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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 Oxogan The Killer Whale, Leviathan
길고 길었던 걸그룹 팅커벨의 활동기간이 끝나고 나는 드디어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소속사 근처의 숙소에서의 합숙생활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이어지는 식단관리에서 부터 문자하나까지 함부로할 수 없는 억압된 생활을 팬들은 알기나 할까?
그저 걸그룹의 화려한 면모만 보고 동경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나도 그 중 한명이였지만 막상 이 바닥에 뛰어들고 보니 이 세상에 돈 벌기 쉬운 직업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고칼로리의 달콤한 디저트를 한상차려놓고 남자친구와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싶은 나연희는 철저히 지운채 팅커벨의 귀염둥이 막내 연희라는 캐릭터로 살아온지 어느덧 2년째.
이제는 어떤 연희가 진짜 나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정도였으니 홀몸으로 자신을 키워준 엄마 앞에서 애교를 부릴때나 매스컴이 만든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져 나는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무심코 스쳐지나갈뻔했다.
때는 새해 신년 이벤트들이 끝물을 맞이한 1월 말.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도 영하의 날씨를 웃도는 한겨울이였으니 저런 상태로 방치했다간 얼마안가 동사하고 말것이다. 직접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119에 신고를 하는게 사람의 도리겠으나 그랬다가 신고자가 걸그룹 팅커벨의 멤버인걸 들키기라도 하면 골치아파진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정말 밉지만...'
세상 인심이 흉흉해서 선행을 해도 있는 그대로로 받아 들여지질 않았다. 분명 착한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쇼라고 몰아가는 안티팬들이 나오겠지. 혹시라도 신고 후 내 갈길을 갔다가 저 할머니가 죽기라도 하면 '아이돌 멤버 Y양 할머니를 죽음으로 몰고가다.'같은 기사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런 최악의 경우의 수까지 생각하니 골목을 지나친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서 오랜만에 엄마품에 안겨 잠들고 모든걸 잊어버리면 좋을텐데. 내일 아침 뉴스에 신원불명의 할머니가 추위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나오든 말든 그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게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며 걸음을 재촉해 코앞에 있는 오피스텔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어린시절 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날 추운날에 붕어빵이 더 잘팔린다며 밖으로 향했던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렸다. 그때는 모처럼의 휴일날 같이 놀아주지 않는 엄마가 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와 있었다. 혹시 그 잠깐사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까봐 허겁지겁 뛰어왔더니 숨이찬건 둘째치고 땀이날 지경이였다. 같이 활동하는 팅커벨 언니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에 막내가 이슈메이커좀 되야겠습니다. 마음을 굳히고 골목으로 드러서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를 가로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보통 빙판길이였는데 저게 도대체 뭐지...? 고래?'
헛것을 보는가 싶어 두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봤지만 역시나 할머니가 있는 빙판길밑으로 고래가 헤엄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빙판밑으로 마치 심해가 연결되어 있는듯한 비주얼이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고래위에는 올백머리를 한 사내가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채로 꼿꼿하게 서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관경에 처음의 목적조차 잊고 넋을 잃은채 지켜보고 있노라니 탐색하듯 심해를 유영하던 고래가 아가리를 벌려재꼈다. 그 아가리는 마치 심연처럼 깊고 어두워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통로같았다. 그런데 아가리를 벌린채 솟구치는 고래의 기세가 플랑크톤이나 먹어치우자고 그러는것 같지가 않았다.
서, 설마 할머니를 먹어치우려는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이대로 도망을 쳐야할지 아니면 할머니를 빙판길에서 끌어당겨 흙땅으로 이동시켜야할지 갈등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빙판밑에 있는 세계에 존재하는 고래가 빙판위의 할머니를 잡아먹는다는게 말이 되는건가.
아니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빙판밑에 심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어어? 잠깐 망설이는 사이 고래는 코앞까지 다가와 할머니는 물론 자신까지 잡아먹을 수 있는 사정권에 도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목구멍을 보고 다리힘이 풀린 내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나를 지탱해주는 손길이 있었다.
"괜찮아요? 빙판길인데 조심하셔야죠. 안그래도 하이힐은 균형잡기 어려운데."
"저, 저기 있는 할머니가 위험해요. 고, 고래가 잡아먹..."
"고래가 뭐요? 아하. 이 날씨에 폐지를 주우시려다가 아가씨처럼 빙판길에 넘어지신 모양이네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를 도와준건 무척이나 두꺼운 목제 뿔테안경을 쓴 사내였다. 그 안경탓인지 이목구미가 다소 불분명하게 느껴졌지만 척보기에도 나쁜 사람같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폐지를 주어모으더니 할머니와 함께 번쩍 들어올리는 손길이 가볍기 그지없다.
그렇게 체격은 크지않은것 같은데 힘이 장산가 보네. 일반적인 성인남성이라면 왜소한 체격의 할머니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어올릴 수 있겠지만 거기에 1m정도 두께의 꽉꽉 눌려진 폐지가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뜩이나 눈을 맞아 축축해진 상태였으니 그냥 바위하나를 악세사리처럼 달고 다닌다고 보면 되겠지.
아니 잠깐만 그러고보니 그 고래는? 나는 뒤늦게 할머니를 집어삼키려던 그 심해의 괴물에 생각이 미쳐 빙판길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고래는 커녕 피래미 한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였다. 역시 무리한 스케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헛것을 본걸까?
찜찜한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요즘 VOT 온라인을 통해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기묘한 시대라지만 끽해봐야 유리겔라의 숟가락 마술을 속임수 없이 재현하는 정도였다. 갑자기 빙판 속을 헤엄치는 고래를 부리는 남자라니 당치도않은 소리지.
"이 할머니는 제가 119분들한테 인계할테니까 다른 볼일 있으시면 가셔도 되요."
"아, 아니요. 저도 도울게 있으면 도울게요. 첫발견자가 이대로 그냥 떠나버리면 좀 무책임한것 같아서."
"그러면 여기 돈 드릴테니까 가까운 편의점에서 핫팩좀 사다주실래요?"
"예, 그럴게요."
목제 뿔테안경을 쓴 사내가 자신이 입은 패딩을 할머니에게 입혀주면서 내게 5만원 짜리 지폐를 건넸다. 요즘 세상에 좀처럼 없는 따듯한 마음을 지닌 청년이였다. 물론 자신이 걸그룹 팅커벨의 막내 연희라는걸 알아보고 점수를 따기위해 짐짓 착한척을 하는것일 수 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나도 이제 걸그룹 2년차인데 그런걸 못알아 보겠어? 저 청년은 국민 막내 연희는 커녕 팅커벨도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그걸 모른다고 해도 내 외모는 남자들중 열에 아홉이면 첫만남에 깊은 호감을 느낄 귀염상이였지만 아무래도 저 청년은 그 열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인 모양이였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알바는 말할것도없이 손님까지 찾아와 싸인을 해달라는 통에 시간을 지체한 나는 다급한 마음에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편의점에서 싸구려 운동화를 구입했다. 착용감이 좋진 않았지만 하이힐보다는 훨씬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의 골목에 도착했을땐 엠불란스가 이제막 할머니를 태우고 떠나는 중이였다. 그나마 목제 뿔테안경을 쓴 청년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감사인사를 전할 순 있을것 같았다. 그런데 이 남자 자기 패딩을 아예 할머니한테 벗어준건가? 엄청 비싼 브랜드 제품이였던것 같았는데...
"조금 늦었네요? 저는 연희씨가 5만원 들고 도망간줄 알았어요."
"아 그게 편의점에서 조금 사정이 있어가지고요. 여기 거스름돈이랑 핫팩이요. 패딩은 어떻게 하신거에요?"
"그냥 폐지값으로 할머니한테 드렸습니다. 엠불런스가 좁아서 이 정도 두께의 폐지는 실을 수 없다고 해서요. 사실 갖고 있던 현금이 연희씨한테 드린 5만원이 전부였던지라."
"그렇구나. 죄송해요. 제가 늦는 바람에... 어? 저 혹시 제가 그쪽한테 제 이름을 말한적 있던가요?"
"아뇨."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신거죠?"
"그거야 팅커벨의 막내이자 국민 막내인 연희씨가 유명인이니까요."
"그, 그런데 왜 처음에 봤을때 모른척 하신거에요?"
"모른척한게 아니라 아는척을 안한겁니다. 저는 연희씨를 알지만 연희씨는 저를 모르면 서로 남남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라도 저에 대해서 연희씨에게 알려드리고 싶은데 근처에서 차라도 한잔 하실래요?"
"그, 그건 좀... 혹여나 파파라치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다른 팅커벨의 언니들에게 폐를 끼치는 꼴이라서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아는 찻집중에 색향천월관이라고 있는데 엄격하게 기자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든요."
"사실은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셔서. 오늘은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솔직히 말해서 저 청년이 마음에 들지않아서 칼같이 제안을 거절한건 아니였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그 반대였찌만 오랜 무명기간을 걸쳐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한 팅커벨의 활동에 지장이 있을것 같아 애써 연애감정을 억누른 것이였다. 그런데 서둘러 떠나려는 내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이내 손에 쥐어지는 따듯한 핫팩.
"아무리 패딩이 없다고 해도 핫팩이 이렇게까지 많이는 필요없어서요. 하나 가져가세요."
"아. 고, 고맙습니... 어어라 왜이렇게 졸립."
"거 팅커벨인지 똥파린지 걸그룹 멤버랍시고 더럽게 고생시키네 진짜. 깨어났을때 무대에서 하던것처럼 허리 못돌리면 진짜 죽여버린다."
* * * *
머리가 개운한것이 오랜만에 꿀잠을 잔것 같은 기분이였다. 한창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할때는 이동하는 벤에서 간간히 쪽잠을 자는게 전부였던지라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하고싶었던 것이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늦잠을 자는것이였다.
그런데 내가 엄마한테 인사는 하고 잠들었던가? 왜 엄마랑 안부인사를 나눈 기억이 없지? 분명 집으로 들어가기전에 쓰러진 할머니를 발견해서 망설이다가 어떤 마음씨 좋은 청년을 만나... 허억! 나는 섬찟한 기분과 함께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니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홀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웨이터나 웨이트리스가 아닌 구체로봇이 서빙을 하고 있다는 점이였는데 낯선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침을 고이게 만드는 코스요리가 한창 그들의 로봇팔에 의해 운반중이였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라고 해도 저런 정교한 로봇이 서빙을 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서 눈을 뜬거지? 그런 고민을 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아무래도 이 낯선 곳에서 눈을 뜬건 나뿐만이 아니였는지 기모노를 입은 동양인과 드레스를 입은 서양인 한명이 나보다 한발 앞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 일어났어? 너무 곤히 자고 있는것 같아서 일부러 안깨웠어. 절대 우리끼리 먹을걸 독점하려고 그런건 아니야. 보시다시피 우리 셋이 하루종일 먹어도 남을만한 산해진미들이 가득한걸. 게다가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저 깡통로봇들이 추가로 음식들을 나르는 중이고. 우리를 납치한 사람은 아무래도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처럼 우리를 살찌운 다음 잡아먹을 생각인가봐."
"납치요? 설마 저희 납치된건가요? 도대체 누가 그런거죠? 혹시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고요?"
"잠깐, 잠깐. 한국사람이 대체로 성격이 급하다는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질문은 한번에 한번씩 해야지. 사실 납치라는건 일종의 추측이야. 눈을 떠보니 제발로 들어온 기억이 없는 낯선 장소에서 눈을 떴다면 그게 납치 밖에 더 있겠어? 그리고 이곳이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 장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건물의 이름은 아마 색향천월관일 확률이 높아."
"색향천월관이라면... 설마 저희를 납치한건 목제 뿔테안경을 쓴 그 남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