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100 살다보니 아이돌들과 새해를 보내네?
* * *
집 안에서 편히 쉬려고 했다가 여기저기서 꾀인 쥐 떼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는 바로 끝났다.
그래도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다 보니 지긋지긋했던 붕대를 하나둘씩 풀 수 있었다.
“유리 조각 찔린 곳은 다 나았고, 이제 여기만 붙으면 되겠네요?”
어깨와 팔뚝 일대에 꿰맨 상처들도 점점 봉합되고 있었고, 실밥을 뜯어내면 흉터는 좀 남아도 움직이는덴 문제 없을 것 같다.
“나중에 문신이나 할까?”
“그런거 위험해요.”
마리는 문신 같은 것에 질색하면서 만류했다.
드레싱이 끝난 뒤로 일어난 김준을 향해 마리는 슬며시 그의 옆으로 기댔다.
“아침부터 왜 그래?”
“오늘이 무슨 날이게요?”
“음….”
12월 31일.
살다 보니 세상이 망하고, 좀비가 세상에 깔리고 총을 들고 무법자처럼 다니다가, 여덟 아이를 구하고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마리가 슬며시 김준의 오른팔에 팔짱을 끼고 있을 때, 그는 머쓱한 듯 얼굴을 긁적였다.
아침이 돼서 식사 자리가 됐을 때, 오늘따라 들떠 있는 에밀리였다.
“올해가 얼마 안 남았어! 내일이면 해피 뉴이어~!”
“아, 진짜 새해가 오네?”
“네, 여기서 새해를요….”
에밀리의 말에 가야나 나니카 등의 아이들도 동조했다.
그녀들 역시도 죽을 고비에서 구해준 김준을 따라 이 집에서 동거하게 된 지도 벌써 몇 개월이었다.
이러다 구정까지 가면 진짜 반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스터 준~ 그거 알아?”
“뭐가?”
“미스 마리, 생일 1월 30일!”
“어?”
“빠른 생일이라고 하더라고~”
에밀리가 한 달 남은 마리 생일을 잊지 말아 달라며, 손가락을 튕기고 눈을 찡긋했다.
“어, 진짜… 그러네요?”
다른 사람이 말해준 자기 생일 체크 덕분에 마리는 생일이 지금부터 D30이라는 것을 카운트했다.
진짜 그때까지도 아무 일 없이 지난다면, 은지에 이어서 두 번째로 집 안에서 톱스타의 생일파티를 벌이게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유쾌하게 넘어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울적해지는 쪽도 있었다.
특히 인아는 지난번 우울함이 터져서 집안일이고 뭐고 손 놔버렸다가 겨우 돌아온 뒤로 다시 울적함이 오는 것 같았다.
“음, 지금 서울은 어떠려나?”
“….”
“딸그락!”
도경이 넌지시 중얼거린 말에 다시 한번 수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지금의 서울은 어떨지, 그리고 자신들의 주변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을지 갑자기 떠오르니 슬퍼졌다.
다시 한번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울적 바이러스가 흐르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때 은지가 조용히 김준을 가리켰다.
“오빠….”
“왜?”
“…내일이면 서른.”
“…?”
은지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슬며시 웃었을 때, 별안간 무슨 나이 이야기냐고 물으려고 할 때였다.
“…킥!”
“지금 웃는 사람도 스물여덟.”
우울함 속에서 은지가 나이 이야기 한마디 한 거로 가야도 순간 뿜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서 우울 바이러스가 점점 희석되고 있었다.
“왜 내일부터야? 생일이 지나야 서른이지!”
“디스 이스 코리안 스타일!”
은지가 한 마디 더 붙이자, 그 말을 들은 에밀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글쎄? 생일은 생일이고 나이 계산은 룰 대로 해야지? 안 그래 나니카?”
“네, 넷?!”
“말해봐. 저패니스도 생일 지나야 나이 먹지?”
“저, 저기… 저희는 설날 이후로 연호대로 쓰지만, 생일은… 그렇네요. 그 뒤로 나이가….”
“연호? 아, 거기 왕 있었지? 그 사람은 좀비 세상에 잘 지내려나?”
다른 일본인이 들었으면 기절초풍할 드립 한 번 친 에밀리.
그리고 나이 이야기로 조금씩 웃는 아이들 속에서 에밀리가 타겟을 돌렸다.
“미스 마리! 그렇게 치면 우리 스물 다섯 동갑?”
“네~ 뭐 편한 대로~”
“데뷔도 느리면서….”
“셧업, 발리볼 걸!”
도경까지 끼어들자 우울 바이러스 속에서 인아까지 미소를 짓고 아침부터 서로를 보고 웃음꽃이 피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김준도 한 마디 거들었다.
“생각해보면 언니 셋이라고 가야랑 은지랑 마리랑 부르는데, 에밀리도 그 나이잖아?”
“난 별로 언니 소리 못 듣지만~”
“아니에요. 에밀리 언니!”
그렇게 아침 식사는 다행히 웃으면서 끝낼수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냥 둘 수 없어서 고무장갑을 챙긴 김준이었다.
“자~ 오늘은 나도 설거지 좀 해야겠다.”
“아니에요! 저희가 할게요.”
“줘 봐~ 오랜만에 해 보게.”
이 아이들이 첫 날 왔을 때, 이후로 설거지는 그녀들의 몫이었다.
생각해보면 처음에 묽은 스프 끓여주고 이후로 애들이 눈치껏 움직여줬다.
김준이 인아가 가진 그릇들을 받아 하나하나 씻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다들 잘 해주네.”
“네?”
“음식 말이야. 너희들 없었으면 아마 혼자서 생야채 씹어먹었을걸?”
“아….”
인아와 은지.
두 소녀가 요리하면서 기존에 있던 음식 이후로 채소를 직접 기르고, 음식을 만들어내서 아포칼립스 속에서 풍족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김장도 직접 했잖아?”
“어렸을 때 배운거라….”
김준은 간간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기는 인아를 보며 쟤는 특별히 멘탈케어를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설거지를 마친 뒤로 김준은 오늘 하루 올해의 마지막을 위해 움직였다.
***
끼릭 끼리릭
“그렇지! 파이프렌치는 그렇게 쓰는거야.”
“끄으응, 이거 점점 드러운게 나오는데요?”
식사 이후 3층 세면대가 물이 안 빠진다고 해서 내친김에 도경을 데리고, 막힌 파이프 뚫는 걸 가르쳐 주고 있었다.
김준은 직접 커버를 열고, 세면대 밑에 접촉부를 파이프렌치로 조여 풀어내게 했고, 도경이 공구를 다룰수록 그곳에서 새카맣고 끈적이는 물이 줄줄 떨어졌다.
“여러명이 한데 쓰니까 이게 막히는게 당연하지.”
“하… 난 세면대에 머리 안 감는데….”
왜 자기가 이걸 치워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툴툴 거렸지만, 전기 만지는 것도 그렇고 공구 다루는데 도경이만한 애가 없었다.
힘이 좋아서 남들 두세번 망치질도 한 번으로 퉁칠만하고, 렌치나 스패너도 잘 돌리고 말이다.
끼리리릭 뽕!
“으엑!?”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 밑으로 역한 냄새의 검은 덩어리들이 떨어져나왔다.
김준이 그 위로 물을 틀자 수압에 의해 나오는 것들은 죄다 엉겨붙은 머리카락이었다.
“아흐… 이게 다 뭐야? 진짜 세면대 머리 못 감게 해야 돼!”
“별별게 다 섞였네? 꼬불거리는건 가야고, 여기 누런건 에밀리일테고, 긴 머리는 누구꺼야?”
“전 아니에요!”
언제나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지금도 기른다는게 목과 어깨에 약간 닿을 정도인 도경이었고, 일단 세면대는 뚫었으니 뒷정리하고 나왔다.
그래도 수고했다고 냉장고에서 콜라 하나 꺼내주자 금방 풀린 소녀였다.
“오늘 새해 기념 회식 할거야.”
“맛있는 거라도 많이 먹어야죠.”
도경은 이곳에 머물면서 별별 일을 다 해봤지만, 맛난 거 먹는 것이 제일 행복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애들이 다들 착해서 알아서 할 일 다하고….”
김준이 그렇게 말하며 옆 방을 봤을 때, 그곳에는 라나와 나니카가 옷을 만들고 있었다.
“오빠! 우리도 콜라!”
라나의 말에 김준이 두 잔 따라줘서 그녀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김준이 안 입는다고 내놓은 옷을 자르고, 사이즈를 맞춰서 수선을 하는 두 소녀였다.
특히 예전에 김준이 수영복으로 썼던 트렁크 반바지를 아이돌 허리에 맞춰 줄인 다음 한단을 더 잘라내서 핫팬츠로 만들어내는 라나였다.
“핫팬츠 정말 좋아하는구나.”
“편하잖아요♥”
은지에게 배운 두 소녀가 뜨개질에 이어서 옷 수선하는 법도 배워서 자기 입을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라나는 지금 입고 있는 핫팻츠 너머로 하얗고 말끔한 다리를 자랑했고, 작고 매끄러운 발에는 매니큐어까지 발톱에 바르고 있었다.
“그렇게 촌스럽다고 하더니만.”
“의외로 좋았어요. 여기 화장품 나중에 써도 되겠는데?”
틴트에 매니큐어에 립스틱에 파우더에 화장품 가지고 메이크업은 언제나 그녀가 다 차지한거 같았다.
“저기… 오빠.”
“음? 나니카 왜?”
“이거, 완성되면 드릴게요.”
나니카가 만들고 있는 것은 폐의류를 잘라서 손수건을 만들고서 완성되면 김준에게 주겠다고 한다.
김준은 피식 웃으면서 두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따 밤에 다같이 모여서 회식 알지?”
“네~ 은지 언니가 파스타 만들어준대요.”
라나와 나니카 모두 각자의 일을 할 때, 김준은 천천히 옥탑방을 나왔다.
그러자 밖에서는 12월에 레깅스, 트레이닝 자켓 차림으로 운동을 하는 에밀리가 보였다.
누가 보면 정신나갔다고 할 짓이었지만, 좀비 사태 이후 이상기온 때문인지 영상 23도의 선선한 날씨속에서 땀을 빼내고 있었다.
스쿼트를 할 때마다 커다란 엉덩이가 부각되고, 헐거운 자켓 너머로도 가슴 부분만 툭 튀어나온 다이너마이트 바디였다.
“아, 준!”
“왜 런닝 안하고?”
“아까 1시간씩 하고 왔어.”
에밀리는 김준이 온 김에 잠시 쉬기 위해 계단에 걸터앉았고, 김준이 그 옆에 앉았을 때 땀 냄새가 살짝 났다.
“하, 더워.”
그러면서 자켓 지퍼를 내리자 그 안에는 브래지어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몸이었다.
“야이씨. 이 날씨에….”
“응, 안 추워.”
“자켓 올려. 땀냄새나.”
“응~ 냄새안나.”
냄새가 안 날 리가 없었고, 아이돌의 시큼한 땀냄새가 계속 김준의 코를 찔렀을 때, 그녀는 오히려 자켓 부분을 팔랑였다.
“아~ 내년에는 목표가 딱 정해졌어.”
“뭔데?”
“좀비 100마리 잡기.”
“… 이 세상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뭐, 계속 좀비 잡다보면 결국은 다시 사람이 많아져서 돌아오지 않을까?”
저세상 멘탈인거 예전부터 알았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다, 가족을 만나고 싶다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많은 좀비 잡아야겠다!’라는게 목표라는 에밀리.
그러면서 발그레해진 얼굴로 김준에게 달라붙으며 물었다.
“좀비 한 마리 잡을때마다 섹스 한 번이면 될까?”
“…진지한 이야기는 안 하고.”
김준은 한숨을 내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새해가 끝나니까 안 해봤던 거 다 여기서 경험을 만들었네?”
“음?”
“보우건도 쏴 봤고, 좀비도 잡아봤어! 그라인더도 써 보고, 기계도 만들었잖아.”
아이돌로 춤과 노래, 그리고 연기등의 수많은 것을 했어도 아포칼립스 상황에 떨어진 여자로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래도 다 잘해줬지.”
“쓰리썸도 처음이지만, 애널도 처음이었고….”
“풋 쿨럭! 쿨럭!”
김준이 사례가 들려서 쿨럭거리자, 에밀리는 은근슬쩍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
“훈련 해?”
“아, 오빠!”
김준이 1층에서 새총과 지팡이로 계속 전투 훈련을 하는 가야와 마리를 보고 인사했다.
마치 현역 병사들이 총 가지고 PRI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표적을 맞히기 위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잘 하네? 직접 맞춘거야?”
“아, 네!”
점점 표적 맞추는데 능숙해진 가야와 마리.
그리고 지난번 황 여사 일행을 돕다가 제일파 놈들과 싸웠던 것을 떠올렸다.
“가야가 대박이었지. 테이저건.”
“아….”
김준에게 달려든 제일파 조폭과 힘싸움을 할 때, 가야가 바로 창문 너머로 테이저건을 쏴서 도운 것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테이저 진짜로 쐈구나….”
마리가 가야를 보고 대단하다는 듯 말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쏜 한 발로 인해서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이라 떠벌릴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김준은 가야와 마리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조용히 집을 돌았다.
***
“자~ 다들 건배!”
“건배!”
밤 11시를 맞춰서, 새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오늘은 특별히 그녀들의 스마트폰을 조금씩 충전해 딱 알람을 맞출 정도로 남겼다.
“올해도 끝이네….”
“다들 내년에도 잘 지내자.”
“음~ 이거 피자 너무 맛있어!”
각자 한마디씩 하거나, 오늘을 위해 차린 망년회 파티 상의 음식을 먹는 아이들.
김준은 그 상황에서 뭔가 격려를 하려다가 분위기를 보고서 말했다.
“씨발! 내년이면 서른이다!”
“사실 별로 다를 거 없을거 같은데?”
에밀리의 말에 김준은 손사래를 쳤고, 한 살씩 먹는 아이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하다가 카운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서 카운트를 셌다.
“텐….”
에밀리의 말에 가야가 잽싸게 말했다.
“나인! 에잇!”
“세븐!”
“파이브”
“포!”
“…산~”
순간 영어 말고 다른 단어가 나온 것 같지만 제끼자.
“투!”
그리고 김준이 바로 일어났다.
“원! 해피 뉴이어!!!”
“해피 뉴이어!”
“후우~ 다들 새해 잘 보내자!”
“꺄핫!”
에밀리가 양 옆에 있던 라나와 나니카를 와락 끌어안고, 가야도 다른 아이들을 다독이며 위로했다.
은지는 조용히 박수를 치면서 미소를 지어줬고, 인아는 새해 첫 음식 기대하라면서 오븐에서 굽고 있는 파이를 가져와 각각 한 조각씩 잘랐다.
그리고 마리가 그 분위기 속에서 잽싸게 김준의 품 안으로 향하면서 속삭였다.
“오빠도 해피 뉴이어.”
“아, 그래. 새해복 많이 받아.”
“그럼 새해 기념은 이따가?”
“….”
그렇게 아포칼립스 속의 톱스타들과 동거에서 새해를 보내게 됐다.
앞으로 한 살씩 더 먹었으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세상에서 좀 더 희망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해에 할 첫 일은… 기념섹스 예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