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186 아이디얼 타입.
* * *
빗줄기가 어느 정도 줄어드는 밤이었다.
라나와 인아는 황 여사 일행이 준 옷을 받아 입고서 홀복차림으로 노래방 안에 있으니 뭔가 미묘한 얼굴이었다.
“노래라도… 부르고 싶네요.”
전기를 끊어놓은 모니터와 마이크를 보고서 라나가 자기 싱글곡 하나라도 부르고 싶어했다.
“이 옷… 진짜 남자들이 좋아하나?”
인아는 지금 입고 있는 것을 보고서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
가슴과 겨드랑이 트인 게 특히 부각되고, 물고기 비닐같이 반짝거리는 단색은 노출도가 높다는 걸그룹 의상과 비교해도 더 부끄러웠다.
“그래도 이 옷 은근히 편해요. 집에서 입고 다니기 괜찮아 보이는데.”
“난 이런거 별로야.”
인아는 그 말을 하고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늘 김준은 노래방 안에서 고장난 공구들 고치고, 전체적으로 한 번 씩 다듬어줬다.
“자, 됐어요.”
“어머~ 이렇게 하니까 진짜 소리가 싹 사라졌네?”
황 여사가 손뼉을 치면서 기계실에 있는 발전기에 방음박스를 만들어 설치해주자 통풍구를 통해 뜨거운 김을 뿜어내면서 팬이 돌아갔다.
“우리는 1층에 이거 설치해서 좀비들이 바글거렸다니까요?”
“어머머, 그래? 이게 진동이나 소음이 그렇게 컸구나?”
황 여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옆에서 김준을 도왔던 은별이 넌지시 물었다.
“3층집이라면서? 위에 올리면 되지 않아?”
“우린 여러대 설치해야 해. 그리고 3층은 텃밭이거든, 거기다가 매캐한 연기 뿜을 수야 있나?”
“아, 그래?”
사실 옛날의 활기찬 삶에 비하면 여기 나오는 이건 매연의 축에도 못 끼는 애교였지만, 그래도 집안 구성을 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바닥에 설치됐고, 방음박스로 커버를 한 상태였다.
그 외에 재배한 채소를 두고서 절임으로 만들어 항아리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게 하고, 비타민 섭취를 위해서 가루 주스도 제공했다.
“아이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우리도 뭐 줄게 마땅치 않네.”
“장이 좀 필요해요. 고추장, 된장, 간장 전부요.”
“아, 간장은 있는데, 된장이랑 고추장은 우리도 가서 가지러 가야 해.”
“그래요? 내일 비 그치면 거기 가봐야겠네. 도와줄 수 있어요?”
“그래, 안 그래도 줄 게 없었는데 이거라도 챙겨줘야지.”
“여기 가진게 왜 없어요?”
김준은 창고 한 곳에 있는 위스키를 집어들었다.
“최고의 물물교환 물건이 여기 있는데.”
“위스키? 맘껏 가져가. 저거 몇 십 박스는 있으니까.”
대부분은 국산의 싸구려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
덕분에 알콜 충전은 앞으로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한 김준이었고, 내일은 제발 비가 그치길 바랬다.
***
한편 아가씨들 배려로 야식으로 골든블루 위스키와 가볍게 만든 야채 튀김을 안주로 먹고 있었다.
파, 당근, 쑥갓, 시금치 등으로 튀긴거지만 짭쪼름한 게 딱 좋았다.
“천천히 먹어~ 너 저번에도 그렇게 들이켜다가 술병 낫잖아?”
“으히히 미안해요. 언니, 제가 좀 빨리 먹는 타입이라서요.”
따르자마자 소주나 맥주처럼 독한 위스키를 쭉쭉 들이키는데 연약한 체구의 소녀로는 아무래도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말이죠. 생각이 딱 들었어요. 진짜 몸뚱이 하나 밖에 없이 무서운데, 저 오빠 내가 꼬시기로요.”
“하하하~ 얘가 아주 당돌해, 언니들 신경 안쓰고 그렇게 움직였어?”
불과 한 살 차이지만, 거기까지 생각해서 움직이면서 김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동생을 보고서 인아는 대단하다 생각하며 박수를 쳐줬다.
“그래서… 언니는 무슨 타입인데요?”
“으응? 뭐가?”
“준이 오빠가 취향이 아닌거에요?”
“무, 무슨!”
인아는 안 그래도 빨개진 얼굴을 휙 돌리면서 멋쩍은 듯, 자신의 긴 생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라나 역시 그 모습을 보고서는 배시시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를 묶어 올렸다.
“준이 오빠 이거 좋아해요. 옆머리 남기고서 요렇게 묶어 올린 거.”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설명해주는 라나를 보고, 인아는 순간 자신도 머리카락 묶으려고 하다가 흠칫하고는 그만뒀다.
“그리고 손도 막~ 가만히 있질 않아. 여기저기 주무르는데 특히 다리랑 엉덩이….”
“으으윽!”
인아는 그 말에 질색하면서 누가 만지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이리저리 털었다.
라나는 오히려 인아의 그런 모습에 이해가 안 간다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뭘 그렇게 싫어해요? 이제껏 언니한테는 그런 적 한번도 없었잖아.”
“없었지.”
“언니 설마… 그….”
“으응?”
“남자 싫어하는 거 그런거 아니죠?”
“무슨 소리야.”
인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컵에 조금 남아있는 위스키를 쭉 마시고는, 야채 튀김 한 조각을 물었다.
“그냥…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 연애같은거.”
“은지 언니나 도경 언니도 그렇게 생각했을거에요.”
“괜히 이런 상황에서 엮여서 진짜 집단으로 그… 그… 행위도 그렇고.”
“마리 언니랑 나니카 언니도 같이 했을건 생각 못 했을 거에요.”
“둘이 같이 했어?! 집단 난교?!”
“어… 글쎄요? 들은 이야기였던가?”
분명 그걸 유도한 것은 라나 자신이지만, 모르는 척 하면서 슬쩍 눈을 회피하는 모습에 인아는 자신의 성적 관념이 뭔가 잘못됐나 싶어 혼란스러웠다.
“별 짓 다했구나.”
“뭐, 심한 짓은 없었어요.”
그냥 조금 친한 연인 사이라면 할 만한 것들을 한 플레이들이었고, 굳이 사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사친과 여사친 사이에 술 먹고 눈 맞다 보면 가끔 한 방에서 쉬어갈 수도 있는 거라면서 손을 휘휘 젓는 라나.
“후우 난 말이지. 뭐랄까? 그냥 다정하고 성실한 남자가 좋아.”
“아~ 이상형이요?”
“배려 잘 해주고, 챙겨주는거 많고, 뭐 그런… 있잖아?”
“으흠~?”
라나는 인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은 인아가 라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반 병 정도 남은 위스키를 찰랑거리던 라나는 좀 더 마실까 하다가가도 내일 일어나 루팅을 한다고 들었으니 일찍 자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홀복 차림으로 잠들어있는 인아를 보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
“거기 아가씨들? 급한대로 세숫물은 이걸로 같이 씻어.”
황 여사가 대야에 담긴 더운 물을 전해 주자 라나와 인아는 그걸로 대충 씻은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아침 식사로 나온 것은 간장과 다시다 육수로 끓여낸 수제비였다.
“후릅 으음, 간 잘 됐네요?”
“된장이 좀 부족하지? 이번에 가서 좀 캐와야 겠어.”
“위치가 거기 사철탕집 맞아요? 가는 길은 대충 알긴 하는데.”
“맞아. 거기.”
김준은 군 시절 가끔 갔던 사철탕집을 생각하면서 거기 양념 맛이 굉장히 강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뒤가 지금 완전 난리야.”
“네? 왜요?”
김준은 그 일대에 뭐가 있나 싶어서 황 사장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쪽이었다.
“사철탕집에 있던 염소랑 토끼랑 닭 있잖아? 그것들이 전부 나갔더라고. 뒷산이 죄다 그거 깔려있어.”
“완전 야생동물이 된 상태겠네?”
김준은 그 말을 듣고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무기들을 준비했다.
“나랑 나미가 같이 갈게. 거기 위치는 잘 알고 있어.”
“은별아, 그럼 이거 챙겨.”
황 여사가 카운터로 가서 열쇠 꾸러미를 주고는 거기에 쓰여있는대로 알려줬다.
“장 담가놓은 창고거든? 거기는 반쯤 파놓은 곳이라 보관도 잘 돼있어.”
“네, 사장님. 나미가 한 번 가 본 곳이니 문제 없을 거에요.”
김준은 인아와 라나를 데리고, 황 여사댁 아가씨 둘까지 데리고서 루팅 나갈 준비를 했다.
***
“여기서 오른쪽, 어! 거기….”
“그냥 큰 길로 가지.”
“안 돼. 거기 좀비 많이 봤어.”
김준이 아는 큰 길로 갔다간 좀비가 많이 나타난 다는 말에 일단 나미가 시키는 대로 갔다.
“오빠, 저쪽으로 간 다음에 뒤로 꺾어. 비탈길로 올라가면 뒷문 나와.”
“알았어.”
나미의 설명을 듣고서 김준이 산이 깎인 오르막길로 향하자 빗길에 잔뜩 씻겨나간 진흙탕 뻘밭에 차가 힘겹게 올라갔다.
그때, 뒤에 있던 라나가 외쳤다.
“어? 오빠 오른쪽!”
“음?”
김준이 오른쪽을 보자 그곳에는 풀숲에 있다가 차량 소리를 듣고서 후다닥 도망치는 염소 무리가 있었다.
원래라면 사철탕집 우리 안에서 도축당할 위기였던 녀석들은 탈출 이후 산을 터전으로 잡고서 새끼도 많이 깐 상태였다.
김준은 쫒아가서 잡을까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장독을 먼저 구하는 게 먼저였다.
차가 사철가든 뒷문에 주차하고,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다가 먼저 내린 김준은 뒤에서 내린 은별과 같이 장독이 가득 있다는 창고로 들어갔다.
철컥
끼이이이이
“오….”
김준이 플래시 라이트를 켜서 비춘 순간 그 안에는 금광과도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항아리의 행렬,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하나 열어보니 매운 냄새가 확 풍기는 검붉은 고추장이 가득했다.
김준이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자 알싸한 맛이 시중에 파는 것보다 훨씬 매웠다.
“크으 좋구만.”
“이건 우리가 챙길께, 카드 몇 개 가져왔어.”
“저쪽은 된장이거든? 니네 동생들 써도 돼지?”
“그렇게 해.”
김준은 인아와 라나를 내리게 해서 같이 옮기게 한 다음 총을 들고서 주변 경계를 섰다.
혹시라도 이 근처에서 좀비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산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김준은 반사적으로 공기총을 들어서 겨눴다.
매에에에
“….”
아까 도망친 염소 중 하나가 천천히 다가와서는 김준의 앞에서 앞발을 구르고는 달려들 기세였다.
이것들이 1년 넘어서 사람을 안 보고 지내다보니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보다.
툭 투툭
나뭇잎을 밟으며 다가온 염소가 두 뿔을 앞세워 빠르게 달려든 순간, 김준은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파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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