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아, 똑똑아 어디 있어. 우르사티가 너 안와서 엄청 걱정하고 있어. 에구구 지반이 너무 단단해서 허리가 아프다.00365 vol.11 Oxogan The Injured Angel or Fallen Angel ========================="어스웜 딘 나 좀 잠깐 내려줄래?"
처음에는 너무 쌩뚱맞은 등장에 긴가민가하던 나는 허리를 바짝 숙인 기계 지렁이의 입속에서 낯익은 안경소녀가 걸어나오자 저 이형의 기계생명체가 12살 짜리 지능을 지녔다는 우르사티의 슈퍼로이드임을 인지했다.
디파일러 퀸 사리카야의 축객령으로 인해 실버스케일 함선이 수왕성을 떠나기 직전까지 땅을 파고 노느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슈퍼로이드 어스웜 딘의 실체를 이렇게 직접 확인해보니 저 큰 덩치로 지금까지 어떻게 숨어다녔는지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하긴 다비금강 사리카야의 종복인 디파일러 그랜드룩 헥타베로스 또한 산만한 덩치로 잘도 수왕성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으니 지렁이의 형태를 한 어스윔 딘의 땅꿀파기 능력은 그보다 한수위면 한수위지 그 아래는 아닐 것이다.
물론 지렁이의 형태라곤 해도 그 덩치가 12m를 넘어서고 철갑비늘을 촘촘히 두르고 있으면 그 위압감은 말로 못할정도라 휘르 행수가 이끌고온 늑대 수인족 자경대들은 한껏 긴장된 분위기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가 아니라 지렁이가 꿈틀하면 밟힐기세였기에 에너지 클로의 출력은 줄어들고 에너지 버클러의 출력이 일제히 급등한다.
하지만 거대 강철 지렁이를 이곳에 끌고온 장본인이자 개발자이기도한 우르사티는 전투의지가 눈꼽만큼도 없다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두 손을 배꼽이 있는 곳으로 모은 뒤 휘르 행수에게 90도로 공손히 사과인사를 해왔다.
"비스트코인 스테이션의 5대 행수중 한명인 휘르 실버코인님에게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직 철없는 저희 딸이 너무 큰 폐를 끼쳐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이번 사태로 야기된 직간접적인 재산피해금액의 두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변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너진 건물을 저희측에서 복구하는건 말할것도 없고요."
"어머니 왜 그렇게까지 우리가 저자세로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건가요? 수인족들은 우주에서도 손꼽히는 물류산업을 이룩하고도 아직도 원시적인 약육강식의 가치를 존중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저기 도열해 있는 늑대 수인족들 전부를 합한것보다 강하다면 사과 따윈 할필요 없는거 아닌... 아윽!"
찰싹!
누가 내 딸 아니랄까봐 지극히 아크리퍼 옥사건다운 사고방식의 주장을 펼치는 무명의 슈퍼로이드의 뺨따구에 우르사티의 갸날픈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아무리 우르사티가 그녀를 만들었다곤 해도 육체능력면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을지언데, 무명의 슈퍼로이드는 반항을 하기는 커녕 뺨을 부여잡고 원망스런 눈길을 보낼뿐이였다.
지 애비는 건물채로 깍뚝썰기를 해버렸던 년이 저런식으로 나오자 나는 순간 울컥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도 아니고 엄마는 살어, 아빠는 죽어라는 마인드인가? 애시당초 그럴거면 뭐하러 날 찾아와서 애정결핍이 어쨌네 이름이 없네 불평불만을 쏟아낸거야.
"수인족들이 상당 수준의 과학문명을 이룩한 뒤에도 원시문명의 일부를 버리지 않고 계승한건 우수한 유전자의 대물림이 일족의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을거라 믿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사고방식이 미개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리고 네게 주어진 힘은 생식행위를 통한 유전자 결합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종류의 것. 그러니까 약육강식의 논리를 앞세워 함부로 날뛰는 짓은 그만둬. 그런건 어스웜 딘도 하지 않는 짓이야."
"제가 아직 어려서 철이 없다고 말하고 싶으신건가요? 그런데 어스웜 딘씨에게는 있고 제게는 없는게 하나 더 있다는거 아시나요, 어머니? 그건 바로 이름이에요. 제가 태어난지 벌써 3,888,000초나 지났는데 어째서 제게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똥개에게도 있는 이름이 없는건가요? 이름이란건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붙여지는 호칭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존재의의를 나타내기도 하죠. 그렇다면 이름이 없는 저의 존재의의라건 무엇일까요? 제발 아무나 알려주세요. 저는 그걸 찾지못해서 미쳐버릴지경이란 말이에요!!"
파지지지지직!!
무명의 슈퍼로이드의 히스테릭한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안테나 이어클립에서 잔번개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가 사춘기를 다른 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슈퍼로이드의 사춘기라서 그런가 진짜 번개폭풍이라도 소환할 기세였다.
허나 엘더 아케인족의 시리우스, 프리우스가 합심해서 펼친 하이퍼키네시스(超越能力) ~벼락소나기의 계절~까지 버텨낸 나였기에 딱히 불안에 떨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가열차게 휘르 행수의 엉벅지와 밑가슴을 주무르며 늑대 귀부인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데 온 신경을 집중할뿐이였다.
그런데 무명의 슈퍼로이드의 현재심리를 누구보다 잘 꿰뚫고있을 천재로봇공학자 우르사티는 지금 이 사태를 그저 관망해선 안된다는 판단이 섰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해왔다.
"어스웜 딘, 똑똑이를 못움직이게 감쌀 준비를 해줘. 그리고 옥사건 너는 당장 내가 알려준대로 똑똑이의 심장 부근에 있는 패널을 개방해서 이름을 입력할 준비를 해. 이대로 그냥 똑똑이를 방치했다간 비스트코인 스테이션 전역에 블랙아웃 현상이 발생할지도 몰라."
-아 똑똑아 화내지마 내가 더 열심히 땅꿀을 파서 새것같은 우주선 갖다줄게.
"블랙아웃? 설마 비스트코인 스테이션에 대정전 현상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는겁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해요!! 단 하루라도 물류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우리 비스트코인 상단은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단 말입니다."
벌떡!
나의 집요한 애무로 사타구니 사이의 계곡에 홍수가 터지기 직전이였던 휘르 행수였지만 비스트코인 상단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가 터지자 내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연 중요한 순간에는 짐승의 본능보다 상인의 금전감각을 우선시한다는건가.
한때는 사파리 동물원의 짐승들과 비교해서 크게 나을게 없었던 수인족들이 이런 찬란한 우주문명을 건설한데에는 지금과같은 지도자들의 시의적절한 결단력이 원동력이 되었던 거겠지. 나 또한 휘르 행수와 으쌰으쌰를 마무리하지 못한 점이 아쉽긴했지만 때가 때인지라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사티에게 다가섰다.
"이름을 지어야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니 그럴거면 그냥 우르사티 니가 지어줬으면 됐잖아. 내가 깡통로봇 이름 하나 짓지못해서 삐질만큼 속좁은 사람으로 보였냐?"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슈퍼로이드에게 있어 이름을 지어준다는건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 부모가 갓 태어난 인간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줘봤자 정작 아이는 그 이름은 커녕 아주 기본적인 언어체계조차 이해할 수 없지. 하지만 슈퍼로이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의 육성데이터를 분석해서 명령권자를 구분하는 일종의 암호키로 활용하는 특성이 있어. 아무리 자아를 지닌 로봇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명령을 내려야 하니까 생긴 시스템이긴 한데...
문제는 원래 메탈하트에 내장된 명명 시스템이 상상을 초월한 철통보안을... 꺄아아악!"
부우우웅, 부우우웅, 부우우웅.
우르사티가 열과 성을 다해 설명을 하곤 있지만 전공분야가 달라 내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우려했던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우르사티의 지시를 받아 무명의 슈퍼로이드를 감싸고 있던 강철 지렁이 어스웜 딘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세조각으로 썰려나간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지른 장본인이야 말할것도 없이 양손에 초진동 빔샤벨을 활성화시킨 무명의 슈퍼로이드였다. 치직치지직! 안테나 이어클립위로 번뜩이는 정전기 때문에 한층 더 위협적인 포스를 발휘하고 있는 그녀는 반쯤 맛이간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나만 이름이 없어야해? 왜, 왜 나만... 이럴바엔 차라리 이 세상에 이름이 있는 모든것들을 이 손으로 없에버리겠어!!!"
"자경대는 지금 당장 발이 빠른자를 추스려서 나머지 4대 행수와 대행수 그라트록님께 달려가 위기상황을 선포하고 지원군을 불러와라. 하필이면 늑대 수인족 최고의 전사인 은랑철권 퍼시벨이 팔륜성의 귀갑권가로 전지훈련을 떠난때에 이런 일이... 아무튼 선두는 내가 맡을테니 모두 지원군이 올때까지 죽을각오로 항전하라!"
"아오오오오오오오오오!!" x 32
"자, 잠깐만요. 저 휘르 행수의 고운 얼굴에 요만큼의 생채기라도 생기면 제 마음이 찢어져요. 어떻게 보면 저때문에 생긴 일이기도 하니까 제가 알아서 수습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