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133 자유시간.
* * *
쏴아아아아
김준이 캠핑카 안에서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근육질 몸으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완전 그거 같다니까.”
브라 후크를 채운 마리는 김준의 몸을 보고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라니? 뭐?”
“그 왜 있잖아요? 마블 영화 나오던 근육질 배우, 그 프로레슬러라던가?”
“…바티스타?”
“아, 네! 쫌 닮았어요.”
김준은 순간 다시 샤워실로 들어가 거울을 바라봤다.
군 시절 병사~하사 때는 그래도 날렵한 몸이었는데, 중사 때부터 헬스하고, 95kg까지 불었을 땐 곰 소리 들으면서 무슨 레슬링 대회 나가냐면서 낄낄거리던 게 생각났다.
“어딜 봐서….”
김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면서 옷을 챙겨입었다.
“확실히 레슬러 체형이에요. 어깨도 엄청 넓고, 허벅지도….”
“아, 시끄러워!”
찰싹!
“꺄아!”
속옷 차림으로 다니는 마리의 엉덩이를 때려줬는데, 오히려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너무해♥”
“옷!”
“네 입어요. 입는다고요.”
마리는 어제 입었던 티셔츠를 바닥에서 주워 입고는 츄리닝 바지도 주섬주섬 입으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마치 커플이 모텔에서 나와 아침햇살을 맞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은 뭐려나?”
“전 뭐든 좋아요.”
마리는 연인처럼 다정하게 김준의 허리를 붙잡고서는 착 달라붙은 채로 올라왔을 때, 아침에는 은지 홀로 음식을 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아….”
은지는 앞치마 차림으로 돌아보다가 마리와 김준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같이 올라왔네요.”
“어.”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었고, 생각해보면 차례대로 한 명씩 했으니 모두가 자연스럽게 느낄수도 있었다.
“인아 앞에서만 보이지 마세요.”
“음? 아, 인아….”
생각해보니까 걔가 유일하게 김준하고 썸씽이 없었다.
게다가 몇 번 걸리기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질색을 하면서 ‘난 절대 안 박힌다.’라는 필사적인 경계를 하고 있었다.
덜컥
때마침 작은방 문이 열리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어난 인아였다.
인아는 세면실에서 씻고 나와 바로 아침을 준비했다.
“아, 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인아도 좋은 아침!”
마리는 은지랑 인아에게 인사하면서 아침상을 준비하고,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했다.
오늘의 메뉴는 만둣국이었다.
인아가 어제 남은 흰떡과 지난번 잔뜩 빚었던 만두를 가지고 각종 야채와 버섯을 썰어 넣은 다음 마지막으로 참깨와 김을 잘라 올리니 그럴듯한 떡만둣국이 만들어졌다.
“사실 지금쯤이면 설연휴인데….”
“아, 그러네?”
마리의 1월 30일 생일이 끝난 다음, 2월의 시작이니 원래였으면 구정쯤 됐을 거다.
이제는 양력으로나 음력으로나 진짜로 새해가 시작됐고, 한 살씩 먹으면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을 하나~ 근데 나는 면제야~”
김준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면서 다른 애들에게 말했다.
“당분간 좀 쉬자. 그냥 자유시간이야.”
“네?”
“흐음.”
가야나 은지 같은 연장자 언니들은 김준이 자유시간을 주자 그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쉬라고 한 것이니 김준부터 오늘은 손이 근질근질해도 그냥 쉴 거다.
“딱 1주일만 쉬자. 그다음에 새 루팅 장소 정할거야. 다들 알았지?”
“네~ 그럼 밥먹고 뭐부터 할까?”
“오랜만에 뱅 한 번 하자.”
“난 루미큐브!”
벌써 보드게임 선점하고, 운동기구 잡으려고 하는 아이들이었다.
***
[우우우우웅 우웅]
“아씨, 여기서 꼼수를.”
“헹! 내가 마리오 카트를 얼마나 잘하는데!”
김준의 안방에서는 그동안 거의 작동하지 않았던 TV에 게임기를 설치하고 라나와 같이 한 판 하고 있었다.
서점에서 가져온 90년대 베이스의 레트로 게임기 내에는 각종 추억의 고전 게임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 64버전 마리오 카트가 있어서 라나와 같이 2인용으로 붙었다.
“아씨! 또 바나나!”
“그렇지!”
라나는 컨트롤러를 이리저리 눌러대면서 유유히 1등으로 승리했고, 김준은 머리를 부여잡다가 일어났다.
“응, 벌써 끝?”
“아, 안 해.”
“이번엔 바나나 빼고 할게요.”
“됐어!”
김준은 밖으로 나와 주방 냉장고 문을 열었다.
거기서는 비닐 진공팩으로 말린 야채와 버섯을 나누어서 담는 인아와 은지가 있었다.
그냥 쉬라고 해도 그녀들은 이게 더 편하다는 듯이 움직였고, 더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거실에서는 나니카와 마리가 젠가를 하고, 다른쪽에서는 가야, 에밀리, 마리가 포커를 치고 있었다.
“한손으로도 충분하다니까?”
에밀 리가 트럼프 카드를 내려놓으면서 자기 승리를 확신했을 때, 마리가 웃으면서 자신의 패도 깠다.
“봉!”
“하씨….”
에밀리는 머리를 부여잡다가 붕대가 잔뜩 감긴 등으로 손이 가서 계속 긁어댔다.
“자꾸 긁지 마! 흉져.”
“이미 흉터는 엄청 많아.”
상처가 빨리 나으려는 건지 살이 올라오면서 계속 가렵다는 말에 마리는 수시로 상태를 확인하면서 소독을 해줬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빨리 나아서.”
“그래, 다행이지.”
에밀리는 가야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팔을 보였다.
그녀는 칼에 맞아 수 차례 꿰매고, 감염까지 돼서 도려낸 흉터까지 남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등 상처는 별로 신경쓸 것도 아니야.”
“아… 뭐, 그건….”
순간 누구보다 흠칫한 가야가 그런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라는 투로 제지했지만, 되려 다른 아이들은 무슨 뜻인가 해서 어리둥절했다.
그러는 사이 냉장고 정리를 마친 은지가 조용히 와서 그녀들에게 접시 하나를 건네줬다.
“간식이다.”
“오! 프렌치프라이!”
은지는 말없이 짬 내서 튀겨낸 감자튀김을 내밀었고, 에밀리는 소금에 찍어 한 입 넣었다.
“으음~ 좋다.”
“고마워, 은지야.”
“은지 언니. 잘 먹을게요.”
“그래.”
가야와 마리가 감사인사를 표할 때 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 감자튀김은 젠가라는 애들 쪽으로 준비했다.
한편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아서 그걸 모두 봤던 김준은 몸만 멀쩡했으면 에밀리의 엉덩이를 잔뜩 때려줬을 거라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는 별 문제 될 거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또 가려운지 등을 긁적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계속 노는 시간이 되었을 때, 김준도 슬슬 손이 근질거렸다.
밖에 나가서 나무판 가지고 상자라도 몇 개 만들까 생각했지만, 본인이 직접 한 이야기이니 그냥 계속 놀기로 했다.
가끔씩 밤이 외로운지 문을 두들기는 애들이 있었는데, 귀찮아서인지 그냥 넘긴 적도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지나고, 내일만 지나면 딱 일주일 차가 되니까 본격적으로 루팅 계획을 짜고, 길을 알아볼 셈이었다.
“일단 내일 물물교환 물품도 준비하고, 한 번 돌아봐야지. 명국이네는 고기 다 먹었으려나?”
이왕이면 다음에도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거 나오면 멀리서 안전하게 잡아다가 고기 수급을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김준은 침대에 누운채로 천장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뒤척이다가 곧 잠들거 같았다.
그때였다.
똑 똑똑
“?!”
김준은 밤에 노크 소리를 듣고서는 문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대체, 어떤 아가씨가 또 이러시나?”
에밀리도 슬슬 아랫배가 근질거린다면서 다가왔었고, 라나는 문을 긁적이고, 도경이나 라나도 노크를 한다.
가야나 나니카 같은 애들이야 내색은 잘 안하지만, 정말로 김준이 끓어오를때는 확 붙잡아서 해댔지만, 그런 것도 지금은 없었다.
“그래~ 누구냐?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똑똑
“누구니?”
덜컥
김준은 라나라면 마리오 카트나 한 판 하고 돌려보낼거고, 마리나 도경이라면 다음에 하자고 돌려보낼 것이다.
근데 문이 열리면서 눈이 마주친 인물은 정말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
“역시 아직 안 잤네요.”
“음, 그래. 밖에 좀비가 나왔구나?”
“없어요.”
“그럼… 어디 고장났어?”
“아니요.”
뜻밖의 인물이었다.
진짜 생각도 못할 사람이 찾아왔으니 김준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게 무리도 아니었다.
“은지 네가 어떻게?”
“술 한 잔… 안 돼요?”
“아니, 안 될건 없는데.”
“그럼 조금만 기다려줘요. 안주 만들어올게요.”
은지는 양손에 들고 온 소주 두병을 김준에게 건네주고는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이거… 꿈 아니지?”
김준은 계속 믿기지가 않는 지 소주 두병을 가지고는 피식 웃으면서 방 안에 있는 냉장고에 담아놨다.
잠시 후 은지는 그럴듯한 술상을 차려왔다.
비빔면을 두 개 삶고, 멧돼지고기를 구워서 올렸고, 군만두와 콩나물국까지 만들어서 둘이서 먹기에 오붓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진짜 놀랍네?”
“저도 술은 마셔요.”
“여기서 말이지?”
김준은 어쨌건 잘 왔다면서 냉장고에 넣어 둔 소주를 꺼내고 종이컵에 따라줬다.
따라준 소주를 쭉 마시던 은지는 어딘가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문제가 있나보구나?”
“그래요.”
“흐음~ 좋아. 뭐든 말해봐. 한 번 다 들어줄게.”
김준은 자세를 고쳐 앉고서 직접 술상까지 차려온 은지를 보고서 연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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