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77 힐링이 필요해.
* * *
“잘 먹었어.”
“아, 벌써 다 드셨어요?”
“…피곤하다. 난 그만 들어갈래.”
김준은 야식으로 요청한 칼칼하게 끓인 부대찌개를 소주와 곁들여 먹다가 먼저 일어났다.
같이 먹던 아이들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들어가는 김준을 보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진짜 힘들었나보네.”
가야의 물음에 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그랬죠.”
“뭔데? 무슨 일인데 그래?”
에밀리는 그 상황에서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면서 눈을 반짝였다.
도경이나 인아 모두 어제의 일을 두고서 손사래를 쳤고, 은지 역시도 적당히 하라면서 제지했다.
“흐응, 오늘 회식 한다니까 기대했는데, 아쉽네요.”
김준이 떠난 뒤로 라나 역시 빈그릇을 들고 조용히 싱크대로 가면서 자기 먹은 몫을 치웠다.
그러다 눈치를 보던 나니카도 조용히 일어났고, 에밀리는 여전히 말해달라면서 도경과 인아를 재촉했다.
“좀 말해줘봐. 발리볼 걸. 가서 물려서 죽어가는 인간이라도 쏜 거야?”
“아, 쫌!”
“아니면, 음…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는데, 그걸 보고 쏴 죽인건가?”
“그만 좀 해라!”
“맞아요. 에밀리 언니!”
도경과 인아가 둘다 소리를 빽 지르면서 쏘아붙이자, 에밀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에서 가야나 은지도 한 번만 더 그런소리하면 손바닥으로 엉덩이 팡팡을 하겠다는 듯이 손을 들자 에밀리는 투덜거리면서 일어났다.
“쉣! 말 좀 해주지. 뭘 그렇게 숨긴다고….”
“자자~ 그만 올라가자.”
에밀리를 데리고 같이 올라가려고 하는 가야.
그녀가 떠나서 남은 것은 그래도 차분한 성격의 사람들만 남았다.
“솔직히 나도 궁금하긴 한데, 차마 못 물어보겠어.”
마리의 한 마디에 은지는 그냥 넘어가자는 듯이 냉장고에서 소주 몇 병과 에너지 드링크, 그리고 과일주스 가루를 가져왔다.
“칵테일이나 한 잔 마시고 기분 풀어.”
은지는 오늘 김준과 같이 고생한 아이들을 위해서 특제 칵테일을 준비했다.
소주를 베이스로 각종 주스와 드링크로 섞어서 단맛을 내고는 얼음을 띄워서 인아와 도경에게 건네줬다.
“역시 은지 언니가 이런걸 잘 해.”
마리는 자신의 몫으로 한 잔 받고는 목을 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도경 역시도 칵테일을 먹으면서 남은 부대찌개를 걸쭉하게 끓여 라면사리를 하나 넣었다.
“이렇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김준이 없어도 여자들끼리 모여서 조촐하게 회식을 하는 자리가 되었다.
특히 인아와 은지가 둘 다 있으니 안주는 문제없었고, 이야기도 활발했다.
그렇게 넷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밤이 됐다.
***
“으음, 으으음!”
소주 두 병 마시고, 일찍 잠에 들었던 김준은 중간에 눈을 뜨고서 침대에서 뒤척였다.
“후우”
중간에 깨서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자려고 했지만 한번 깬 뒤로 졸음이 사라졌다.
“하씨… 지금 몇 시야?”
새벽 2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본 김준은 한숨을 쉬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한 4시간 자고 일어난 상태였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맡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방에 나왔을 때,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 깼어요?”
“안 잤어?”
LED등 두 개를 켜 놓고서 소파에 누워 뒹굴대는 은지를 보고서 김준은 헛웃음이 나왔다.
뭘 하는지 그녀에게 다가오니 루팅으로 가져온 애장판 순정만화를 읽고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좀 보고 있었어요.”
“푹 좀 자두지.”
“내일은 마리랑 가야 언니가 직접 음식 해본다고 해서 여유가 있어요.”
“순번제로 하려고?”
“저랑 인아 없이도 한번씩 해 봐야죠.”
“그렇구만.”
김준은 종이컵에 물을 살짝 채워서 재떨이를 만들고 소파에 앉아 한 대 물었다.
치익
언제나 그렇듯이 김준의 끽연에 별 상관 안하면서 계속 책을 보고 있는 은지.
김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작은 조명 속에서도 그 미모는 굉장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피부는 매끄러웠고, 오똑한 코에 커다란 눈이 연신 깜빡거렸다.
중단발로 자른 뒤로 다양한 머리스타일을 했지만, 어느 정도 자라자 다시 끝부분을 땋아서 작고 가는 목을 감고 있었다.
옷차림도 예전에 비해 간소해졌다.
더 이상 몸을 칭칭 감는 긴팔 폴라티나 래쉬가드 대신 입기 편한 흰 티셔츠 한 장, 바지는 체육사에서 가져온 학교 체육복인데 그 단촐한 패션도 결국 얼굴이 모두 완성시켰다.
김준은 넋이 나가서 은지를 바라봤고, 조용히 만화책을 한 장씩 넘기던 은지는 그 시선을 뒤늦게 느끼고서 이쪽을 바라봤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을 연신 깜빡이는 모습은, 예전과 달리 싸늘함이 사라져 있다.
김준은 조용히 적신 재떨이에 담배를 넣고 주변을 휘휘 젛으면서 연기를 내보냈다.
“흐음~ 잠은 안 오는 거죠?”
“뭐, 그렇지. 나도 그거나 볼까?”
“다 보긴 했는데… 1권 드려요?”
은지는 조용히 일어나서 바닥에 있는 만화책을 들어 건네줬다.
그렇게 김준도 만화책을 펼치면서 두 남녀가 소파 위에서 편한 자세로 순정만화를 보면서 새벽 시간을 보냈다.
은지는 그러던 중 뭐가 생각났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갔다.
잠시 후 봉지 뜯는 소리와 계란 깨는 소리가 들리더니 양은 냄비에 음식을 해 와서 김준 앞에 내려놨다.
뚜껑을 열자 더운 연기가 확 올라오면서 보글보글 끓는 라면이 있었다.
“생각나서요.”
“오~ 땡큐.”
소파에 누워 만화책 보다가, 은지가 파에 계란까지 넣은 라면을 끓여오자 진짜 바로 젓가락을 집은 김준이다.
“같이 먹자.”
“네, 그러죠.”
내일 아침 붓는 거는 상관없이 야식으로 라면을 나눠 먹는 두 남녀.
은지는 조용히 앞접시에 라면을 담으면서 김준에게 말했다.
“바깥 파밍 고생 많았어요.”
“….”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언제나 고생하셨으니까.”
은지의 말에 김준은 이제는 어제가 되었던 그 상황을 떠올리다가 이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다 먹은 라면 냄비를 치우려고 가져갔을 때, 은지는 자신이 직접 설거지를 했고, 남은 만화책을 보고서 김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 좀… 어둡지 않아?”
“불 더 켜면, 다른 애들 깰 텐데.”
“내 방에 들어가서 볼래?”
“….”
김준이 오랜만에 은지에게 큰 제안한 번 해봤다.
순간 은지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어두운 복도에 김준의 방을 슬쩍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뭘 뜻하는 지 다 안다는 눈치였지만, 이내 일부로 져주면서 조용히 만화책을 챙겼다.
“뭐, 그러죠. 밤은 아직 기니까….”
의외로 쿨하게 받아들이면서 먼저 안방으로 들어가는 은지를 보고서 김준은 조용히 간식거리를 챙겼다.
김준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그리고 은지는 침대 매트리스에 엎드려서 다리를 까딱이며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 불룩한 힙이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었지만, 일단은 지켜봤다.
만화책을 다 본 뒤로 은지는 조용히 책을 김준에게 내밀었다.
“다 봤네요.”
“자려고?”
“흐음~ 아직 심심하긴 한데.”
은지는 뭐든 상관없으니까 다른 놀거리를 찾았고, 김준은 조용히 책상 위에 노트북을 꺼냈다.
“이게 되려나?”
노트북에 HDMI 단자를 TV에다가 꽂았고, 외부 입력을 하자 그동안 켜지지 않았던 컴퓨터가 TV를 통해 켜졌다.
“오….”
“옛날 예능프로그램 다운받아놓은게 있거든?”
“그거 불법인데.”
뭐, 이 자리에서 그런 걸 누가 신경쓰겠냐만, 일단 노트북으로 곰플레이어를 틀어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봤다.
“아, 이거!”
[컨츄리 걸스.]
강원도 산골이나, 어촌 등에 현역 걸그룹 소녀들이 들어와 숙식을 해결하는 컨셉의 프로그램이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가스렌지 하나 없이 드럼통에 불을 붙이고, 야채를 캐서 직접 만들어 먹는 컨셉은 시즌 5까지 나와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그 중에서도 김준이 전편을 가지고 있는 건 시즌 3이었는데, 다름 아닌 은지가 나와서였다.
“와, 저거….”
은지는 예전의 자신 모습을 보고서 감회가 새로운지 김준과 같이 침대에 누워서 그걸 즐겨봤다.
자신의 앞에서 조용히 누워있을 때, 김준은 슬며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저때, 같이 한 애들도 기억나네.”
“배우 김슬아랑, MC 양선화….”
“실제 사이는 어땠어?”
“별로 안 좋았어요. 저거 종영하고 따로 연락한 적 없고.”
“….”
그당시에 까칠했던 은지다운 대답이었다.
시골에서 래쉬가드 차림으로 음식을 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봄나물들을 모아놓고 야무지게 칼질을 한 다음에 잡채를 만드는 모습은 비주얼이 엄청났다.
“저거보니 잡채먹고 싶다.”
“나중에 해 드릴게요.”
“음.”
예능 프로그램이 지나가면서, 은지가 다양한 요리를 만들고, 집안 여기저기 꼼꼼하게 청소를 하는 모습은 샤랄라한 자막이 나오면서, 정적인 힐링이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김준은 조용히 숨만 쉬면서 자신이 나온 방송을 보고 있는 은지를 바라봤다.
배에 착 달라붙어서 팔베게를 하는 모습에 조용히 정수리만 쓰다듬었는데, 좀더 내려서 땋은 머리카락을 집고 이리저리 흔들어봤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좀 더 대담하게 손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하얀 티셔츠에 살짝 튀어나온 어깨를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봤고, 흠칫하긴 했지만 돌아보지 않는 은지의 몸을 조용히 바라봤다.
늘어진 목 너머로 검은색 레이스 브래지어와, 봉긋한 가슴에 점이 하나 있는 것 까지 잘 보였다.
옷 너머로 보이는 몸매를 감상한 뒤로 점점 김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어깨 라인을 타고 내려가 옆구리에 닿았을 때, 살짝 움찔거리는 은지.
그리고는 결심한 듯 조용히 티셔츠 아래로 손이 들어가서 말랑거리는 배에 닿았을 때, 은지가 휙 돌아봤다.
경멸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한심하다는 듯한 그 눈매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은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주물거리는 김준의 나쁜 손을 그냥 허락했다.
“…콘돔은 있죠?”
긴 밤에 마지막 힐링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