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옥사건 더 디파일러-383화 (383/599)

나는 한참 서로의 장기말이 먹고 먹히는 일수일퇴를 반복하던중 뜸을 들이며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스고우를 보고 농담에 가까웠던 내 추측이 맞았음을 직감했다.00383 vol.11 Oxogan The Injured Angel or Fallen Angel ========================="아니 잠깐 아무리 그래도 대기권을 돌파해서 우주에서도 싸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육체초월(Phoenix Mode)이란 기술이 있는데 고작 바닷속으로 쳐들어갔다가 패배했다고?"

"옥사건군. 옥사건군의 고향별은 총면적에서 바다가 몇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나요?"

"대략 70퍼센트쯤 되려나? 뜬금없이 그건 왜 묻는데."

"그렇다면 옥사건군의 행성에서 브류고뉴씨가 옥사건군과 맞붙을 경우의 승률 또한 70%일겁니다. 물론 같은 여신칼날단원인 두 사람이 싸울 일은 없겠지만요. 아무튼 수왕성의 바다 면적 비율은 그것 보다 높은 85%. 아무리 육체초월 상태인 사리카야짱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죠."

"그 말 인정 못하겠는데. 물론 내 표면상의 서열은 27위고 브루고뉴란 양반은 4위라고 해도 그 차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게다가 서열 놀이로 따지자면 이 성토전이란것도 할 필요 없는것 아닌가. 우리쪽 최고서열자인 앙그릿사는 10위고 반신타락자쪽 최고서열자인 쟈크 더 리퍼는 4위이니까 말이야."

"저도 서열이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에는 어느정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서열이 높아질 수 록 그들의 싸움은 일반적인 궤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어요. 도시형전함 도그파이트에서의 싸움을 예로 들어볼까요. 지금으로부터 반년전쯤인가 제법 실력있는 늑대 수인족 한명이 도그파이트를 찾아와 이달의 챔피언을 먹은적이 있었죠. 비스트코인 스테이션 고위직 출신이라는 이유로 라챠카씨가 벌벌 떨었던 탓에 더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과연 1:1에선 쿠자르군 정도만이 상대가 가능할 정도로 강자더군요. 하지만 바지사장인 라챠카씨가 선장의 권한으로 그 늑대 수인족을 불순분자 계급으로 설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어떤 강자도 도시형 전함의 모든 보안시설이 퍼붓는 집중포화를 계속해서 견디긴 어려울것입니다."

"스고우 네 말의 요지가 뭔지를 모르겠다만. 그거랑 브류고누랑 뭔 상관인데?"

"바다전체가 일종의 보안시설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브류고뉴 개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격대상을 바꿀 수 있는 첨단보안시설로요. 장군."

스고우가 포(包)의 장기말을 절묘한 위치로 올리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설렁설렁 장기말을 옮기고 있던 나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은 한수가 아닐 수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이 상황을 타개할 수법을 고민하는데 왼쪽눈이 꿈틀거리며 누군가 훈수를 해온다.

'주인님 제가 안대 너머로 잠깐 살펴봤는데 저기 차로 졸을 잡으면 포가 꼼짝못할뿐더러 역습의 기회를 노릴 수 있을것 같습니다만...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훈수를.'

"올타구나 멍군!"

아무리 친선게임이라지만 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요슈아의 훈수를 냉큼 받아들여 역으로 스고우의 왕의 장기말을 노렸다. 제법 까다로운 수였는지 지금까지 막힘없이 장기말을 옮기던 스고우가 뺨을 긁적이며 멈칫하는게 느껴진다. 요슈아 이녀석 왼쪽눈으로 둥지를 터준 보람이 있구만!

"재미있군요. 지금까지의 옥사건군의 스타일하고는 전혀 다른 수라 솔직히 말해 조금 감탄했습니다. 제 패배를 인정하도록 하죠."

"앙? 그게 뭔소리야. 아직 왼쪽 차포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항복이라니."

"아하 이쪽 차포 말입니까? 이건 사실 모두 허상이였습니다."

스고우가 왼쪽편의 차포를 각각 양쪽 엄지와 검지로 들어보인 다음 말했다. 아니 지금도 내 눈에 뻔히 보이는 장기말이 어떻게 허상이라는거야. 나는 당최 이해가 가지않아 왼쪽 안대속에 웅크려있는 요슈아를 닥달했다.

'엣헴! 어디보자 저 장기말이라면 허상이 맞습니다. 상당한 고수준의 환술을 걸어놓은듯 하지만 제 눈을 속일 수 는 없지요.'

'뭐야 너 처음부터 저 장기말들이 허상이라는거 알고 있었어?'

'예, 그렇습니다. 딱히 주인님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목적의 환술은 아닌듯해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원한신다면 지금 저 환술을 해제해드릴까요?'

'얌마 그러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 될거 아니야. 내가 저 차포때문에 쉐도우 복싱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

'다, 당연히 알고계시는줄 알았습니다. 그도그럴게 저 차포 게임이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움직이지 않지 않았습니까?'

나는 요슈아의 지적에 뒤통수를 한대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그러고보니 스고우는

왼쪽의 차포로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음에도 가만히 있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아니 멀쩡한 뱀을 무기로 만들고 장기는 자체적으로 차포를 떼고 스고우 이 자식의 정신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거야.

"나도 어디가서 정상이라는 소리는 잘 못듣는편이다만 너는 한술 더 뜨는군."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년차가 아니라 누적 대국 시간만 100년이 넘는 장기의 달인입니다. 아무런 핸디캡도 없이 초심자인 옥사건군과 대국을 두는건 불공평한 일이지요. 그렇다고 대놓고 차포를 떼자니 옥사건군의 자존심을 건들것 같아 이런 일을 꾸미게 됐습니다. 오랜만의 대국이라 반드시 성사시키고 싶었거든요."

"흐음. 하긴 사리카야년이랑 장기를 둘 순 없는 노릇이니 그동안 많이 심심했겠군."

"후후후. 그래도 요새는 쿠자르군의 실력이 많이 늘어서 포차졸을 하나씩 떼고 하면 그럭저럭 할만합니다."

스고우가 양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차포를 연기처럼 증발시킨 다음 졸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기 장기판의 말을 들어내야 게임이 할만해지다니 장기를 너무 잘해도 문제로군.

지금까지 차포도 없는 상대와 혈전을 벌였다는 생각에 기운이 빠진 내가 슬슬 자리를 파하고 일어설 준비를 하는데, 스고우가 자신이 만지작 거리던 졸(卒)의 장기말을 내게 넘겨주었다.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든 나는 혹시나 이것도 허상인가 싶어 순금여부를 확인하듯

이빨로 살짝 깨물어보았다. 악, 드럽게 딱딱하네!

"그건 진짜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념품으로 드릴테니 가져가세요."

"이딴걸 어디다 쓰라고 가져가라는거냐. 나는 장기처럼 고상한 취미에 발붙일 생각따위는 없다고."

"장기를 두지않으셔도 분명 쓸모가 있을겁니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스고우가 한줌 독연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장기판이 있던 땅바닥에 새겨지는 몰의 메시지, '아크리퍼님 지금 당장 죽림으로 와주세요. 지원이 필요합니다.'와 그 위를 기어다니는 못보던 새끼뱀.

"야, 요슈아 설마 스고우도 허상이였던거냐?"

'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는 분명 허상이 아니였습니다. 주인님께서도 그자가 던진 장기말이 진짜라는걸 직접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에 그 아무리 고명한 환술이라도 이 요슈아의 눈을 속일 수 는 없습니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제발 저를 믿어주십쇼!'

"알았어, 알았어. 상황이 상황이니 자초지종은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땅에 새겨진 메시지를 뒤이어 VOT 단말기에서 불이 나고 있었기에 나는 서둘러 죽림이란 곳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여튼간에 지 동생 닮아서 조금만 답변이 늦어도 메시지를 도배해버린다니까.

빼곡하게 자라난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스무걸음쯤 지나니 양지바른 평야에서 거대한 개미와 사투중인 퀼레뮤츠와 몰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미가 어찌나 큰지 옛날 외국영화의 설정처럼 퀼레뮤츠와 몰의 크기가 줄어든건 아닌가하고 느껴질정도였다.

"야 깡통로봇아 장승배기가 쓰러지면 안된다며! 고작 디파일러 룩 때문에 사람을 호출하면 어저자는거냐?"

"닥치고 여기와서 고기방패나 해라 강령술사!"

연신 양팔의 기관총으로 불을 뿜는대도 엔트 디파일러 룩의 외갑피를 뚫지 못하는 퀼레뮤츠의 성화에 나는 못이기는척 최전선으로 뛰쳐나갔다. 비숍 계급 미만의 디파일러들 특히 룩은 지능이 뛰어나지 않았기에 앞에서 살짝 반가움의 손인사를 해줬을 뿐인데 바로 공격타겟을 나로 바꿔버렸다.

이족 보행을 하던 디파일러 폰과 달리 다시 육족 보행으로 퇴화한 룩이 아랫턱을 덜그럭 거리며 나를 잡아먹으려 든다. 굳이 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나는 그냥 한쪽 팔을 내주었다. 앗차하는 순간에 씹혀져 나가는 팔뚤의 살집.

퀼레뮤츠가 이 덩치만 큰 녀석을 어찌하지 못한거 보면 디파일러 룩에게도 보정이 들어갔음이 분명했으나 그렇다해도 언옥타늄을 씹어삼키지는 못할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것 마냥 켁켁거리는 거대 개미. 우악스런 힘으로 나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지만 나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엔트 디파일러 룩은 그 과정에서 배밑 피부를 드러낸 대가로 퀼레뮤츠의 젖가슴에서 튀어나온 찌찌 미사일을 얻어맞아야만 했다. 몰의 손짓으로 솟아오른 스톤 스파이크는 덤. 핸디캡이고 보정이고 나발이고 간에 이미 극심한 격차가 나는 상대에게 절호의 일격을 허용했으니 녀석도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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