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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 Oxogan The Twelve Sky
륭 사부의 취향을 생각하면 당장 야외 수영장으로 달려가 내려쮜는 태양 아래에서 물장구라도 치는 편이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2m의 장신에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듯한 초콜릿 몸매를 지니고 있는 륭 사부가 야외 수영장에 등장했다간 단숨에 모든 이목이 집중될터.
혹여나 다른 생명공학과 학우들을 만난다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베네수엘라에서 모델하시던 분인데 우연한 계기로 친해져서 같이 놀기로 했다...는 어림도 없지. 하여 나는 륭 사부를 이끌고 카지노 형태의 오락시설로 향했다.
투숙객의 지갑을 털기 위한 슬롯머신으로 가득할줄 알았던 카지노에는 의외로 다양한 동전 오락기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투숙객이라면 무제한으로 코인을 넣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추억의 거리싸움꾼2를 발견한 나는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어가 자리를 잡았고 륭 사부는 뻘쭘하게 그 뒤를 따랐다.
"륭 사부 이건 격투 게임이라고 해서 여기 있는 조작 버튼을 이용해 화면속의 캐릭터들끼리 싸울 수 있게 만든 지구의 유흥거리에요.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으실테니까 일단 먼저 제가 컴퓨터랑 싸우는걸 보여드릴게요."
"연자가 직접 싸우는게 아닌 화면안의 존재가 대신 싸운다는 말인가? 그것 참 흥미롭군."
한때 왕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천생 격투가였던 륭 사부에게도 이 거리싸움꾼2라는 게임은 흥미로워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옥단예를 고른 뒤 각국의 싸움꾼들과 대결을 시작했다. 첫 상대는 공교롭게도 한국의 김화랑. 필살기는 기를 최대로 모았을때 상대피를 반토막까지 낼 수 있는 뒤돌려차기.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손이 조작법을 기억하고 있었던지 나는 자연스럽게 장풍기로 김화랑의 내려찍기를 카운터칠 수 있었다. 레버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면서 이 버튼을 누르면 이런 기술이 나간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드리며 나는 능숙하게 김화랑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김화랑이 기를 쌓을 틈조차 주지 않고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2:0 승리를 거머쥔 나는 연이어서 세계 각국의 강자들을 쓰러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보스인 인조인간 오메가까지 박살내자 옥단예가 우승상금으로 중국에서 만두집을 차렸다는 허접한 엔딩과 함께 스텝롤이 올라간다.
"어때요? 재밋을것 같아요?"
"흐음. 저 거리싸움꾼이라는 게임 내에 존재하는 캐릭터들이 사용하는 격투술. 개중에는 쓸만해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쓸데없이 동작이 크고 화려한 것들 뿐이더군. 비단 권묘궐뿐만 아니라 모든 마샬아츠 더 비타의 공통목표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타격치를 뽑아내는 것. 연자여 아무래도 이 격투 게임은 나와 맞지않는듯한..."
"자, 잠깐만요. 아까도 말했듯이 게임이란건 유흥거리라니깐요. 여기 나오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으로 보고 격투 연습을 하라고 만들어진게 아니에요 륭사부."
"그런가? 내가 뭔갈 착각했던 모양이군. 나의 왕국에선 꼬마아이들 조차 격투실력에 도움이 되는 놀이를 했던지라. 그러면 시험 삼아 연자와 이 게임이라는 걸로 붙어보도록 하지."
"좋아요. 저도 멍청한 컴퓨터랑 하는걸 슬슬 질린 참이였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나와 륭 사부의 격투게임 대전은 내가 각 캐릭터들의 특징과 기술 커맨드에 관해서 알려주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륭 사부는 처음 다뤄보는 조이스틱때문에 어색해 했지만 원체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초인적인 수준이였던지라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고 있었다.
처음에는 캐릭터간 카운터법을 정확히 알고있는 내가 연승을 거뒀지만 어느새 2:1을 기록하더니 10판이 채 지나지않아 륭 사부에게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절대 봐주거나 하는게 아닌 전력을 다한 플레이였지만 륭 사부의 번개같은 반응속도 때문에 번번히 역전승을 당했던 것.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이제 막 재미를 붙인 륭 사부와 나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거리싸움꾼2에 몰입했다. 후반에 이르러서는 내가 전패를 기록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오랜만 추억의 게임을 만나 필사기를 맞고 옷이 찢어지는 옥단예를 보는것도 나름 즐거웠다.
"미, 미안하군. 연자여 내가 너무 이겨버린것이 아닌가 싶다."
"에이 륭사부 제가 무슨 게임에서 진다고 삐치는 사람인줄 아세요? 저 그렇게 치졸한 남자 아닙니다. 그러면 충분히 즐겼으니 이만 일어날까요? 레크레이션 시간에 늦으면 우레가 또 무슨 잔소리를 할지 몰라서 미리 가있으렵니다."
"그럼 본녀는 다시 유체화 상태로 돌아가야겠군."
카지노를 나선 나는 우레가 문자로 알려준 레크레이션 장소로 가기 위해 근처의 벨보이를 찾았다. 본래 만찬회와 같은 행사때만 사용되는 홀을 쿤메이의 부모님께서 통크게 빌려주신 덕분에 레크레이션은 제법 그럴듯한 장소에서 진행될 예정이였다.
벨보이를 따라 도착한 홀에는 이미 많은 생명공학과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새 얼마나 놀아재꼈는지 얼굴이 시커멓게 탄 친구들도 심심치않게 보였다. 나는 비교적 한적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내일은 뭐하고 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라도 착용하고 륭 사부와 함께 야외 수영장으로 나가볼까 생각하던 도중 번듯 스치는 잔상이 있었다. 안면인식장애를 일으키는 목각안경. 전생유적에서 획득한 전리품 중 가장 보잘것 없어서 있고 있었던 그 아티팩트만 있다면 륭 사부와 함께 야외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들 누가 신경쓰겠는가.
내가 그걸 어디다 뒀더라? 오르시나의 권능을 빌어 화이트 티타늄을 비롯한 일체의 기갑교룡 제작재료를 지구로 옮길때 같이 들고온것 까지는 기억 나는데... 기갑교룡 제작에 열중하다 보니 목각안경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뭐 기야스보고 찾아달라고 하면 금방 찾아주겠지.
"애들아 잠깐 주목. 좀 있다가 레크레이션 시작할텐데 그 전에 오늘같은 자리를 마련해준 쿤메이양의 아버님에게 감사인사를..."
"오늘 너무 잘 놀았어요.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쿤메이양을 제게 주십쇼! "
"남은 4일도 잘부탁드릴게요!"
"아니 쿤메이양 아버님은 한국말을 전혀 못하신다니까. 롤페이퍼 같은거에 적은 다음에 번역하는 방식으로..."
"우레 선배 고마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을거에요. 제가 나중에 다 통역해 드릴테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죠. 다들 노느라 많이 허기졌을텐데."
"쿤메이양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오늘 레크레이션의 주인공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후덕해보이는 인상의 대머리 아저씨가 쿤메이, 우레와 함께 홀에 입장했던 것이다. 쿤메이양과 달리 부친은 한국말을 전혀 할줄 모르는지 학생들의 환호에도 그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을 뿐이였다.
곧이어 중국 전통복장중 하나인 챠파오를 착용한 종업원들이 중화코스요리를 서빙하기 위해 일렬로 등장했고 학생들의 환호는 극에 달해 홀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나는 내쪽으로 서빙된 오리고기 고추잡채를 조금씩 덜어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륭 사부에게 나눠주며 조용히 혼자만의 만찬을 즐겼다.
식욕을 자극한 향신료 냄새와 학우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 본격적인 레크레이션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벌써 분위기는 무르익을때로 무르익어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갑작스럽게 홀로 난입한 괴한들때문에 홀에는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당신들은 누구요? 여긴 예약된 손님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 썩 나가요!"
"우리가 누구냐고? 어디보자.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그 몸값을 받고 파는 사람을 뭐라고 하더라? 아하 그렇지 납치범이로구나."
"나, 납치범!? 경비원들 거기 있는가? 지금 당장 공안에 신고하고 이 인간들 쫓아내도록."
평생 화 한번 안내고 사실것처럼 보였던 쿤메이의 아버님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허나 저 멀리서 검은 양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절도있는 구두소리를 내며 몰려오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납치범이라 밝힌 무리는 꼼짝도 않고 있었다.
특히 그 괴한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최소 200kg을 넘을듯한 덩치의 비계살을 덩실거리며 껄껄 웃는 여유까지 보이는것이 아닌가? 아직까지는 내가 끼여들 타이밍은 아닌것 같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호텔 경비원이 마침내 도착하여 비계덩어리 사내의 신병을 구속했다.
그러나 이내 비계덩어리 사내가 팔을 들어올리자 경비원은 한쪽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우스운 꼴이 대고 말았다. 화가난 경비원이 품안에서 삼단봉을 꺼내들었을때... 촤아아아악! 고깃덩어리가 찢겨나가는 파육음이 홀을 비명으로 물들였다.
처음에는 낯선 괴한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생명공학과 학생들의 눈이 공포로 가득했다. 고어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사람이 산채로 찢겨나가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무리도 아니지. 그러나 정작 그런 참극을 일으킨 당사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시체를 털어버리더니 테이블 위의 먹다남은 탕수육을 입안에 털어넣는게 아닌가?
"키야 호텔 주방장의 솜씨가 제법이야. 어디보자 거기 너 제법 반반하게 생겼으니까 첫 타자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국 정부에서 한화로 5000억원을 몸값으로 가져다 주지 않으면 한놈씩 찢어 죽일 생각이거든. 방금 저 정장 입은 모질이처럼 말이야."
"사, 살려주세요. 흑흐윽."
"닥쳐 이 년아! 인질이 하도 많아서 한두놈 정도는 그냥 골로 보내버릴 수 있단 말이다."
"으으... 으으으윽."
"이 년이 그래도!"
"거기 멈춰요! 도대체 당신 뭐하는 짓입니까? 대도시에서 한복판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범죄를 저지르다니 폴리스가 무섭지도 않습니까?"
"허어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르겠다면 경찰 한 단어는 알아먹겠네. 미안하지만 내일 모레까지 공안이 이 호텔로 출두하는 일은 없을거다 이 건방진 꼬마야. 왜냐면 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해놨거든. 어른들의 사정이란게 다 그런거야. 우쭈쭈쭈. 위험한 일이 생기면 경찰 아저씨가 나타나서 다 구해줄줄 알았니? 응? 도덕책에서 그렇게 가르쳤구나?"
비계덩어리 사내가 집어든 탕수육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여학우가 바닥에 실례를 한채로 주저 앉았다. 모두가 압도적인 공포와 절망에 눌려 있을때 우레가 그 앞을 막아섰지만 뒤틀릿 웃음을 짓고 있는 비계덩어리 사내 앞에선 한낱 종이쪼가리처럼 찢겨져 버리리라.
정의의 사도 놀이는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레가 희생되는건 원하지 않았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륭 사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나보다 한발 앞선자가 있었으니 그 아니 그녀는 다름 아닌 룬메이였다.
정작 그녀의 아버지 조차 시체를 본뒤 바닥에 주저않아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비계덩어리 사내 앞으로 걸어갔다. 아기사슴 밤비노에게 저런 당찬면이 있었다니 역시 사람은 겉만보고선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당장 그만두세욧! 차라리 저를 인질로 삼으시죠. 무고한 한국 학생들을 지금 건드렸다간 제가 절대 가만있지않을 겁니다."
"가만히 안있으면 어떻게 할건대? 그리고 나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돈을 뜯으려는거지 중국 정부를 상대로 돈을 뜯으려는게 아니라고. 내가 아직 그정도로 미치진 않아서 말이야. 즉 너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말씀."
"이이이이익!!!"
"오케이, 오케이. 자 꼬꼬마 친구들 여기 앞에 있는 처자의 용기를 높이 사서 내가 특별 서비스를 해주지. 딱 한 놈만 희생해라. 여기 있는 수십명의 학생들 중 한 명이 인질을 자처해 준다면 한시간에 한명씩 목을 따는 대신 그 놈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따주지. 시간이 지날 수 록 줄줄이 소시지가 늘어가는 모양세가 볼만할거야. 자 거기 용감한 처자 어서 내 말 통역해주지 않고 뭐해? 다들 못알아먹는 표정이잖아!"
뭐지 방금의 촌극은? 다른 생명공학과 학생들은 공포에 짓눌려서 혹은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VOT 단말기 때문에 모든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던 내게 방금 대화는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저 비계덩어리의 사내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범법자로 경찰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몸에 달라 붙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찢어죽인 놈이였다. 그런데 쿤메이가 코앞에서 호통을 치는데 그대로 둔다?
거기에 특별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수십명의 인질을 단 한명으로 퉁치겠다고 전략을 바꾸기 까지 했다. 정말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5000억원을 받아낼 생각이라면 인질이 많으면 많을 수 록 좋다는걸 모르지 않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