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7 vol.13 Oxogan The Bony City Of Necropolis
========================= 엘리자베스 프로젝트(Elizabeth Project).
그것은 죽음의 구도자, 세트님의 신앙을 우주 전역으로 퍼트리기 위한 실험적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가 성립한 배경에는 다소 복잡하게 얽힌 여러가지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프로젝트의 골자 자체는 단순했다. 타인의 모습을 모사할 수 있는 도플갱어란 마물을 언데드로 만든 후 캡슐형 우주선에 태워 우주 각지로 보내 세트님의 교구를 확대한다.
이를 위해 세트님을 모시는 직속 주교들은 판데모니엄의 군주들과의 충돌까지 불사하며 도플갱어들을 납치해왔고, 각종 정신세뇌와 육체개조를 동반한 언데드화를 통해 엘리자베스 NO.0001 서부터 엘리자베스 NO.1000가 완성되었다.
허나 여기까지는 약간의 희생(판데모니엄 군주의 화풀이에 몇몇 주교가 살해당함)은 있었어도 성공적이였던 프로젝트도 캡슐형 우주선이 발사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우주는 넓고 인류가 거주중인 행성도 셀 수 없이 많았지만 1000개라고 하는 우주선은 그 넓은 우주를 탐색하기에 충분한 정찰기 숫자가 아니였던 것이다.
소행성 충돌, 블랙홀 그리고 태양의 전자기 폭풍등 각종 우주의 위협에 생명체 반응이 있는 행성을 찾기도전에 99%의 엘리자베스들이 소멸하고 말았다. 제대로된 항법장치가 달려있지않은 캡슐형 우주선을 무작위로 날려보낸 대가였다. 오히려 엘리자베스가 1%나 살아남은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였으니 1%의 엘리자베스가 운좋게 행성에 정착했다고해서 바로 교구를 확장시킬 수 있는것도 아니였다. 도플갱어 자체가 이미 중급 이상의 마물이고 언데드 개조를 받긴 했지만 어떤 행성은 마왕도 밟아죽이는 상상을 초월한 괴수들이 드글드글한 곳도 있었고, 이미 다른 신이 자신의 교구를 만든 곳도 있었다.
물론 나 엘리자베스 NO.101은 둘 다 해당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교구확장에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 지구란 행성에 자리를 잡았을땐 신비문명의 레벨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쉽게 쉽게 갈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지구에는 진짜 신은 단 한명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종교가 너무 많았다.
'큰 줄기로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있지만 각각의 종교가 지역별로 교리별로 또 종파가 수십갈래씩 나뉘니까 다합하면 1000개도 넘겠지. 빌어먹을 행성같으니라고.'
그 1000개도 넘는 종파끼리 서로 사이가 좋으면 또 모르겠는데 다른 큰 줄기끼리는 말할것도 없고 같은 큰 줄기에서 빠져나온 종파조차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니 새로운 종교가 들어설 틈이 없었다(시골의 작은 교회와 절간으로 스타트라인을 끊었봤는데 텃세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차라리 하나의 종교가 지구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면 교단에 몰래 잠입한 다음 교황과 몸을 갈아치우는 것으로 손쉽게 미션 클리어였을텐데(물론 지구에 진짜 신이 없기에 가능한 시나리오. 진짜 신을 모시는 교황을 내 전투력으로 상대했다간 설교 한번에 뼛가루가 되고 말것이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몸을 갈아치우며 허송세월을 보내길 1세기가 지나서야 나에게도 기회가 돌아왔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만들어진 신, 엔도미야가 이 쥐뿔도 없이 편가르기만 좋아하는 행성에 비밀 프로젝트를 시동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네임은 VOT(Vaccine Of Things). 증강현실 MMORPG의 탈을 쓰고 사회에 첫 등장한 이 프로젝트는 미루어 짐작컨대 엔도미야가 전생유적의 뒤를 이어 디파일러(바이러스)에 저항하기 위한 인재(백혈구)를 육성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분명했다.
대박 건수를 잡은 나는 바로 교단의 신앙네트워크를 통해 주교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는 것이였다.
-만들어진 신따위에게 휘둘릴만큼 세트님은 한가하지 않을뿐더러 교단의 자원과 인력도 모자란다. 더욱이 그 상대가 야미도엔도 아닌 엔도미야라면 예의 행성의 주민들이 우리 교단을 적대할 가능성은 극히 낮지. 엘리자베스 NO.101 네녀석은 교구 확장에나 집중하도록.
'그러니까 그 교구 확장이 나 혼자서 어렵다니까 맨날 똑같은 소리나 하기는.'
지구의 신비문명 레벨이 제로에 가깝다고 하지만 과학문명까지 뒤떨어지는건 아니였다. 아케인 일족과 비교하자면 걸음마 수준이나 다름없지만 기본적인 열병기는 어느정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진지 오래였다.
돌격소총으로 무장한 일개소대 정도는 어떻게든 내 손으로 끝장낼 수 있을지 몰라도 전차나 전투기를 앞세워 온다면 나 또한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의 노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타이밍 마다 얼굴을 갈아치우며 정체를 숨겨왔던 것이다.
그래서 VOT 온라인 프로젝트를 감지했을때 그걸 핑계로 언데드 십자군의 원정을 요청할 생각이였는데 내 담당의 주교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실무라곤 해본적도 없고 네크로폴리스의 철옹성안에서 펜대나 놀리는 서기 출신이 분명하리라.
불평불만을 꾹 눌러참고 진짜 확실한 건수를 물기 위해 내가 직접 VOT 온라인을 플레이하길 수년째. 기회는 전혀 예상치 못한곳에서 찾아왔다. 하여 나는 지금 사제 등급의 존재가 딱 한번 사용할 수 있는 세트님과의 1:1 면담권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자칫 시덥잖은 일로 세트님을 호출했다간 영멸을 당할 수 도 있는 위험한 초대.
하지만 꼰대 주교와 말씨름을 하다 두번째 기회까지 날려버리는 것 보단 나으리라.
"위대한 죽음의 구도자이신 세트님이시여 이 미천한 어린양의 울음을 들어주시옵소서."
신앙네트워크에 접속된채로 역십자가의 수인을 맺자 곧이어 강렬한 압박감과 함께 나비 모양의 가면을 쓴 미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대 이름은?
"엘리자베스 NO.101이라고 하옵니다."
-엘리자베스 NO.101? 꽤나 특이한 세례명이로군. 어느 주교가 지었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 이름은 세례명이 아닌 코드네임입니다. 엘리자베스 프로젝트를 총괄한 주교가 편의상 지은 이름이라 특이하게 느끼시는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프로젝트? 아하 그 더럽게 손해만보고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프로젝트 말이로군. 그 똥멍청이 짓을 저지른 주교는 내가 손수 직접 영멸시켰는데 프로젝트 자체는 현재진행중이였다는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따지고보면 정식사제도 아닌 네가 무슨 용무로 날 부른거지?
"제가 정착한 행성에서 우연히 엔도미야가 시동한 VOT 프로젝트라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꽤나 흥미로워 이렇게 무례를 무릎쓰고 세트님에게 직접 면담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만들어진 신과 관련된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걸 모르지 않을텐데.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대의 제왕들은 그들을 싫어하지. 신이 만든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인공 신, 그리고 신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인공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구도야.
"허나 분명 세트님에게 실익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실익이라... 그러면 어서 소상히 말해보라. 만약 지금 내가 느낀 불쾌감을 덮을 수 있을만큼 큰 실익이 아니라면 너는 아마 엘리자베스 프로젝트를 발족한 주교와 마찬가지로 내손에 영멸당할 것이다.
꿀꺽.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대로 사건의 개요를 차례차례 밝혀나갔다. 죽음의 구도자, 세트님의 얼굴을 보는건 사실상 처음이였기에 여러번 연습을 했음에도 긴장되기 그지없는 프레젠테이션이였다.
"...여기까지가 제가 보고 들은대로 판단한 내용의 전부입니다."
-실로 흥미롭군. 네 말에 따르면 엔도미야가 VOT 프로젝트를 통해 주교보다 강력한 강령술사를 육성해냈다는 것이 아니냐? 인정하긴 싫지만 엘리자베스 프로젝트따위 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아웃풋이야. 그 지구란 행성의 총 인구수가 어느정도라고 했지?
"약 60억 정도입니다."
-흐음 그정도라면 언데드 노예 충원용으로도 나쁘지 않겠어. 조금 먼게 흠이긴 하지만 네크로폴리스 본성을 옮기면 원정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겠지.
"그, 그말인즉슨 세트님께서 직접 언데드 십자군의 원정지휘를 맡으신다는겁니까?"
-그래. 내 개인적으로도 흥미가 있고 엔도미야의 여신칼날단과의 직접 충돌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그편이 안전하겠지. 때가 되면 내가 주교를 통해 다시 연락할테니 너는 계속해서 정보를 모아라. 그럼 이만 통신을 끊겠다.
"사, 살펴가시옵소서."
후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나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러나 실제로 땀이 묻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도플갱어 언데드인 자신은 땀따위는 흘리지 않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세트님과 1:1 면담은 그만큼 생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것처럼 느껴질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것이였다.
어쨌든 그 분의 손에 영멸당하지 않았다는건 성공적으로 개인면담을 마쳤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기에 나는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창고문을 통해 다시 색향천월관의 숙소로 복귀하려는 순간 나는 상자더미 옆에 웅쿠려앉은 하얀 소복의 소녀를 발견했다.
섬찟!
긴장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그대로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과 같은 전기충격이 느껴진다. 설마 아크리퍼란자가 내가 언데드라는걸 눈치채고 감시역을 붙여둔건가? 하긴 상대는 주교 이상의 전력을 갖춘것으로 추정되는 강령술사였다. 어쩌면 감시카메라만 피할 수 있으면 세트님과 통신을 해도 문제가 없을거라 생각한 내가 안일했던걸지도 모른다.
하얀소복을 입은 소녀 또한 만만치않은 영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물기를 약 십여분. 어디선가 흥겨운 노랫말 소리와 함께 들려오나 싶더니 창고문이 활짝 열린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머리카락 보이면 그 수만큼 바늘 삼키기! 소소 언니 여기 있지? 히히히힣. 사실은 내가 소소언니 옷자락에 실을 매달아뒀거든. 여기서 또 유체화 상태로 도망가지말고 나랑 술래 교환하자. 이번에는 내가 숨고싶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