑 싸우는 도중에 방해를 받는거야. 너는 그 중 두가지를 동시에 한걸보니 목숨이 서너개쯤 되는모양이지?"
"오르카니우스 목숨 한개뿐이다. 하지만 오르카니우스 엄청 쌔니까 쉽게 안죽는다."
"아 그래? 그럼 어디 한번 그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시험해볼까?"
누가 전투광 아니랄까봐 용린은리 사저와 전투를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른 어그로를 끌어버리는 사리카야. 강건너 불구경 모드에 들어간 내 입장에서는 재밌는 구경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였지만, 그녀의 충신인 쿠자르 입장에서는 도저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는 없었는지 바로 직언에 나섰다.
"사리카야님!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제고하셔야 할때입니다. 저 얼음칼을 쓰는 여검사나 엑시아 여왕의 부하는 나중에고 언제든지 다시 혼내줄 수 있지만 물의 정령신, 브루고뉴는 지금 이 순간에 처리하지 못해 아스트랄계로 도망쳐버리면 다신 잡지 못할겁니다."
"아스트랄계라는게 뭔데? 그리고 추적이 불가능한 이유는 또 뭐고?"
"예? 그, 그건 그러니까 아스트랄계는 정신체들이 거주하는 특수한 차원으로 일반적인 생명체들은 육신의 껍질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진입할 수 없는지라..."
"흐으응. 쿠자르 너 스고우랑 자주 붙어먹더니 많이 똑똑해졌다? 누가보면 네가 내 로열나이트가 아니라 아크비숍인줄 알겠어."
"소,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단지 하루라도 빨리 사리카야님께서 수왕성을 탈환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조언을 드린것입니다만 그게 사리카야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고개 숙여 사과드리겠습니다."
"흥! 우리 사이에 사과는 무슨. 됐고 쿠자르 네 말대로 싸움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건 사실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한발 양보하다록하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하지만! 브루고뉴를 쓰러트린 다음에는 바로 애꾸눈 여자, 그리고 그 다음에는 범고래 대가리 너니까 목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머리는 나빠도 싸울 상대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기억하니까 도망칠 생각도 버리는게 좋을거야."
라고 일일히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예비 선전포고를 마친 사리카야가 쿠자르를 이끌고 먼저 출발해 버렸다. 그러자 혼자 뻘쭘하게 남은 오르카니우스가 나와 용린은리 사저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 사라졌는데 아까부터 쿠자르의 언행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나는 추적할 생각도 않고 턱을 괸채로 사색에 잠겼다.
멍청한 사리카야는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3자 입장에서 봤을때 쿠자르는 사리카야를 브루고뉴와 조우시키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것이 사리카야 본인이 원했던 일이긴 하지만 애초에 쿠자르는 수왕성 탈환보다 엑시아 여왕측의 음모를 경계해오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면에서 봤을때 사리카야가 오르카니우스의 무례한 마중에 분노했을때 말리기 보다는 오히려 부채질을 해서 싸움을 붙이는 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였다. 아무리 로열나이트가 3명이라고 해도 디파일러 간부급 전력 한명, 한명이 소중한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이 기회에 오르카니우스를 제거하거나 혹은 전투불능 상태로 만든다면 그만한 이득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 록 쿠자르의 행동이 미심쩍게 느껴졌지만 나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사리카야와 엑시아가 동맹을 맺든 튀통수를 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였고 오르시나와의 약속때문에 브루고뉴의 편을 들어야하는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쓰러트려야할 적이라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지 않던가. 그렇게 내가 결론을 내렸을때쯤 용린은리 사저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저 녀석 강하다."
"예? 용린은리 사저가 갑자기 새삼스럽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사리카야야 머리가 좀 모자라긴 해도 그 육체적 강함이나 전투 센스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명색이 디파일러 퀸인걸요."
"사리카야를 말하는게 아니야. 아까 그 오르카니우스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말하는거다. 딱 한번 검을 맞대봤을뿐이지만 마치 태산을 지탱하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지더군. 모르긴 몰라도 쿠자르 녀석보다 훨씬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진 않을 녀석인데 저런 놈하고 동급인 디파일러 로열나이트가 2명이나 더 있다고?"
"한놈은 제가 해치웠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아니면 용린은리 사저가 상대하기 뭣하면 방금 범고래 대가리 녀석은 제가 전담 마크할까요?"
"이 자식이 은근슬쩍 사람 신경 긁는건 여전하구만. 잔말말고 너는 전황분석이나 제대로 해. 지금 수왕성엔 발데온 함장도 없고 나도 이번엔 작전 참모가 아니라 한명의 병사일뿐이니 네가 사령관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우리가 수적 열세인지 우위인지 판별이 되야 나도 사부를 부를 명분이 생기지 않겠어?"
"용린은리 사저의 사부라면 천빙검후 여사태님을 말하는 건가요? 설마 그 분도 황룡선에 같이 타고 온겁니까?"
"그래. 지금 수왕성이 이 꼴이 된줄도 모르고 신혼여행지로 좋겠다며 사전답사겸 원군지원이란 명목으로 냉큼 따라오더군. 세간에 알려진것과 달리 황룡거사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할망구니까 아마 짐이 될일은 없을거다."
황룡거사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다고? 그렇다면 본래 천빙검후 여사태는 팔륜이존이 아닌 팔륜이황이란 칭호였어야 한다는건가. 나는 혹여나 용린은리 사저가 자신의 사부라는 이유로 과대평가를 하는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은 낮다는걸 깨닫고 양쪽 손가락을 펼쳐들었다.
내가 해치운 복어대장군과 꽃게여장군이나 전투능력이 없는 계왕고래는 제한다치자. 그래도 로열나이트인 오르카니우스와 샤힌, 아크비숍인 젤피와 무르갈 그리고 그랜드 룩인 계왕오징어와 계왕불가사리까지 총 여섯명이 남아 있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디파일러 퀸인 엑시아 본인까지도 생각하면 이런 숫적 열세도 또 없었다.
그건 천빙검후 여사태가 참전한다 한들 마찬가지였기에 이번 싸움의 승패는 사리카야를 우리편으로 회유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이는 그녀가 엑시아 여왕과 반목하는 순간 쿠자르, 헥타베로스 그리고 스고우까지 자연스럽게 아군 전력으로 포함되기 때문이였는데, 브루고뉴만 조질려고 혈안이 된 그녀를 회유하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터. 현재로서는 최소 3대 1정도는 감안하고 전투에 임하는게 좋았다.
"그러면 용린은리 사저는 일단 다시 황룡선으로 돌아가서 제가 신호할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일단 전황이 어떤식으로 흘러가는 제 두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좋아. 그러면 나중에 그 금용희라는 황룡거사의 제자도 같이 데려올까? 보아하니 나이대에 비해 실력이 아주 제법이던데. 솔직히 나도 어렸을때부터 기재라는 소리를 귀아프도록 들으면서 자랐지만 그 나이때에 권강을 자류자재로 쓸 정도는 아니였단 말이지. 과연 황룡거사의 하나뿐인 제자답달까."
"아뇨, 용희는 황룡선에 남아서 주포인 용린으로 지원사격을 하는편이 더 나을겁니다. 사저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천살성이란 체질을 타고난 그녀는 이런 난전에선 자칫 잘못하면 피아식별도 못하고 날뛸 가능성이 있어요."
"천살성? 어쩐지 말도 안되는 무재를 타고 났다 했더니 그런 전설속에서나 나오는 혈맥을 타고났단 말인가. 그럼 조금 있다 보자."
용린은리 사저가 그녀로서는 꽤 드믈게 경의 어린 표정을 짓더니 자신이 만든 얼음 칼날위에 받을 딛고 황룡선쪽으로 날아올랐다. 그 신묘한 무위 또한 전설속에나 나온다는 어검비행술과 닮아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마녀가 빗자루에 올라타듯 자연스럽게 균형을 유지했다.
하긴 사리카야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데에는 용린은리 사저 나름대로 그간의 성취에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였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웬지 모를 든든함을 느끼며 사리카야가 향했던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검을 타고 공중부유를 하는 경지는 아직 내게 멀고 먼 이야기였지만 이매망량의 물결을 이용한다면 하늘을 나는 것정도야 아주 간단한 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