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밤의 톱스타-301화 (301/374)

“선풍기 설치한다.”

“예~ 안 그래도 후끈거렸어~!”

김준이 안방에서 선풍기를 가지고 나오자 에밀리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두 팔을 벌렸다.

선풍기를 설치하는 동안에도 은지는 조용히 컵에 담긴 소주를 쭉 원샷으로 들이켜고는 육회 한 조각을 우물거리면서 에밀리에게 잔을 내밀었다.

위이이이잉-

“아~ 시원해. 준!”

“맨날 쓰러지면서 뭐 이렇게 마셨어?”

“이히히- 다크 나이트 해 줄래?”

“줘 봐.”

“농담이야.♥”

김준이 없던 사이에서 물밑 하이힐 질을 하던 두 아가씨였고, 김준한테 맡기는 건 에밀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 한 잔 마십니다.”

“야! 야! 너 그러다….”

에밀리는 김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컵에 가득 찬 소주를 쭉 들이켰다.

그러고는 입가를 손으로 닦으면서 잔을 돌려 은지에게 건네주고 쭉 따라줬다.

천엽과 생간을 참기름에 찍어 한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은지의 잔을 채워주자 그녀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다 먹겠어? 나도 줘.”

“새로 따라드릴게요.”

은지는 종이컵으로 김준의 잔을 채워준 다음에 둘이서 쭉 들이켰다.

김준은 그 상황을 보고서 중재했다.

“확실하게 말할게. 감정 상한 거 있으면 이 자리에서 툭 털자.”

“흐응~ 글쎄?”

“지금은 그냥 마시면서 생각하는 거죠.”

에밀리나 은지나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황이라 아까 같은 날카로움은 없었다.

특히 에밀리의 경우 그 새하얀 피부에 점점 홍조가 올라오면서 좀만 더 마시면 토마토처럼 새빨개질 것 같았다.

은지는 남은 소주를 쭉 따랐고, 가득이 아닌 반쯤 되는 양이었지만, 에밀리는 그걸 잡고 쭉 마셨다.

그때 슬슬 한계가 오는지 몽롱해진 눈을 한 에밀리에게 김준이 육회와 천엽을 말아 기름장에 찍었다.

“아~ 해 봐.”

“아아~”

에밀리가 입을 벌리고 새빨간 혀를 내밀었을 때, 거기에 넣어 주고 오물거릴 때, 데운 무국도 가져다 줬다.

“술내기를 하는 건 상관없는데, 안주 좀 먹으면서 해라. 속 버린다.”

“땡스~ 준~”

에밀리가 미소를 지으면서 브이자를 해주며 은지의 잔을 채워줬다.

“헤비 드렁커잖아, 진짜 취하면 성격이 바뀌나?”

“확인해 볼래?”

“지금 확인하려고. 히~”

“슬슬 혀 꼬이는 거 같으니까 들어가 자.”

“시른~데에~?”

기어이 소주 새로 까서 채우려고 할 때, 김준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은지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잔을 받아 쭉 들이켰고, 그냥 볼 수 없던 김준도 그만큼 따라서 같이 마셨다.

‘생각해 보면 쟤 취한 건 진짜 못보긴 했지.’

은지는 에밀리 앞에서 종이컵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계속하겠냐는 투로 눈짓 했다.

“두세잔만 더 마시면 쓰리썸인데….”

“뭐?”

“주우운~ 내 편들어 줘야 쟤가 오늘 밤….”

그 순간 에밀리는 김준의 옆에 풀썩 쓰러졌다.

안기면서 술 냄새가 확 풍기면서 가슴이 연신 무릎에 닿았다.

“에밀리 일어나. 여기서 자면 안 되지. 이 아가씨야~”

“으으응~ 응~”

한번 잠들면 몸부림은 쳐도 깨지는 않는 에밀리를 두고 은지는 내기는 이겼지만, 자기 몫으로 남긴 소주를 쭉 들이켜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10분 전부터 이미 간 상태였어요.”

“너 진짜 술 세다.”

은지는 김준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놓인 무릎담요를 집었다.

김준이 완전히 가 버린 에밀리를 안고 있다 무릎에 눕힐 때, 그녀의 몸에 조용히 덮어줬다.

그렇게 에밀리는 과음으로 아웃이고, 김준의 무릎을 밴채 새근새근 잘도 잤다.

“계속 마실거지?”

“뭐, 오늘은 딱히 그거 생각도 없고요.”

은지는 소주를 따르면서 뒤늦게 안주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바깥에는 모기가 잔뜩 꼬이고, 열대야가 심했지만, 집안은 선풍기 바람 쐬면서 천국이 따로 없었다.

김준은 은지를 따라주면서 안주 많이 먹으라고 천엽 그릇을 그녀에게 밀어줬다.

그리고 섹스는 다음으로 미루고 취중진담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저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네요.”

“음….”

“제가 애들하고 못 어울려도, 오빠가 배려해줬으니까요.”

은지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이곳에서의 삶이 오래되긴 했나보다.

그 얼음 여왕이 김준한테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건 보기 힘들었다.

“처음엔 그냥 나랑 한번 자고 싶은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내가 양아치냐?”

“오빠는 좋은 사람이 맞아요.”

은지는 소주잔을 들고 건배하면서 쭉 들이켰다.

그러고는 이런 자리에서 그동안 못했던 말에 대해 하나둘씩 나왔다.

“에밀리가 원래 좀 집착이 심한 건 맞아요. 물건 욕심도 심하고.”

“으히~”

김준은 무릎을 베고 잠꼬대를 하는 에밀리의 금색의 머리칼을 쓰담 쓰담하면서 편하게 재웠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은지 너는 다른 애들하고 왜 그렇게 거리를 둬?”

“딱히 그렇게 생각을 안 했는데….”

“가야나 인아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은데 나머지 애들하고는 좀 냉랭하잖아? 에밀리처럼 긁지는 않아도.”

“으음….”

은지 역시 그 말에 대해서는 반박을 못 했다.

김준에게 마음은 어느 정도 열었다고 해도 다른 애들하고의 관계는 거의 수직적인 분위기였다.

원래 맏언니였던 가야가 리더 못하겠다고 해서 은지가 맡았는데 집안의 룰은 잘 지키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다 처리하려고 하지 누구랑 같이 협력하는 것은 부족했다.

“그거 생각나네, 나랑 인아가 나갔을 때, 집에 좀비가 쳐들어왔었다며?”

“그랬죠.”

“그때 네가 쇠 파이프 끝에다 보루 묶어서 불붙여서 휘둘러 좀비 쫓아내고 새총 쏴서 잡았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자기 혼자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나섰던 은지.

그녀가 그렇게 움직였던 게 한 번이 아니었다.

“가야가 맹장 터졌을 때, 기가 막히게 양 사장이 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쩌려고 했어?”

“업고라도 갔겠죠. 길은 아니까”

“좀비가 있는 밖에서?”

“어차피 그 길은 하도 쓸어댔으니 그렇게 없었을 거예요.”

“가야까지 위험하잖아.”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거는 쫌… 고쳤으면 좋을 텐데.”

“!”

김준은 소주를 쭉 들이켜면서 조용히 은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 했다.

예전 같으면 싸늘한 얼굴로 ‘왜요?’라는 표정을 지었겠지만, 지금은 조용히 잔을 들고 다가와 김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왼쪽에는 무릎담요 덮고서 새근새근 잘도 자는 에밀리.

오른쪽에는 은지가 어깨에 붙으면서 소주를 같이 나눠마셨다.

“그래, 내가 은지 좋아하긴 하는데, 이거는 너도 생각 좀 해 봤으면 좋겠어.”

“어떤?”

“위험성이 없고 주변 사람에 대한 생각이 없어.”

“흐음~”

“지금처럼 하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좀만 더 신중하고 다른 애들하고도 같이 어울렸으면 좋겠어.”

“그럼 그러죠.”

은지는 쿨하게 김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진짜?”

“네, 좀 더 애들한테 살갑게 대하고, 안전 챙기라는 거잖아요.”

굳이 그거에 대해서 티격태격 할 것도 없이 은지는 김준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내일부터는 달라지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제껏 애교가 없었죠?”

“솔직히 인정!”

그동안 섹스 같은 것도 ‘하고 싶으면 그냥 해라.’ 식으로 몸을 대주는 행위였고, 어울려달라고 해도 언제나 수동적이었다.

은지는 핫팬츠 차림에 조용히 발을 들어 신고 있던 양말을 쓱쓱 벗었다.

“!”

씻고 온 상태에서도 실내에서 양말을 신고 다니던 은지였는데 그걸 벗고는 자연스럽게 김준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이렇게 터치도 하고….”

은지는 그동안 들었던 김준의 성벽을 생각하면서 입고 있던 티셔츠도 슬그머니 올려서 매끈한 배와 밑가슴을 보였다.

매끈하고, 매니큐어를 바른 작고 촘촘한 발이 김준의 무릎을 간질거리다가 허벅지까지 타고 올라가 배까지 올라가 꼼지락거렸다.

김준이 손으로 그녀의 발을 덥썩 잡자 그녀는 빙긋- 웃으면서 계속해보라는 듯 색기 있는 표정을 지어 봤다.

은지의 발이 김준에게 잡혀서 얼굴에 올라왔을 때, 냄새 하나 없이 오히려 바디워시 향이 나는 엄지발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

발을 깨물리자 순간 움찔거리면서 취기가 올라오는지 얼굴이 확 빨개지는 은지.

나갈 때마다 매일 같이 팬티스타킹이나 레깅스를 입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이 예쁜 다리를 뭐 그렇게 꽁꽁 감싸는지 모르겠다.

흉터 있는 상반신이야 그래도 다리 정도는 얼마든지 드러내도 훨씬 더 예뻐 보일텐데 말이다.

은지는 발을 이리저리 물고 빨리다가 조용히 떼어놓고 소줏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정도 남아 있는 것을 집은 채 티셔츠를 쭉 올리자 꽁꽁 감춰있던 탐스러운 가슴골이 드러났다.

“이거… 이렇게 따라주는 거라고?”

아까 에밀리의 계곡주의 이야기를 듣고서 처음 해보지만, 소주를 골에다가 졸졸 따르고 잔뜩 모아 웅덩이를 만든 은지.

김준은 그 순간 바로 얼굴을 파묻었고, 은지는 에밀리나 다른 애들이 말했던 남자 녹이는 밤일이 뭔지 알 것 같다는 미소를 지었다.

***

이튿날.

“으으윽- 끄으으으응!”

일어나자마자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빗어넘긴 가야.

“어우, 몇 시야...”

“언니, 일어났어요?”

옆에서 자고 있던 인아도 뒤늦게 깨서 하품을 크게 하고는 몸을 긁적거리며 미닫이 문을 열었다.

“으~ 술 냄새. 저거 뭐야?”

가야와 인아는 밖에 나오자마자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언니, 세상에….”

“은지에, 에밀리에… 어제 완전 술판 벌렸네.”

거실의 상황은 가관이었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어제의 술안주 찌꺼기에, 전부 비워 버린 예닐곱 병의 소주.

소파 앞에서 늘어지게 곯아떨어진 김준과 그의 무릎에서 담요를 덮고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에밀리.

그리고 그 소파 위에선 은지가 쿠션을 잡고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은지 언니 옷이 왜 저래요?”

“세상에….”

“으으응~ 뭐예요?”

뒤늦게 일어나서 나온 라나는 아침부터 거실을 보는 가야와 인아를 보고서 같이 껴서 그 상황을 같이 봤다.

양말 한 짝을 벗어서 그걸 김준 어깨 위에 올려놓고 발을 까딱거리는 잠꼬대.

거기에 핫팬츠는 어째서인지 지퍼가 열려서 팬티가 드러났고, 웃옷도 제대로 안 입었다.

“설마 여기서… 아니겠죠?”

“인아야, 그건 아닐 거야.”

“….”

그때 라나가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 뭔가를 꺼내 왔다.

“라나야! 너 지금 뭐….”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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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온 라나는 그 모습을 보고 바로 사진에 담았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아침부터 널브러진 모습을 보인 김준과 은지와 에밀리.

일어나자마자 옷차림을 보고 화들짝 놀란 은지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옷을 갈아입고 오자 이미 다른 아이들이 아침 해장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은지 언니도 빈틈이 있었구나~”

라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은지는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잠결에 옷이 풀어졌나 봐.”

“브래지어도 벗어다 소파 옆에 던져놓고요.”

“내가 자면서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 일이었는데, 애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은지였다.

그리고 그런 은지를 맞은편에서 보면서 어젯밤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에밀리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작게 키득거렸다.

그렇게 아침부터 라나가 찍은 사진 덕분에 ‘은지 언니도 빈틈이 있었다.’라면서 좋은 구경거리와 함께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

식사 이후로 냉장고 보리차 두 통을 비우고서 겨우 속을 푼 김준은 밖으로 나가 간단한 작업했다.

오늘같은 날은 날붙이나 전기 만지는 일은 접고, 가볍게 창고 관리하기로 했다.

끼기긱- 끼이이익-

삼발이 밸브렌치를 돌려서 빗물탱크를 열자 오랜만에 열린 곳에서 고인 물들이 모습을 내밀었다.

“요샌 비도 안 온다니까.”

김준이 혀를 차며 중얼거릴 때, 보고 있던 마리가 조용히 뒤따라왔다.

“오빠!”

“마리야! 그냥 오지 말고 요오드랑 주사기 가져와!”

“아이오딘이요? 네~!”

집으로 후다닥 달려간 마리는 응급상자 안에서 김준이 말한 요오드와 주사기를 가져 왔다.

김준은 그것을 받고는 톤 단위로 저장된 세 개의 빗물탱크를 모두 열고, 주사기에 요오드를 빨아들여 각각 집어넣었다.

새빨간 요오드 용액이 물에 떨어지면서 안에 퍼질 때,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희석 락스나 아이오딘 몇 방울 넣는 걸로 식수 정화하는 건 식약청 가이드 라인에도 있으니까요.”

“밀봉도 신경 써야 해. 여기에 장구벌레 까면 진짜 답 없어.”

“네, 맞아요.”

그나마 다행인지 모기에 대한 피해는 적었다.

옛날에 방치된 세상에서 물웅덩이 하나 고여 장구벌레가 꼬일 법도 했지만, 그렇게 더운 날에도 모기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이 주변에 모기향 좀 깔고, 스프레이도 뿌려야 해.”

“네, 그것도 제가 할게요.”

위생이랑 의료 쪽에서는 마리가 집 전체를 돌면서 전부 케어해줬고, 김준은 이곳저곳 돌면서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때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갑자기 무전이 왔다.

명국이었다.

“생선?”

[치직- 네. 염치불구하고 어떻게 안 될까요?]

“무슨 생선?”

[그냥 구이나 찜용이면 될 거 같아요. 수영이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갑작스러운 연락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아내가 생선 요리를 먹고 싶다는 말에 부탁을 한 명국이었다.

김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차피 창고에 넘쳐나는 게 고등어나 청어, 꽁치,정어리 통조림이었으니 몇 개 줘봤자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달걀하고, 메추리 많이 준비할게요.]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겠다. 좀만 기다려. 가져갈게.”

[치직- 감사합니다. 형님.]

“대신에 점심 너희 집에서 먹을 거니까 준비좀 해 줘라.”

[네! 많이 차릴게요. 아기도 보러 오세요!]

갑작스럽지만, 그렇게 명국의 집으로 가기로 한 김준.

그때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서 오늘 하루 조용하던 은지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 집 가는 거예요? 저도 갈게요.”

“됐어. 쉬어.”

“!”

“어제 술도 많이 먹었는데, 에밀리랑 쉬어.”

안 그래도 술병난 상태로 계속 누워 있는 에밀리를 두고 라나와 마리가 계속 돌보고 있었다.

“오늘은 은지 대신 은야 데리고 가야겠다. 그리고 인아도 같이 가자.”

“아, 네. 준비할게요.”

갑작스럽게 픽이 되자 흠칫했지만, 일단 움직이기로 한 가야와 인아.

“물물교환할 거 챙겨야 하는데… 인아야. 우리 모종 좀 챙기자.”

“모종이요?”

“이젠 슬슬 준비해야 할 거 같아.”

그동안 김준의 집안은 종묘상에서 털어왔던 씨를 가지고 1층 상가와 옥탑방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각종 야채부터, 구황작물까지 못 나오는 게 없었지만, 이걸 몇 년이고 반복한다면 생산량이 줄 수밖에 없었다.

“걔들 종자하고, 우리거하고 바꿔서 따로 심어봐야겠어.”

“아, 그거라면… 네. 제가 챙길게요!”

“가야는 나랑 같이 통조림 챙겨야 하는데 누가 도와줄… 그래, 나니카가 와라!”

도경이와 라나와 같이 이불 빨래 잔뜩 들고 있던 세 명 중 나니카가 부름을 받고 쪼르르 달려왔다.

김준은 둘을 데리고 창고에 와서 그동안 숱하게 만들었던 나무 궤짝 하나를 가져다가 천을 깔고, 통조림을 차곡차곡 담았다.

“이거 한 박스면 충분하지 뭐.”

“인아가 옥상에 널어놓은 말린 생선도 좀 챙긴 대요.”

“있으면 좋지.”

그동안 김준 일행이 양 사장이 가져다준 해산물로 회도 떠먹고, 탕탕이에, 서더리탕에, 어포까지 만들어 먹었는데 이 정도는 해 줄 법했다.

게다가 지금 집의 냉장고에는 사냥한 멧돼지 고기와 아산에서 가져온 신선한 소고기가 가득이니 쌓아봤자 썩을 것들은 바로바로 나눠 주기로 했다.

“얼추 다 챙긴 것 같아요.”

“흠~ 그러면 나가기 전에….”

“!”

김준은 조용히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대략 이야기해줬다.

이 집에서 가장 차분하고, 누구하고도 모난 게 없는 가야와 나니카가 그 이야기를 듣자 눈이 커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가 좀 여기저기 투닥거리긴 했는데, 은지한테도 그랬구나….”

“그… 오빠, 제가 어떻게 이야기해볼까요?”

그나마 나니카가 에밀리하고 사이가 가장 좋았고, 가야야 누구하고도 친하면서 맏언니라 모두 따르니 중재하기에 좋을 거다.

“일단 가야는 나갈 준비하고, 인아하고 같이 다녀올 동안 준비좀 해 줘.”

그러자 가야는 나니카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마리한테 이야기해서 은지 좀 지켜봐. 걔도 트러블 잘 말려.”

“아, 네….”

김준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고, 자기 무기를 챙기면서 차로 향했다.

명국이네가 있는 시골길을 달릴 때, 김준은 조수석에 앉은 애들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좀… 애들 편애했나?”

“?”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인아는 무슨 소리인가 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뒤에 있던 가야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가야는 적극적으로 김준에 대해 변호했다.

“그냥 걔들끼리 투닥거린 거죠. 에밀리가 원래 좀 집착이나 질투가 심했어요.”

“에밀리 언니 무슨 일 있었어요?”

인아가 넌지시 물어 봤을 때, 가야는 최대한 좋게 말해줬다.

“그냥 술 먹고서 누구 더 좋아하냐 이런 거 묻다가 편애 이야기 나왔대.”

“아….”

그 순간 인아도 뭐가 생각난 게 있는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쟤도 처음에는 김준을 슬슬 피하다가 그날의 밤 이후로 그가 다시 찾아줄때까지 눈치만 보다가 겨우 용기내서 다가왔었다.

“가족처럼 다 같이 사는데, 누구 편애하고, 누구 싫어하고… 이런 이야기 안 나오게 노력할게.”

“가족같이….”

인아는 김준의 그 말에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 역시도 운전하면서 생각이 복잡했다.

‘매일 같이 한 명씩 공평하게 해줄 수도 없고… 손발 맞추는 것도 편한 애들 데리고 하는데…으음.’

여기가 내무반도 아니고, 군대 시절부터 할 일만 시키고 손 놨다가는 뭔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아가씨들의 생활이었다.

그때 하천 다리를 건너는 길부터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크어- 크어어-]

“씨발! 저거 뭐야?”

“꺄앗!?”

눈앞에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고가 났는지 바닥에 나뒹굴면서 피와 기름을 뿌린 채 쓰러진 오토바이.

그리고 원래 주인으로 보이던 존재는 고깃덩이의 몸이 되어 수많은 좀비들이 달라붙어 하이에나떼처럼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미친!”

더 볼 것도 없이 엽총을 든 김준.

우걱- 우걱- 크르르르…

입에 시체 살점이 가득 물려 피투성이의 좀비 하나가 차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렸고, 초점 없는 뿌연 눈을 한 채로 일어난 녀석은 그대로 포효했다.

캬아악- 캬아아아아아-

“엄맛?!”

인아와 가야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를 때, 김준은 바로 차를 돌려서 창문을 향해 엽총을 내밀었다.

철컥-

타앙!!!

멧돼지탄이 피투성이로 달려드는 좀비의 머리를 갈가리 찢어 버리고 쓰러트렸다.

하지만 그 총성은 오히려 시체만 뜯어먹던 좀비들을 모두 자극했고, 하나둘씩 일어나 새로운 표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김준은 가진 무기로 미친 듯이 난사해댔고, 언제나 자주 가던 길이 아스팔트 위에 피로 물든 죽음의 도로로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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