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엔젤 아니 다시 밴쉬아쳐가 된 하희빈은 그런 나를 말없이 따라붙었고 이제 레벨9를 찍을 CP(루시페르와 싸우는 도중에도 리쿤다룬이 꾸준히 엔트 디파일러 폰을 사냥해준 덕분)도 모였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니 내가 고민해야할건 오직 단 하나, 이번 성토전에서 무임승차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한 트렉슐과 몰에게 어떻게 VP를 뜯어내는가였다.00395 vol.11 Oxogan The Injured Angel or Fallen Angel ========================="해치웠나?"
"해치웠냐고? 그런 소리를 하면 무덤으로 기어들어간 적도 벌떡 부활한다는거 몰라, 이 깡통로봇 아니 전자빗치야?"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루시페르를 제대로 무찔렀는지에 대해서나 말해라. 그렇게 큰소리 뻥뻥쳐놓고 설마 도망쳐왔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만약 그런거러면 델타크롬을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이 나를 능... 멸한 대가를 치루게 하겠다."
"흥! 제 아무리 대마신이라고 해도 진짜 대사신에게 사형선고를 받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것 아닌가? 확실히 마무리했으니 걱정일랑 붙들어 메라고."
"오, 옥사건군?"
다시 인간형태로 폴리모프한 앙그릿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호출하자 나는 급히 소리의 진원지쪽으로 달려갔다. 물론 앙그릿사가 걱정되서가 아니라 부축을 하는척하면서 그녀의 궁뎅이와 꿀젖통을 만지기 위해서였다.
물컹물컹.
파충류의 피부마냥 차가웠지만 부드러움만큼은 극상품인 가슴을 은근슬젖 문지르며 나는 앙그릿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은것치곤 굉장히 멀쩡해보였다. 드래곤으로 현신했을때 입은 상처가 폴리모프를 한다고해서 사라지는게 아닐텐데 말이지.
"몸은 좀 괜찮아요, 앙그릿사?"
"예에. 저기 계신 자폰씨라는 분 덕분에 어느정도는 몸을 추스렸습니다. 아무래도 야미도엔이 게임의 균형이 일방적으로 기우는걸 방지하기 위해 3차 장승배기가 무너지면 해당팀을 돕는 도우미가 출현하는 장치를 준비해둔 모양이에요."
"자폰이라고요?"
나는 익숙한 이름의 주인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물론 앙그릿사의 가슴과 엉덩이에선 손을 떼지않은채로). 멀지않은 곳에 녹색 망토를 두른 개미 한 마리가 네 팔을 동시에 사용해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음악소리라는게 일반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를 편곡한듯한 느낌이였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시냇물이 조로록 흐르는 소리가 절묘한 박자로 어우러지니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탄생하기는 개뿔! 그냥 진짜 자연에서 들릴법한 BGM이라 내가 누군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허나 그 자연의 소리에 회복 효과가 있는건 확실한지 3차 장승배기 안쪽으로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파김치 상태였던 내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천근만근하던 눈꺼풀이 점점 가벼워진다 했어. 이런 경우를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라고 하던가.
"형씨 내 연주가 어땠소? 이래도 내가 아직 쓸모없는 한량놈으로 보이요?"
"브라보! 짝짝짝. 아주 멋졌어. 하지만 저작권료를 챙길 생각은 버리는게 좋을것 같군. 왜냐하면 우주정거장이 아닌 자연행성이라면 언제든지 음반없이도 네 연주를 들을 수 있을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나도 사실은 그게 걱정이야. 이 연주의 피로회복 효과는 직접 귀로 들을때만 적용되니까. 심신안정 효과라면 음반을 들어도 얻을 수 있겠지만서도 그것만가지고 돈을 받고 팔기는 좀 그렇잖아."
"여기 피로회복이랑 심신안정 둘 다 필요한 공주님이 있으니까 잡소리는 그만하고 하던 연주나 계속해."
"Yes Sir! 나는 전투는 젬병이니까 이런거라도 열심히 해야지."
디파일러 아크비숍을 보면 디파일러 퀸의 성격도 알 수 있는법. 나는 여신칼날단을 코앞에 두고도 저렇게 소탈할 수 있는 자폰을 보면서 그의 여왕 또한 대붕공자 카트랏슈처럼 인간친화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짐작을 해보았다. 아니 어쩌면 저녀석 혼자서만 저렇게 괴짜인걸지도.
"옥사건군, 일단 리더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한점에 대해서 사과드릴게요. 당신 혼자서 루시페르를 상대하게 둬선 안되는거였는데."
"괜찮습니다. 혼자 날뛰는게 익숙해서요.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더 불편했겠죠. 아, 사실 엄밀히 따지면 혼자가 아니였지만서도."
"루시페르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선 이젠 무려 20,000 CP가 필요할테니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안그래도 레벨업이 뒤쳐진 반신타락자측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리가 없으니까요. 문제는 반신타락자의 리더, 쟈크 더 리퍼에요."
"저 또한 아직 성토전이 완전히 끝난게 아니라는것쯤은 알고있습니다. 저희가 레벨로 앞서있을때 서둘러 녀석을 끝장내야겠죠."
"아뇨, 저희가 성토전에서 최종승리를 하려면 절대 그래서는 안됩니다. 필멸의 어릿광대 그는 루시페르보다 곱절로 까다로운 적이에요."
"하지만 앙그릿사 당신은 중앙 공격로에서 그와 대등한 대결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대등한 대결이라... 그걸 그렇게 포장할 수 도 있겠지만 실제 내용물은 전혀 달랐습니다. 쟈크 더 리퍼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와 진지하게 대결할 생각따윈 없었어요. 그저 제가 비취보석으로 다른 술법을 펼칠때마다 묘기를 관람하듯 즐겼을뿐이죠."
"쟈크 더 리퍼가 보기보다 아니 보이는 액면 그대로 무서운 적이라는건 알았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싸움을 피하면 성토전에서 이길 수 가 없는데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다행히도 쟈크 더 리퍼는 승리 자체에 집착하기 보다는 이 게임을 유희의 일부로서 즐기고 있어요. 누군가가 그와 놀아주는 사이 나머지 인원들이 호굴의 문지기인 엔트 디파일러 그랜드룩을 잡아 공성전으로 끌고간다면 이 성토전 승산이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여기서 놀아준다는 표현은 진짜 노는게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을 뜻합니다. 쟈크 더 리퍼의 심장을 뛰게할 건곤일척의 싸움을 말이죠."
길게 끌것없이 모든 부하를 끌고가 쟈크 더 리파를 격살할 생각이였던 나는 앙그릿사의 제안에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마침 밴쉬아쳐가 하단 공격로의 3차 장승배기를 파괴 직전까지 몰고갔으니 일시에 병력을 그곳으로 집중한다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최종 수비를 맡고있는 특별한 장승배기)이 지키고 있는 별의 심장을 단숨에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누가 쟈크 더 리퍼의 시선을 끌 미끼가 되냐는것과 나머지 반신타락자 멤버들이 과연 본진이 초토화될때까지 가만히 있겠냐는것이였다. 안그래도 이쪽은 두명의 여신칼날단원들이 죽림에 들어간 이후 행방불명된 상황인데 말이다. 씨부럴, 생각해보니 좆나게 열받네. 보상은 똑같이 받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좆뱅이를 쳐야하는거지.
"그러고보니 몰하고 트렉슐에게서는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군요. 혹시 짐작가는거라도 있습니까?"
"아마도 반신타락자측에 습격을 받았을 확률이 높겠지요. 그들이 쟈크 더 리퍼의 지시대로 얌전히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설마 우리측 죽림으로 침투해올줄이야. 일부러 죽이지않고 속박기를 걸어둔 상태라면 다시 부활하지 못하는것도 이해는 갑니다."
"그런 시나리오라면 차라리 낫겠습니다만... 뭐 일단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보죠. 프랑케네트 나와봐!"
나는 인벤토리에서 크림슴 메이든을 꺼낸뒤 슈퍼로이드 딸내미를 호출했다. 우르사티가 말하길 친딸이 아니라는걸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해도 그런것마냥 취급해주는게 슈퍼로이드의 정서상 좋다나 뭐라나.
"아버지 여기는 도대체 어디죠? 이어센서의 안테나를 최대전개했는데도 위성신호가 잡히지 않는건 처음이에요. 비스트코인 스테이션의 고철처리장 최심부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궁금한게 있으면 나중에 니 언니한테 물어보고 일단 이 사람들이랑 합류해서 네 전투력을 뽐내봐라. 옛날처럼 괜히 엄한곳에 화풀이하지 말고."
"어, 언니요?"
프랑케네트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채로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스스로가 로봇이라는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가족적 개념에 무척이나 민감했다. 요리조리 둘러봐도 자신의 언니라고 칭할 수 있을만한 인물은 퀼레뮤츠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허겁지겁 달려가 손부터 맞잡고 보는 생후 6개월의 슈퍼로이드.
"다, 당신이 제 언니인가요?"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냐! 내 동생은 세비앙이지 너처럼 더러운 강령술사의 피가 섞인 마녀가 아니란 말이다!! 애시당초 내가 네 언니면 나 또한 아크리퍼 녀석의 딸이라는건데 세상에 그런 개족보가 어디있... 아니 잠깐만! 설마 네녀석 내가 소실한 메탈하트를 재활용해 만들어진 슈퍼로이드는 아니겠지? 아크리퍼 이 씨발새끼가 어서 대답해!!!"
"글쎄, 난 잘모르겠는데. 증거있으면 어디 한번 가져와 보시던가. 그리고 설사 퀼레뮤츠 네 말이 맞다고 해도 나는 꿀릴거 없어. 나를 죽이려고 찾아온 암살자를 처리하고 손에 넣은 전리품을 다시 암살자에게 돌려주는 호구가 어딨겠어. 그러면 나는 쟈크 더 리퍼랑 쎄쎄쎄나 하러 갈란다. 동생 교육 잘 부탁한다! 리쿤다룬이랑 하희빈도 같은 크림슨 메이든의 가족이니까 잘챙기고."
"가, 가족. 그러면 이쪽의 머리없는 남자분은 제 삼촌이고 이쪽의 머리가 뱀인 여자분은 제 이모인건가요? 갑자기 가족이 세명이나 생기다니 프랑케네트는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요!!"
"아.크.리.퍼 이 구제불능의 쓰레기가...!"
"휘파라파라바라밤!"
퀼레뮤츠가 입에서 불까지 뿜으며 나를 닥달하려고 하자 나는 휘파람까지 부르며 모른는척 잡아땠다. 이 성토전에서 패배하면 또 육체를 소실하지도 모르는 입장이라 그런가 그녀도 고래고래 소리는 질러도 이미 죽림쪽으로 벗어난 나를 추적해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아무도 없는 중앙공격로를 걸으며 나는 몸상태를 점검했다. 자폰의 연주덕분에 컨디션은 어느정도 회복됐지만 과연 다시 유니온키네시스(精神體化) ~데모고르곤의 너와 나~를 다시 사용해도 될 정도인지는 넌센스였다. 알게모르게 육체적 피로가 아닌 정신적 피로가 한계치까지 쌓여있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최대한 주의를 해야만 했다.
싸움 도중에 강제로 유니온키네시스가 풀릴 경우 다른건 둘째치고 본체가 위험에 처할 수 도 있었기 때문이였다. 환수갑옷 그레이트 쟈칼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안전장치를 해두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뇌와 심장이 손상당했을때 재생이 불가능하다는건 초월자들끼리의 싸움에서 꽤나 치명적인 약점이였다.
가급적이면 얼티밋 언데드 폼으로 이루어진 아바타로만 승부를 보기로 마음먹은 나는 긴장된 발걸음으로 반신타락자들의 티타인 현장쪽으로 나아갔다. 이매망량이나 언데드 부하들도 없이 반신타락자 서열 4위와 싸운다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였으나 어차피 내역활을 시간끌기였으니 해내지 못할것도 없으리라.
"오호호호호호홍! 드디어 와주셨군요, 아크리퍼공."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왠 존칭이냐, 쟈크 더 리퍼."
"대마신을 처치한 대영웅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접이 있어야 하는것 아니겠소이까? 험난한 여정에 많이 지치셨을테니 이리와서 차라도 한잔 하는건? 조금 식었지만 아직 향이 그윽하답니다."
"거절하... 지는 않겠다. 그런데 다른 녀석들은 모두 어디갔지? 리더를 홀로 나두고 그냥 떠나버리다니 결속력 한번 죽여주는 녀석들이로구만."
마침내 중앙 공격로의 1차 장승배기가 있었던곳에 도착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쟈크 더 리퍼. 나는 뜬금없는 티타임 제안을 거절할까 하다가 시간을 끌기 용이할것 같아 그의 앞자리에 착석했다. 겉으론 태연한척 했지만 만약 이게 모종의 함정이라면 팔다리 중 하나정도는 내줄 각오를 마친 대담한 결정이였다.
"모두 염불에는 관심없고 잿밥에만 정신이 팔린 탓이지요. 이 우주에서 그 수가 얼마되지
않는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와의 싸움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승리했을때의 전리품에만 정신이 팔리다니 이 어릿광대는 탄식을 금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럼 리더의 권한으로 녀석들을 이곳에 다시 집합시키는건 어때?"
"후후후. 재미있는 생각이로군요, 아크리퍼공. 허나 많은 구경꾼을 모으려면 그만한 구경거리를 준비해야하는법. 아크리퍼공에게는 다섯명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만한 묘기가 준비되어 있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