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1 / 0316 ----------------------------------------------
vol.5 Oxogan The Twelve Sky
오랜만에 십이지천에 반항하는 삼합회 잔존세력을 직접 손수 숙청한 나는 상해에서 근거지로 삼은 호텔에서 샤워를 했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걸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피가 씻겨내려가고 나서야 전신을 휘감은 용문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딱 필요한만큼 붙어 있는 실전형 근육들과 어울어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용문신은 언제봐도 흐뭇하기 그지없다. 혹자는 문신을 협잡꾼들이 자신의 위험성을 과시하기 위한 포장이라 하지만 내게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이 용문신은 내게 무궁무진한 힘을 주었으니 한낱 시골 쿵푸도장의 딸년이 몇년 새에 산동성에서 광동성에 이르는 지역을 주름잡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것도 다 이 힘덕분아니겠는가?
여자로서는 드물게 선명한 왕(王)자 복근에 힘을 주자 용이 꿈틀거리며 화룡점정의 일화마냥 날아오를듯 했다. 아직 전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이리라. 십이지천의 서열 2위이자 내게서 호랑이 문신을 하사받은 견소룡을 불러 대련이나 할까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부하 조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율리시안이라는 자가 찾아왔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율리시안이라면..."
민간군사기업 고스트의 사장으로 일전에 슈트 구입건으로 협력요청을 시도한적이 있는 사내였다. 천외천 유저출신이 으레 그렇듯이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 그때는 거절당했지만, 막상 자신이 궁지에 몰리니 직접 찾아온 모양이다.
장거리공대지유도탄을 미얀마에 꼴아박은 일로 미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입지가 좁아졌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바가 있지만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줄이야. 아니, 아니지. 지금 자신은 뒷골목 왈패들의 우두머리가 아닌 삼합회를 능가하는 법죄조직 십이지천의 보스였다.
이제는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것에 익숙해질법도 하건만 워낙 단기간에 정점에 오른탓인지 가끔 공안의 고위간부가 인사차 찾아오면 아직도 뒤통수가 서늘하다. 나는 목욕가운을 두른다음 끈을 질끈 동여매 손님맞을 마쳤다. 어디 한번 갑질이란걸 해볼까?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보스."
호텔 방문 앞에서 호위역을 하던 부하가 문을 열자 어딘가 헬쓱해 보이는 율리시안이 시대에 맞지않게 두건이 달린 로브를 착용한 호리호리한 체구의 꼬리를 달고 들어왔다. 부하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꼬리를 자르려 한 순간 로브속에서 가냘픈 손이 튀어나와 부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비비 싸우려고 온거 아니니까 그만둬. 왕루옌 두목 내 부하가 무례를 저지른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 변명이라기엔 뭐하지만 왕루옌 두목과 달리 나는 본신의 전투력이 일반인 이하다보니 부하가 내 안전에 민감한편이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군. 바로 사과해서 산줄 아시요.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비비라는 부하의 머리통을 뽑아버렸을테니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중 하나가 십이지천의 형제들을 건드는 일이거든."
"다시 한번 사과드리겟소. 누차말하지만 오늘은 절대 싸우려고 온게 아니요. 비비 잠깐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천하의 율리시안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다니 뭔가 대단한 부탁이라도 할 모양이군."
"부정은 않겠소."
"손님을 너무 오래 서있게 해선 안돼지. 이리 와서 앉으세요. 거기 뭔가 마실거 좀 들고와라."
"콜록콜록. 아... 알겠습니다, 보스."
율리시안을 응접실로 안내한 나는 수납장에 비치된 궐련을 챙긴뒤 다리를 꼰채로 쇼파에 엉덩이를 파묻었다. 목욕가운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단련된 몸매가 소위 뇌살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율리시안은 파리한 눈동자에는 그 어떤 음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평생 노트북보다 무거운건 들어본적 없을 샌님이 이런 부분에서 강한면을 드러내는게 기특하달까, 소문에는 한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눈돌릴 틈이없다고 하던데 무슨 좆같은 소린지.
수컷들의 본성은 뻔하다. 그저 예쁘고 몸매좋은 여자만 보면 거시기를 흔들지 못해서 안달난 저급한 족속들. 아마 율리시안은 노트북 앞에서 전자파를 너무 쌘 까닭에 발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자가 줄어든걸지도 모른다.
"커컼. 담배 냄새가 꽤 독하군요.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어머 숨쉬기 힘들정도였나요? 그래도 안심하세요. 아편같은건 섞지 않았으니까. 공안에서는 매년 천만위안씩 처먹으면서도 끝내 마약류는 허락해주지 않더군요. 역사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않은 모양이에요."
"그... 그렇군요. 오늘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북두십성의 일인인 아크리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같은 북두십성의 일인인 매... 드 독스 왕루옌님이 아크리퍼와 제법 접촉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
"저는 매드독스라는 천외천 이명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항상 입에 담길 꺼려하더군요. 뭐 그건 그렇다치고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군요. 아크리퍼라... 한때 미친듯이 쫒아다니던 상대의 이름을 듣게될줄이야. 이명이 말해주듯 저한테 투견의 피가 흘러서 말이죠. 강한 상대는 꺽지안으면 못베긴달까. 그런데 그러지 못한 상대가 이제껏 딱 한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크리퍼였죠.
VOTO 내에서는 아크리퍼가 자취감추고 현실 밖에서는 십이지천을 운영하느라 바빠서 완전히 잊고 있어습니다만, 그의 신변을 궁금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조금 긴 이야기가 될것 같습니다만..."
운을 떼는데 제법 망설임이 길었던 율리시안의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인 것이였다. 초국적 의료기기 회사인 크로스데일의 회장인 블루아주가 돌연사한 배경에 천외천 유저간의 알력다툼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뭐 VOTO(Vaccine Of Things Online)에서야 하루가 멀다하고 다투는 천외천 유저들이였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블루아주처럼 든든한 뒷배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아닌바에야 스스로 기반세력을 만들던가 아니면 다른 기업 밑으로 들어가 입지를 견고히 하는데 집중했다.
나와 율리시안의 전자의 케이스에 해당했으니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게된 이적의 힘을 천외천 유저끼리 싸우는데 사용하는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더 풀어서 말하자면 모두가 먹고 남을 만큼 충분한 밥그릇이 있는데 싸울필요는 없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모든 밥그릇의 주인이 결정되고 나면 서로에게 이빨을 들이대고도 남을 인사들이였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였다. 그러나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는법. 아크리퍼가 현실에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도 투지가 들끓지 않았던가? 언데드를 소환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분명 승산이 있을...
"와... 왕루옌 두목 조금만 기세를 누그러트려 주시겠습니까?"
"이런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문신의 힘을 끌어올려 버렸군요."
"무투계열 천외천 유저의 힘도 무시할게 못되는군요. 저는 내심 현실에 즉각적으로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장인계열 천외천 유저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거야 케이스 바이 케이스죠. 저만해도 현실에서 내공을 쌓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VOTO에서 익힌 수십가지의 네임드 무공을 썩히고 있습니다. 물론 초식만으로도 꽤 쓸만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뭐 각설하고 율리시안 캡틴의 부탁에 관해서 마저 이야기 해봅시다. 사실 우리 사이가 VOT의 이적의 힘을 주제로 깊게 토론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내게서 문신의 힘을 받은 11명의 의형제들간에도 VOT의 비전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는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밑천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법이니 서운하다고 생각해본적은 없다.
어차피 내공을 쌓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 풍수지의 위치만 공유하고 각자의 독문절기에 매진하면 그만이다. 율리시안에겐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구에선 내공을 쌓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일부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는 내공을 쌓는것이 가능했으니, 우리 형제들은 그 곳을 풍수지라 부르기로 했다.
"아크리퍼가 한국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 아야사 크로스데일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거라는 것. 이 두가지가 팬텀 소대와 캡틴 슈트라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어낸 정보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제 여자친구가 잡혀있죠. 제가 원하는건 단 하나 그녀를 되찾는것 뿐입니다."
"이런이런 소문대로 꽤나 순정남이셨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도 이제 한 단체의 수장이 된지라 단순히 감정에 치우쳐서 인력을 동원할 수 없어졌습니다. 제가 여자친구분을 되찾아주면 율리시안 캡틴은 저에게 그리고 십이지천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죠?"
"고스트 슈트의 제작기술을 넘겨드리겠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로군요. 1년전에 받았다면 말이죠. 고스트 슈트의 제작 기술 플러스 팬텀 슈트 12벌은 어떤가요? 물론 팬텀 슈트의 경우 제작기술을 넘기는게 아닌만큼 AS까지 보장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십이지천의 간부들이 급떨어지게 일반 사병과 똑같은 슈트를 입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수락합니다. 그 대신 제 여자친구를 되찾는것은 물론 아크리퍼를 죽여주십쇼. 가능하다면 최대한 잔인하게!"
"아크리퍼의 죽음이라... 그거야말로 몇년전부터 제가 바라마지않던 일이죠. 은밀히 기술이전할 준비나 하세요. 십이지천을 감시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눈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고스트 슈트 기술을 이전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들이밀 그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토악질이 나오는군요."
"그러면 좋은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비비 돌아가자."
율리시안이 호텔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 마실것을 가져오라고 보낸 부하가 상다리가 휘어질듯한 10첩밥상에 마오타이주 한병을 담아 들어오고 있었다. 제법 행동이 빠릿빠릿하고 대학물좀 먹은 인텔리 출신이라 곁에 두었으나 너무 내게 잘보이기 위해 오버하는 경향이 이 있었는데 기여코 사고를 친것이다.
이미 협상이 다 끝난마당에 한상가득 정성들여 차려오면 어쩌라는건지. 부하도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율리시안에게 길을 비켜줬다. 비비라는 이름의 호위와 율리시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상을 물리려 했던 나는 기왕 이렇게 된김에 11 형제를 불려들여 먹어치우기로 했다.
12명이서 먹기도 제법 많은 양이였지만 내게서 돼지의 문신을 하사받은 룽타우의 식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모자란감이 있었다. 어찌됐든 율리시안의 의뢰건에 관해서 상의도 해야되고 각자 맡은 구역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도 해야했으니 마침 잘된 일이 아닌가?
"십이지천 형제들에게 소집령을 내려라."
"조... 존명!"
"어라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지금 소집령이 내려진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첫번째로군요. 샤오밍이 쥐문신의 힘을 발휘해도 저보다 빨리 도착할 순 없겠죠."
"견소룡 네가 여긴 어쩐일이냐?"
"아니 왠지 누님이 대련을 하자고 부르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상해에 볼일도 있고해서 인사차 들렸습니다."
"징쑤성은 어떻게하고?"
"최근에 한바탕 푸닥거리를 해놔서 괜찮을겁니다. 그건 그렇고 누님도 꽤 크게 소탕작전을 벌이셨다는데 괜찮으신겁니까?"
"하아? 그 삼합회 조무래기들을 처리하는데 내가 생채기 하나 날성 싶으냐?"
"아니 그러니까 그 삼합회 조무래기들은 괜찮냐고요? 누님 걱정이야 일치감찌 접었죠. 저를 포함한 11명의 십이지천 형제들이 동시에 덤벼도 이길 수 없는 괴물을 누가 걱정한단 말입니까?"
"견소룡 네가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군. 대련장으로 따라와라. 배밖에 나온 간을 쏙들어가게 만들어주마."
"아이쿠 무서워라."
견소룡이 특유의 실눈을 씰룩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내 뒤를 따라오는것을 보면 과연 2인자 답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십이지천의 간부들중 자신과의 대련에 선뜻 응할 자가 몇이나 될까?
아크리퍼를 떠올렸을때 피어오른 투지가 다시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형제들이 모두 모였을때 견소룡의 실눈에 푸른 멍자국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분위기가 제법 달아오르겠지. 크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