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회
vol.14 Oxygan the True Queen Of Ocean
의표를 찔러오는 브루고뉴의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신은 아니지만 죽음의 구도자, 세트라는 악신까지 무찌른 갓슬레이어인데, 직접 죽인건 아니고 사실 내 몸에 깃들고 있던 태초의 사자를 윤허한자 오시리스가 동귀어진에 가까운 기술을 써서 봉인 시킨거야라고 말하기엔 너무 추잡스러웠던 것이다.
애초에 브루고뉴에게 짧게 요점만 간단히 말해달라 해놓곤 나는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우스운 일이였다. 그렇기에 나는 의자를 좀 더 깊숙히 끌어당겨 앉으면서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보면 볼 수 록 여자보다 고운 긴 생머리와 투명한 피부를 지닌 브루고뉴였지만 남자라고 생각하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런건 어때? 내가 어둠의 정령왕으로서 자의로 사리카야를 위시한 디파일러 세력들을 돕는다고 하면 말이야."
"그래도 상관없네."
"뭐 상관없다고? 그게 무슨 얼척없는 소리야. 자기들 손으로 뽑아준 정령왕이 반기를 들겠다는데 당연히 버럭 화를 내면서 길길이 날뛰어야 하는거 아니야?"
브루고뉴의 반응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자 나는 오히려 내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자네는 아직 필멸자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지 못해서인지 미시적인 싸움의 승패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령신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건 다원속성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거시적인 싸움이야. 우리들의 다원속성력과 정령가든 또한 모두 그를 위해서 존재하는거지. 생명체가 거주하는 행성에서 물이 없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고 수왕성에서의 패배가 곧 물속성 엔트로피의 급락을 의미하는건 아닐세. 그저 수많은 행성중 하나가 디파일러의 손아귀에 넘아갈뿐. 그러면에서 볼때 엔도미야라면 조금 껄끄러울 수 있는 사안이겠군."
"이봐이봐 마치 자기는 여신칼날단 소속이 아닌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물론 나는 여신칼날단 서열 4위 육각수의 초월령이 맞네. 정령신들중에는 유일하게 기계신의 사조직에 가담해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디파일러들을 퇴치하므로써 질서의 엔트로피를 수호하는 여신칼날단으로서의 의무를 물의 졍령신으로서의 의무보다 우선시하겠다는건 아니야. 내가 여신칼날단에 입단한건 어디까지나 더 수월하게 물의 정령신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고,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이미 엔도미야와 협의가 끝난 상황이네.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둠의 정령왕으로서의 의무를 위해서 여신칼날단의 의무를 저버리려는거니."
"아니 그게 뭐 그럴 수 도 있고 아닐 수 도 있달까..."
"물의 최하급 정령인 닉스가 오염되지 않은 호수의 수자원을 먹이로 하는 반면 어둠의 최하급 정령인 셰오는 인간의 오염된 감정을 먹이로 삼지. 원망, 질투 그리고 슬픔과 같은 것들. 자네가 그런걸 수왕성에 확산시키기 위해서 디파일러들 편에 선다면 나도 말리지 않겠네. 뭐 그렇다고해서 일부러 져줄 생각도 없지만 누가 이기든간에 차후 감정 상하는 일은 없도록 하지. 정령신들간의 다툼만큼 다원속성간의 균형을 깨트리는 짓이 없으니. 전대 어둠의 정령신인 둠 5세도 그런 맥락으로 빛의 정령신 루에게 덤벼들었다가 령멸(靈滅)을 당했다고 들었네."
담담한 표정으로 동료신의 죽음을 거론하는 브루고뉴. 그 어조는 너도 나한테 덤비면 그런꼴 날 수 있으니 조심해라라기 보다는 마치 스티븐 존슨이라는 IT전문가가 대장암으로 요절했다고 하니 너도 먹을거 조심해라라는 느낌이였다. 거의 부처마냥 사사로운 감정으로부터 해탈한 모양새. 양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이득을 따블로 취하겠다는 내 계획은 사실상 물건너 갔으리라.
"좋아. 수왕성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머리 아파 뒤질것 같으니까."
"그러지. 나도 생산적이지 못한 토론은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네."
"그럼 정령궁을 떠나기전에 한가지 질문만 더 하지. 아까 오다가 이피로스라는 자칭 물의 정령왕을 만났는데 오르시나에게 굉장히 까칠하게 굴더라고.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건가?"
"아... 그거라면 과거 그 둘이 자매결연 관계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군."
"자매결연이라고?"
"자네도 알다시피 정령들에게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개념이 없네. 태어날때도 자연에서 죽을때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는 갓 태어나 백지 상태인 상황에서 이끌어줄 존재가 절실하지. 그래서 내가 만든 제도가 바로 먼저 태어나 경험이 풍부한 물의 정령과 나중에 태어나 경험이 부족한 물의 정령을 쌍으로 묶는 자매결연이지. 그렇기 때문에 그 둘 사이의 유대감은 부모자식 사이 이상이네만 내가 본의 아니게 그 둘 사이를 갈라놨으니 모두 내 잘못이네. 엔도미야로 부터 전생유적의 가디언을 맡을 정령을 차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때 아무 생각없이 자원요청한 오르시나를 보내버린게 실책이였지.
인간일때의 감정이란게 1%라도 남아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신이 된다는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모양이야."
브루고뉴가 웬지 모르게 회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유일하게 감정의 편린이라고 할만한게 느껴진 첫 순간이였지만 나는 그냥 못본척 하기로 했다. 내가 아무리 천하의 개썅놈이라지만 오르시나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물의 정령을 약점으로 잡고 뭔가 수작을 부릴 순 없었던 것이다.
"나도 성욕을 버려야만 신이 될 수 있다면 신따윈 절대 될 생각없어. 인간의 감정이라는게 때론 비이성적으로 느껴지거나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게 만들때도 있지만 결국 그 감정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것 아니겠어? 그럼 이만 나는 물러나도록 하지. 오르시나에게는 좀 더 놀다와도 상관없으니까 천천히 있다가 오라그래."
"그렇게 하지. 아무래도 오르시나가 오랜시간을 기다린만큼 좋은 주인을 만난것 같군."
"글쎄. 오르시나 본인은 그렇게 생각안할걸. 킥킥킥. 그럼 우리 결전의 날에 또 보자고. 왕과 신중 누가 더 길고 짧은지 대봐야하지 않겠어?"
"그전에 이걸 가져가게. 정령가든으로 통하는 열쇠형 아티팩트네. 열쇠구멍이 있는 문이라면 그 어느곳이든 이 열쇠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령가든으로 출입할 수 있지."
"땡큐!"
조로륵!
나는 브루고뉴가 공중을 수놓는 물줄기를 타고 건네준 보석이 박힌 열쇠를 받아들고 지체없이 그 길로 정령궁을 빠져나갔다. 나가는 길이 아마 들어왔던 길이 때가 되면 밑물에서 썰물로 바뀐다고 했던가. 뭐 아무 뱃길이나 타면 브루고뉴가 알아서 보내주겠지.
* * * *
"브루고뉴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재밌게도 이미 수왕성에 닥칠 모든 위험을 꿰뚫어보고 대비할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
"하지만 스이쿤님께서는 다른 행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그건 아무래도 일종의 눈속임이였던 모양이야. 샨코 공주 댁을 무사히 수왕성에서 피신시키기 위한 핑계거리랄까."
"피신이요?"
"아무래도 브루고뉴 입장에서는 수왕성 전체에 대홍수를 일으키는게 싸우기 편하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마음껏 물난리를 피우기엔 레드 파이렛츠인지 뭐시기가 걸리적 거린다고 생각한게 아닐까?"
"당치않습니다! 레드 파이렛츠는 물속에서도 100% 아니 200%의 전력을 낼 수 있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요!! 우주에서 무인 보급함이나 약탈하는 우주해적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입니다!!!"
샨코 공주가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얼굴이 시뻘게져서 열변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이솔다 공주나 스와레 공주에 비해서 호전적인데 일신의 전투력도 높다보니 피난민 취급 자체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힌 모양이였다. 사실 샨코 공주가 피난을 가건 말건 내 알바는 아니였으나 브루고뉴의 입장을 고려해서 나는 사견을 덧붙였다.
"나는 레드 파이렛츠의 실질적인 전투력이 어느정도인지 몰라. 하지만 브루고뉴가 대홍수를 일으킨다고 했을때 그게 그저 해수면이 높아지는걸로 이해하면 곤란하지. 어차피 이미 수왕성은 표면적의 85%가 바다로 뒤덮힌 상태. 그 와중에 대홍수를 일으킨다는건 좀 더러운 비유긴
하지만 수왕성의 바다를 마치 끝없이 물이 빨려들어가는 변기처럼 만든다는 소리야. 그렇게 함으로써 디파일러라는 더러운 배설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겠다는거지. 그와중에 너희같은 토착민들이 섞여 있으면 아무리 브루고뉴라고 해도 구해주기 어려울걸?"
"구해줄 필요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무슨 이유로 관광산업을 등한시한채 군비확충을 해왔다고 생각하시는겁니까? 모두 사리카야년과의 재결전을 위해섭니다. 이번 싸움에서 레드 파이렛츠는 절대 피난따윈 가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울겁니다. 수왕성의 모든 바다를 피로 물드는 한이 있더라도!!"
주르륵!
샨코 공주가 어찌나 자기 입술을 쌔께 물어 뜯었는지 피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런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피신 설득을 하는걸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아주 그냥 고래싸움에 등골 나가는 새우꼴 되는줄 모르고 길길이 날뛰는군. 이게 바로 분노의 감정이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의
원동력이 된 케이스 인가? 뭐 죽든 살든간에 제 팔자지 내가 별 수 있겠어.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