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167 볼장 다 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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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아침 일찍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몸은 엄청나게 무겁고, 입 안은 바짝 말라서 혀가 안 돌아간다.
냉장고까지 겨우 걸어가서 시원한 보리차를 들이켤 때, 김준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기 물이 틀어지면서 내친김에 시원하게 목욕하고 나온 김준이었다.
“후우”
수분 보충을 하고, 몸도 깨끗이 씻은 상태에서 김준은 서랍을 열어 트렁크 한 장을 꺼내 입었다.
동네에서 만원에 세 장으로 파는 제품이 한가득 쌓여있었고, 티셔츠도 꺼내서 입으며 머리를 탈탈 털 때, 라나는 아직도 몸을 뒤척였다.
“으으으….”
괴로운 표정으로 뒤척이는 라나를 보면서 김준은 조용히 다가가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줬다.
시원한 감촉에 잔뜩 찡그린 얼굴이 점점 펴졌지만, 그래도 괴로운지 뒤척이던 라나가 눈을 떴다.
“흐으으응….”
“일어나. 씻어야지.”
김준은 숙취로 괴로워하는 라나를 일으켜줬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비틀거리는 라나를 김준이 붙잡아주고 조심스럽게 욕실로 향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소녀는 김준에게 의지했다.
“오빠, 물 좀….”
“어, 여기.”
아까 마시다가 놔둔 보리차 병을 들어서 라나에게 건네주자 아기처럼 받아먹으면서 가느다란 목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그때, 물을 삼키던 라나가 갑자기 눈을 부릅 뜨며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우우웁!!!”
“어?! 야!!”
연신 기침하고 비틀거리다가 후다닥 욕실로 달려가는 라나.
김준이 깜짝 놀라서 달려갈 때, 그녀는 필사적으로 입을 막으면서 욕실 문을 닫았다.
“라나… 아니, 나라야! 차나라! 문 좀 열어줘봐.”
하지만 라나는 눈물이 왈칵 터지면서 고개를 저었고, 제발 비켜달라고 김준에게 손짓했다.
무슨 상황인지 너무 잘 알아서 등이라도 두들겨 주려고 했는데, 이런 추한 모습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여줄 수 없다면서 문을 단단히 닫은 라나.
그러면서 김준이 앞에 있어서 필사적으로 넘어오려는걸 참고 있었다.
“쯧, 다하면 씻고 나와. 거기 찬장에 칫솔 새 거 있어.”
김준은 안쓰럽게 바라보며, 밖으로 나왔고 라나는 차마 그제야 불덩어리 같은 몸을 움직였다.
***
“으으응… 흐으으… 흑….”
“잘 한다. 소화도 못 시킬걸 어제 뭘 그렇게 먹은거야?”
김준은 아침도 못 먹고 누워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라나를 보고서 안쓰러운 눈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몇 번이고 샤워와 양치를 해서 산뜻한 향이 났지만, 그와 다르게 몸 은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술병이 나서 열이 나는 상태의 라나를 보고 김준 옆에서 마리가 상태를 보고 있었다.
“후~ 링거라도 한 대 맞으면 직빵인데….”
마리는 그릇에 포도당 캔디를 갈아서 물에 살살 개고는 수저로 떴다.
“이리 줘. 내가 먹여줄게.”
마리가 가지고 있는 포도당액 그릇을 받은 김준은 수저로 떠서 조용히 라나의 입에 가져다 댔다.
“후르릅 으음.”
과일향의 달달한 맛에 혀를 낼름거리는 라나.
김준은 그녀에게 천천히 수저로 떠서 포도당액을 먹여줬다.
“해장국 많이 있는데, 한그릇 먹고 자….”
“오빠… 미안해요. 진짜 뭐 한 숟갈만 먹어도 계속 토할 것 같아….”
지끈거리는 두통에, 위액을 쏟아낼 정도로 게워낸 속.
팔다리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서 미닫이문 방 넓은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는 라나였다.
김준은 포도당 액을 라나에게 먹여주고는 찬 물로 적신 수건을 쨔서 머리에 덮어줬다.
“한숨 푹 자.”
“네에~”
라나는 어제 이미 필름이 끊긴 상태였고, 섹스는 어떻게 했을지 모를 상태였다.
김준은 다음 기회를 생각하면서 일단 술병 난 꼬맹이 쉬라고 방에서 나왔다.
“후우”
“아, 오빠. 라나는 좀 어때요?”
3층에서 다른 애들 챙기고 온 가야의 물음에 김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방을 가리켰다.
“술병 제대로 났어. 포도당 주스만 겨우 먹고서 자라고 했지.”
“후우~ 3층도 똑같아요. 에밀리 걔 완전 속 뒤집혀서 머리 아프다고 아스피린 달라고 하고, 나니카도 밥 먹은 뒤로 그냥 잔대요.”
“어우, 그거 안 돼요. 숙취 두통에 아스피린 먹으면 간 망가져.”
“그러니까!”
마리의 말에 가야는 한숨을 쉬면서 거실에 앉았다.
그러자 인아와 은지가 차를 가지고 와서 티 타임을 가졌다.
“쯧, 적당히 마셔야지. 뭘 그렇게 부어대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지가 그 말을 하는데 생각해보면 웃겼다.
어제 먹은 양으로만 치면 2차까지 계속 소주병 비우면서 조용히 들어갔는데, 내색도 없이 아침에 인아랑 같이 해장국을 끓였다.
“으으으, 저도 좀 쉬고 싶어요.”
“작은 방에 도경이도 자고 있어. 거기 가서 눈 좀 붙여.”
“네에~”
인아는 아침 식사를 차린 다음에 머리를 부여잡고 들어갔고, 남은 것은 차 한잔을 마시는 가야, 은지, 마리.
딱 언니 3인방이었다.
“그래도 연장자 셋이 잘 견디네?”
“후~ 저야 뭐 조금밖에 안 마셨거든요.”
“가야 언니는 고기 좀 드시지, 계속 애들 챙긴다고….”
마리가 한마디 할 때, 가야는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김준은 피식 웃으면서 은지를 가리키고 말했다.
“얘가 진짜 철인이야. 어제 2차까지 여기서 먹었는데, 내색을 안 해.”
“2차 했었어요?”
“여기서 해장국 끓여다가 마리랑 인아랑 은지랑 해서.”
“라나가 그래서 술병 났구나….”
가야나 마리는 어제 다른 애들 챙기느라 정신없었는데 2차로 여기서 먹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제는 뭐… 솔직히 야외 옥탑방에서 소고기를 구워먹는데 그럴만 했지.”
“맞아요~ 그걸 어떻게 참냐고요. 킥….”
다른 것도 아니고 갓 도축한 소를 가져다가 옥탑방에서 구워 먹으며 전통주인 증류식 소주를 부어서 직접 재배한 채소에 싸서 먹는데 과음은 인정이었다.
게다가 숙취 때문에 그렇지 모두가 행복했던 하루였고, 오늘도 가볍게 집안에서 있을 셈이었다.
“차 마시고 뭐 할 거 있을까요?”
“음, 글쎄? 일단 이불 빨래 해서 널을까?”
“아, 그러죠. 담요랑 베갯커버 전부 다 꺼낼게요.”
은지가 빠르게 움직이자 가야나 마리도 같이 일어나 거들기로 했다.
김준은 지뿌둥한 몸을 이끌고서 세탁기로 향했고, 편의점에서 가져온 섬유유연제와 표백제를 보고는 빨래 준비를 했다.
“이건 뭐, 재활용도 안 되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세제가 섞인 빨랫물은 어디 쓸 데가 없어서 아쉽긴 했다.
잠시 후 세 명이 빨랫감을 잔뜩 가져왔고, 세탁기를 돌리면서 남은 시간 동안 청소를 시작했다.
동생들은 숙취로 푹 자고 있고, 언니들이 같이 움직이는 동안 김준은 집안일도 하다보면 은근히 시간 많이 잡아먹는다며 혀를 찼다.
“하긴 9명이나 사는데, 그럴 만도 하지.”
그 사이에 점심이 훌쩍 지나고, 다시 애들을 깨우려고 해도 여전했다.
“오빠… 저 그냥 계속 쉴래요.”
“야,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못 먹겠어?”
“으으응….”
“얘 진짜 링거 맞춰야 하나.”
김준은 다음번엔 얘하고 끝까지 술 먹는 자리는 참아야 할 것 같았다.
그 사이 몇 차례에 걸친 이불 빨래가 끝이나고 그걸 들고 옥탑방에 올라갔을 때, 김준은 가야와 같이 담요를 양 쪽으로 잡았다.
“자~ 한 번에 터는 거다.”
“아, 네.”
김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야와 같이 이불을 세차게 털 때, 그녀가 순간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꺄앗?!”
“야, 위험….”
김준이 힘껏 이불을 털 때 그걸 잡다가 힘에 밀려서 앞으로 넘어지려는 가야.
그걸 보고 김준이 바로 잡고 있던 이불을 확 당겨서 그녀까지 확 딸려오게 했다.
쿠당탕!
“으읏!?”
축축한 이불 사이로 가야의 몸이 김준에게 떨어졌고, 그녀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담요를 넘어 김준의 얼굴에 닿았다.
“….”
“…풋!”
“?”
“푸하핫! 야, 어떻게 그거 흔들었다고 쭉 딸려 오냐?”
김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고, 가야 역시도 자기가 무슨 종이인형같이 쭉 딸려 나온 모습이 못내 웃겼는지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으이구, 하여튼 맏언니가 가장 유리몸이야.”
“죄, 죄송해요. 요새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됐어. 이거나 빨리 널고 들어가….”
툭
“!?”
툭 투툭 툭
갑자기 김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몇 가닥의 물방울.
그리고 하늘을 봤을 때, 해는 쨍쨍 떠 있는데 구름이 꾸물거리더니 물이 떨어졌다.
“오빠….”
“아씨, 좆됐네.”
산뜻하게 빨래하고, 널으려고 했는데, 비가 오고 있었다.
***
“당겨!!!”
“으으읏!”
끼릭 끼리리릭
황급히 빨랫감을 집 안에다 널어놓고 렌치 들고서 빗물탱크를 여는 김준이었다.
가야는 낑낑거리면서 렌치를 당겼고, 김준이 말없이 스패너를 주자 가야는 지난번 인아가 알려준대로 렌치 끝에 꽂아 지렛대 형식으로 당겼다.
끼기긱 끼이이이이
“아, 됐다!”
“그래~ 힘으로 안 되면, 이렇게 하면 된다고.”
비를 맞으면서 세 개의 빗물 탱크를 모두 열었을 때, 김준은 가야를 데리고서 1층 지붕 안으로 들어갔다.
칙 치익
젖은 담배를 물고서 불을 붙였을 때, 연기가 빗물사이로 뿜어져나왔다.
“후우 수고했어.”
“당분간 물 걱정은 없겠네요.”
김준이 조용히 손을 뻗어 물기에 젖은 가야의 곱슬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쓰다듬는 김준의 손길에 가만히 있었다.
어제 그렇게 술자리에서 과거 미담이 가득했던 아가씨는 오늘도 그 인성을 보여줬다.
술병나서 누워있는 후배들 쉬라고 한다음에 자신이 앞장서서 집안 일을 하고, 비가 와서 탱크 열어야 하는데, 애들 깨울 생각을 안하고 자기가 직접 김준과 나와서 낑낑거려도 다 처리한 걸 보면 말이다.
“은야야.”
“…네?”
가야는 김준이 본명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웬만해선 그냥 아이돌 예명으로 부르지만, 본명을 부를때는 ‘딱 그거’라는 것을 알았다.
“비도 오고… 또 술 생각이 나네.”
“조금은… 마실 수 있겠네요?”
김준은 담배꽁초를 던지고 한 팔로 가야를 끌어안은 다음, 자켓을 벗어 그녀의 머리에 덮어줬다.
그날은 저녁도 못 먹겠다면서 누워있는 애들이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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