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134 두꺼운 옷 속의 진실.
* * *
김준은 방 안에서 은지와 소주 대작을 맡는 자리를 가졌다.
언제나 쌀쌀맞던 아가씨가 먼저 찾아와서 안주까지 만들어서 가져왔는데 정말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쭈욱
“잘 마시네?”
“오빠, 저 원래 술 세요.”
종이컵으로 연신 소주를 비운 은지는 빠르게 한 병을 비우고는 피부색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다음 병도 땄다.
김준은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의 은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잔뜩 술 먹고 원나잇 했을 때, 이후로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거라면서 거리를 두고 있던 아이가 직접 찾아왔다.
그것만 해도 진짜 놀랄 일이었는데, 이전의 은지 바 처럼 술친구가 필요한 건지 김준을 맞은 편에 두고 혼자 잘 먹는 은지를 보고서 일단은 지켜 보기로 했다.
천천히 마시라고 만류하지도 않고, 안주가 떨어질 것 같으니 냉장고에 넣어뒀던 말린 육포와 야채 등을 꺼내 주자 풋고추 하나를 들고 아그작 씹는 은지였다.
“후우”
“기분 좀 풀려?”
“….”
은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가 미묘한 눈으로 김준을 바라보면서 종이컵 끝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계속되는 서로가 말을 아끼면서 지켜보고 있을 때, 결국 은지가 마음 속에서 결심한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음?”
“그렇게 보고 싶어요? 옷 안에?”
은지는 언제나 한 몸처럼 입고 다니던 검은색 목 폴라티를 슬쩍 잡아 당겨 올렸다.
“!?!?”
폴라티 끝을 슬쩍 올렸을 때, 햇빛을 거의 받지 않아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도경 만큼은 아니어도 탄탄한 복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손과 얼굴 제외하고 꽁꽁 싸매던 애가 갑자기 이러니 혼란스러워 지는 김준이었다.
“은지야, 대체 왜 그래?”
“보고 싶어요? 원한다면 지금 벗고요.”
“이야기를 좀… 차분하게 해봐.”
김준의 말에 은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서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에밀리… 그 씨발년.”
“음?”
“하아, 진짜….”
은지는 조용히 병을 들어 종이컵에 소주를 콸콸 채우고는 한 모금 마시면서 그동안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놨다.
“제가 소속사 들어간 게 10년 전이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때요.”
“흐음.”
“그때 숙소가 엄청 낡은 건물이었어요. 같이 있던 에잇틴 멤버들도 힘들어했어요.”
은지가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묵묵히 들어줬다.
지금 이 상황은 그동안 은지의 괴로워했던 일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끔찍했어요. 세면대에서 씻으면 배수구에서 물이 역류하고, 컴퓨터랑 오디오 동시에 틀면 퓨즈 나가서 그거 다시 올리러 갔고, 비만 오면 전등 빼고는 두꺼비집이 안올라갔어요.”
“어우, 진짜 그런데서 사람이 살았구나.”
김준은 혀를 끌끌 차면서 조용히 소주를 마셨고, 은지는 이제 ‘그때의 일’을 말하려고 할 때 순간적으로 트라우마가 발동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김준은 진중한 눈으로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줬다.
종이컵에 가득 채운 소주를 들고 벌컥벌컥 들이킨 은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취기는 안 보였고 오히려 차분해 보였다.
“밤에 소속사 사장이 왔다 갔었어요. 아직도 못 잊어. 생일 다음 날이었으니까.”
“….”
“데뷔 앞둔다고 했는데, 그날 밤에 전등 합선으로 불이 났어요.”
“…!!!”
“애들 깨워서 다들 피하게 했는데… 불붙은 전등이 등에 떨어졌고….”
“어우.”
드디어 알게 된 진실이었다.
지난 루팅때도 옷이 밀려서 살짝 보였던 수술 자국이었는데, 결국은 그건 극히 일부였었던 것이었다.
“백번 말해야 상관없죠.”
은지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한쪽으로 땋은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끈을 풀었다.
긴 생머리가 풀어헤쳐졌고, 조용히 폴라티도 벗어버렸다.
그렇게 보기 힘들었던, 아마 현역 아이돌 시절에도 래쉬가드 등을 껴입어서 볼 수 없었던 그 갑옷 같았던 상의가 벗어진 순간, 의외로 불륨이 있는 검은 레이스의 브래지어 차림이 드러났다.
앞모습만 보면 정말 환상적으로 예쁜 몸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한 곳으로 쓸어 올리며 뒤를 돈 순간, 김준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아이고….”
그녀가 말한대로 새하얀 등 한 곳은 화상으로 뒤덮인 화마의 흉측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왼쪽 어깨부터 날갯죽지를 타고 내려온 흉터는 젊은 소녀가 견디기에는 상당히 커 보였다.
김준은 말을 잇지 못했고,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은지는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그 등을 보인 뒤로 옷을 입지 않고 그 차림으로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뭐, 결국은 그래서 데뷔는 늦어졌고 그러다가 같은 무대에 서게 된게 샌드걸스 선배들이었죠.”
“아, 가야랑 그때 만난거고?”
“처음에 복장이 등이 파인 스웨터인데, 그거 안 입고 래쉬가드 입는다고 뭐라고 했는데, 은야 언니가 그때 커버쳐줬어요.”
치열한 아이돌 연예계에서 가야의 인성은 유명했다.
타 소속사 후배들도 잘 챙겨주고, 걸스 파이팅 예능 촬영을 할때도 담당 PD 대신 후배들에게 요청하면 거의 다 캐스팅이 됐다면서, 아이돌 은퇴하면 소속사의 중역으로 쓰이거나, 자신이 기획사 차린다는 말도 많았다고 한다.
“뭐, 그것도 몇 년 못 갔지만….”
“음?”
“그년들이 통수를 쳤거든요.”
“그년들이라니? 설마….”
에잇틴의 다른 멤버들.
은지를 통해서 화재에서 살아남은 애들이지만, 역으로 은지로 인해 데뷔가 늦어지고 노출 컨셉을 포기하게 된 상황에서 계약기간 도중에 트러블이 일어났다고 한다.
“공식 팬카페에서 매니저 입을 통해, 내가 레즈라서 컨셉을 포기 못한다고 말하거나, 몸에 문신 가린다고 과거에 일진이었다고 퍼트리거나….”
“아, 시발. 뭐 그런 년들이 다 있냐?”
“원래였으면 올해 계약 끝내고 소속사 트레이너 제안도 받았었어요. 새 멤버 영입한다는 말도 있었던 거 같고요.”
모든 것을 다 들어보니 정말로 인간 불신이 극에 달했어도 이상하게 없는 은지의 과거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준도 순간 빡쳐서 자신의 에잇틴 덕질을 탈퇴하고 은지 수호를 위해 나섰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은지가 결국 이걸 공개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에밀리… 그 썅년 진짜.”
“그래, 에밀리는 왜 그렇게 싫어하는건데?”
“자신도 제 얘기 알고 있었다고 뒤늦게 말하더라고요. 자기 소속사 사장한테 들은 이야기라고.”
“뭐?”
“자긴 흉터 있어도 당당한데, 뭐 그렇게 빼냐고…. 스카 백이래요.”
“스카백이 뭐야?”
은지는 자신의 눈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에 상처 있으면 Scar Face잖아요. 등에 상처 있으면 Scar Back이라고….”
“아~ 그년 그거 진짜 때려줄까?”
“걘 그거 더 좋아하지 않아요?”
엉덩이를 때리면 오히려 탄성을 내뱉으니 일단 뭐가 됐든 간에 상처 나으면 따로 불러서 면담 좀 해 봐야겠다.
어쨌건 이런 자리를 통해 드디어 은지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를 알고 위로해 주는 가운데, 김준의 눈은 슬며시 은지의 상반신으로 향했다.
“이제 보니까….”
“?”
“가슴에 점이 있었구나.”
“아….”
망사 레이스 브래지어 위로 오른쪽 가슴 위에 작은 점이 보였는데, 만화적 묘사로만 봤지 실제로 있는 여성은 처음 봤다.
생각해보니 지금 모습은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었다.
은지는 남은 소주를 입에 넣고 가글을 하듯이 쭉 들이킨 조용히 일어나 냉장고의 물을 꺼내다 마셨다.
그리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김준을 보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거라고 말했는데….”
“흐음~”
어쩌다 보니 다시 김준하고 눈이 맞았고, 그 상황에서 둘의 분위기가 점점 후끈후끈해졌다.
은지는 잔뜩 달아올라 있는 김준의 얼굴을 보고는 냉장고 위에 올라와 있는 목캔디 하나를 꺼내 입에 넣으면서 안에 술과 안주 냄새를 지워갔다.
“…흐으응.”
은지가 계속 서 있자 김준 역시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스커트로 손이 갔다.
스커트의 지퍼를 푸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은지는 마침내 결심한 건지 천천히 스커트를 벗고 유광의 검은 팬티스타킹이 드러났다.
오늘 처음 본 새하얀 상반신의 피부에, 의외로 큰 가슴과 위에 작게 찍힌 점도 매력적이었지만, 역시 은지는 허리부터 내려오는 엉덩이와 스타킹으로 덮인 다리 라인이 정말 환상적으로 예뻤다.
김준은 그 뒷태에 반사적으로 손이 갔다.
“!?”
아무런 리액션 없이 두 손이 팬티스타킹에 쌓인 엉덩이로 향하고 주물거릴 때, 은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김준은 까실까실한 스타킹과 그 안에서 부드럽고 꽉 잡히는 엉덩이를 주물거리다가 이내 두 손을 올려 은지를 뒤에서 안았다.
“….”
“계속 이렇게 안고 싶다.”
뒤에서 안아주면서 계속 토닥이는 손길에 은지의 손도 살며시 김준을 잡았다.
이후 오늘밤은 다시 한번 은지랑 하게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