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 많은 이야기를 마친 김준은 가야와 나니카를 태우고서 내려왔다.
“나니카 이는 괜찮아?”
“어금니 살짝 썩은 거 긁어냈어요.”
“뭘로 때웠는데 봐바.”
“아~”
조수석에 앉은 나니카가 입을 벌렸을 때, 검은 줄로 되어 있던 썩은 곳을 전부 긁어내고, 금이 발라져 있었다.
“저번에 오빠가 주신 금반지 녹여서 튜브에 담았대요. 오늘 하루는 이쪽으로 씹지 말라고….”
“그래도 그 치과의사 아저씨가 실력은 좋으시네.”
기계도 없이 손으로만 충치를 긁어내고, 때우는 것도 해결했다.
뒤에 있는 가야 역시도 탐침만으로 잇몸속을 찔러 긁어댔는데, 피가 조금 나는 것 빼고는 안에 있는 치석을 싹 다 긁어낸 상태였다.
“다음번에는 나도 가야겠다.”
“네, 이거 은근 시원해요.”
치과 치료도 마치고, 정보도 얻었으니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길.
하지만 직진해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갑자기 좀비 무리가 보였다.
으어어- 크어-
우우우- 우우우우-
가장 뜨거운 정오 때는 사라졌던 좀비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모습을 본 김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엽총을 집었다.
“저, 저 좀비 어디서 튀어나온 거예요?”
“하, 씨발 진짜 퇴근길만 노리나….”
대로변에 서성이면서 앞을 막는 좀비 무리를 본 김준은 조용히 다른 쪽 길을 살펴봤다.
교차로에 있는 상황에서 직진하면 바로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돌아갈 셈이었다.
“우회전 한다, 꽉 잡아!”
“!!!”
김준은 핸들을 급히 돌려 오르막길로 확 올라갔다.
차가 거칠게 덜컹거리면서 올라갈 때, 나니카는 조수석 창문 위에 있는 손잡이를 꽉 잡았다.
확실히 밖에 나간 경험이 적어서인지, 마리나 은지, 에밀리같이 석궁을 들고 쏠 준비하는게 아니라 김준이 움직이는 대로 묵묵히 움직이며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은야야! 뒤에 뭐 쫓아오는 거 있나 잘 살펴!”
“네, 넷!”
잠자리때 아니면 거의 안 부르던 가야의 본명을 불러 준 김준.
가야는 황급히 석궁을 들고 주변을 살펴봤고, 나니카도 잡고 있던 손잡이를 떼고 눈치껏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저번에 딱 한 번 온 곳인데….”
“학교도 보이네요? 위쪽은 아까 그 산길?”
“어, 저기서 좌회전해서 돌아가면 원룸촌이거든? 그 안까지는 안 들어가 봤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가야의 물음에 김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사이드미러를 바라봤다.
“오늘은 좀비 잡기도 싫고, 더워서 루팅도 안 하려고 했는데… 이 길로 왔으면 원룸촌 지나갈 수 있거든?”
“으음-”
“좀비 없는 편의점이 있다면 잠깐 털어도 되긴 하겠다.”
이렇게 된 거 그냥 가는 길동안 상점 몇 개 정도는 털어서 물자라도 두둑이 챙기고 가기로 했다.
“그럼 지금부터 천천히 가 볼게.”
“…네.”
예정에 없던 루팅이라는 말에 잔뜩 긴장한 나니카와 가야.
김준 역시도 주변을 계속 둘러보면서 서행으로 좁은 2차선 도로를 누볐다.
지물포, 부동산, 기념품점 등 다양한 가게가 많았지만, 생존에 필요한 것이 있는 곳은 찾기 힘들었다.
이 동네는 특히 개발이 덜 돼서 편의점 이전까지 동네 슈퍼마켓 두어 개가 전부였던 곳이었다.
김준이 계속 서행으로 걸어갈 때, 나니카가 지나가던 원룸단지 골목을 보고 눈이 커졌다.
“오, 오빠! 좀비가….”
“어디?”
고개를 돌린 순간 골목에서 서성이고 있는 좀비가 보였다.
수는 모르겠지만, 건물 뒤에도 있을 것 같아서 일일이 상대하기엔 좀 성가셨다.
“그냥 지나가자.”
부우우우웅-
기어를 바꾸고 힘껏 속도를 낸 순간, 좀비들이 그걸 들었으나, 역시 걷는 녀석들인지 골목에서 나와 쫓아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시 길을 가면서 김준은 편의점을 발견했다.
“저기 어떨지 봐야겠다.”
김준이 속도를 줄여 편의점 앞에 섰을 때, 안의 상황은 깨진 유리 벽에 바닥에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거기에 바깥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 주변으로 새카맣게 굳어 버린 피가 상당히 불길하게 보였다.
“어떻게… 가, 말어?”
“어, 오빠는….”
나니카가 쭈뼛쭈뼛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뒤에 있던 가야가 단호하게 말했다.
“살펴보고 안으로 들어가죠.”
“진짜?”
“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울 거 같아요. 그리고… 같이 들어갈게요!”
굳은 의지를 갖춘 눈으로 말하는가야.
안 그래도 루팅에서 그다지 재미를 못 봤던 아이였고, 거기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었다.
김준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엽총을 챙겼다.
“그래! 한 번 안에 들어가 보자. 나니카!”
“네, 네엣?!”
“석궁으로 저기 저 유리창 쏴 봐.”
“어… 저기를요?”
“그래. 못하겠으면 뒤에 가야 시키고.”
“아, 아니예요! 할게요!”
나니카는 황급히 석궁의 화살을 장전하고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직 깨지지 않은 피 묻은 편의점 유리창을 향해 노리고는 떨리는 손을 진정한 채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파앙-
째애애앵-
빠르고 힘있게 날아간 화살이 유리 벽을 그대로 꿰뚫었고, 편의점의 벽 스티커가 아니었으면 산산조각이 났을 거다.
“한 발 더 쏴봐.”
“네, 넷!”
왜인지는 몰라도 석궁화살을 다시 장전하고 벽에 쏜 나니카.
이번에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깨졌을 때, 문이 깨져 있는 편의점 안에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안에 뭐 없나보다.”
김준은 클락션 대신 석궁 화살로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먼저 밖으로 나와 조용히 기다리게 했다.
끼이이익-
짜라랑- 찌익-
김준은 문을 열고 바닥에 있는 유리 조각들을 워커로 밟아서 전부 치워 버렸다.
안에는 예상대로 아무것도 없었고, 오랫동안 전기가 끊겨 썩어 버린 레토르트 식품이 밀봉된 채로 방치된 것 빼고는 안에 있는 물건이 그대로였다.
“됐다. 둘 다 나와!”
덜컥-
김준의 말에 나온 나니카와 가야.
가야는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구에서 석궁을 들고 경계를 섰다.
그리고 나니카가 더블백을 들고 와서 김준이 시키는 대로 담을 준비했다.
“저거 기름이다. 전부 담아.”
“네?”
“이거 라이타 기름. 전부 휘발유야 여기 있는 것만 다 담아도 얼마야...”
133ml의 작은 용량이었지만, 수는 충분했다.
저기 있는 것만 죄 쓸어담아도 집에 있는 발전기 돌리는 데는 문제없었고, 위급할 경우 자동차에 넣어서 굴릴수도 있었다.
나니카가 그렇게 기름과 그 근처의 손톱깎이나, 귀후비개, 펜과 커터칼 등을 챙기고 있을 때, 김준은 자기가 멘 가방을 풀고 소면류부터 챙겼다.
라면이야 옛날에 유통기한이 지났으나 못 먹을 건 아니었다.
뭐, 면은 정 안 되면 사료용으로 쓰고, 스프만 따로 빼다가 조미료로 장기보관하면 되니 말이다.
소면 다음으로 골뱅이와 스팸, 참치캔 등을 챙겼고, 가방 하나가 넉넉히 찼을 때, 바로 나와서 뒷문을 열고 다음 가방을 챙겼다.
통조림과 소면뿐만 아니라 종이 라벨로 포장된 밀가루와 소금, 설탕.
고추장에 간장, 식초까지 알차게 챙기는 날이었다.
“오빠! 다 담았어요.”
“좀 남으면 거기 치약하고 비누챙겨.”
“네!”
아직도 넉넉한 더블백을 보고 김준이 명하자 나니카는 있는 대로 꾹꾹 눌러 담아질질 끌고 나갈 준비했다.
“줘 봐.”
“꺄핫?!”
오늘 처음 루팅 하는 것도 아닌데, 연신 화들짝 놀라는 나니카.
그녀 역시도 자각한 건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눈치를 보다가 차라리 다른 거라도 챙기려는 건지 카운터로 달려가 김준이 즐겨 피는 담배를 보루 단위로 챙겼다.
그렇게 몇 번을 걸쳐서 편의점에서 쓸 만한 물건을 꽉꽉 채운 김준 일행은 셋 다 뒷좌석으로 가서 챙긴 물건들을 정리했다.
“좀 쉬었다 가자.”
“네, 그래요.”
가야는 목 칼라와 소매 부분이 땀에 젖어 연신 펄럭거렸다.
미리 에어컨을 크게 틀어놔서 저번처럼 땀에 온몸이 젖는 대참사는 피했고, 냉장고에서 미리 풀어놓은 미숫가루를 한 잔씩 나눠마시고 쉬는 자리를 가졌다.
“다음 편의점은 안 가도 되겠지?”
“네, 꽉 차서 들어갈데도 없을 거예요.”
“나니카랑 가야는 집에 가면 여기 있는 휘발유 빈 말통 하나 가져다 채워놔.”
“네. 오빠.”
가야와 나니카 모두 어제 챙긴 스마트 선풍기 하나씩 꺼내서 얼굴에 쐬었다.
김준 역시도 넥밴드 선풍기를 차고서 시원한 힐링 타임을 가졌다.
그렇게 20분쯤 쉬던 김준이 다시 운전석으로 향했고, 나니카가 뒤따라 조수석에 앉았다.
“자~ 오늘 챙길 것도 다 챙겼겠다. 가 볼까?”
“밀가루 많으니까 저녁에 라멘 만들까요?”
“돼지뼈 남은 거 있던가?”
“시오라멘… 만들 수 있어요.”
“시오라멘?”
“그… 소금으로 육수 만들어 낸거거든요? 닭고기 고명에 쪽파 썰어서….”
“그래 뭐, 만들 수 있으면 좋지.”
나니카는 오늘 루팅에서 실수 연발한 걸 저녁이라도 해서 만회해야겠다는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가득 물자를 실어 온 트럭이 집에 도착했고, 모두가 나와서 가져온 것들을 차곡차곡 챙기는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