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밤의 톱스타-352화 (352/374)

주한미군 이야기가 나오고, 거기에 관심을 보이는 황 여사 밑의 보도방 아가씨들.

앙헬이 나가서 애들에게 알리는 동안 12인실 안의 홀에서는 침묵이 계속됐다.

“주스라도 좀 가져올까?”

은별의 말에 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으면 줘.”

“아, 저도 같이 갈게요.”

라나가 혼자 여기 마실 거 가져오는 건 힘들 거라면서 손을 들고 은별을 따라나섰다.

노래방 안에 있는 업소용 대형 냉장고는 김준이 건네줬던 캠핑용 발전기를 통해 돌아가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자 안에는 그동안 재배했던 야채와 저수지에서 잡아 온 것 같은 얼린 생선, 각종 통조림 음식등이 있었다.

“이걸로 먹고 산다~”

“네.”

은별은 생수병을 꺼내서 스틱으로 된 아이스티 가루를 뜯어 즉석으로 주스를 만들었다.

라나가 주변에서 쟁반이랑 컵을 찾아서 싱크대에 가져다주자 은별은 피식 웃으면서 라나에게 물었다.

“라나....본명은 차나라였나?”

“아, 네. 차나라 맞아요.”

“아이돌이었잖아? 언니도 네 앨범 휴대폰에 넣어 다녔어.”

“아하하하….”

“홀에 있는 샤인도 그렇고, 연예인들이 준이하고 잘 사는 거 같네?”

“네~ 잘 살고 있어요.”

라나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은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계속 준이네 있으려고?”

“음~ 아마도요?”

“그럼 걔에 대해서 좀 알려줄까?”

“!”

라나는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가 이내 눈을 반짝였다.

“준이 오빠가 뭐 있어요?”

***

잠시 후 얼음이 동동 뜬 아이스티가 홀 안으로 들어왔고 김준은 컵에 담긴걸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아메리칸 캠프, 거기 괜찮으면 우린 갈래.”

앙헬의 말에 황 여사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가 됐든 그 깡패 새끼들 때보단 낫겠지.”

이곳 또한 1년간 아포칼립스에서 시달릴 대로 시달리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은 생존자 일행이었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적어도 지난날 보다는 나을 거라 여기는 외국 아가씨들의 말에 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전 남을 거예요.”

“응?”

“저하고 나미는 따로 이야기했어요. 외국인 애들 간다고 해도 전 그냥 여기 있으려고요. 뭐, 여기가 그렇게 못 살 곳도 아니고….”

“….”

은별은 바깥에 있는 또 다른 한국인 바텐더 나미와 같이 황 여사 옆에 끝까지 있을 거라고 말했다.

“누나는 여기 있겠다고?”

“너도 계속 이 동네 돌 거잖아? 그냥 앞으로도 이렇게 물물 교환하면서 지내자고.”

“그래, 뭐. 나도 자주 올 거니까.”

양근태 역시도 손뼉을 치면서 편한 대로 하라며 그녀들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그렇게 황 여사의 노래방은 10명의 여성들 중 3명의 한국인이 이곳에 남고, 7명이 미군부대가 부른다면 기꺼이 가기로 했다.

매튜 리 대위가 말했던 대로 생존자 중 여성이 있다면 자신들이 먹여 살리겠다고 했으니 딱히 문제되진 않을 거다.

김준은 그 상황을 모두 확인하고, 돌아갈 준비했다.

“김 사장은 벌써 가게?”

“오랜만에 뵈는 분들끼리 계세요. 전 집에 있는 식구들이 많아서요.”

“아, 거기도 아가씨들 많이 있지.”

양근태는 김준을 따라 집으로 가려는 인아와 라나를 보고는 뭔가 생각난 듯 그들을 불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잠깐만, 트럭에 이거라도 가져가.”

“!”

양근태는 인아와 라나를 향해 트럭에 있는 짐 중에서 박스 하나씩을 꺼내서 그녀들에게 건네줬다.

“어머?”

“오휘 브랜드!”

양근태가 트럭에서 꺼낸 건 여성용 화장품 세트.

그것도 오휘와 더페이스샵이라는 네임드 브랜드의 미개봉 화장품 세트였다.

“이거 받아도 돼요?”

“가져가. 여기 뭐 챙겨 갈 거 없었잖아?”

양근태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김준한테도 넌지시 물었다.

“달팽이 크림도 있는데 줄까?”

“뭐, 주세요.”

“앞으로 물물교환할 거 있으면 여기 몫까지 내가 다 낼게.”

“진짜 쉘터 합치실 거예요?”

“뭐, 나야 황 여사만 좋다면.”

싱글벙글한 얼굴의 양근태는 김준에게 자신이 직접 선물을 건네주고는 손을 흔들어 배웅해 줬다.

그렇게 좀비들을 잡고 돌아가는 길에 김준은 혹시나 해서 차로 아까 좀비들을 잡아냈던 곳을 살폈다.

“웁!”

“어우….”

꽉 닫은 창문틈 너머로도 탄내가 확 올라오자 김준은 바로 에어컨을 틀었다.

“진짜 싸그리 타버렸네….”

“진짜요.”

도로부터 해서 새카만 그을음과 뼛조각 하나까지 타들어 간 재가 이곳저곳에 휘날렸고, 주변 건물들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잔불이 남았어도 뭐 태울래야 태울 거리가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라 저절로 꺼졌다.

“오빠.”

“왜?”

“저기 하늘이요.”

조수석에 있던 인아가 하늘을 가리키자, 김준이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봤다.

정오가 지날 때까지 해가 쨍쨍 뜨고 있었는데 별안간 구름이 조금씩 낀게 보였다.

“어….”

“좀 있다가 비 올 거 같지 않아요?”

“비 좀 왔으면 좋겠다.”

김준은 차를 돌리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좀비 군락을 잡은 뒤로 김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게다가 아까 양근태가 말해 준 대로 좀비들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면 후각이 먼저고, 그다음이 촉각, 청각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앞으로 좀비 대처법을 매뉴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우리가 나갈 때마다 좀비 튀어나오는지 알 것 같았어.”

“네?”

“인아 언니, 여기 바깥에 좀비가요. 냄새 맡아서 움직이는 거래요.”

“…아.”

김준도 운전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지나갈 때마다 논밭에 있던 좀비가 오거나, 갑자기 튀어나와서 쫓아오는 거… 그게 다 차 운전할 때 기름 냄새를 맡고 달려온다는 거잖아?”

“전기차라도 있어야 할까요?”

“매연이랑 소리는 없으니 조용히 다닐 수는 있겠다.”

인아의 말에 김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봤다.

김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매캐해진 호흡기 때문에 연신 기침했다.

“집에 가면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연기를 하도 마셔서 생각도 없어.”

“….”

인아는 김준의 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최근 들어 밥 말고 다른 이야기할 수 있는 거리가 없긴 했다.

***

“그래서, 아메리칸 아미들하고, 거기 후커들하고 엮이는 거야?”

“그 후커란 소리 좀 하지 마라.”

“그럼 뭐라고 하지? 섹스 워커? 가라오케 쇼걸?”

“쫌!”

김준은 옆에 착 달라붙어서 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 에밀리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렇구나. 공단면에 그 사람들이 미군부대로 가는 거군요.”

은지도 그 상황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 역시 그렇게 됐다면서, 자신이 먼저 제안하기 전에 그녀들이 요청한 거니 일단 미군부대에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준, 내가 무전기로 알릴까?”

“잠깐만! 그 전에.”

“!”

김준 대신 은지가 손을 들어 에밀리를 제지 했다.

그러고는 은지가 김준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신릉면이라는 조폭 소굴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음.”

“미군이 나올 수 있다면 차라리 거기 애들 쓸어버려서 거기에 있다는 언니들도 데려가게 할 수 있지 않아요?”

“!”

김준은 은지의 제안에 얼굴을 긁적였다.

생각해 보면 거기도 상당한 수의 업소녀들이 있다고 하는데 마약 빤 깡패놈들 밑에서 고통받는 상황이었다.

“거기는 약사에 전문의에 필요한 인원들 다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마리도 한 마디 거들자 김준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그냥 거기 아가씨들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 내친김에 미군한테 요청해서 신릉면 제일파 새끼들도 싹 쓸어 버리자?”

“걔들한테 요청할 수 있나 싶어서요.”

그 제안을 꺼낸 은지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조용히 김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단 그건 생각 좀 해 봐야겠다. 조만간 절에도 한 번 가 보고. 그 사람한테 얘기 좀 들어 보고 또….”

김준은 애들의 얼굴을 한 번씩 보면서 말했다.

“스케일링이나 이 아픈애들 있으면 같이 가자.”

“나 할래! 스케일링.”

에밀리는 자기 입을 크게 벌리면서 새하얀 치아를 가리켰다.

보통 사람들은 치과하면 반사적으로 가기 싫어하는데, 얼마나 나가고 싶으면 자원해서 받고 싶다는 에밀리를 두고 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 쯤에 가자.”

김준은 그 말을 마치고,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치려 했다.

그때 조용히 바깥을 보고 있던 인아가 베란다 문을 확 열어 버렸다.

드르륵-

“!?”

“인아, 뭐 해?”

“역시….”

베란다 문을 열고 손을 뻗었던 인아는 손끝에 묻어나는 물을 보고서 외쳤다.

“오빠! 밖에 비와요?”

“어, 진짜?”

비 온다는 말에 바로 일어난 김준과, 서로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는 에밀리, 마리, 라나.

그녀들은 김준이 시키기도 전에 신발장으로 가서 고이 접혀 있는 우비를 하나씩 꺼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오랜만에 쏟아지는 비에 모두가 나와서 빗물탱크를 열고, 흠뻑 젖은 채로 물을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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