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으-”
오전 일찍 출발하는 김준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어제 엄청 격했나 보네요?”
“….”
조수석에 앉아 있던 라나는 자동차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 마리 언니랑 한 거죠? 소리 엄청 컸어요.”
“그… 들었구나?”
“뭐, 오늘 밤은 내 차례겠네요.”
라나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칸막이를 손톱으로 긁었다.
소음보다는 지난번 방문을 긁던 그 얌전한 고양이의 소리가 났고, 작정하고서 오늘 김준이랑 같이 밤을 지새려고 달아오른 상태였다.
“일단 미군부대 다녀오고 시간 많이 있으니 그때 말해.”
“안 한다는 말은 아니죠?”
라나의 머리 위에 하트가 만들어졌다.
김준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뒤에서 교환 물자를 가득 준비한 마리는 이미 자기 타임이 끝난 상태에서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군부대까지 가는 길은 굉장히 순탄했다.
오늘 같은 날은 하늘도 돕는지, 좀비라고 해야 공기총이나 석궁으로만 써서 몇 되지도 않는 좀비들을 잡는 것으로 끝냈다.
“오늘은 진짜 얌전하네요.”
“뛰는 좀비 발견해도 그냥 달려가면 될 거 같아.”
“술래잡기할 필요도 없이 말이죠?”
뒤에 있는 마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준.
대로변에도 별로 좀비가 없었고, 샛길을 통해서 미군부대까지 왔을 때, 김준은 예상한 시간을 살폈다.
“그거 챙겼어?”
“폭죽이요? 여기요.”
김준은 마리가 챙긴 폭죽을 가지고 차에서 천천히 나왔다.
캠핑카 위의 캐리어 박스에 올라탄 김준은 저 멀리 보이는 휑한 미군부대를 바라봤다.
관리가 안 되는지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스코프를 통해 본 곳에는 예전에 유리창이 깨지고 핏자국이 남은 검문소가 있었다.
기본적인 경계 병력도 없는 상황이라 생각한 김준은 품 안에 챙긴 폭죽을 챙기고 담배 한 대를 물면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익- 치지지지지지직-
심지에서 불꽃이 튀면서 기다리는 동안 김준은 이 폭죽을 터트리고 언제 도착할지 몰랐다.
퍼엉- 펑! 쌔애애애애액! 펑!
신호용 폭죽이 터지면서 불꽃과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김준은 저 멀리 있는 미군들이 들을 수 있게, 폭죽을 기울여서 힘껏 쏴 댔다.
펑! 퍼엉! 펑!!!
폭죽이 터지는 동안 그 밑에 있던 마리와 라나는 느긋한 얼굴로 저 장벽 너머로 누가 나올지 기대하고 있었다.
치익-
폭죽이 다 터진 뒤로 김준이 캐리어박스에 앉은 채 담배를 태웠다.
일단 저들이 원한대로 신호는 보냈고, 언제 올지 몰랐다.
담배는 연달아 태워대고, 바깥 날씨는 더워서 마리가 위로 올려 준 물을 마시면서 기다릴 때… 저 멀리서 먼지바람이 일어났다.
“!”
김준이 엽총의 스코프를 통해서 살폈을 때, 맹렬히 달려오는 사다리차가 한 대 있었다.
“왔다!”
그들은 폭죽이 터지는 쪽으로 다가왔고, 김준이 지난번 편지 용도로 쓰였던 조립식 깃대를 들어 올리자 그것을 확인한 미군들이 방향을 돌렸다.
“오빠! 왔어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이야기해볼게!”
한국어를 하는 미군이 있는 것은 확인했고, 그들을 보면서 대화가 될 거로 생각한 김준.
좀 더 가까이 왔을 때, 장벽 하나를 두고 차에서 내린 인물이 사다리차로 올라왔다.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거친 인상에 정복을 입은 미군은 무기를 챙긴 채 김준을 보고서 손을 흔들었다.
“헬로!”
“미군부대?”
“오케이! 오케이! 한국 말! 할 줄 압니다!”
딱딱 끊어지는 억양이었지만, 분명 한국말로 하는 중년의 미군.
그는 차 위에서 장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불편한지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쪽! 게이트! 오면 돼요!”
“오케이!”
김준은 바로 캐리어 박스에서 내려와 운전석에 올라탔고, 그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어머! 진짜 미군 만난 거예요?”
“그래.”
“그 편지 남긴 사람이 ‘스테판 벨린저’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면 좋겠는데….”
“직접 오지 않았을까요? 군종목사라면서요?”
마리의 말에 김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 백 미터를 가서 출입문에 도착한 김준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미군들을 맞이했다.
세상이 멸망하고, 좀비들 속에서도 미군은 미군이었다.
최신형 헬멧부터 풀무장한 군복에 M4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는 1개 분대의 미군.
김준은 엽총을 든 채로 그들과 인사하며 물었다.
“스테판 벨린저 대령이 누구요?”
“스테판 벨린저? 왜 그를 찾죠?”
“이 편지를 남긴 게 그 사람이니까!”
김준이 군복에 적힌 벨린저 대령의 편지를 흔들자 미군 분대를 통솔하는 중년의 미군 사내가 크게 웃으면서 대문 창살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벨린저 대령이요.”
“마이 네임 이즈... 김 준!”
“솔져?”
“예전 솔져. 서전트!”
“아, 오케이!”
그걸 병장으로 알아들었는지, 중사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납득한 스테판 대령.
그가 눈짓하자 미군들은 사다리차에 있는 물자를 꺼내 왔다.
“여기까지 와 줘서 진심으로 고맙소. 일단 우리가 이런 걸 준비했는데….”
억양이 좀 세긴 하지만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한 스테판 대령은 김준에게 커다란 스팸 캔을 건넸다.
“오….”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파는 게 아닌 1.8kg의 대용량 스팸.
그것도 미국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고, 그 외에 베이크드 빈이나, 올리브, 콘비프같은 염장고기 통조림이 팔뚝만 한 사이즈의 크기였다.
“혹시 그쪽도 가져올 물건, 있어요?”
“물론이죠! 마리야!”
김준이 마리를 부르자 문이 열리면서 나무상자에 물자를 가져왔다.
마리가 나오자 김준이 그 나무상자에 담긴 걸 가져 왔고, 젊은 미군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휘익-”
“휘- 휙-”
몇몇은 캣콜링을 연상케 하는 휘파람을 불면서 실실 웃었지만, 벨린저 대령이 노려보자 바로 멈췄다.
김준이 순간 발끈했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병사들을 향해 영어로 엄하게 꾸짖는 벨린저 대령이었다.
“어떻게 안에 들어가서 교환해요?”
“오! 무기를 들고 있어서 무리군요. 그 샷건을 내려놓고 차만 온다면 가능합니다.”
“아니, 그건 나도….”
“일단은 이렇게 교환을 합시다. 창살 너머로 들이면 돼요.”
김준은 이해가 빠른 벨린저 대령의 말에 일단 포장된 소금과 꿀, 설탕 등을 넣어줬다.
그것을 본 미군들이 받아들고서 몇몇은 바로 뜯어서 손으로 설탕을 한움큼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
“스윗!”
“오, 컴온!”
미군 하나가 포장지 뜯고 입에 설탕을 잔뜩 묻힌 채로 신이나 있었다.
저게 무슨 대단한 마약이나 된 것처럼 설탕을 여기저기서 물어대는 미군들을 보니 천하의 천조국도 필요한 게 많다는 걸 느꼈다.
“콜라도, 소다도, 아스파탐도 없었어요.”
“앞으로도 구할 수 있으면 더 구하죠. 그리고 이거….”
라나까지 나와서 둘이 두툼하게 담긴 옷을 선보였다.
등산용 티셔츠부터, 사이즈 별로 있는 스포츠웨어까지 보여주자 미군들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몇몇이 라나와 마리를 보면서 관심을 보였지만, 벨린저 대령이 엄격하게 그들을 통제했다.
그 상황에서 라나가 일부러 미소를 한 번 짓자 그들의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김준은 그 상황에서 라나의 손을 꼭 잡아 뒤로 빠지게 한 다음 본격적인 협상했다.
“설탕과 소금, 꿀등을 통조림과 교환하는 거… 그다음은요?”
“오!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총알.”
“왓?”
그러자 옆에 있던 마리가 거들었다.
“불릿! 라이플 불릿!”
마리가 소총탄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소총을 가리키자 그는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김준은 품 안을 뒤적거리며 수기로 썼던 쪽지 하나를 건네줬다.
그것은 과거 험비와 M4 소총을 받으면서 그들이 남긴 기록물이었다.
벨린저 대령이 그것을 읽은 순간 깊이 탄식하면서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맥클러리 중령… 결국 떠나갔군. 부디 천국으로 갔기를….”
군종 목사 벨린저 대령이 희생된 부대에 대해 명복을 빌며, 조용히 기도했다.
기도를 마친 뒤로 다시 협상 이야기하는 벨린저 대령.
하지만 그는 소총에 대한 교환은 거부했다.
“아임 소리, 킴! 이 거래를 통해 당신이 좋은 친구라는 걸 알았지만… M4의 불릿은 우리도 함부로 줄 수 없습니다.”
“….”
“만약 우리가 여러 번 만나면서 진정한 신뢰를 쌓는다면 그때는 부대원들을 통해 말해 보죠.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아, 그래요? 그럼 통조림하고 가솔린….”
“가솔린은 드릴 수 있습니다.”
벨린저 대령이 명하자 미군 둘이 사다리차로 달려가, 그곳에 비상용으로 준비한 가솔린 통을 가져왔다
플라스틱이 아닌 스테인레스 가솔린 탱크 네 개가 아이도 왔다 갈 수 있는 넓이의 쇠창살 너머로 나왔다.
총 80L의 휘발유를 받은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옷 상자 하나를 넘겨줬다.
그리고 남은 것을 뭐로 협상할까 하는 김준을 두고 벨린저가 다시 불렀다.
“미스터 킴!”
“!?”
“정, 무기가 필요하면 내걸 줄 수 있어요!”
벨린저 대령이 허리춤을 뒤적거리더니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미군 대령이 좀비 사태에서도 구비하고 있던 권총.
그는 그것의 자루를 잡고 창살을 너머 김준에게 건네줬다.
“커널!(대령님!)”
몇몇 미군 병사들이 총을 건네주는 상황에 우려스럽게 외쳤지만, 벨린저 대령은 괜찮다면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김준은 세월이 묻어난 그 권총을 받아들였다.
M1911권총.... 흔히 ‘콜트 45’라고 불리는 미군의 제식권총이었다.
김준이 콜트45 권총을 받자마자 탄창을 빼냈고, 안에 7발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벨린저 대령은 다른 병사들에게 시켜 추가 총알을 가져올 것을 명했고, 사다리차 안에 구비된 게 많은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묵직한 종이갑과 그 위에 빈 탄창을 가져왔다.
45.ACP 라고 쓰인 게 45구경에 50발짜리 박스였다.
“첫 교환의 목적으로 드리겠소.”
“오… 이거면… 땡큐! 땡큐 벨린저!”
김준은 콜트 45권총과 예비 탄창 한 자루, 50발짜리 총알을 받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옷 3박스와 혹시 몰라 예비용으로 가진 설탕과 소금, 식용유와 미원까지 모두 건네줬다.
“이 콜트... 좋은 핸드건이군요.”
“미스터 킴! 이것도 가져가시오.”
“응?”
“우리의 대화를 계속 위해 드리겠습니다.”
벨린저 대령은 마지막 선물로 묵직한 전자 장비 하나를 건네줬다.
등에 메고서 어디든지 미군 부대에 연락할 수 있는 치트키 아이템.
미군 무전기였다.
“오, 이건….”
“10마일(16km)까지는 우리한테 연락할 수 있어요.”
‘미친… 역시 미군인가?’
2~3km의 무전기를 기지국 설치한다고 여러 개를 이어 붙여서 노이즈 가득한 연락을 했는데, 다이렉트로 김준의 집에서 미군부대까지 연락할 수 있는 휴대용 무전기를 받았다.
“우리가 필요하면, 이걸로 연락하면 됩니다.”
“땡큐! 리얼 땡큐!”
콩글리쉬를 쓰면서 감사를 표하자 벨린저 대령 이하 1개 분대가 일제히 경례했다.
김준 역시도 그 자리에서 맞경례를 했고, 미군과의 거래를 마칠 수 있었다.
엄청난 성과.
늦게 발견하고, 많은 준비해서 얻은 성과는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