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점심은 엄청난 메뉴가 나왔다.
“와씨! 이걸 어떻게 만들었어?”
“나니카가 했어요.”
최근 몸이 안 좋다면서 얼굴이 핼쑥해진 은지가 나니카를 가리키며 말해줬다.
“맞아요. 저는 보조만 했지. 나니카가 했죠.”
인아 역시도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니 오늘은 나니카가 다 만들었나 보다.
막상 당사자는 부끄부끄한 얼굴로 자기가 만들었지만, 다들 잘 먹을지 엄청 긴장한 상태였다.
“이걸 직접 만들었어?”
김준이 그릇을 들고 내민 오늘의 메뉴는 육수에 얼음이 동동 뜬 냉소바였다.
안 그래도 더워서 냉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점심 메뉴는 갓 만들어 낸 메밀면에 쯔유 대신 국간장과 무를 갈아서 만든 육수로 만든 냉소바가 김준을 맞이했다.
“그… 입에 잘 맞으세요?”
“완~전 시원해. 진짜 잘만들었다.”
나니카는 지금, 이 집 안에 있는 재료 가지고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김준이 그동안 방앗간과 편의점, 마트 등을 털면서 가져온 메밀가루, 밀가루, 쌀가루 등을 적절하게 조합해서 제면기로 면을 뽑아냈다.
그리고 있는 살림대로 간장 육수를 만들고, 무를 갈고, 쪽파와 당근을 썰은 고명에 마지막으로 김을 올리고 얼음을 띄웠다.
거기에 편의점에서 가져온 와사비를 풀어 주니 일식집에서 먹는 소바 그 맛이었다.
“아니, 이렇게 잘 만드는데, 왜 요리를 안 했대?”
도경이가 소바를 두 그릇째 먹으면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묻자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휙 돌리는 나니카.
“나니카가 진짜 요리 잘했다. 나는 맨날 은지랑 인아 보조만 했는데.”
음식담당인 둘의 부재 시 대타로 요리했던 가야도 이런 실력이었으면 청소, 빨래 대신에 그녀를 요리 담당으로 시켰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와! 언니! 이거 존나 맛있어!”
“아무리 그래도 존나가 뭐야~ 언니한테.”
“아, 미안 해요.”
라나 역시도 도경이와 똑같이 있는 대로 면치기를 해대며 한 그릇 비우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존나’라는 말까지 쓰고 마리가 지적하니 사과하면서도 한 그릇 더 챙기는 게 정말 맛있나보다.
반면 원래 음식담당인 은지와 인아 둘은 정말 음식을 못 먹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쉴게요.”
“언니~ 좀 먹어요.”
“미안 해. 나니카가 고생해서 만들어줬는데, 이건 안될 거 같아.”
라나가 그릇은 비우라고 인아를 붙잡았지만,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그래도 은지는 만들어 준 사람 정성을 생각해서 꾸역꾸역 먹으면서 그릇을 비우자 마자 바로 싱크대에 넣고 인아를 따라갔다.
정말 맛난 소바인데 제대로 못 즐기고 들어간 둘을 보며 김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저러는 거야?”
“생리통 때문에 그래요.”
거기에 대해서는 마리가 설명해줬다.
“그동안 경구피임약 엄청나게 먹어대면서 여기 애들 생리 주기가 비슷해졌어요. 그거 멈추려고 약 먹으면서 안 먹을 때 몰아서 쏟아 내니 당연히 탈이 나지.”
“어… 그게 탈이 나?”
“그러게~ 난 안 그런데 말이야.”
어색한 젓가락질을 하며 소바를 먹던 에밀리가 자기 아랫배를 탕탕 치면서 말했다.
“아이언 움(Womb:자궁)이야.”
“에밀리, 그거 절대 좋은걸 아니야. 나중에 검사해야 해.”
“어떻게? 그 포르노에 나오는 스페큘럼으로 쑤시고 벌려서 확인해?”
“…하아.”
의사 마리의 입을 틀어막을 수준의 에밀리 드립에 다른 아이들도 차마 뭐라고 말을 못 했다.
김준도 저런 노빠꾸 말을 보고 엉덩이를 때려주려고 손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놨다.
“암튼, 제발 아프지들 마라~ 요샌 조금만 뭔 일 생겨도 철렁해.”
김준의 말에 다른 톱스타들 모두 공감하며 안 다치는 게 끝까지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다시금 상기했다.
***
“다들 좀 괜찮아?”
생리통이 얼마나 심한지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는 두 아가씨를 향해 김준이 찾아왔다.
“괜히… 안 와도 되는데….”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은지가 일어났을 때, 김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시 앉혔다.
“!?”
“어, 됐어! 쉬어! 쉬어!”
군 시절부터 아프면 그냥 쉬라는 주의인 김준에게 은지의 행동은 그냥 객기로밖에 안 보였다.
“인아는 들었는데, 은지까지 이런 줄 몰랐다.”
“미안 해요. 금방 끝나니까 좀만 기다려 줘요.”
“됐어~ 이럴 때 좀 더 푹 자둬!”
여자한테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라는 생리통이 배 이상으로 왔다고 하니 그 상황을 모르는 김준도 신경이 쓰였다.
“몸 관리 잘하고, 당분간 식사는 나니카랑 가야가 한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김준은 인아와 은지를 토닥여주면서 미닫이방에서 나갔다.
하지만 그때, 은지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 갔다.
“오빠….”
“아니, 왜 또 일어….”
꽈악-
은지가 김준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부비댔다.
생전 안 이러던 애가 부담스러운 스킨쉽을 하자 당황한 김준이 돌아설 때 은지와 눈이 마주쳤다.
“안 생겼네요.”
“…뭐?”
“이거… 생리통이 심한 게요.”
은지가 자기 아랫배를 가리키며 쿡쿡 찔러대는 제스처를 보이자, 김준은 그제야 뭔 뜻인 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또 날이 있겠지.”
김준은 앞으로 은지하고는 콘돔 안 쓰고 할지를 생각했다.
***
“오빠! 오빠! 전화요!”
“뭔 전화?”
바깥에서 라나와 도경이를 캠핑카 수리를 하고 있던 김준은 마리가 무전기를 들고 오자 어디서 연락이 왔나 싶어 받았다.
무전기로 남은 생존자들을 이어놓으니까 확실히 일일이 가지 않아도 이런 게 편했다.
“네~ 전화 받았어요.”
[치직- 준이냐? 나 은기야.]
무전을 보낸 건, 정토사에서 머무는 친구 은기였다.
“어, 왜? 거기 뭔 일 생겼어?”
[치직- 준아. 이런 거 부탁하기 미안하긴 한데… 치이익- 혹시 휴대용 선풍기 좀 구할 수 있을까?]
“뭐?”
[치직- 이게 미안한 건 아는데, 지금 상황이 그래…]
김준은 여기뿐만 아니라 그쪽도 무더위로 고생하는 것 같아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현재 절의 상태를 들으니 상당히 열악해 보였다.
[치직- 나는 좀 견뎌도, 애들은 진짜 안 되겠더라고, 소율이도 그렇고 여기 있는 중학생하고, 3살짜리 애도 있고.]
“어우, 애들은 안 되지.”
[치직- 그래서 말인데, 어떻게 안 될까? 여기가 전기는 없으니 휴대용 선풍기 같은 거라도.]
“어, 잠깐만 우리도 지금 그거 때문에 여기저기 털러 다니는데, 이번 주 안에 구해다가 한 번 들를 게.”
[치직- 어, 그래! 가져다주면 고맙지. 여기도 채소가 많이 자라서 물물교환은 잘 될 거다.]
지난번에 봄 농사 지은지 얼마 안 돼서 뭐 없는 상황이라고 했는데, 그사이에 또 자랐나보다.
김준은 정토사에게 냉방제품 구해다 주겠다는 약속하고 무전을 마쳤다.
“휘유~”
“거기도 진짜 덥겠다.”
“차 에어컨 쓰면 되지 않나?”
“거기 폐차했잖아.”
라나가 캠핑카를 탕탕 치면서 자신들이 더위를 나는 법을 생각했지만, 김준이 바로 정정해줬다.
“안 그래도 차 고치는 대로 고물상이나 가전제품 한 번 털러 가려고 했어.”
“완~전요. 우리도 여기 에어컨 없었으면 쪄죽었을 걸요?”
도경이 역시도 정말 더울 때는 이동 수단보다 간이 휴게소가 된 캠핑카를 애용했다.
“이거 오늘 다 고칠 수 있으니까, 이따 밤에 루팅 계획 짜자.”
“네~ 이번엔 제가 갈 거예요~”
라나가 힘차게 손을 들면서 에밀리의 3연속 루팅 이후 자신이 가고 싶다고 재촉했다.
김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뒤에 있는 도경이 역시도 머뭇거리다가 자신도 불러 주길 원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매달려서 새 범퍼를 달고, 시동이 걸리는 걸 확인한 김준은 기름때 잔뜩 묻은 손으로 차를 힘껏 두들겨 줬다.
고생 많았던 캠핑카 수리 이후 시원하게 씻고 온 김준은 애들을 불러서 다음 루팅 계획에 대해 말했다.
“지금 선풍기 네 대에, 캠핑카 에어컨 쓰고 있잖아? 아무래도 여름 대비해서 더 늘여야겠어.”
“완전 공감~ 에어컨 가져와야 해.”
“전기는 어디서 끌어오고?”
“런닝머신 두 배로 조지면… 어떻게 안 돼?”
에밀리가 더티 블론드의 머리를 배배 꼬면서 말했을 때, 김준은 그녀의 제안은 바로 씹어 버리고 지도를 펼쳐 계획에 대해 말했다.
“소사벌 재래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전파상이 하나 큰 거 있어. 여기 선풍기도 옛날에 거기서 사 온 거고.”
“재래시장… 맨날 지나가기만 한 곳인데.”
가야나 마리 등은 다른 곳을 갈 때마다 지나쳤던 그 재래시장 골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팅은 못 나가도 길에 대해선 아는 은지가 한마디 했다.
“근데, 재래시장 그 좁은 골목에 들어가서 가져와야 하잖아요?”
“음….”
“그리고 지나가면서 보는 거기는 길거리 음식이랑 고기같은 거 죄 썩어서 냄새도 장난 아닌데, 통풍도 안 되고….”
안 그래도 생선이나 생고기 비린내가 장난 아니었던 재래시장인데, 1년 동안 방치돼서 썩은 상태.
냄새를 둘째치더라도, 쥐에 각종 벌레가 꼬일 상황이라 질병의 위험도 있었다.
“이건 생각해 봐야겠다. 최신형 가전제품 구할 수는 있는데, 은지 말대로 가는 길 자체가 너무 빡세.”
“그럼 다른 데가 있어요?”
라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김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지도에서 다른 지역을 찾았다.
그녀의 말대로 냉방가전 구할데가 그곳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 갔던 소사벌대 근처에 고물상도 있어.”
“아, 거기 뒤지면 좋은걸 많이 나올 거 같아요.”
“죄다 돌아가는 게 문제겠지만.”
“그 근처에 원룸 자취하는데 소형가전 파는 만물상도 있어.”
갈 곳은 많이 있었다.
김준 역시 이런 건 전문적인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 안전한 길을 찾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걸 강조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어디를 가서 뭘 구해 올지에 대한 계획을 확실히 짰고, 이튿날 오전에 식사하고 바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