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8 vol.10 Oxogan The Goddess of the Moon ========================================================================= Reg
VOT 단말기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비비앙 칼빌레이에게 메시지를 통보한 것이기 때문에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허나 설사 비비앙이 내 명령을 거부한다손치더라도 바뀌는건 없었다. 황금장수풍뎅이 기야스의 계급체계는 선원에게 그리 많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단지 포로 등급이였을때의 제약이 사라졌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즉 비비앙이 기야스 함내에서 조종기판으로 피아노를 치든 그 어떤 다른 지랄발광을 한다한들 내가 지나가듯 던진 명령을 기야스는 더 우선시한다는 소리였다. 비비앙 입장에선 내가 양보한 타협점에 맞추어 인적이 드문 황폐한 땅을 기야스의 주함포인 피스메이커Ⅱ로 포격하는게 최선일 것이다.
-러시아에 바람구멍을 낸다는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있지않느냐, 아크리퍼!
"좀 닥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봐. 네가 군에서 제법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곧 무슨 뜻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테니까."
나는 기야스가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분단위로 어림잡은 다음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이미 자월도에서 미얀마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터였다. 문제는 비비앙이 얼마나 빠르게 결심을 굳히고 인적이 드문 장소를 물색해 내냐는 거겠지.
10, 9, 8, 7, 6...
겉보기에는 아직 산수가 서툰 초등학교 1학년 생이 손가락으로 숫자 계산을 하는듯한 모양새였지만, 그걸 지켜보는 아크엔젤과 앱솔루트 모나크의 시선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이 열손가락이 모두 접혔을때 뭔진 알 수 없지만 대사건이 일어나리란걸 본능적으로 알아챈것이다.
5, 4, 3, 2, !
마침내 모든 손가락이 접혔을때 미하엘로프 소장의 얼굴이 흙빛이 되서는 소리쳤다.
-치지직, 치직. 이이 아크리퍼 생또라이 새끼가 시베리아 산맥을 날려버리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치지지지지직, 하고 있는것이냐!!!"
"호오 팬텀이 시베리아 산맥을 포격타겟으로 삼았단 말이지? 제법 머리를 썼네. 그런데 때마침 시베리아 산맥을 등반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면 어떻게 하지?"
-치직, 치지지직. 그런 속편한 소리를 하고 있을때냐!!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고 해도 산맥 하나가 통채로 사라진다는게 국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 계산을 해보란 말이다! 환경, 기후, 자원 이 모든 것이 뒤바껴 대격변을 불러올 것이다. 치직치직치직. 듣고있나, 아크리퍼!
피스메이커Ⅱ의 포격여파로 인해 전파상태가 좋지 못한지 미하엘로프 소장의 말이 중간중간 끊겨서 들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팬텀이 기야스를 끌고가서 어디를 타격했는지만 알아들었으면 오케이였기 때문에, 성을 내는 미하엘로프 소장의 말을 한귀로 흘려들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거야 우리나라 일이 아니니까 내 알바아니고. 그러는 앱솔루트 모나크 너야말로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서 남의 엄마를 납치해서 살해하는게 상식에 맞다고 생각하냐? 나는 도심지에 포격을 가하지 않은것만 해도 많이 봐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또 손가락 열개 카운트 다운 들어간다. 만약 왕원희를 사지멀쩡하게 풀어주지 않는다면 두번째 포격을 가해주지."
번쩍!
나는 앱솔루트 모나크가 잘 볼 수 있게 두 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이래서야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벌을 서는듯한 자세였지만 지금 진짜 벌을 받는듯한 기분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미하엘로프 소장일 것이다.
내 약점을 잡기 위해서 김여령 여사를 납치한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대가로 자국의 대표산맥이 통채로 날아가다니 되로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분단위가 아니라 초단위인 손가락 접기가 한층 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미하엘로프 소장이 힘겨운 목소리로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과, 과연 왕원희가 네게 있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일까?
"아앙? 그게 뭔 개소리야. 화랑대학교 생명공학과 09 학번 동기인건 맞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기는 커녕 얼굴도 마주친적 없다고 했잖아. 애시당초 나는 그녀의 이름을 니가 형사의 입을 빌려서 협박을 했을때 처음 알았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KGB쪽 군인들이 크로스데일 한국지점을 습격했을때 모친보다 그녀를 먼저 구했던거지?
"아니 먼저 구한게 아니라 타이밍이 어긋나서 그런...
-아니. 나는 왕원희가 너에게 있어서 모친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에 내 전부를 걸겠다. 러시아를 포격하고 싶다며 얼마든지 더 포격해라. 마더 러시아의 육체가 손상될지라도 마더 러시아를 사랑하는 자들의 혼만 남아 있다면 눈의 제국은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다.
기야스의 주함포 피스메이커Ⅱ가 시베리아 산맥을 날려버렸을때만 하더라도 하늘이 무너진듯 굴더니,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배째라는식으로 나오기 시작한 미하엘로프 소장. 나는 배째라고 까부는 녀석이 있으면 웃으면서 배를 쨀 수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문제는 피스메이커Ⅰ과 달리 피스메이커Ⅱ는 한번 발포하고 나면 하루정도의 충전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였다.
당연히 시베리아 산맥 폭격 소식을 듣자마자 미하엘로프 소장이 꼬리를 말고 왕원희를 풀어줄 알았던 나는 몹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짜증나! 이렇게 되면 아야사가 만들어낸 본 보어 마스크 성체를 러시아 도심 한가운데 풀어버릴까? 아니면 악령천인대를 일반인들에게 빙의시켜서 서로 죽고죽이는 살육게임을?
지금 당장 생각나는건 이정도 뿐이였지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개국가를 무정부 상태로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였다. 허나 중요한건 러시아를 어떻게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앱솔루트 모나크를 어떻게 조지냐는 것이였다.
타인의 입을 빌려 뻐꾸기나 날리는 별볼일 없는 녀석이지만 지금까지 그랬던것처럼 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 싶은 사람을 계속해서 납치해간다면 그것만큼 성가신게 또 어디있겠는가? 물론 나와 최측근인 인물들은 호위가 붙어있거나 색향천월관에 거주중인 상태고 제 2, 제 3의 왕원희가 나타난다 해도 딱히 쫄릴것은 없었다.
하지만 대신에 기분이 조오오오오오오오온나게 더러웠다. 이것은 엄마가 죽은줄 알았었던 때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마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빨간색으로 도배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예상치 못한 미하엘로프 소장의 태도에 고심에 빠진 나는 문득 비비앙과 떡을 치고 난 뒤 현자타임 상태에서 고안해내 플랜B를 떠올렸다.
'유레카! 그래 바로 이거다!!'
"아이구야 이런 들켜버렸네. 앱솔루트 모나크 이번만큼은 네 추측이 맞았다. 왕원희는 사실 숨겨진 내 이복동생이였어. 아주 어렸을적에 헤어지고 난뒤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메일로 안부정도는 주고받고 있었는데 이번 사태가 딱 터지고 만거야. 엄마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연약한 여동생을 먼저 챙기는게 오빠로서의 도리 아니겠어?"
-방금 지어낸 3류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네가 김여령 박사보다 왕원희를 먼저 구한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그러니까 말이야. 손으로 달을 가릴 수 없듯 자명한 이야기지. 좋아, 그러면 앱솔루트 모나크 네가 요청했던데로 달의 신전을 지어주마. 하지만 그대신 네가 직접 왕원희를 나에게 데려와. 자월도에서 그랬던것처럼 치졸하게 닮은 사람을 대리인으로 내세우지 말고 너도 북두십성 유저로서의 자부심이 있다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담판을 짓자."
-시덥잖은 개수작이군, 아크리퍼. 나는 아크데빌과같은 꼴이 나고싶은 생각이 없기때문에 절대 신변을 바깥으로 노출시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크데빌을 죽인건 하희빈이였는데 왜 내가 녀석을 죽인것처럼 말해. 뭐 인페르노 소탕작전에서 내가 강장 혁혁한 공을 세운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말이야. 어쨌든 나와 직접 대면하지 않겠다면 달의 신전을 지어주겠다는 얘기는 없던 일로하지."
-네 이복동생이라는 왕원희가 어찌되든 상관없단 말이냐?
"그건 아니지. 하지만 이번 일을 한번 생각해봐. 나는 엄마가 코앞에서 자살하는걸 두눈뜨고 지켜봐야만 했어. 만약 이번에도 네가 왕원희의 몸을 빌려서 자살같은걸 하면 여동생과 엄마를 둘 다 떠내보낸 나는 더할나위없는 절망에 빠질거야. 그러니 앱솔루트 모나크 네가 왕원희의 안전이 확보될때까지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거지. 내 말이 틀렸어?"
-내가 김여령 박사를 자살시킨건 네가 내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 흐음.
미하엘로프 소장이 인질범의 논리로 얘기를 펼치려다가 자칫 나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아꼈다. 말로는 러시아의 혼만 살아있다면 국토는 손상당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추가 포격이 가해지는걸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래서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는거 아니겠어.
그렇게나 나와 직접 대면하는게 두려운지 한참을 망설이던 미하엘로프 소장은 내가 플랜B고 나발이고 그냥 러시아에 좀비 바이러스나 풀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할쯤이 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아크엔젤의 호위를 받는다는 전제하에 아크리퍼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