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마리는 미닫이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은지가 다쳤다는 말에 집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봤고, 김준이 일어나 물었다.
“어때?”
“뇌진탕 증상이 있는데, 일단 타이레놀 먹고, 한숨 잔대요.”
“괜찮은 거지?”
“글쎄요. 여긴 CT도 없고, MRI도 없으니….”
김준은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하는데….”
“오빠!”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도경이가 등골이 서늘한지 그건 아니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김준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개새끼들이 말이야. 마트 점거해서 쇠구슬을 쏘는데, 그걸 머리 노리고 맞춘거야.”
“헉….”
“헬멧을 썼는데 그게 박살 나서 쇠구슬이 파고들었어. 그냥 맞았으면 걔 죽을 수도 있었다고.”
“세상에.”
가야나 마리 같은 애들도 그 이야기를 들으니 치가 떨리는 듯 반사적으로 자기 머리를 잡고 어루만졌다.
그리고 조용히 듣고 있던 에밀리가 조용히 다가와 김준을 살며시 안았다.
“치워-”
“고생 많았겠다. 내 품에 안겨~”
김준이 달라붙지 말라고 한 마디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가슴을 내밀면서 이리저리 부비댔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자기 가슴 만지라고 부비댔는데, 오늘도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 오늘은 고기라도 구울까요?”
“응, 그래.”
인아 역시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저기압인 분위기에서 고기 회식을 제안 했다.
때마침 영주 아저씨네에서 가져온 고기요리가 가득이었다.
***
드르륵-
“너무 자주 와요.”
“4시간에 한 번씩 확인하래.”
“….”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밤중에 미닫이방으로 들어온 김준은 은지의 귀에 체온계를 꽂아 체온을 체크하고 이마를 짚었다.
“괜찮다니까요?”
“뇌진탕이라니까 이대로 일주일은 봐야 해.”
“잠이나 좀 푹 자고 싶은데….”
“낮부터 계속 잤잖아?”
“몰라요. 그냥 다 가라앉아서….”
은지는 내색은 안 했지만, 뇌진탕 후유증으로 누워만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싫었다.
지금은 절대 안정이라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으니 한숨만 나왔다.
“뭐 좀 먹고 싶어요.”
“음, 수프랑 죽만 먹으라고 했는데….”
“그럼 죽 위에 뭐든 올려놔서요. 짭짤하게.”
“음. 뭐 좀 만들어올게.”
김준은 늦은 밤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조용히 부엌으로 나가 음식을 만들었다.
갓 지읏 밥을 물에 말아다가 냄비 위에 올려놨고, 냉장고에 있는 인아가 담근 김치를 잘게 썰어서 밥 위에 올려놓고 깨를 뿌려 김치죽을 쑤었다.
거기에 지난번 영주 아저씨네서 받아온 장조림도 반찬으로 추가해서 접시에 담고 가져가자 은지는 밤에 먹는 야식에 미소를 지었다.
“후룹-”
“먹을 만 해?”
“장조림 이거 맛있네요.”
김준이 끓여 온 김치죽을 후후 불어먹고, 젓가락으로 장조림을 조금씩 먹는 은지를 보며 김준은 안쓰러운 눈으로 계속 지켜봤다.
“그렇게 안 봐도 돼요. 며칠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지니까.”
“후우… 미안하다.”
“바깥은 원래 위험했어요.”
몇 번이고 그때 그놈들 못 죽인 게 한이 됐지만, 은지는 담담하게 자기 머리에 쇠구슬을 쏜 그 붉은 조끼들을 떠올리며 넌지시 말했다.
“오빠한테 총 맞은 그 인간들도 어디서 끙끙 앓고 있겠죠.”
“싹 다 죽여도 상관없는데….”
“좀비는 몰라도 사람은 좀….”
은지는 조용히 김준의 손을 잡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에게는 그냥 총으로 쏴 죽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살인은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었다.
“뭐, 몸 나으면 또 나가죠. 헬멧 튼튼한 거로 쓰고.”
“아냐, 쉬어도 돼.”
“괜찮아요. 사실 집에 있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편하니까.”
은지는 담담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김준은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히 버티는 그녀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김준은 연신 은지를 간병하고 토닥여주면서 며칠간 그녀의 수발을 전부 들어줬다.
***
“으으응- 으응-”
“괜찮아?”
“그냥… 수건만 주고 일 봐요. 옆에 있는 게 더 힘들어.”
“아, 그래도 이건….”
“혼자 좀 쉬고 싶어요.”
요 며칠 새 은지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초반엔 음식에 고기도 곧잘 먹던 애가 어느 순간 먹던 걸 전부 토해내고, 고열에 시달리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온종일 누워만 있었다.
김준과 마리가 돌아가면서 상태를 봤지만, 오히려 통증 때문에 혼자 있고 싶다면서 그의 간병도 만류했다.
“타이레놀 먹고 좀 잘게요.”
“그,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알았어요. 이제 그만!”
은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김준은 한숨을 내쉬면서 미닫이방을 나섰다.
거실에 있던 마리는 김준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뇌진탕 오래가네요.”
“뇌진탕만이야?”
혹시나 머리에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게 물어본 김준이었지만, 마리는 가진 장비들로 최대한 관찰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혈압도 괜찮고, 눈도 확인했어요. 원래 뇌진탕이 일주일에서 2주일은 가는데….”
은지의 상태를 보고 다른 애들 역시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요새 은지 너무 고생하더라.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됐어.”
“그러게요. 은지언니 빨리 나아야 하는데….”
몇몇은 눈물까지 글썽였고, 언제나 드립을 치던 에밀리도 점점 상황이 심각해진다는 걸 아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은지가 있는 방을 바라봤다.
“저기 오빠.”
“왜?”
“그… 이 상황에서 이런 거 말하기가 그렇긴 한데….”
도경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옥탑방을 가리켰다.
“요새 3층 물이 잘 안 나와요. 펌프도 돌아가는 소리가 이상하고요.”
“후- 그래. 보러 갈게.”
이 상황에서 간병 빼고는 뭐 할 수가 없으니 그냥 하던 일이나 하면서 어떻게든 은지가 견뎌 내기를 바랐다.
***
그리고 이튿날 아침.
김준이 일어나마자 씻고서 은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응?”
“아주 반사적으로 움직이시네요.”
“!?”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보니 그곳에선 은지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간 좀 봐주세요. 일부러 찌개를 좀 묽게 했는데….”
“괜찮은 거야?”
은지는 대답 대신 자기 손으로 머리를 콕콕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우~ 진짜 오래 앓았어요. 독감인 줄~”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은지를 보면서 김준은 며칠간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기분이 이제야 풀렸다.
그리고 다른 애들도 하나둘씩 일어나서 은지가 나은 모습을 보고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서로 끌어안고 눈물까지 보였다.
특히 라나랑 인아 같은 애들이 눈물 콧물을 빼내면서 은지한테 안겨 매달렸었다.
***
치익-
은지 상태가 나아진 뒤로 김준은 안도하며 바깥에서 끽연을 즐겼다.
그리고 장거리에 다녀온 뒤로 김준은 생각이 많았었다.
“당분간은 루팅도 혼자 가려고 했는데, 그건 또 싫다니….”
애들한테 미안 해서 당분간 바깥 혼자만 나간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면서 다음 바깥 외출도 무조건 자기가 가겠다고 우긴 은지였다.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니 다음에는 뭘 구하러 나갈진 몰라도 일단 은지의 말대로 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바깥에 나와 따사로운 햇빛을 맞을 때, 갑자기 차 소리가 들렸다.
“응?”
부우웅- 우우우우웅-
멀리서부터 오는 트럭의 소리.
김준이 혹시나 해서 캠핑카 위로 올라가서 살폈을 때, 골목을 타고 이곳으로 오는 큰 트럭이 한 대 있었다.
“하….”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만물상 트럭이었다.
빵- 빵-
“클락션 울리지 마요!”
김준의 외침에 바로 손을 뗀 행상인 양근태는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김 사장! 별일 없었어?”
“별일이 아주 많… 에휴~ 아닙니다.”
“김 사장! 이번에 장어 좀 가져 왔는데, 뭐 좀 챙긴 거 있어?”
“!?”
김준이 일단 문을 열어 주자 양 사장은 트럭에 있는 수많은 물품 중에서 흰색 스티로폼 박스를 건네줬다.
“어머? 누가 왔어?”
“아이고, 노랑머리 아가씨 오랜만이네.”
“아~ 트럭커!”
에밀리가 나왔다가 양근태를 보고는 손을 흔들면서 김준 옆에 착 달라붙었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는 수십 마리의 붕장어가 활기차게 움직였고, kg 단위로 쳐도 꽤 비쌀 금액이었다.
“어때? 기가 막히지?”
“요새 해산물 잘 가져오시네요. 게도 있나요?”
“방게 쬐간한거밖에 없는데, 같이 줄까?”
“다른 건요?”
“바지락 조금 있고, 미역이랑 김 말린 거 있고.”
“다 주세요. 소고기 가져온 게 있는데 그거랑 교환하죠.”
“오우~ 이 집은 요새 고기 잘 구해 오네? 다른 거 뭐 없어?”
“쌀이야 많죠.”
요 며칠 물자는 풍족해도 은지가 아파서 우중충했는데, 양 사장이 온 덕에 다양한 물건들과 교환할 수 있었다.
특히 장어를 보고서 입맛을 다신 에밀리는 김준 옆에서 넌지시 말했다.
“꼬리는 준이 다 먹어도 돼.”
“그건 민물장어지.”
“일단 먹으면 불끈불끈 하잖아.”
장어를 보고 자기가 먹는 게 아니라 김준 먹일 생각에 입맛을 다시는 에밀리.
그렇게 물물교환을 마친 양 사장은 김준에게 줄게 있다면서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무전기. 어촌 사람들이 쓰는 거 받아왔어.”
“!?”
김준 역시 이곳저곳에 무전기가 있었지만, 양 사장이 직접 자기랑 연락할 수 있는 걸 주니 묘했다.
“이거 가지고 앞으로 필요한 물건 있으면 연락하자고. 뭐, 내가 근처 있어야만 하지만….”
“그렇군요.”
어쨌든 무전기까지 덤으로 받고 고기와 해산물을 물물교환한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붕장어 구이가 됐고, 김준 앞으로 올라온 장어 꼬리만 10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