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128 잠.깐.만!!!!!
* * *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새벽부터 일어난 은지가 부스스한 머리를 붙잡고서 바로 옥탑방 욕실로 들어가 바로 씻고 나왔다.
“아휴….”
은지는 씻고 나오자마자 길게 한숨을 쉰 다음, 누가 볼까 봐 바로 알몸에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움직였다.
2층 내려가서 밥 안친 다음에 머리 만지려고 했는데, 그녀가 나오자마자 본 것은 공기총을 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김준이었다.
“…?!”
은지는 김준을 보자마자 놀라다가도 천천히 다가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깨우려고 은지의 새하얀 손이 김준의 뺨에 닿았을 때, 순간적으로 그가 눈을 떴다.
“?!”
김준은 눈을 뜨자마자 흠칫한 은지를 보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빠 왜 밖에서 주무세요?”
총을 들고서 옥탑방을 맴돈 흔적이 보였지만, 은지는 모르는 척 떠보면서 조용히 김준의 뺨을 쓸어내렸다.
김준은 새벽의 일을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고는 힘들었던 야간 경계를 겨우 풀었다.
“옥탑방 애들은 계속 잔 거야?”
“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후, 뭐라 해야 하나… 아니다. 내려가면 그때 얘기하지 뭐.”
김준이 모두가 모인 다음에 말한다고 하자 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분주하게 움직였고, 젖은 머리를 찰랑이며 달려갈 때 그녀의 긴 치마 속으로 팬티스타킹 라인이 슬쩍 보였다.
김준은 공기총을 세워놓고 한숨을 쉬면서 뒤늦게 내려갔다.
“하필 잠깐 졸아서….”
김준이 투덜거리면서 2층 집으로 내려왔을 때, 아직도 다른 아이돌들은 잠에 빠져있었다.
딱 딱
은지 혼자서 주방에 렌지를 키고, 국을 끓이기 위해 냄비를 올릴 때 김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거의 기계처럼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다른 애들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빠지면서 상을 피고 밥을 먹을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는 소녀.
하필 오늘은 유독 젖은 머리가 더 섹시하게 보여서 김준이 무심코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은지가 앞치마를 입고서 김치를 꺼내 썰어 넣을 때 모습을 보면, 마치 아침 준비하는 신혼 주부 같았다.
“….”
김준은 새벽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가도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은지의 등에 닿았고, 순간 흠칫한 그녀는 국자를 든 채로 휙 돌아섰다.
“…!!!!”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는 은지를 보고서 김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털었다.
“어우.”
“…하지 마요.”
“그래, 우리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
다른 톱스타들과 다르게 김준이 주물거리면 달아올라서 하는 게 아니라 질색하는 은지.
엄밀히 말해서 ‘딱 한 명’ 빼고 모두 섹스한 사이인데, 그녀는 그때 이후로도 계속 미묘한 감정으로 거리를 뒀다.
드르륵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는 인아가 나와 주방을 보고는 바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아 은지 언니랑 오빠… 일어났어요? 잠깐만요.”
그녀는 바로 욕실로 달려가 물을 틀고 씻었고, 김준은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 그냥 거실 소파에 앉아 아침밥만 기다리기로 했다.
인아랑 은지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시간이 지나 하나둘씩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서 김준은 바깥을 한 번 보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오늘 루팅 취소.”
“네?!”
“오우 안 가는 거야?”
오늘 나갈 준비를 했던 라나와 에밀리는 김준의 취소 이야기에 놀란 눈치였다.
다른 톱스타들도 뭐가 문제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했고, 가야가 먼저 물었다.
“갑자기 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 있었어.”
김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아까의 이야기를 말했다.
“새벽에 자다 깼거든? 근데 깬 이유가 차 소리 들은 거였어.”
“네?”
“아니 엑셀 땡긴 소리가 나서 깼다니까?”
김준의 말에 웅성거리는 분위기.
그리고 상황 파악을 한 현재 톱스타들의 2대 리더 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새벽에 나온 게 그거 때문인거군요.”
“그래, 잠깐 돌았어.”
“그럼 오늘 일과는 어떻게 하죠?”
은지의 물음에 김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정했다.
“오늘은 딱히 집수리할 것도 없어. 일단 집안에서 각자 자유시간 줄게. 단 에밀리랑 라나는 오늘 나가지 않는 대신에 집 밖에서 주변 경계 나랑 같이좀 서 보자.”
“오케이! 보우건 준비할게.”
“저도 뭐 챙기면 되려나요?”
“그래.”
자유시간 주면서 일단은 편히 있으라고 하니 거기서 은지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그럼 잠깐 애들 데리고 할 게 있어요.”
“뭔대?”
“저번에요. 서점에서 책 털었을 때, 요리책을 몇 개 가져온게 있는데 그거 가지고 애들 요리나 가르쳐 보게요.”
“어,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해.”
다른 아이들도 요리책 보면서 직접 만든다고 하니 재밌겠다면서 기대하고 있었다.
***
“흐아암~”
“지루하지?”
“앗, 아니에요!”
옥탑방에서 새총 하나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깥을 살피던 라나는 김준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보초가 원래 개 지루해. 보이는 것도 없고.”
“흐응….”
바깥을 보니 미세먼지 하나 없는 푸른 하늘에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주변에 인적이 하나 없었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철새 떼라도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는데, 하늘 위에 새 한 마리 날아다니는게 안 보이고, 골목에도 개나 고양이 한 마리 안 보인다.
“고양이 같은 거 없으려나.”
“왜? 키우게?”
“큰일나겠죠?”
김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다. 밖에서 새나 멧돼지나 붕어 잡는거 보면 동물을 섭취할 때 좀비 감염은 없는 거 같은데.”
“막 나중에는 좀비한테 물려 감염된 들개나 고양이 나오면… 으으으!”
라나는 좀비 영화에서 봤던 동물을 통한 감염 위험성에 두려워하며 덜덜 떨었고,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똥머리로 올린 푹신한 머리카락을 쓰다듬해줬다.
그 반응에 좋아하며 더 해달라고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유리처럼 깨끗한 뒷목에 손이 가고 또 등까지 내려왔다.
옷 위에 만져지는 살과 브라끈 감촉은 언제 만져도 까실까실한 기분이 참 좋았다.
아까 정색하던 은지와 다르게 그르릉거리는 라나와 서로 힐링을 느낀 김준은 다시 총을 들고 내려왔다.
1층에서는 캠핑카 문을 열고 앉은채 쉬고 있는 에밀리가 있었다.
“준~ 내일은 갈 수 있어?”
“내일도 문제 없으면 모레 갈거야.”
“흐응, 그렇구나.”
에밀리는 김준이 옆에 앉자 홀로 흥얼거리면서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걸그룹 스피넬 시절 우월한 피지컬로 댄스 실력은 S급이었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노래 실력도 굉장했다.
마치 좋은 날씨에 지저귀는 한 마리의 새와 같은 소리였고, 김준은 그 자리에서 계속 노래를 듣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만 들어가자.”
아침과 점심 먹을 때 빼고는 계속 밖에서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차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의 저녁은 요리책 보고서 각자가 만들어본 진수성찬이었다.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언니, 이거 그거죠? 월남쌈!”
“맞아.”
은지가 요리책 보고서 지난번 공단면에서 가져온 쌀가루랑 전분을 가지고 라이스 페이퍼를 만들었다.
그것을 데친 물에 살짝 불려서 인아가 매일같이 가꾸는 채소와 버섯을 하나하나 싸고, 고기 한점 올려 돌돌 말아먹으니 딱 식당에서 먹는 그 맛이었다.
“으음~ 잘했네?”
“이건 저희들이 만들었어요.”
마리, 나니카, 도경 셋이서 서로 팀플로 만들어 온 음식은 잡채였다.
라면이야 유통기한이 얼마 안남았어도, 당면은 제대로만 보관하면 2년도 넘게 있을수 있으니 넘쳐나는 물자 중 하나였다.
“흐음?”
“얘가 채소 썰고, 얘가 간했고, 제가 볶았어요.♥”
마리가 각각 양옆에 있는 도경과 나니카를 보여주며 말했고, 김준은 한 입 먹어본 다음 괜찮은 맛에 엄지를 올렸다.
그 뒤로 가야가 직접 끓인 만둣국, 인아가 빚은 소면 등으로 오늘의 식사 역시도 엄청나게 화려했다.
실컷 먹다보니 또 술을 부르는 날이 됐고, 특히 잡채는 김준이 오늘 남은거 내일 아침 잡채밥이랑 계란국 만들어 달라는 오더까지 내렸다.
그 뒤로 다음날 역시도 개인 정보의 시간을 가지고 차 소리를 들은지 정확히 모레가 되어서 김준은 움직일 준비를 했다.
“역시 이거 무거워.”
“개량은 못해.”
“아, 아니에요! 은지언니! 힘들게 만들어주신건데!”
라나가 혼자 중얼거리다가 뒤에 있는 은지의 말을 듣고서 방검 스웨터를 늘이면서 한바퀴를 돌았다.
샤랄라한 감각은 없고, 육중한 갑옷과도 같았다.
그리고 에밀리 역시도 옷을 갖춰 입고 나왔다.
똑같이 은지가 만든 방검복에 김준이 살쪄서 못 입었다는 가죽 재킷을 입고 나왔는데, 하필 바지도 청바지여서 선글라스랑 헬멧만 쓰면 딱 바이커 갱스터 같은 모습이었다.
“흐음~ 오늘 패션 좋고~”
“좀비 잡으러 가는 거야.”
“응~ 알아. 근데 내가 잡힐 일 없어.”
에밀리는 싱글벙글한 얼굴이었고, 요새 들어 애들 너무 방심하는거 아닌가 싶었지만, 김준은 그녀들을 믿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가장 루팅을 많이 다녔던 게 라나와 에밀리고 둘 다 김준과의 콤비는 상당히 잘 맞아 돌발행동도 별로 없었다.
“잘 다녀오세요.”
“다들 조심해.”
모두 나와 해주는 배웅을 받은 김준은 두 아이돌을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차에서 나온 뒤로 김준은 어제 가기로 했던 그곳으로 곧바로 액셀을 밟았다.
“고가밑 길로 갈거야. 어제 말한대로 그 골목쪽에 헌책방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옆에는 같은 사장님이 운영했던 슈퍼마켓이 있어.”
“웬만한건 다 썩었을텐데, 물하고 통조림만 챙겨야겠죠?”
조수석 라나의 물음에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휴지랑 비누도 챙겨야지.”
“아, 물티슈도 챙겨야될거야. 요새 방청소 그걸로 해서 금방 소비되더라고.”
방마다 여자애들이 물티슈를 왜 그렇게 많이 쓰나 했더니만, 걸레 안쓰고 그걸로 뽑아 닦아낸다고 하니 과소비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고가밑 일대는 몇 번이고 다녀서 좀비들을 잡았고, 꼭 지나치는 길이기도 해서 좀비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들밭에서 고라니나 새떼가 보이긴 했지만, 저걸 딱히 잡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김준은 능숙하게 헌책방 골목까지 왔다.
일방통행이어서 아주 좁은 길에 캠핑카가 들어오자 도로가 꽉차있었다.
“흐음~ 레트로 스타일이네?”
아날로그 간판으로 된 옛날 슈퍼마켓, 비맞아서 퉁퉁 불은 참고서가 바깥에 잔뜩 쌓여있는 헌책방, 그리고 반대편 상가 역시도 운영은 하나 싶은 낡은 이발소 하나에 [상가문의]라고 붙은 표지에 검붉은 자국이 묻어난게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빠아아아아앙
김준은 FM대로 움직였다.
처음 루팅 장소 앞에서 클락션을 울린다.
그리고 천천히 기다려본 다음에 천천히 총을 들고 내려온다.
그리고 헌책방 내부를 살펴 본 다음에 조수석에 있는 라나가 내려서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뒷좌석에 있던 에밀 리가 석궁을 들고서 문 앞에서 경계를 선다.
“잘 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고.”
“오케이!”
“나라야 한번 둘러봐.”
“흐응~ 네~”
라나는 헌책방에서 참고서나 낙서 가득한 교과서는 치우고 당장 볼만한게 뭐가 있나 찾아봤다.
다행히 만화책이나 소설책은 1권부터 완결까지 노끈으로 묶여있어서 한 번에 챙기기 용의했다.
김준은 잡지들을 제치고, 이런데서 뭐가 더 있을까 뒤적거렸다.
그때 깊숙이 들어가서 뭔가를 발견했다.
“호오~”
“뭐에요?”
“건강서적 코너가 따로 있었구만.”
김준이 그 안에 들어가 보니 각종 한약 제조에있는 서적, 미용관련 서적, 그리고 의협에서 만들었다는 [응급처치 매뉴얼], [내분비 임상학],[쉽게 이해하는 해부생리학], 그리고 그 옆에는 간호학 매뉴얼이 있었다.
“아~ 뭔가 했더니만 간호학원 시험 볼 때 쓰던 책들인가보구나.”
그 책들 속에서도 간호사 시험과 간호대 생활에 대한게 나오는걸 봐서 이 근처에 옛날부터 유명했던 요양보호사/간호조무사 자격증 학원이 있었는데 그게 다 여기 있었다.
그래도 의대 졸업생인데 여기 있는거 가지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른애들 응급처치 하는 법은 알테니 다 챙겼다.
책은 얼추 챙겨서 옆에 있는 라나랑 같이 에밀리 불러서 이거 나르자고 할 때였다.
“꺄앗!?”
“!”
갑작스런 비명에 김준이 고개를 돌린 순간, 갑자기 에밀리가 안 보였다.
“뭐야?! 얘 어디갔어?”
“에밀리 언니!”
라나가 황급히 달려가려다가 김준이 바로 붙잡고는 먼저 나왔다.
그 순간 문에 나오자마자 김준은 반사적으로 권총을 꺼냈다.
철컥
스릉
“…!!!!”
순간 눈앞의 상황을 보고 심장이 멈출뻔한 김준이었다.
“하~ 시발, 이 동네 웬 백마가 돌아다닌다 했더니만 산 놈들이 더 있었어?”
“개 씨발것들이….”
“어~ 어~ 그거 내려놔. 내려놔 빨리~”
“우웁! 으븝!”
낡은 양복을 입은 거구의 두 사내.
그들은 길다란 회칼을 가지고 에밀리를 붙잡아 입을 틀어막고 그녀의 몸에 칼을 들이댔다.
제일파 조폭이었다.
이 놈들 신릉면 나왔을때만 하더라도 다시 만날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중간 지점에서 결국 루팅 속에서 만나게 됐다.
“이 새끼들. 걔 안 놔주냐?”
“아그야. 총 내려놔라. 안 그러면 이 년 모가지 그어진다.”
스윽
김준이 조금만 더 움직이면, 그 즉시 에밀리를 칼로 찢어버리겠다는 위협을 하는 제일파 조폭들.
좀비가 없으니 인간들끼리 다시 한번 대치하게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