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121 비 오는 날 빨간 옷.
* * *
“흐엣취!”
김준은 아침부터 으슬으슬한 날에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게 다른 애들에게도 전염된 걸까?
“엣취!”
“으으으 추워!”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가 이거저거 껴입고서 벌벌 떠는 아이들이 보였다.
가야는 지난번 정토사에서 선물 받은 스웨터를 껴입었고, 나니카랑 라나는 화투 칠 때 쓰던 모포를 펼쳐서 둘이 무릎을 덮고 있었다.
은지도 ‘그 날’이후로 껴입던 스타킹과 치마 대신 핫팬츠를 입더니 다시 옷차림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다른 아이들도 뭐 하나씩 더 걸치면서 추운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 아침은 미역국이에요.”
인아는 오늘의 국이 담긴 냄비를 오븐장갑으로 껴 와서 뚜껑을 열었고, 추운 날이라는 것을 알리듯 연기가 뿜어졌다.
평소와 다른 이상기온에 모두다 국자로 뜨거운 국부터 푸면서 추운 속을 녹였다.
“비가 아직도 안 그치네?”
벌써 사흘째였다.
처음 폭우가 왔을 때만 하더라도 물 걱정은 없을 거라며 욕조 목욕까지 시켰는데, 아직도 내리는 비로 인해 물은 정말로 넘쳐났고, 빈 병이란 빈 병은 죄다 모아서 빗물로 차 끓이는데 쓰고 잔뜩 모아놨다.
“물.”
“하나씩 드세요.”
보리차가 가득 담긴 페트병 9개가 놓였고, 1인 1페트로 하나씩 마시는 상황이 되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싱크대에 펑펑 쓰면서 박박 닦아내는 설거지.
그리고 식사가 끝났을 때, 김준은 결심한 듯 우비를 꺼내 입었다.
“밖에 나갈 거야.”
워커를 신고 허리춤에 도끼를 찬 채, 판초 우의를 꺼내다 입고서 엽총을 들고 있는 모습은 마치 슬래셔 무비에 나오는 살인마를 연상케 했다.
“지금 루팅 나가요?”
“바깥에 근처 도는거야.”
“!?”
김준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돌들, 하지만 그중에서 은지가 조용히 나섰다.
“같이 나가죠.”
“옷 단단이 챙겨. 바깥에 춥다.”
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난번에 멧돼지 습격 이후로 갈기갈기 찢어졌던 빨간색 가죽 재킷을 꺼냈다.
그걸 일일이 바느질해서 다시 꿰맨 다음에 아예 패치까지 덧댄 모습에 김준은 다른 애들도 둘러봤다.
“바깥 경계야? 그럼 나도 가지 뭐.”
에밀리도 나서자 김준은 둘이면 충분하다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들어올 때, 커피 뜨끈하게 끓여놔.”
“네? 아, 네!”
“설탕 많이 넣어서.”
“네~ 네~”
김준은 다른 아이들에게 집단속 맡긴 다음 천천히 나섰다.
비가 오는지라 전기충격기는 못 쓰고, 새총과 지팡이 정도로만 나선 두 여성.
그리고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바깥은 완전 물바다였다.
“어머, 저거….”
“흐음.”
은지가 가리킨 곳에는 지난번 비가 쏟아지기 전에 새벽에 잡았던 좀비였다.
총에 맞아 죽은 상태로 비가 연신 쏟아져 흐물흐물해진 시체가 점점 바닥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김준은 좀비 시체들을 뒤로 한 채 집 주변을 돌았다.
뒤에서는 은지가 지팡이를 들고서 주변을 둘러봤고, 에밀리는 김준이 챙기라고 한 사과박스 안에 빈 소주병과 잡동사니를 잔뜩 챙긴 채로 뒤따라왔다.
그들이 먼저 향한곳은 자신들이 사는 집 뒤에 있는 빌라촌이었다.
옛날 빌라라서 5층도 안되는 단층에 콘크리트로 된 담장은 여기저기 갈라져서 비를 맞고 있는게 을씨년 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빌라 입구 근처에는 지난번 석궁 두 발 맞고 죽어 있는 좀비 시체가 있었다.
“어우 그거 같네.”
“그거?”
“그 로드킬 당해서 죽은 동물이 비맞았을 때 불어터진거.”
“….”
에밀리의 말에 김준은 피식 웃으면서 가져온 거 내려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잠시 물러나라고 한 다음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소주 병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강
짝
김준은 가져온 소주병들을 하나하나 깨면서 날카로운 조각들을 바닥에 깔았다.
“에밀리, 줄!”
“여기!”
에밀리가 박스 안을 뒤적거리면서 쇠사슬을 꺼냈다.
이건 자동차 주차구역 확보용으로 페인트칠을 한 사슬이었는데, 전부 가져와서 빌라 입구에 깔기로 했다.
땅 땅
비를 잔뜩 맞은 벽돌 장벽에 대고 못질을 하니 힘없이 뚫렸다.
김준은 문 양쪽에 못을 박은 다음 쇠사슬로 빌라 입구를 전부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들을 지팡이로 슬슬 쓸어서 일자로 트랩을 만들었다.
“이걸로 이쪽 좀비는 뛰어오는 순간 작살이야.”
“진작에 이렇게 할 걸….”
에밀리나 은지가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형식으로 후방에 길을 틀어막자 김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앞쪽은 전기 철망을 쓰고, 뒤쪽 담벼락에 본드로 유리랑 녹슨 못 깔아서 이걸로도 충분하다 생각했어.”
“하지만 세 번이나 왔죠.”
“방어 쉘터를 더 넓혀야 했다는 거 인정.”
김준은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빌라 일대의 입구를 다 막고서 다시는 이쪽을 통해서 좀비가 못 들어오게 했다.
그다음으로 주변 일대를 걸어 다니면서 경계의 시간을 가졌고, 다행히 걸어서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살폈지만, 좀비라고 보이는 것은 전부 새벽에 잡았던 빗물에 불어터진 좀비 시체들 뿐이었다.
“후우”
“들어가자.”
에밀리가 추운지 이를 딱딱 물면서 입김을 뿜어내자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집으로 들어가라고 한 둘을 두고서 김준은 담배 한 대를 물고서 1층 상가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오자 순간 후끈한 열기가 확 올라왔다.
비가 와서 햇빛도 못 보는 상황에서 상가 내의 채소들은 연신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다.
지난번 드럼통을 갈라서 만든 화분도 흙만 채워넣는다면 저기다가 볍씨를 심어도 되고, 배추를 심어서 자체 수급을 할 수 있을텐데 지금은 부족한게 너무 많았다.
“후우”
김준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면서 으슬거리는 날씨에 결심했다.
***
“비 그치면 나가려고 했는데, 이게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그럼 비 오는 상황에도 루팅 나가려고요.”
“그러려고.”
또 다시 루팅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에 각자 상황에 대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간 게 라나랑 도경이지?”
“한 번 더 갈수 있죠.”
“아직 나 한 번만 갔어. 라나가 교대해줘서 그렇지.”
가야가 손을 들자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야를 픽했다.
“도경이는 절하고, 고물상 두 번 갔으니 이번에 빠지고 그러면 라나가 갈까?”
“저는 상관 없어요.”
김준은 그 상황에 대해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지도를 펼쳐서 이번에 갈 곳을 정했다.
“이번에는 서해안 공업단지로 갈거야.”
“어머, 여기는….”
가야가 그곳을 보고서 기억을 되짚자 옆에서 보고 있던 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맞네. 신릉면에서 그 술집 언니들 데려다 준곳.”
술집언니들이라는 말에 마리가 움찔했다.
“그거… 오빠 조폭들하고 싸워서 크게 다친 일이잖아요?”
“뭐, 다 나았어.”
어디 불편한 곳도 없고 팔을 휘휘 돌리면서 건장함을 보인 김준이었다.
마리나 나니카 등은 지난번 김준이 크게 다친 곳이라는 말에 염려했지만, 이미 이사간지 오래고 그쪽으로 안 갈거니 문제 없을거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라나는 자신도 향할곳이니 이제껏 지도로 갔던 곳 표시를 쭉 보다가 뭔가 떠오르는게 있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까 여기… 저 처음 나갔던 곳이네요? 그 약국 털었을 때.”
“맞아.”
“그리고 여기서 국도로 쭉 가서 그 횟집에 고기들 가져왔다가….”
“좀비 튀어나와 뒤질 뻔 했지.”
그때를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한 라나였지만, 그 사이에 있는 다른 길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예능 촬영지였던 수도권 외곽의 시골동네인 이 소사벌시.
하지만 이제는 잦은 루팅과 동거생활로 인해 웬만한 길은 어느정도 숙지했다.
“여기가 원래 공단 일대에서 원룸촌하고 유흥가랑 생활용품점이 많은 곳이야.”
“일용직 노동자들 많이 사는 곳이었다는 거죠?”
“그렇지. 그래서 가구 상가나 가전제품 상가가 아주 많아. 이번에 가면 냉장고하고 발전기 추가로 한번 가져오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냉장고를 더요?”
김준은 마리와 가야의 물음에 손으로 거실에 잔뜩 쌓여있는 차가 담긴 물병들을 가리켰다.
“저거 상온에 계속 놔둘까?”
“그것도 그렇네요.”
김준은 수첩을 펼쳐서 하나하나를 볼펜에 적기 시작했다.
“냉장고, 이왕이면 그 모텔 같은데서 쓰는 소형 냉장고 여러대 있으면 좋겠네. 그리고 캠핑용 발전기, 이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다음으로 화훼상을 가서 분갈이용 흙도 찾으면 좋겠고….”
“오빠.”
“왜? 인아야?”
인아는 이번에 자신이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필요한 것에 대해 몇 가지 말했다.
“그동안 1층 밭 매면서 도구가 부족하거든요?”
“뭐뭐 필요한데?”
“분무기, 꽃삽, 호미, 장갑 이런 거요.”
“비료도 챙길까?”
“화학비료… 있으면 좋은데, 지금은 쌀뜨물이랑 다쓴 티백으로 하고 있어요.”
매일같이 밥을 지을 때, 쌀 씻은물을 가져다가 비료로 썼는데 야채가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확실히 집에서 먹는 채소 재배는 그녀가 전담해서 하고 있었고, 1층은 말 그대로 인아의 화원이었다.
“저번처럼 물물교환으로 쓸만한 것들 챙겨놓고 움직이자.”
“네, 오빠.”
다른 아이들이 움직이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가야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근데 거기가 뭐 교환할 게 있으려나….”
***
끼익 끼이익
와이퍼가 움직이면서 빗길에 물자를 실은 캠핑카가 국도를 달렸다.
“비와서 특히 좀비가 안 보일 수 있어. 잘 봐야 한다.”
“네~ 걱정마세요.”
라나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양옆의 창가와 뒷문을 보면서 인간 레이더가 되어 움직였다.
가야 역사도 조수석에서 잘 살펴봤지만, 빗속에서 다가오는 좀비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장마가 계속 돼서 좀비가 다 죽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김준은 가야의 말에 예전부터 좀비물을 보면서 궁금한게 있었다.
대체 좀비들은 자연재해에 대해서 어떻게 넘어갈까? 특히 비와 눈이 올 때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기온에는 그냥 죽는 걸까?
어쩌면 이번에 알 수 있을지 몰라 김준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서해안까지 가는 길에 신기하게도 좀비를 잡을 상황이 안나왔고, 몇몇이 저 멀리 기어다니는게 보였지만 저걸 쏘고 가느니 시간낭비만 될거 같았다.
“어머! 저거봐요.”
“뭔데?”
라나의 말에 김준이 고개를 돌리자 하천에서 싯누런 물이 콸콸 쏟아지면서 폭포처럼 역류하고 있었다.
“어우, 하천 물이 다 넘치네.”
김준은 저거 농사철이었으면 진짜 작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상황이었으면 수로 손질하고, 각 논밭마다 물꼬 내면서 파냈을텐데 오랜기간 방치된 논밭이 여름 모내기 논처럼 웅덩이가 되 있었다.
“저기, 저희 집 있는데까지 물 넘치진 않죠?”
“괜찮아. 이 동네에서 지대가 제일 높은 곳이야.”
김준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서해안 도로를 타고 공단 시내 쪽으로 향했다.
원래 이곳도 80%까지 지어진 아파트 단지 속에서 지금쯤이면 입주가 완공되고 아름다운 호수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넘칠 자리일텐데 완전 폐허가 되버렸다.
김준은 씁쓸한 얼굴로 골목을 돌아서 노래방 빌딩 쪽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라나가 뭔가를 발견하고 앞을 두들겼다.
쾅쾅
“오빠! 오빠!”
“뭐야? 뭐냐고?”
김준이 차를 멈췄을 때 라나가 뒤에서 계속 한 곳을 가리켰다.
“차 돌려서 저기요! 저기 빨간 옷!”
“뭐?”
김준이 차를 돌려서 뒤쪽을 보자 정말 비 오는날에 빨간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 뭐야? 사람이야?”
가야도 그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 입을 막았고, 혹시라도 좀비일지 적일지 몰라 대쉬보드에서 새총 탄을 꺼냈다.
철컥
김준 역시도 총알을 장전하고 천천히 기다렸다.
좀비라면 원샷 원킬이고 사람이라면 일단 이곳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후자였다.
“어? 저기 손 흔든다!”
“!”
김준은 바로 엽총에 스코프를 통해서 그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들여봤다.
그리고 캠핑카를 보고 손을 흔드는 빨간 우의의 사람들은 모두 여자, 그 중에 한 명은 한국인이 아니라 동남아 사람으로 보였다.
“뭐야, 쟤들….”
김준은 바로 핸들을 돌려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차가 다가오자 반갑게 손을 흔들던 이들은 들고 있던 양동이를 내려놓고는 인사했다.
“중사 아저씨!”
“맞네! 김준 아저씨잖아!”
“…여기서 뭐해요?”
황 여사 일행의 종업원들이었다.
지난번 신릉면에서 이들을 데리고 여기로 옮겨줬을 때 감사인사를 표했던 그녀들을 보고 가야도 알아봤다.
그녀들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 얇은 우의 하나 걸치고는 그에게 물었다.
“태워주실수 있어요?”
“…그래 타.”
라나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두들기자 그녀들이 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라나는 양동이에 담긴 것을 보고서 비명을 질렀다.
“꺄악! 이게 뭐에요?”
“물고기! 오늘 먹을거에요.”
“호수에 붕어 풀어놓은 거 잡았어요. 다 살아있다고요.”
“엄맛! 나 생선 못 만져!”
라나가 질색하는 소리가 들렸고, 김준은 비가 쏟아져 흙탕물이 된 인공호수에서 붕어를 잡아다가 가져가는 길이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도 어떻게 살아는 가네?”
김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황 여사가 있는 노래방 건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