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184 구해줘!
* * *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라면 진짜 맛있어~♥.”
캠핑카 안에서는 라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후후 불면서 맛나게 먹고 있었다.
두 미소녀를 데리고서 라면 먹방만 진행했어도 인터넷 방송에서 별풍이 은하수를 만들었을 거다.
“근데 진짜 신경 쓰이긴 하네요. 어디 홍수 나는거 아니에요?”
인아가 걱정스럽게 물었을 때, 김준은 바깥을 보면서 멈출 줄을 모르는 빗줄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하천 있는 길은 가면 안 되겠다.”
이게 아포칼립스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농수로 보를 열고, 저수지에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었을 거다.
김준은 걱정스러워하는 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일단 지금까지는 괜찮아. 먹으면서 잠깐 쉬고 있자.”
“오빠, 나도! 나도!”
“어, 그래.”
머리를 들이미는 라나를 향해 왼손을 들어서 쓰담쓰담을 해 주자 좋다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인아는 그런 자연스러운 스킨쉽을 보고서 생각했다.
‘뭔가… 이제 머리 만지는거나, 손 잡는 거는 자연스럽네?’
옛날이었다면 이것 역시도 그냥 웃으면서 물러나거나 손길을 거절했을텐데 어쩌다 보니 지금 상황은 그랬다.
라면을 다 먹고서 빈 그릇을 든 인아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샤워장으로 가져가서 설거지를 준비했다.
라나는 눈치를 보다가 바로 일어나서 인아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그 사이 김준은 아까 푹 젖어있는 옷의 물을 쭉 쨔낸 다음 대충 침대 있는 곳에 널어서 캠핑카 안에 있는 탁상 선풍기를 꺼내 틀어놨다.
그렇게 잠시 안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될 때였다.
빵 빵 빠아아아앙
“!?”
“뭐, 뭐야!? 차 소리가 어디서 나요?”
라나가 화들짝 놀라서 샤워장에서 튀어나왔을 때, 김준은 조용히 창문의 커튼을 열고서 천천히 안을 살펴봤다.
세찬 빗줄기에 앞이 다 뿌옇게 보였지만, 그 속에서도 튀어나오는 빛이 있었다.
“뭐야, 저거….”
누가 헤드라이트로 이쪽을 비추고 있었다.
김준은 설마 싶어서 일단 허리춤의 권총을 확인하고 한 곳에 놓여있는 엽총을 집었다.
아무래도 비상깜박이는 괜히 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오빠….”
“다들 안심해. 내가 무기 잡고 있으니까.”
“….”
“신경쓰이면 안에서 모포 덮고 있어.”
김준의 말에 라나가 슬며시 모포를 들어 인아에게 줬지만, 그녀는 치우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계속 대치하는 가운데, 점점 다가온 불빛이 멈춰섰다.
드르르릉 끼익
“!!!”
김준은 그 차를 보고서는 조용히 인아와 라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좁은 창문 너머로 빗길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차량을 가리켰다.
“저거…맞지?”
“아, 잠깐만요. 진짜 저 트럭은….”
검은색 픽업 트럭, 그리고 뒤에는 천막으로 덮여진 박스에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김준이 아는 인물 같았고, 다른 소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트럭 장수 아저씨인가?”
라나의 중얼거림에 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거 같은데.”
그리고 그가 차에서 내린 순간, 우비와 우산을 챙기고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운전석을 보고는 손으로 쿵쿵 두들겼다.
“이봐요! 안에 사람 있어? 왜 비상 깜빡이만 켜진거야?”
운전석을 두들기는 소리에 김준은 자신이 대답하기로 했다.
“누구에요? 트럭 장수?”
“어어? 이거 어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아이구야 누구인가 했네?”
뒤쪽에서 창문을 슬쩍 열고 외친 말을 듣고서 다가온 인물은 바로 트럭 행상인이었다.
김준은 엽총을 옆으로 한 채 틈 너머로 그에게 말했다.
“갑자기 차가 멈췄어요. 엔진룸 열어보려고 해도 비가 너무 쏟아져.”
“그렇구만, 이거 어떻게 할라고 그 안에 있소?”
“일단 비가 그쳐야 뭘 하지!”
“이거 참… 그렇다고 이렇게 있으면 쓰나?”
행상인은 바로 자신의 차로 간다음에 안에서 뭔가를 뒤적뒤적거리다가 커다란 쇠사슬을 가져왔다.
“이보슈! 캠핑카 양반! 내가 지금 견인장비 있는데, 차부터 일단 옮길까?”
“….”
김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라나와 인아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아야, 네가 라나 데리고서 여기 있어.”
“오빠! 어디 가시게요?”
“차, 견인해서 일단 비 피할곳 찾아야겠다. 내가 저 양반 차에 타서 앞차로 끌게.”
“괜찮겠어요?”
라나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김준은 말없이 자신의 웃옷을 들었다.
허리춤에 홀스터까지 갖춰있는 권총 세 자루를 확인한 두 소녀는 저절로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갔다 올게.”
“네.”
김준은 손을 흔들면서 두 소녀를 토닥여주고는 다시 우산을 들고서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쇠사슬 소리가 들리면서 캠핑카 앞에다가 묶었고, 픽업트럭 뒤에도 같이 채운 다음 김준이 행상인을 따라 조수석에 탔다.
탁
띵띵띵
차 문이 열릴 때, 소리가 퍼졌고, 안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가득한 조수석이었다.
자신이 운전하지 않고 얼마만에 이 자리에 타는 지 모르겠다.
“가 볼까요?”
“어디 아는데 있어요?”
“쫌만 더가면 농협에서 쓰는 창고가 있지. 거기 내 개인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곳이거든.”
“!”
“아, 거기 가면 씨종자 많은데, 좀 챙겨가겠수? 물론 공짜는 아니야.”
김준은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물었다.
“뭐가 필요하신대요?”
“주는 거에 따라 다르지.”
행상인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바로 시동을 걸었다.
덜그럭 쿠쿠쿠쿠쿵
2톤 가까이 되는 캠핑카가 서서히 끌렸고, 4륜 픽업트럭이 힘을 내서 차를 끌고 서행으로 겨우 앞으로 나갔다.
***
쏴아 쏴아아아아아
조명이라고는 건전지 전등 몇 개를 이어붙인 창고 안에는 각종 나방들이 날아다녔다.
딱 시골 창고가 이런 분위기였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잡동사니가 쌓여있었다.
“우아~”
“뭘 놀라고… 이런게 한 두 개가 아닌데.”
두 차량이 안으로 들어온 뒤로 차에서 내린 행상인은 비옷을 벗어 탈탈 털고는 걸레를 집어다가 안을 닦았다.
김준 역시 차에서 내리면서 캠핑카에 있는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탁탁 쳤다.
그 와중에 행상인은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고, 김준 역시도 품에서 꺼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네?”
“뭐… 김 중사라고 부르세요.”
“군인이었어?”
“작년까지는요.”
김준이 대충 얼버무리자, 행상인은 껄껄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 양근태요. 여기 농협 직원 출신이었어.”
“아… 그렇군요.”
“원래 하는 일이 노인네들 데리고서 쌀이랑 보리 매수하고, 출하 하는거 있잖아?”
“예, 뭔지 압니다. 저희집도 농가여서요.”
“아이고~ 조합원 노친네들 진짜 징했어. 10원을 안 깎아!”
김준은 순간 그 얘기를 듣고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알고보니 이 행상인의 정체가 지역 농협에서 소규모 농가들 농산물하고, 축산물 출하 담당하는 담당이었다니…
불과 1년 전 농협의 쌀 수매 문제로 버티기 싸움한다고 동네 노인들이 자기 집 창고에다가 쌀 잔뜩 쌓아놓고 제 값 받을때까지 버틴다고 해서 아포칼립스의 풍족한 창고가 된게 어떻게 보면 저 분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오래 살아계셨네요?”
“시발 것, 이게 몇 년이나 갈지 모르겠네.”
긴장이 풀렸는지 담배 연기를 뿜으며 걸걸하게 욕 한 바가지를 한 양근태는 창고에서 더블백에 쌓인 공구를 질질 끌고 오면서 김준의 차로 다가왔다.
“어디보자~ 뭐가 문제인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도와주려고 하자 김준도 자신의 차에서 공구를 꺼냈다.
기계 잘 아는 두 남자가 덜그럭거리면서 뭔가를 계속 파내고, 긁어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김준이 시동을 걸기 위해 운전석에 탑승했다.
“하아~”
한숨을 쉬고, 기름 묻은 두손을 비비적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차 키를 돌려봤다.
부르릉 부르르르르릉
“오케이~ 시동 걸렸어!”
김준의 외침에 뒤에서 조마조마 있던 두 소녀들의 박수소리도 들렸다.
“와~ 만세!”
라나와 인아의 외침에 김준은 엄지를 들고는 바로 차에서 내려 양근태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거 엔진오일 막힌거는 기본이지.”
“이거, 수리비라 말하긴 뭐하지만….”
“오, 담배.”
김준이 박스에 있던 말보로 몇 갑을 건네주자 그것을 받고서 싱글벙글하는 양근태.
그리고 떠나기 전 그들은 잠시 나와서 담배 타임을 가졌다.
“후우”
“뒤에 아가씨들이 나랑 거래했던 그 사람들인가?”
“으음… 그게.”
“숨길 거 없어요. 여기 살아가는데 나도 눈칫밥은 있지.”
“글쎄요. 안 그런 인간들도 있어서요.”
“제일파 말하시는건가?”
“!?”
김준은 역시 이 사람이 제일파와도 거래한다는 것을 알고서 아까의 풀린 긴장이 다시 조여들었다.
하지만 양근태는 쿨하게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옷을 열고 배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주삿바늘과 이리저리 긁힌 흉터가 잔뜩 있었다.
“내가 당뇨가 좀 있거든? 근데 거기에는 의사도 있고, 약사도 있고, 약도 있어. 포도당 가루하고, 건강 상태 체크하려면 거기는 무조껀 가야해.”
“그, 그렇군요.”
“가끔씩은 좋은 거 있다면서 약도 준다니까?”
“….”
김준은 그 말을 듣고서 짐승 같은 것들이 주변 인물들 데리고 오래도 살아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양근태는 피식 웃으면서 김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그 놈들은 나 절~대 못 건드려. 왠줄 알아?”
“?”
“나도 제일파에 아는 놈 많거든. 시골 짬바가 괜히 생기는 줄 알아? 거기 애기들이 나 건드렸다간 그 형님이란 것들에게 아구 나간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이 사람의 말이 노가다판 아재의 술자리 허세 같았지만, 일단은 믿기로 했다.
“그럼 요새 필요하신 거 있어요?”
“에이그~ 간간히 여자나 데리고 싶다.”
“….”
“왜? 뒤에 아가씨들 신경쓰여서? 에이~ 난 딸뻘되는 애들 생각 안 해.”
김준은 멋쩍게 웃고는 다시 차를 타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창고 안에서 또 뭐를 뒤적거리던 양근태는 김준에게 플라스틱 통 두 개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엔진오일! 여기 알았으니까 입 단속 잘하라고 그냥 줄게.”
“아… 감사합니다.”
“만약에 여기 털려있으면 난 중사 친구가 범인이라 생각한다?”
만약 그랬다간 진짜로 제일파에 자신들을 알릴수도 있다는 너스레.
하지만 저 양반 성격상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고,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네준 엔진오일을 받고서 다시 출발했다.
양근태는 창고에서 김준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든뒤에 넌지시 담배 한 대를 물고 불을 붙였다.
“소사벌 황 여사가 진짜 그립네. 그 꽃마차 마담 살아있으려나?”
예전에 제일파 놈들이 붙잡고서 거의 성착취 용도로 썼다고 하지만, 이후 전부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찾고 싶단 생각이 들은 그였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아는 김준은 이미 떠난지 오래였고, 양근태는 창고 안에 있는 낚시의자에 앉아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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