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언니, 미군 부대 쪽 안 가 봤죠?”
“으, 으응. 나는 그쪽 전혀 몰라.”
“생각해 보니 가야는 생존자 별로 안 봤구나?”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가야.
생각해 보니 그녀는 절과 명국 부부네, 맨 처음 갔던 신릉면 일대를 제외하고는 그냥 동네만 돌면서 필요한 물건 챙기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혼자 뭘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총무를 시킨 뒤로는 잘 나가지도 않았다.
“영어로 말하는 거야,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막 그런 건 아니겠죠?”
“뭐가?”
“오히려 그쪽이 무기로 저희를 위협하는….”
“그럴 일 없어. 그 전에 나한테 죽으니까.”
김준은 그러면서 점점 차가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에서 기어를 바꿨다.
액셀 한 번 잘못 밟거나, 핸들 꺾으면 바로 논두렁에 처박힐 수도 있는 위태위태한 길.
하지만 양근태가 말한 대로 정말 좀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마리는 비탈길을 가면서 들썩이는 상황에 조수석 손잡이를 잡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굉장히 무서운 분위기의 김준을 향해 계속 화제를 돌렸다.
“집에 가면 에밀리가 뭐라 하겠다. 걔 며칠 전부터 미군부대 나간다고 들떠 있었잖아요?”
“뭐, 달래줘야겠지.”
“어떻게요?”
“…알잖아?”
“아하하하, 그죠?”
마리는 김준의 그 대답에 키득거리면서, 밤에 먹을 술안주를 떠올렸다.
어젯밤부터 살인극을 볼 뻔한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밤일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풀린 마리였다.
물론, 그 뒤로 김준은 다시 말없이 앞차만 보고 달렸다.
좀비라도 중간에 나온다면 능숙하게 잡으면서 존재감을 보이고 싶었지만, 이곳은 아예 그걸 피하는 길이라 기회가 없었다.
양근태의 차를 따라 쭉 직진하던 김준의 캠핑카는 수로 돌다리로 올라온 다음에 멈췄다.
난간 하나 없는 아슬아슬한 곳에서 아래에는 오랜 기간 방치되어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 있었다.
김준은 앞에 멈춘 차를 보고 같이 멈춰 서 마리와 같이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쟤들만 신났네.”
왜가리 몇 마리가 물속을 누비면서 기다란 주둥이를 쑤셔 넣을 때마다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잡혔다.
“언제 날 잡고 저런 하천 한 번 들쑤셔 봐?”
“흐음~ 라나나 인아 같이 민물고기 좋아하는 애들 많지만, 저는 좀….”
붕어찜 같은 거 만들어도 그녀는 잘 안 먹었다.
하기야 8명이 부대끼고 사는데, 각각의 입맛이 다르니 당연하였다.
그사이 양근태는 차에서 내려서 진흙투성이의 차바퀴를 털어내고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중에 그가 다시 차에 타고 시동을 걸자 김준은 바로 뒤따라갔다.
얼마 안 있어 미군 부대까지 가는 길에 김준은 뒤늦게 떠오른 게 있어서 손바닥으로 핸들을 쳤다.
쿠웅-
“왓?! 오빠, 왜요?”
“준이 오빠?!”
“아이 씨, 그걸 놓고 왔네.”
“뭐, 뭐요?”
“우리 깃발! 미군들 보여 준다고 편지 쓴 거 있잖아.”
“…아!”
미군과 교류를 위해서 영어로 써서 자신들의 상황과 물물교환을 요청하는 내용의 깃발을 에밀리가 썼는데, 그걸 놓고 온 것이었다.
그거는 돌아오는 대로 험비에 담아서 가져가려고 했는데, 절에서 캠핑카 상태로 그냥 가 버렸는데 이제 떠올랐다.
“하, 씨발 이거….”
“오빠, 제가 쓸게요.”
“응?”
“간단하게 영작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에밀리 거는 아쉽게 못 챙겼지만, 마리가 있으니 자신이 즉석에서 써서 올리겠다고 한 마리.
어쩔 수 없이 미군 부대 근처로 가서 처리하기로 한 김준.
그렇게 두 차량이 미군부대에 도착했을 때, 그 앞으로는 좀비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일단 잡고 보자.”
“오케이!”
마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제야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석궁을 준비했다.
뒤에 있는 가야 역시도 자기가 고집 피워서 가겠다고 했으니 무기로 새총을 꺼내고 볼트를 장전했다.
혹시라도 앞에서 쏴대는데 사각으로 달려올 수 있으니 후방을 든든이 지켜야 했다.
크아아아- 캬아아아아악!!!
비틀거리다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오는 좀비.
거리는 충분했고, 오늘은 공기총 위주로 가져와 연지탄을 장전하고, 달려오는 좀비의 미간을 정확히 노렸다.
띵- 찰카닥-
새끼손톱 만한 사이즈의 연지탄이 압축공기로 발사되며 빠르게 날아가 달려드는 좀비의 머리를 맞췄을 때, 브레이크가 걸린 좀비.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마리가 바로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파각-
뛰는 좀비는 확실히 연지탄 한 방으로 잡기 힘들어 보였다.
원래 꿩이나 까마귀 등의 소형 조류를 잡는 용도여서 저지력이 부족한 게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탄만 계속 소비할 수 없었고, 다시 장전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띵-
뒤에 있는 좀비도 김준이 쏜 연지탄에 안구가 터지면서 비틀거렸다.
거기에 맞춰 마리가 한 방 더 쏘려는 찰나….
푸욱-
“!?”
별안간 좀비가 관자놀이에 다트가 꽂히면서 픽 쓰러졌다.
“뭐야?”
“오빠, 저기!”
“!?”
자세히 보니 앞차에서 기다랗게 나온 파이프가 있었다.
양근태 사장이 쏜 것이었고, 뒤이어 느릿거리는 좀비를 향해 또다시 다트가 날아가 이마에 꽂혔다.
“호….”
양근태가 쓰는 무기는 다름 아닌 블로우건이었다.
보통 동물원에서 파이프에 마취침을 장전하고 입으로 훅- 불어서 날리려 좀비를 맞추고 있었다.
“저 양반도 자기 무기는 따로 있네.”
김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공기총으로 마저 남은 좀비들을 하나하나 잡아갔다.
그사이 가야는 후방에서 달려오는 좀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상황 종료 외침이 울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갈까요?”
“잠깐만 있어 봐.”
김준은 차의 시동을 걸고서 좀비를 잡고 앞으로 나아갔고, 붉은 벽돌의 미군부대 장벽을 천천히 따라갔다.
지난번 험비를 노획했던 곳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빵- 빵- 빠아아앙-
“!?”
역으로 뒤에서 따라오던 행상인 양근태의 차가 연신 클락션을 울렸다.
그러고는 비상등 깜박이를 켜 대는 게, 뭔가 할 말이 있을 거 같았다.
김준은 차를 후진해서 그와 차 높이를 맞추고 창문을 열었다.
“뭡니까?”
“김 사장! 이쪽이 아니야.”
“뭔 소리예요?”
“반대쪽으로 가 보자! 저쪽에 무슨 커다란 깃발 같은 게 널브러져 있거든? 자네가 쓴 거 아니지?”
“뭔 소리예요. 무슨 깃발이….”
“아유, 한 번 따라와 봐! 자네가 확인해야 할 거 같아.”
“무슨….”
양근태가 차를 후진하면서 미군부대 정문으로 향했고, 김준은 한숨을 쉬면서도 일단 차를 돌려 그를 따라가 봤다.
그렇게 반대쪽 붉은 장벽을 따라 달릴 때, 양근태가 멈춰 섰고, 그 옆에는….
“어머, 저거 뭐야?”
“….”
“오빠, 우리 여기 한 바퀴 돌면서 저건 못 보지 않았어요?”
“진짜 메시지인가?”
높은 담벼락, 그 위에는 날카로운 피스가 박힌 철조망이 가득.
그런데 그 위에 기울어져 있는 깃발 하나가 휘날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미군들이 사막 도색으로 쓰는 그 누런 군복을 잘라다 쓴 것이었고, 펜으로 뭔가가 적혀 있었다.
“김사장! 이거, 이거 맞지?”
차 안에서 외치는 양근태를 보니, 그래도 저 아재가 뭐 한 건은 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거 어떻게 챙기죠?”
“높긴 하네.”
보통 키로는 도저히 닿을 높이가 아니었고, 김준이 차를 좀 더 가까이 붙인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거기 잘 있어!”
“네! 엄호할게요!”
마리와 가야가 석궁과 새총을 들고서 주변을 볼 때, 김준은 천천히 캠핑카 위로 올라가 캐리어 박스를 딛고 천천히 일어섰다.
“쪼끔 애매한데, 팔 좀 뻗어서….”
김준이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나풀거리는 깃발을 겨우 잡을 수 있었고, 힘껏 당긴 순간 깃대 전체가 당겨져 떨어졌다.
쿠당탕탕!
다행히 차를 긁지는 않았고, 바닥에 떨어진 깃대.
그리고 김준이 힘으로 쥐고 있는 깃발을 확인하고는 깃대에 묶인 걸 천천히 풀어내고 그걸 집어서 차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앞에 있던 양근태는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가 보겠다며 차를 돌렸다.
“어, 저 아저씨 가시네?”
“관심 없다 이거겠지.”
김준은 들고 온 깃발을 마리에게 건네줬다.
“한 번 읽어봐.”
“뭐, 써놓은 게 있… 아, 있구나?”
“읽어봐.”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거기 적힌 것을 읽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락션 소리를 듣고서 바깥에도 아직 생존자가 있다는 것에 대해 환호했습니다. 우리는 미 8군의 한국군 지원단 소속입니다.”
능숙하게 읽어나가는 마리를 보고 에밀리 만큼이나 영어실력이 뛰어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준.
‘역시 의대 출신이라 다르구나….’
마리는 계속 읽어나갔다.
“저는 군종목사 겸 생존자 대대를 맡은 스테판 벨린저 대령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1개 대대를 포함해 그 가족들까지 적지 않은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 편지를 확인하신 다면 이후 이곳으로 물자 교환을 하고 싶습니다.”
“뭐가 필요하다는데?”
“우리는 소금과 설탕, 그리고 의류가 필요합니다. 현재 설탕이 없어 MRE로 보관한 사탕을 녹여 쓰고 있습니다.”
“소금이라….”
확실히 물이나, 기름, 무기 같은 건 몰라도 생존에 필요한 거긴 했다.
거기가 강이어서 소금 수급이 힘든가 보다.
가져다주는 건 문제가 없을 텐데, 저쪽이 뭘 줄지는 모르겠다.
“이 편지를 발견하시면 그 이후로는 주일이 되었을 때, 저녁에 맞춰 폭죽을 터트려 주십시오. 이 깃발 말린 곳에 있는 걸 뜯어면 됩니다?”
마리가 한쪽 말린 것을 손으로 뜯어내자 정말 그 안에는 신호용 폭죽이 있었다.
“오오~”
“제대로 준비했네. 챙기고 가자.”
“넵!”
오늘은 루팅이고 뭐고 그냥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그래도 저 붉은 장벽 너머로 있는 생존자들을 확인하고, 그들 역시 대화 의사가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차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 종일 우중충했던 김준은 담배 한 대를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너도 영어 진짜 잘하네.”
“네, 네?”
“아까 그거 읽어보라고 한 거. 다 번역했잖아?”
“아하하하, 오빠 그거 있잖아요?”
“?”
마리는 대답 대신 그 깃발을 활짝 펴 줬다.
현란한 영어로 쓴 장문인데, 문제는 그 옆에…
“이거 옆에 한국어로 써놨어요.”
“….”
“어, 음… 생각해 보니 그 안에 한국말할 줄 아는 사람 있는 게 당연한가? 주‘한’미군이잖아?”
대대급에 가족까지 합치면 최소 1천 명은 넘는다는 건데, 당연히 그중 하나는 있을 법 하긴 했다.
“미군부대 굳이 에밀리 안 데려가도 되겠다.”
“그거 말하면 되게 서운해할 거 같아요.”
“뭐, 어쩌겠어?”
김준은 거기에 대한 보상은 따로 해 주기로 다짐한 상태였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빨리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주머니에는 아직도 절에서 나오면서 받은 ‘제일파의 유물’이 담긴 쪽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