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4 / 0316 ----------------------------------------------
vol.4 Oxogan The Dances With Wolves
발두인 함장의 해산명령에 나는 번개처럼 엉덩이를 자리에서 땠다. 어서 개인선실로 돌아가서 한숨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은리 사저도 지난 새벽 하도 푸닥거리를 해서 그런지 내게 신경쓸 기력이 없어 보였다.
은리 사저를 제외하면 눈치볼 사람도 없었던지라 그 누구보다 빠르게 브리핑 룸의 문을 통과한 내 소매 자락을 누군가 붙잡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 가냘픈 손길의 주인이 이솔다 공주라는걸 본능적으로 눈치챈 나는 신사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옥사건 준위 시간이 괜찮다면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이솔다 공주님의 부탁이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죠. 물론 실제로 한가하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급하게 걸어나가시길래 바쁜 볼일이이라도 있는줄 알았습니다."
"아하! 이길로 개인선실로 돌아간다음 침대위에서 뒹굴뒹굴할 생각이였거든요."
"그러면 그리 긴 이야기가 될것 같지는 않으니 옥사건 준위의 방쪽으로 걸으면서 대화하죠."
오랜만에 보는 이솔다 공주는 여전히 동화속 공주님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바로옆에서 어깨를 나란히하며 걸을 수 있다는건 정말 두근거리는 일이였다. 비록 내 어깨가 그녀의 어깨보다 5cm정도 낮다고 할지라도.
"한동안 안보이시던데 휴가중에는 본체가 있는 모행성에서 보내신건가요?"
"예, 그렇죠. 중간에 한번 아바타로 로그인한적이 있긴한데 워낙 짧은시간이였던지라."
"그러고보니 옥사건 준위가 모행성에서는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사실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아바타와 본체를 오가며 생활한다는건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사실 특별한건 없어요. 왜냐면 제가 나고자란만큼 익숙하지만 마땅히 새로울게 없으니까요. 오히려 제게는 수왕성이 특별하죠. 이렇게 동화속에 나올법한 아리따운 인어공주님이랑 나란히 걸으며 말을 섞는 일은 지구에선 불가능하니까요."
"그 말은 제가 지구로 이동한다면 수왕성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잔뜩할 수 있다는 뜻으로 봐도 될까요?"
"아마도요? 처음이라면 제법 신기해할만한 문물이 있는건 사실이죠. 예를 들면 라면같은 경우 이솔다 공주님은 물론 관광객들도 천하진미라며 극찬하셨으니까. 물론 지구에서도 맛있는편이긴 하지만 솔직히 흔한 음식이거든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이솔다 공주가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본다. 신장차이때문에 내려다보는 형국이였지만 이솔다 공주의 호수같은 눈동자와 초근접 아이컨택을 하는데 키가 대수랴. 뭔가 할말이 있는듯 입을 오물거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하길래 나는 인내심을 갖고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사실 옥사건 준위가 휴가중일때 블랙해커라는 집단에서 아바타 구입을 저에게 제안해왔습니다. 최근 관광객을 다수 유치한 동해용궁 커뮤니티에 아바타를 구입할정도의 구매력이 있을거라 생각한 모양이더군요. 발두인 함장이나 용린은리 소령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발설하면 판매건은 없는걸로 하겠다고 신신당부를 한 탓에 이 얘기를 터놓고 상담할 사람으로 옥사건 준위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실제로 아바타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도 옥사건 준위뿐이구요."
"그러면 그 블랙해커 소속의 무법자가 지금 아이스바운드에 있는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 눈으로 한번 직접 보고 싶군요. 혹시 아바타 생성을 빌미로 이솔다 공주님의 몸에 손을 댄다거나 한건 아니겠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만 자신의 위치를 저를 제외한 다른이에게 발설해도 판매건을 취소한다고 했던지라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것까진 없구요. 그런데 이솔다 공주님이 말씀하시는걸 보아하니 이미 아바타에 욕심이 있으신것 같습니다만. 답은 이미 정해져있으니 너는 대답만하면 돼!같은걸 원하시는건가요?"
"아뇨, 저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여지는 남겨두기위해서... 후우 옥사건 준위한테까지 저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겠죠. 솔직히 말해서 아바타가 탐나는게 사실입니다. 정확히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했던 어렸을적의 꿈에대한 갈망이랄까요. 저는 현재 동해용궁의 인어족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있으니 개인의 모험심을 앞세워 자리를 비울 수 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바타만 있다면 옥사건 준위처럼 휴가를 빌어 모험을 떠날 수 있죠.
하지만 아바타를 구입할때 사용될 비용도 인어족들이 피땀흘려 모은 VP일지언데 제가 너무 개인의 욕심을 앞세우는건 아닌가 싶어서..."
나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이솔다 공주의 양뺨을 부여잡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사실 리더의 자질로 따져봤을때 이솔다 공주는 나와 비교도 안되게 휼륭한 인어였지만 그때문에 개인의 행복을 너무 희생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이솔다 공주에게 키스를이 아니라 돌직구를 날려줄 필요가 있어보였다. 그런데 막상 이솔다 공주의 따듯한 온기가 손으로 전해지니까 정말로 키스가 꼴린다. 어이쿠! 정신차려 옥사건.
"야 이솔다 일단 지르고봐."
"예? 옥사건 준위 지금 뭐라고..."
"그냥 지르고 보라고. 뒷일은 신경끄고. 너 내 VP잔고가 지금 얼마인지 알아?"
"그... 글쌔요. 그동안의 공로가 있으니 제법 쌓여있지 않을까요."
"아니 틀렸어. 0이야 0. 제로라고. 어차피 한번뿐인 인생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결과지. 근데 너는 언제까지 다른 인어들 뒤치닥꺼리만 하고 살래. 물론 지를땐 지르더라도 상대가 무법자라는걸 고려하면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겠지. 아바타 가격이 얼마야?"
"30만 VP 정도에요. 하지만 무법자들은 VOT 단말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VP를 받을 수 없는것은 물론 백신마켓도 이용할 수 없죠. 그래서 그녀가 원한건 정확히 30만 VP정도의 현물이였어요. 따로 구매 리스트를 적어줬는데 그 중에는 수왕성의 해산물도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로 소요될 비용은 25만 VP정도일거에요."
블랙해커측에서 식량을 포함한 현물을 요구했다고? 뭐 무법자라고 한들 먹지 않으면 굵어죽는것은 매한가지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아바타가 아무리 희귀한 상품이라도 그들이 백신마켓을 이용할 수 없다는점을 고려하면 이쪽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호라 그렇다면 이솔다 네가 굳이 저자세로 갈필요가 없잖아. 가서 내가 공증인 자격으로 참관하지 않으면 아바타를 구매할 생각이없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아. 내가 그놈들이 허튼수작 못부리게 뒤를 봐줄게. 오히려 쪼들리는건 블랙해커쪽일걸? 아바타없이는 살아도 식량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
"고마워요.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런데 슬슬 이 손좀 때주시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괜한 소문이..."
"이솔다 너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예쁘다. 고마우면 이 오빠랑 진하게 뽀뽀나 한번 할래?"
"제 안의 목소리가 위험하니까 용린은리 소령을 호출하라고 하는데 옥사건 준위가 말한대로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해야겠죠?"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이솔다 공주님. 그렇게 정색하시면서 말하면 제 섬세한 마음에 스크래치가 생겨요."
나는 황급히 이솔다 공주의 얼굴에서 두손을 때고 항복자세를 펼쳐보였다. 역시 이솔다 공주는 녹록치가 않다. 북풍한설같던 이솔다 공주의 표정이 이내 화사한 봄처럼 녹아내리더니 '조언은 감사히 받겠지만 가급적이면 남녀사이의 선은 지켜주세요.'라는 일침을 가하고 내게서 멀어져간다. 조... 조심히 들어가셔요.
* * * *
개인선실로 복귀한 나는 이솔다 공주의 얼굴을 만졌던 손으로 데모닉 그리모어를 펼쳐들었다. 함선의 제본실에서 행정병에게 VP를 지불하고 제작한것을 인벤토리에 넣어왔던 것이다. 사실 VOT 단말기의 홀로그램 영상을 사용하면 데모닉 그리모어의 전페이지를 편하게 재생 및 페이지이동이 가능했으나 손맛이라는게 있는법.
직접 손에 침을 묻혀가며 페이지를 넘기는 맛이 있어야 공부할 맛도 나지 않겠는가? 진짜 고대 마도서처럼 엔티크한 느낌까지 나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걸 위해서 빳빳한 새종이를 일부러 낡아보이게 만들 순 없는 노릇이였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어제 공부했던 부분에 이어서 악령군세의 이론적 부분을 해석해나가다 보니 단순히 머릿속에서 이미지하는것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혔다. 이럴때는 역시 불완전한 술식이라도 실제로 펼쳐보는게 제일이다. 주위를 떠도는 이매망량중 일부에게 정제된 음에너지가 자아내는 악의를 주입해본다.
이매망량(魑魅魍魎) 제 2형 악령천인대(Expedition of the Evil Thousand)
이야! 이거 장난 아닌데? 내 의지에 순종하기만 하는 인형같았던 이매망량이 의지를 갖추고 검과 방패를 들어올린다. 단순 전투력 계산으로만 따져도 전력이 2배는 증강했으리라. 게다가 자의적으로 싸울 상대를 찾아나서니 편리하기까지하다. 물론 그 싸울 상대를 고르는 방식이 스마트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제기랄! 이러다 줄초상치르겠네. 나는 악의에 찬 이매망량이 살아있는것들을 살육하기 위해 뛰쳐나가려는것을 영압족쇄로 꿇어앉혔다. 술식을 해제한 그 순간 공교롭게도 VOT 단말기가 번쩍인다. 식은땀을 훔치며 살펴보니 발두인 함장으로부터의 긴급호출이였다. 저녁점호를 하기엔 이른 시간인데데 다른 볼일이 있는건가?
아무생각없이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마침 은리 사저도 방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였다. 눈이 마주친 우리 사이에 1.5초 정도 어색한 기류가 휘몰아쳤다. 먼저 입을 연것은 은리 사저였는데 어제 새벽 활화산같은 분노를 분출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이외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너도 발두인 함장의 연락을 받고 나온거지? 함장이 긴급호출을 하는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서두르자."
"그러죠."
"어제는... 내가 미안했다. 집무실을 도배하다시피한 피를 닦다보니까 내가 좀 심했다는걸 느꼈어."
"괜찮습니다. 죄송할 일은 제가 먼저시작했는걸요. 그... 삼각형 끈팬티는 버리셔도 상관없는데 차파오는 제 선물이라 생각하고 보관해주세요. 전생유적에서 나온 재료를 기반으로 솜씨 좋은 재봉사가 한땀한땀 정성들여 만든옷이니 쓸모가 있을겁니다."
"어쩐지 옷의 촉감이라던가 문양이 고급스러웠던 이유가 있었구나. 알았다. 입을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하게 보관하마."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은리 사저 사이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저 부지런히 브리핑 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해보니 그깟 보짓털 하나때문에 그 난리를 피운게 우습게 느껴졌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보짓털을 내주지 않았던 나나 보짓털이 소화되기전에 내장을 들어내려한 은리 사저나 뭔가에 씌였던것이 아닐까?
* * * *
"제 누나가 행방불명된것 같네요."
나와 은리사저가 브리핑 룸의 책상 앞에 동시에 착석하자 발두인 함장이 꺼낸 첫마디였다. 그런데 실종된 누나를 걱정하는 뉘앙스라기 보다는 철없는 동생이 가출했을때 한탄하는듯한 뉘앙스다. 어찌됐든 함장의 친누나가 실종된 사건을 두고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던지라 침묵하고 있노라니 은리 사저가 입을 열었다.
"하아? 라라펠 그년은 또 시집가기 싫다고 집에서 가출한거야?"
"이번에는 그런게 아닌 모양이에요. 애초에 이미 집을 나와서 용린은리 소령과 함께였었던 실버라군이라는 용병 커뮤니티 활동을 홀로 재개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연락이 두절된거죠. 상세한 정황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디파일러와 교전중에 자기모래폭풍에 휘말린것 같아요."
"잠깐 자기모래폭풍이라면?"
"예, 맞아요. 천주랑씨가 주둔중인 백토성에서 용병활동을 하다가 변을 당한거죠. 자기모래폭풍때문에 탐사선을 보낼 수 도 없는 노릇이고 어머니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해서 어머니가 대대적으로 구조팀을 선별중인데 저한테도 DF등급 소유자 한명만 보내라고 하시네요. 어머니의 명령이 절대적인것도 있지만 누나를 구하는 일에 제가 잠자코 있을 수도 없지 않겠어요?
결국 두분중 한명을 어머니가 계시는 비스트코인 우주정거장으로 보낼 수 밖에 없을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