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2 그때를 복기해보자.
* * *
피곤하다고 먼저 떠난 애들 하나둘씩 치우다 보니 남은건 은지와 가야 정도였고, 인아가 그릇을 하나씩 치웠다.
벌써 얼굴이 발그레해진 가야와 다르게 은지는 술 못 마신다면서 오늘따라 계속 견디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암튼 다들 잘 해주고 있어. 도경이도 몇 번 계속 다니다보면 익숙해지겠지.”
김준이 마지막 남은 소주를 기울여서 한 잔 딱 채웠을 때였다.
은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 상황에서 그 말을 꺼냈다.
“뭐, 다들 잘 지내고 있는 이 와중에 뻘질문 하나만 하자면요.”
“음?”
“만약에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정말 만약이지만….”
“그래, 뭐든 말해봐.”
“그날 갇혀있던 게 남자들이었으면 어떻게 하셨을거예요?”
“…?”
옆에서 듣고 있던 가야도 눈을 부릅떴고, 김준의 미간도 씰룩거렸다.
좀비 사태가 터지고, 몇 주간 갇혀있었던 예능 촬영 앞둔 미모의 여자 연예인들.
그리고 큰 고민 없이 모두를 거둬들였고, 지금까지 살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에 성별이 바뀌어서 보이그룹이었다면, 그때도 휴머니즘으로 구해줬을까?
“으, 은지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런 질문을 갑자기 왜 여기서….”
“말했잖아요? 그냥 뻘질문이라고.”
가야가 눈치를 보고 어떻게든 은지를 데려가려 했을 때 김준은 곧바로 대답했다.
“안고 가야지.”
“!”
은지는 그 대답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는 분위기였고, 김준은 거기에 답해줬다.
“오빠, 군생활 7년 넘게 했어. 좀 더 했으면 들어는 봤을 행보관이었겠지.”
“아….”
“남자면 걔들 통솔하고, 먹는 양은 늘겠지만, 그만큼 더 루팅을 자주 하겠지. 기계 만지는것도 다 가르치고.”
“그게 컨트롤이 되는군요.”
“못 할 것 같니?”
김준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고 은지는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뻘 질문이었어요.”
“아니야. 좋은 질문이었어.”
은지는 김준에게 사과한 다음, 남은 접시들과 김준이 비운 잔까지 자신이 다 치우고는 설거지까지 끝낸 다음 가야와 같이 올라갔다.
베란다로 올라갈 때, 가야는 뭔 쓸데 없는 소리를 하냐면서 타박하려고 하다가 그 앞에 멈춘 은지를 보고 자신도 멈칫했다.
“은지야, 너 왜그래?”
“…언니?”
“얘가 참.”
은지는 순간 허리를 짚으면서 고통스러워했고, 깜짝 놀란 가야가 술이 확 깨서 그녀를 부축했다.
“괘, 괜찮아?”
은지는 그런 가야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언제쯤 들킬까?”
“…들어가자. 그럴 일 없을 거야.”
연예인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두 여성은 조용히 옥탑방으로 올라가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속 애들하고, 그리고 오빠하고도 거리 두려고 하지 마. 다 티나.”
“….”
은지는 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고 벽에 지난날 생일파티때 붙어있던 사진들을 한 번씩 쓸어내리면서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
아침 일찍 일어난 김준은 아침 식사에서 한 명이 비는 것을 보고 가야에게 물었다.
“은지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애가 원래 알쓰인데, 어제 괜히 자리에 남았고, 그러다보니….”
“은지 언니가 술병인가 보네요.”
마리가 바로 눈치를 채고서 말했다.
“링거 한 병만 맞으면 되는데, 그건 안되니까 일단 죽하고 국 좀 퍼서 살펴볼게요.”
“아니야. 내가 가져갈게.”
룸메이트인 가야가 하겠다는 말에 그냥 넘긴 마리.
김준은 식사를 하면서 다들 어제로 인해 숙취가 심한 것 같으니 속 좀 풀라며 국 좀 더 끓이자고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각자 운동을 할 때 김준은 각자의 시간을 가지게 한 다음에 안방으로 들어갔다.
누구는 운동을, 또 누구는 청소와 빨래를, 혹은 루팅때 가졌던 안장 지팡이를 가지고 그걸로 좀비를 밀어내거나, 아니면 휘둘러서 쳐내는 식으로 개인 훈련에 열중했다.
한가로운 나날이라고 할 수 있을 때, 김준은 오후가 되어서 모두를 불렀다.
“은지는 몸 좀 괜찮아?”
“네, 어제 좀 마셨나봐요.”
어질어질한 상황의 은지는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컨디션이 안 좋아보였다.
하지만 그녀까지도 꼭 포함시켜 8명을 전부 부른 김준은 조용히 노트를 펼쳤다.
“오늘은 그동안 루팅, 혹은 집안일은 잠시 접고서 이야기를 할 시간을 가질게.”
“이야기? 우리끼리 토크쇼인가?”
에밀리가 먼저 물어봤고, 김준은 모두에게 말했다.
“좀비가 처음 나온 날.”
“!!!”
“으으….”
“우웁!”
가장 민감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그 근원을 알아보자는 말에 벌써부터 발작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김준은 이 상황에서 꼭 이걸 말하기로 했다.
“만약 불편하면 먼저 들어가도 좋아. 하지만 확실히 알아야겠어.”
펼친 노트에서 볼펜으로 날짜를 적어 하나하나 쓰기 시작했다.
“일단 나부터 먼저 말하지. 나는 너희들이 우리 동네에서 촬영한다길래 구경가려고 준비하다가 TV를 봤다.”
김준이 적은 시간에는 갑자기 속보로 텔롭자막으로 [이상현상! 갑작스러운 폭동 발생!]이라고 자막이 나왔었다.
“그 다음으로 갑자기 뉴스 긴급 속보가 나오고, 좀비로 추정되는 상황이 나오면서 10분도 안 돼서 모든 방송국이 끊겼어.”
“….”
“딴데 전화 걸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통화도 끊기고 말이야.”
TV와 인터넷, 그리고 전화까지 한번에 끊기면서 나오는 것은 기분나쁜 비프음들.
그나마 라디오가 긴급 대피 명령을 내렸지만, 아나운서의 비명과 함께서 그것도 확 끊겨버렸다.
“이상이야. 솔직히 나 그것 때문에 며칠간 집 안에서 존버했다.”
“….”
“그러다가 몇 주 지나도 바뀔 생각이 없길래 생존 물품 챙기려고 여기저기 다니고, 종합운동장에 재난대피소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발전기 챙기다가….”
“그리고 우리가 운명적으로 만난 거구나~”
에밀리의 저 강철 멘탈은 정말 칭찬할 만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가장 먼저 상황에 대해 말했다.
“원래 촬영 전에 팬들이 와서 구경 오잖아? 게다가 우리는 소속사가 다 다르니까 각 팬덤들이 와서 막 조공도 바치고 그러거든.”
“아, 네. 그런 게… 있지요.”
걸그룹 스피넬의 비주얼 센터였던 에밀리, 그리고 멀티 엔터테이너로 삼촌팬이 엄청났던 인아가 공감했다.
“그래서 수제 쿠키다, 음료수가 막 줘서 가방에 담았거든. 그리고 리허설 앞두고 촬영하려는데….”
“끔찍했죠. 갑자기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었고.”
가야도 그것을 듣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샌드걸스 팬클럽인 SD피플 사람들이 그래서 놀래서 달려갔죠. 처음에는 팬덤끼리 패싸움인줄 알았어요. 근데… 근데….”
가야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서 은지와 마리가 토닥였고, 김준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무슨 징조도 없이 별안간에 사람들이 폭주해서 서로를 물어뜯었다라….”
“그래서 폭동인줄 알고 스태프랑 매니저들이 달려왔어요. 일단 우리에게 피하라고 하고, 경찰 부를테니까 그때까지 참으라고 대기실로 갔죠.”
8명의 멤버들은 그렇게 대기실에서 4명씩 기다렸다.
하지만 그 뒤로 복도에서 벌어진 참극, 뛰어다니고 기어다니고, 걸어다니고 피투성이의 좀비들이 여기저기에서 날뛰었다.
그 안에서 비명이 울릴때마다 서로를 어루만지면서 눈물콧물 흘리면서 기약없이 그 안에서 갇혀있었다.
“팬들이 조공이라고 준 과자하고, 껌, 음료수… 그거라도 없었으면 우리 다 굶어죽었죠.”
“그것도 사흘치였어. 대기실에 화장실 있어서 물로 배 채웠지.”
확실히 한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애들이 뭘로 버텼겠는가?
“에밀리같은 경우는 뭐라도 먹어야 된다면서 자기 립스틱을 수돗물에 풀어 씹어먹었다니까?”
“그래서 산 거야.”
“인정해, 인체에 무해하긴 했지.”
마리가 그때의 일을 두고 말하자 에밀리는 자신의 생존능력을 떠받들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나니카가 말했다.
“저기 저는 고향쪽 뉴스도 많이 보는데, 이상현상이라고 지진이 엄청 많이 났대요.”
“일본은 지진 많이 나지 않아?”
“그게…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 홍콩 동남아 전부 얕은 지진이 한번씩 났다죠. 피해는 적었다지만.”
그정도면 그냥 가벼운 자연재해 수준이지만, 뭔가 인과관계라고 엮기에는 부족했다.
“땅울림 때문에 좀비가 나왔을리도 없고 말이지.”
“아니, 그럼 어쩌면…”
이번엔 라나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그, 뭐라고 하죠? 스마트폰 유심하고 연동되서 몸안에 있는 생체칩….”
SF적인 음모론까지 나왔을 때, 에밀리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와~ 베리칩 음모론은 진짜 미국에서도 Dickhead들이나 믿는건데.”
“뭐에요? 그 뜻은!”
“차라리 외계인이 뿌린 바이러스라는게 더 설득력 있겠다.”
김준은 그 허무맹랑한 것도 그냥 노트에 적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도 결국 좀비 바이러스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알수 없음’이었다.
“군대 시절에 핵전쟁 시나리오도 이 정도로 긴박하지는 않았는데, 너무 빨리 퍼졌어.”
“그러게요. 무슨 바이러스가 막 퍼졌다는 이야기도 없었는데.”
결국 이 상황에서는 그저 몇 시간동안 좀비 사태가 터졌던 당시의 상황만 서로 복기할 수 밖에 없었다.
“제일 궁금한 건… 역시 서울 상황이죠.”
은지의 말에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인구 10만인 이 동네에서도 이 정도로 좀비의 위험성이 가득한데, 천만인구 수도의 서울은 과연 어느정도로 지옥이 되어있을지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그래도, 생존자의 존재는 알았으니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서 결국 극복하지 않을까요?”
지난번 아주 큰 도움을 주신 덕원산 스님들의 존재를 알게된 이후로 김준을 포함해 일행들은 큰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오늘의 일을 정리한 뒤로 오늘의 회의는 끝나고 각자 일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 김준은 가야와 은지의 요청으로 3층 옥탑방에서 집수리를 하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네요.”
“그래도 노력은 했네?”
창틈이 살짝 벌어져 외풍이 들어왔는데, 그걸 막겠다고 틈에다가 껌을 붙이고, 헌 옷을 붙여다가 막으려고 했지만, 김준이 창틀을 아예 빼버리고 내부를 청소한다음 문풍지를 붙여서 해결했다.
“자 다 됐다.”
“고마워요. 오빠!”
가야가 이제부터는 덜덜 떨지 않아도 지낼수 있겠다며 좋아했고, 은지 역시도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신 김에 뭐 좀 드시고 가시죠.”
“음?”
은지는 조용히 3층 주방을 이용해서 그 자리에서 뭔가 요리를 만들었다.
지난번 편의점에서 가져온 면을 삶고, 바질대신 깻잎, 옥탑방에서 재배했던 방울토마토를 썰고 파스타를 만들어 그릇에 담았다.
거기에 와인까지 따니 그럴듯한 식사가 되었다.
“오~ 냄새 좋네?”
“은지도 요리 잘하는 편이죠.”
다같이 모여 저녁 먹기 전에 은지의 파스타를 대접받은 김준은 기분 좋게 포크를 들었다.
톱 아이돌이 직접 만들어준 요리를 다같이 먹으면서 자주 보기 힘든 은지의 미소를 보고 김준 역시 웃었다.
“예전부터 에잇틴 멤버중에서 은지 너를 제일 좋아했다니까.”
최애가 직접 만들어준 요리를 먹으니 이것만큼 호사가 없었다.
김준의 옆과 앞에서 가야와 은지가 미소를 지었고, 와인 한 잔 곁들여서 기분 좋은 식사를 대접받은 김준은 이후 집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수리할데가 더 있는지 확인하고 저녁 식사 이후에 운동을 하다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펑 퍼어엉
“!”
김준은 자다가 울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공기총을 챙겼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준이 문을 열자 그곳에는 그 미세한 폭죽 소리를 들은 은지가 있었다.
“오빠, 깼어요?”
“어, 그래. 무슨 상황인지 봐야겠어.”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김준은 은지와 같이 베란다를 타고 3층 옥탑방 계단으로 올라갔다.
퍼엉 퍼어어엉
“오빠, 저기!”
“!”
조명 하나 없는 새카만 밤 속에서 불꽃이 보였다.
다급하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는 것 같았고, 김준은 공기총에 적외선 스코프를 조립하고 그곳을 살폈다.
녹색의 조명 속에서 움직임이 보였고 간간이 튀는 불꽃, 거기에 좀비떼가 몰려들고 있었다.
“또 생존자가 있는 걸까요?”
“젠장!”
할 수만 있다면 저걸 구해야 하는데, 당장 조명 하나 없이 차를 끌고 저기까지 간다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차라리 해가 조금이라도 있었을 새벽때라면 당장에 조명을 앞세우고 돌진했을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실거죠?”
“후… 일단 저 사람들 도와야지!”
철컥
김준은 적외선 스코프를 통해 좀비의 움직임으로 보이는 존재들을 겨냥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구하기는 힘들어도, 최소한 원거리 저격으로 서포트는 해줄 수 있었다.
김준은 스코프 안에서 몸부림치는 좀비 하나를 보고서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띵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