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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 Oxogan The Dances With Wolves
"엔츄라 여왕님이 이리로 오고 있으니 모두 예를 갖추거라!"
당장이라도 아이언 메이든에서 언데드 군단을 소환하려던 내게 김빠지는 소식이 들려왔다. 흑색터번을 착용한 구리빛 피부의 전사들이 데저트 오스트릿을 타고 호각소리를 듣고 우르르 몰려와 싸우러 오는줄 알았더니 단순히 요인 호위병력이였던 것이다.
내 군시절 대대장님 전역식때 간부들이 병사들을 일렬종대로 마주보며 서게 만든것처럼 자리한 흑전갈단, 확실히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과는 달리 고도로 수련된 무사의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기본무장인 곡도와 석궁이 백색휘광을 뿜는것을 보아하니 무기도 범상치 않으리라.
성문의 사건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던 사상누각의 주민들도 일제히 엎드려 예를 표하는 가운데 이 소란을 피운 주인공이 드디어 등장했다. 휘장이 달린 가마가 설치된 코끼리를 타고 흑전갈단의 밀착호위를 받으며 성문으로 접근중인 그녀가 아마 사상누각 커뮤니티의 우두머리인 엔츄라 여왕이겠지.
"디파일러가 쳐들어온것도 아닌데 비상호각을 불다니, 성문 책임자가 누구지?"
"쿠랄 백인장입니다만 현재 기절중입니다."
"기절하면 다야? 기절하면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는건가? 그것참 편리한 명령불복종법이로군."
"죄송합니다! 엔츄라여왕님. 바로 깨워서 부름을 받잡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서로가 칼끝을 겨누고 있는 현상황에서 벌어진 촌극에 헛움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실제로 호각을 분건 쿠랄이 아니라 지금 엔츄라 여왕에게 말을건 병사였다. 쿠랄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호각을 불은것인데 막상 엔츄라 여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쿠랄 백인장에게 책임을 떠넘긴것이다.
뭐 결국 쿠랄 백인장이 입을 잘못놀려서 이 지경이 된것은 사실이지만 주위병사들이 출혈성 쇼크로 기절한 쿠랄을 어떻게든 깨우기 위해 물을 끼얹는것을 보니 그가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쿠랄 백인장이 엔츄라 여왕을 목전에 두자 거의 반사적으로 납작 엎드린다. 이 사상누각 커뮤니티의 계급관계가 동해용궁과 달리 상당히 엄격하다는것을 미루어 짐작 수 있었다. 이솔다 공주가 천사지, 천사여.
"엔츄라 여왕님을 뵙습니다. 소신 성문을 담당하는 백인장 쿠랄이라 하옵니다. 으윽!"
"무슨 사정이 소상히 있었는지 말해봐. 분명 내 소중한 디저트 시간을 방해할 수 밖에 없었을만큼 구구절절한 사정이겠지?"
"저기 저, 저놈이 나쁜놈입니다. 저놈이 사상누각을 백토성에서 지워버리겠다고 협박을... 쿠허헉!"
엔츄라 여왕이 휘장을 걷고 나와 코끼리의 머리를 쓰담았을뿐인데 영민한 코끼리가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코로 쿠랄 백인장을 휘감아 들어올렸다. 지구한정 지상최강의 생명체 앞에서 바위같은 근육이 무색하게 쿠랄이 바스라질듯한 근육통을 호소한다.
"네놈의 아둔한 머리에서 필터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내가 오늘 아침조회시간에도 강조했는데 그걸 그새 까먹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엔츄라 여왕님 부디 다시 한번만 사정설명을 할 기회를...우욱!"
"그래 나는 자비로운 여왕이니까 두번까지는 기회를 주겠어. 하지만 세번은 없다는걸 알아둬. 화이트 샌드 채굴장으로 끌려가고 싶은건 아니겠지?"
"그, 그 이번에 비스트코인 상단에서 사막 조난자를 찾고 싶다고 사람을 보내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천대주가 그 사람을 함선승강장에서 픽업해서 사상누각으로 들어오려고 하길래 제딴에는 친근하게 비실한 찐따라고 부른것을 저 사람이 과민반응을 해서..."
쿠랄 백인장의 사견이 첨언되긴 했지만 나름 정확한 사실관계가 계속해서 엔츄라 여왕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혹시라도 나중에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이 발견되면 엔츄라 여왕의 말마따라 노역장으로 끌려가는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쿠랄 백인장의 성토가 모두 끝났음에도 엔츄라 여왕은 턱끝을 매니큐어가 발린 손끝으로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반면에 그녀를 지키고 있던 흑전갈단은 사상누각을 백토성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발언을 한 나를 향해 폭발적인 살기를 쏘아내고 있었으니 나는 해맑은 미소로 보답했다.
"쿠랄 백인장 그동안 네가 사상누각의 외부손님을 상대로 무례하게 굴고 뒷돈을 해쳐먹는걸 내가 눈감아준 이유가 뭔것 같아?"
"그... 그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번 일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반성하고 앞으로는 다신 그러지 않겠습니다."
"포인트를 잘못짚었어, 쿠랄 백인장. 쌈박질은 능수능란해도 머리는 그만큼 안돌아가는 모양인데 내가 그간의 만행을 묵인한건 필요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상대적으로 늦게 VOT 단말기를 각성한 백토성이 토착민을 얕잡아보고 가격을 후려치려는 군소상인들에게 사상누각이 만만치않다는 첫인상을 주려고 했던거라고.
그런 관행때문에 사상누각에 등을 돌린 상인들도 있었지만 결국 화이트 티타늄은 대체불가능한 최고급재료니까 실속을 챙길줄 아는 자들은 굽히고 사상누각에 입성해왔다. 뭐 그런 이야기지. 그런데 최근 사상누각이 화이트 티타늄을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세가 강성해지자 쿠랄 백인장 당신의 행동이 도를 지나치기 시작했어.
사상누각이 가난했을때는 가진것없는 하이애나가 얕보이지 않기 위해 으러렁거리는 느낌이였다면 요즘은 다가진 사자가 상대를 낮잡아보고 거들먹거리는 느낌이랄까. 오늘같은 사건은 훨씬 오래전에 예견된걸지도 모르지. 쿠랄 백인장 잘려나간 팔은 사이보그팔 수술로 대체해줄테니까 내일부터 노역감독관으로 일하도록."
"엔츄라 여왕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사지가 잘려나가기 전까지는 여왕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만 기회를..."
나는 엔츄라 여왕의 식견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화려한 장신구와 거창한 호위행렬을 보고 허영심이 많은 여자라고만 생각했지 뒷돈을 받는 행위를 일차원적인 관점이 아닌 고차원적인 관점에서 분석할 정도로 명석한 리더일줄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에 앞뒤과정이 어떻게 됐든간에 실패한 부하에게 은퇴 후 살길까지 열어주는걸 보면 만만히 봐서는 안될 여자라는 생각이들었다. 그건그렇고 옛날같았으면 엔츄라 여왕이 얼굴은 예쁜지, 가슴과 엉덩이는 큰지부터 살폈을텐데 확실히 귀룡탕이 나를 현자로 만들었다는 것이 체감이된다.
"쿠랄 백인장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배려해주는거니까 토달지마. 한번만 더 토달면... 내 성격 알지?"
"네, 넵! 알겠습니다. 노역감독관이 되어서도 뼈가 부서져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쿠랄 백인장 뼈가 부서지는건 상관없는데 노역자들 뼈는 부수지마. 노역자들도 엄연히 사상누각의 재산이고 화이트 샌드 채굴량에 영향을 끼치니 함부로 다뤄서는 안될것이야. 쓸데없이 과잉충성으로 노역자들 몰아부치지도 말고 그들을 얇지만 길게 부려먹는것이 장기적으로 봤을때는 이득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 자식 치료실에 데려가서 지혈좀 시켜."
"누구맘대로 데려간다는거지? 나는 아직 저자식한테 제대로된 사과를 받은적이 없어. 거기에 아까 지껄이는걸 보아하니 아직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것 같더군."
"이런이런 작은산을 넘은줄 알았더니 큰산이 아직 남아있었군. 그래, 그 쪽이 사상누각을 백토성에서 지워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비스트코인의 용병인가? 순간의 자존심으로 호기를 부린거라면 지금이라도 용서해줄테니 그냥 물러서지 그래."
"순간의 호기? 크크크크크크킄. 좆까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10분 주겠다. 그때까지 저녀석이 제대로 반성하지않는다면 사상누각을 백토성에서 지워버리겠다."
쿠랄에게 이야기로 전해들었을때는 그러려니 했을테지만 내 입에서 직접 사상누각 멸망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듣자 가만둬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흑전갈단장으로 추정되는 거구의 사내가 턱짖으로 나를 가리켰다.
검은색 터번을 한 사막의 백전노장들이 앞다퉈 내게 달려들어 백색곡도를 휘둘러 온다. 전부 접근전을 택한것은 아니고 일부는 석궁을 집어들어 나를 노려왔으니 제법 훈련이 잘된놈들이란게 태가난다.
일반 성문경비병력은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우르르 물러나 흑전갈단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망설일것 없이 이매망량 악령천인대를 풀어 그들에게 힘의 차이를 각인시키려 했지만 그 기회는 허무하게 날라가고 말았다.
엔츄라 여왕이 왼손을 들어올려 흑전갈단을 제지시킨 탓이였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듯 공격하던 자세 그대로 멈춰선 흑전갈단이 이내 되감기 장면을 보듯 원래 자리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진짜 기가 막히게 훈련된 똥강아지들이군.
"이봐 깡좋은 용병나리. 비실한 찐따라는 욕이 분명 모욕적인 말인건 사실이지만 감히 내 앞에서 사상누각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한쪽이 훨씬 더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비스트코인처럼 유명상단을 대표해서 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로군."
"무례하고 나발이고 니들쪽에서 먼저 시작했잖아! 그러면 끝을 봐야지. 9분 남았다."
"말이안통하는 작자로군. 천대주, 비스트코인의 용병과 일면식이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만 저자가 도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저런 강짜를 부리는겁니까?"
"단순비교로 치자면 옥사건 준위는 구룡대보다 강합니다."
"천대주를 제외한 구룡대입니까 아니면 포함한 구룡대입니까?"
"후자... 입니다."
"내 일찍이 천대주보다 강한 검사를 몇 본적이 없거늘 우주가 넓긴 넓군요. 구룡대 전원을 합쳐도 당해낼 수 없는 용병이라... 만약 사상누각이 저자와 전면전을 펼친다면 천대주는 어떤 전략을 펼치시겠습니까?"
"일단 지금 이 자리에서 싸우는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흑전갈단과 제가 합심해서 옥사건 준위의 발을 묶은다음 엔츄라 여왕님은 비상탈출함선을 통해서 백토성을 빠져나가야합니다. 그 이후 청룡문을 위시한 무력 커뮤니티와 연계해서 사상누각을 재탈환하는 방법이 제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천대주는 건실한 청년의 이미지가 짙으며 실재로도 건실하다. 아마 천대주가 어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할 타입이 아니라는걸 엔츄라 여왕도 알고있었는지 침음성을 삼킨다. VOT 단말기가 5분이 경과했음을 알려와 내가 팔목을 일견한 그 순간,
쿠랄 백인장이 내 앞까지 걸어와 오체투지 자세로 엎드린 후 미친듯이 고개를 빻으며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와 이렇게 하면 나 혼자만 나쁜놈 되는거잖아. 내가 바랬던건 단지 진심을 담은 사과였지 이런 오버스러운 액션이 아니였거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잘못이니 사상누각을 건들이지 마십쇼."
"너 내가 무슨 악당이라도 되는것처럼 지껄인다? 내가 원한게 뭐였어? 네가 한 모욕에 대해서 무릎꿇고 사과하라는것 뿐이였지. 네가 진즉에 그대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될것도 없었어. 엔츄라 여왕에게 이실직고할때 너한테 유리한쪽으로 살살 말을 바꾸는것 까지는 그려러니 했는데 이제와서 오버스럽게 이마를 빻아? 안그래도 피 많이 흘렸으니까 조금 더흘려도 상관없다 이거야?
좋아, 어차피 사이보그 팔로 바꿀거면 두짝다 바꾸는게 좋겠지. 내가 도와줄게!"
"옥사건 준위 거기까지만 하시죠. 쿠랄 백인장이 부상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그런것까지 계산해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거기에 처음에는 그렇다쳐도 점점 정도에 벗어나고 계십니다."
"정도? 정도? 정도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도대체 인생에 있어서 정도가 뭔데? 초면인 사람한테 비실이 찐따라고 부르는게 정도인가? 하하하하! 사실 그게 정도가 맞아. 왜냐하면 가는말이 고우면 호구로보는 좆같은 세상이니까. 상냥함과 슈퍼히어로가 있는 유토피아같은 세상이 아니란 말이야, 이 순둥이야! 지금 3분남았군. 쿠랄 이 좆같은 새끼야 니 손으로 남은 팔짜르던지 아니면 두눈으로 사상누각이 멸망하는걸 지켜보던지 좆대로 해라!"
* * * *
대머리독수리때가 시시탐탐 하늘 위를 선회하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아마 나이트메어의 말꼬리에 달린 최고급 스테이크용 양고기때문이리라. 대머리독수리때가 귀찮게 구는것음 감수하고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서 익어가고 있는 양고기를 말꼬리에 매달아둔것은 다름이 아니라 라라펠 때문이였다.
휘르 행수 왈, 라라펠은 십리밖에서도 고기 냄새를 맡고 쫓아올 수 있으니 탐색의 용이를 위해 양고기를 어딘가 달아두라는 것이였다. 라라펠의 몸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탐사용 아티팩트가 있었지만 반경 십리내에 접근하기만 한다면 양고기쪽이 오히려 정확도가 높을거라고.
"내가 조금 심했나?"
나이트메어의 등에 올라 오랜만에 아무생각없이 시속 150km에 가까운 속도로 질주하다 보니 나는 문득 사상누각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성욕이 감퇴된것 까지는 좋지만 내 지랄맞은 성격이 어디간건 아닌듯 또 한바탕 저질러버렸다.
집밖으로 나오면 처신을 잘해야한다고 하는데 은리 사저라나 도르칸 대위라는 브레이크가 없으니 오히려 VOTO(Vaccine Of Things Online) 시절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 결국 성문을 지키던 쿠랄 백인장은 옷을 찢어만든 천조각을 물고 자신의 남은 팔을 곡도로 잘라낼 수 밖에 없었다.
아마 한동안 사상누각을 방문한 상인들은 성문 경비대의 과도한 친절함에 어리둥절해 하리라. 엔츄라 여왕과도 천주랑의 중재로 협상테이블이 마련되어 어찌어찌 파국으로 치달을 수 도 있었던 관계가 잘 매듭지어져 시가 20,000 VP에 해당하는 화이트 티타늄 1금괴도 선물로 받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시한번 엔츄라 여왕에게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저자세로 나온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압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유려한 말솜씨를 뽐내며 잔뜩 날이선 내 마음을 뭉그러뜨렸던 것이다.
말 한마디면 천냥빛도 갚는다는 속담을 귀로 체감하며 엔츄라 여왕 주체의 파티까지 참여할뻔 했던 나는 그제서야 의뢰 수행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초대를 거절하고 사상누각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