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131 생일파티 준비.
* * *
“아무래도 이게 문제야.”
“으으음, 크긴 크네요?”
김준은 지난날 신릉면 지구대에서 가져온 경찰 방검복을 가야, 나니카, 인아, 도경에게 입혀본 다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권도 시합에서 쓰이는 두꺼운 호구처럼 생긴 이 방검복을 어떻게든 써먹으려 했지만, 여자애들에겐 무리였다.
그나마 다른 애들보다 큰 키에 성인 남성 체구 이상인 도경이 정도나 맞았지, 인아나 라나, 나니카 같은 애들은 그걸 입고 최대한으로 벨트를 조여도 달릴 때마다 덜렁거리면서 굉장히 불편했다.
이것 때문에 은지한테 수선을 부탁했었는데, 벨크로 몇 개 추가해서 입혀보니 막상 입혀보면 성인 남성용 방검복은 안전에 앞서 불편함이 너무 컸다.
“몸만 딱 막으니까 팔이나 목 같은 곳 못 막는 것도 크고….”
“그럼 이거 어쩌죠?”
“이렇게 하자, 일단 도경이가 차고 다녀. 언제 나갈지는 몰라도 네 전용 방검복으로 만들게.”
“네, 그럴게요.”
제일파와의 충돌 이후 은지가 만들어준 방검복 중 하나는 에밀리의 목숨을 구한 뒤로 그 역할이 끝났고, 나머지는 한 벌이었다.
“다음에 루팅 할 품목은 잘 알겠다.”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천천히 준비하기로 했다.
“준 오빠~ 아이언맨 슈트 같은 건 못 만들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흐응, 그럼 최소한 배트맨 슈트같이 철판에 타이즈라도!”
에밀리가 계속 슈퍼 히어로 드립을 치면서 낄낄거릴 때, 김준은 그래도 저 녀석이 활발하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에밀리는 김준과 다른 톱스타들이 눈물 흘리고, 잠도 못 자면서 상태를 봐 왔던 것이 무색게 칼을 맞고, 녹농균 감염까지 있었던 상황에서도 건강하게 움직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식사 자리마다 고기반찬만 찾아다니면서 잘 먹고, 집안에서 지루한 일상 속에 가야나 마리나 라나 불러서 왼손만 쓰는 포커나 화투를 치곤 했다.
그러다가 또 좀이 쑤시면 루팅 사라지고, 집 안 시설을 점검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김준을 따라다니면서 바람을 쐬곤 했다.
“하아~ 날씨 좋다.”
우반신이 붕대로 칭칭 감겨있는 상황에서도 할 건 다 하는 에밀리.
김준은 그녀의 옆에서 담배를 들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내일 기대된다.”
“그래~ 생일파티라도 해서 애들 기좀 살려줘야지.”
“인아가 떡볶이랑 튀김 잔뜩 만든다고 하더라. 기대하고 있어.”
“잘 먹고, 빨리 나아.”
“응~ 그래야지.”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캠핑카 안에 있는 박스를 가리켰다.
“이번에 좋은 거 가져왔는데, 누구한테 먼저 쓸 거야?”
“뭐? 좋은 거라니?”
“흐응~ 알면서.”
에밀리가 안으로 들어가 침대 밑의 박스, 제일파 차에서 가져온 것을 꺼내자 그것을 열자 나온 것은 김준의 할 말을 잊게 했다.
“깡패들이 은근히 즐길 거 즐기나 봐?”
“이건 진짜… 기가 막히네.”
가야도 수첩에 ‘성인용품’이라고 적어놨고, 콘돔이랑 젤 같은게 나왔다길래 그러려니 하고 그냥 창고에 넣어 놓으라고 했다.
근데 안에 있는건, 무슨 일본 야동에나 나올법한 물건이 잔뜩 있었다.
“오~ 이거 실제로 처음 봐. 애널비즈인가?”
흉악한 크기의 구슬이 줄 하나에 나란히 달려있는 것을 에밀리가 채찍처럼 휘휘 돌렸다.
그 안에는 딜도에, 오나홀에, 에그라고 불리는 진동기에, 실리콘 가슴에 각종 일본어가 가득한 잡지가 가득했다.
“미친 놈들이 뭐 이런 걸 가지고 다녀….”
“걔들 밤이 외로운가 봐.”
에밀리의 말이 농담 같지 않았다.
신릉면 일대에서도 황여사 일행의 아가씨들을 노렸고, 다시 만났을 때도 에밀리를 납치해가려고 한 걸 보면 진짜 거대 조직 내에서 보스가 건재해서 여자들을 납치하는 일도 할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야지.”
“없을거야.”
에밀리는 조용히 김준의 손을 잡고서는 싱긋 웃었다.
“이거 다 나으면, 저거 쓰면서 하는 건가?”
“…다 나으면 말하자. 응?”
김준은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일어났다.
***
다음날.
그렇게 기다리던 마리의 생일이었고, 에밀리의 습격이나 제일파 조폭들과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날보다 행복한 파티가 열렸을 것이다.
“어머~ 오늘은 진짜 기대해도 되는건가?”
아침 식사를 산뜻하게 미역국으로 시작했던 마리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에밀리 역시 자기 생일인 것처럼 활짝 웃으면서 엄지를 올렸다.
그리고 은지와 인아가 메인 셰프로 나서면서 남은 여자애들이 오더를 받고서 움직였다.
“가야 언니는 당면 삶아주고, 나니카랑 라나는 고기랑 당근 잘게 썰어.”
“아, 네. 볶음밥 넣을 정도로 다지라고 했죠?”
“응, 그래.”
한쪽에서는 만두 만들었던 다라이에서 다진 고기와 야채를 만들었고, 인아는 도경을 데리고서 떡볶이를 만들었다.
“어묵 진짜 만들었네?”
“만들수는 있다니까요? 그 맛이 날지 모르겠지만.”
밀가루에 다진 야채와 꽁치 통조림을 잘게 다져서 버무리고는 튀길 준비를 하는 인아였다.
“케이크는 언제 만들어?”
“이거 다 만든다음에 바로 오븐 준비할거에요. 밀가루 따로 빼놨어요.”
“오케이~”
김준은 거실에 있으면서 좀이 쑤셔 운동하다가, 밖에 나가서 모터 펌프를 만지거나, 차 내부를 살피는 등 할 일을 찾아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분식을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마리를 위해서 정말 분식으로 생일상을 만들었다.
“우아… 진짜 우아….”
마리의 두 눈에 연신 하트가 생겼다.
테이블에 있는 음식 중 맨 처음 본 것은 김밥이었다.
은지가 싼 건데 안에 있는 내용물도, 당근, 시금치, 계란, 깻잎, 햄으로 이뤄진 있을건 다 있는 김밥이었고, 마리가 꼬다리부터 하나 집어 바로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으음~ 완전 맛있어!”
그 뒤로 떡에 어묵에 라면사리를 넣은 라볶이를 보자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김밥 위에 올려놓고 한 입 먹어본 마리.
그 옆에는 쫄면과 멧돼지 살을 다져대서 만들어낸 돈까스. 그리고 어묵탕, 군만두, 제육볶음까지…
“야, 진짜 이건… 다 만드는데 고생 좀 했겠는데?”
김준은 오늘 음식을 준비한 아이들을 위해 박수를 쳤고, 창고에서 초를 가져온 가야가 하나하나 꽂고 불을 붙였다.
“자~ 마리 불어.”
“진짜 너무들 고마워요. 후우~!!!”
마리가 촛불을 끄자 모두가 박수치면서 생일파티가 시작됐다.
“이거 케이크 어떻게 만들었어요? 진짜 달다.”
“땅콩하고 꿀이요. 너무 달지 않아요?”
“아니야. 딱 좋아!”
마리가 하나하나 먹어보면서 각자의 자리에 있는 음식을 집을때마다 나니카나 도경이나 라나나 가야나 이건 내가 만들었고, 이건 내가 재료 삶았고 하는 이야기가 한 마디씩 나왔다.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었고, 부엌에서는 은지가 비장의 무기로 준비한 튀김과 순대가 남아있었다.
순대 얘기를 들었을 땐, 김준이 ‘내장도 없는데 뭘로 만드냐? 비닐?’ 이라는 말에도 방법이 있다면서 요리책을 흔들어댔던 은지였다.
“자, 와인 깝니다!”
뻥
코르크 마개를 갈고리로 파내고 이리저리 돌려내고 힘으로 당겨내서 겨우 열렸다.
김준은 마리에게 먼저 와인잔에 한 잔 따라줬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돌렸지만, 이 상황에서 아쉬워하는 이가 있었다.
“한 잔은 안 돼?”
“응, 안 돼.”
“알코올이니까 몸에 들어가면 소독할거 아니야?”
“응, 헛소리야.”
에밀리는 혼자만 와인을 못 마시고, 아쉬운대로 분말가루 주스를 들면서 묘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다들 잘 먹으니 다행이다.”
“이따가 카메라 준비할게요. 제가 찍을거에요!”
라나가 자신만만하게 자기 사진 잘찍는다면서 가슴을 팡팡 두들기자 김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술과 분식이 곁들여지고 있을 때, 은지가 드디어 필살기를 가져왔다.
“오우!”
“스게에~”
“대박! 이게 어떻게?”
“어머, 진짜 순대야?”
은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검은 순대를 가져와 비닐장갑을 끼고 칼로 잘라내자 그 안에 당면에 채소에 버섯에 간 고기가 들어있는 순대가 나왔다.
“나 먹어볼래!”
“마리야, 이걸로 찍어먹어.”
양념으로 꽃소금에 고춧가루, 들깨 섞은 것을 보여주자 진짜 은지가 제대로 준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리가 먼저 그 순대를 먹어보자 엄청난 만족과 함께 엄지를 연신 올렸고, 다른 애들도 하나씩 집었다.
에밀리는 그 와중에 튀김 노래를 불렀는데, 김말이 튀김과 감자, 고구마, 풋고추 튀김을 보고는 그거부터 바로 손을 뻗었다.
잘 먹고 있는 에밀리에 대한 은지의 표정은 미묘했다.
김준은 그 상황에서 조용히 순대 한 점을 집고 물었다.
“은지야. 이제 말해줘바.”
“네?”
“진짜 어떻게 만들었냐? 이거 순대.”
뭔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김준이 먼저 은지에게 묻자 그녀는 시선을 돌리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요리책 본대로 따라 했어요.”
“그러니까 이 순대를 내장 없이 뭘로 한 건데?”
“월남쌈 라이스 페이퍼.”
“…아!”
“요리책에는 ‘채식주의자 전용 순대’라고 나왔는데, 내장 대신 라이스 페이퍼, 고기 대신 버섯이랑 야채, 당면 갈아서 돌돌 말아 찜기에 넣으라고 했는데 우린 돼지고기가 있으니까요.”
“머리 좋다….”
“책에 나온대로 해 본 거에요.”
김준은 은지와 인아를 연신 칭찬해주면서 뭐라도 줄게 없을까 생각했다.
“확실히 은지가 진짜 대단해.”
“인정! 차가운 아포칼립스 셰프야.”
에밀리도 엄지를 올렸을 때, 은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
밤 12시까지 먹고 마시면서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잠시 밖에 나온 에밀리.
그녀 혼자서 술을 못 먹어서 뭔가 반쪽짜리 행복을 누리는 것 같아서 영 그랬다.
그때 에밀리를 보고 조용히 따라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레드불이라도 마시고 싶다….”
에밀리는 캠핑카 안에 있는 소형냉자고의 캔 콜라를 꺼내다가 바로 따고 들이켰다.
“왜 나와있어?”
“응? 그러는 언니는?”
캠핑카 문 열고 거기 앉아있던 에밀리는 은지가 온 것을 보고 물었다.
“등이랑 팔… 괜찮다고 했지?”
“예스~ 요샌 딱쟁이 지려는지 가렵더라고.”
“…후우.”
“어제 한 말 때문에 그러는구나? 스카 배…ㄱ.”
그 순간 은지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결국 은지가 한숨을 쉬면서 손을 내렸다.
“너… 진짜 그 말 쓰지 마.”
“우리 소속사 보스가 그때 한 말이 사실이었구나.”
“!?”
“오프 더 레코드 였다던데….”
“…죽인다 진짜.”
에밀리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웃었다.
“그럼 안 쓰지, 뭐~ 이거 상처 때문에 그러는 거지?”
에밀리가 등이 아니라 가슴 한 가운데를 가리키면서 콕콕 찌르는데, 여전히 싸늘한 은지.
그리고 에밀리는 거기서 한술 더 떠 깐죽거렸다.
“아~ 지금 여기 가슴 가리키는 거는 ‘비유법’이라는 거야.”
“하아~ 됐다. 그만하자.”
은지는 자신이 말한 게 오히려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에밀리는 그런 은지를 향해 한 마디 더 했다.
“근데, 왜 다시 인디언 머리하는 거야? 스타킹도 다시 신고.”
“….”
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인디언 머리라고 불린 자신의 땋은 머리를 슬쩍 들어 보다가 이내 2층으로 올라갔다.
에밀리는 은지가 돌아간 자리에서도 연신 피식거리며 중얼거렸다.
“하긴, 스카페이스도 아니고 스카 백이라고 그러면 좀 멋 없기는 하지.”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오른쪽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때 금발과 흑발이 섞인 머리카락 속에서 찢어진 흉터가 있었는데, 헤어 스타일을 묶어 올리거나, 올백으로 넘기면 바로 드러날 크기였다.
물론 그녀는 내색 없이 잘만 다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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