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34 오래 누울 새가 어딨어?
* * *
김준은 새벽부터 화끈거리는 통증에 잠을 설쳤다.
2시간도 못 잔 것 같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먼저 한 건 양손을 들고 움직여 보는 것.
그다음은 두 발을 까딱이면서 잘 움직이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휘유~”
다행히도 손발은 잘 움직였다.
다만 목 한번 돌릴 때마다 더럽게 쑤시고, 허리도 계속 욱신거려 일어나기가 힘들지만 말이다.
“됐어. 손발만 움직이면 금방 일어날 수 있겠다.”
길가다가 넘어져도 전치 2주인데, 2층에서 떨어졌던 부상이면 최소 5주 각.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몸을 계속 움직일 때 조용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열렸어.”
철컥, 끼이이
문이 열리고 벽에 붙은 무선 LED등 스위치를 켜지자 빚이 들어오고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왔어?”
“오빠, 몸 상태 좀 볼게요.”
마리는 약상자를 가지고 와서 김준의 몸을 살펴봤다.
김준이 몸을 힘겹게 돌리자 잔뜩 붙여진 파스 위에 전신이 붉게 올라왔다가 점점 보라색으로 변하는 상처를 보고 눌러봤다.
“아오!”
“타박상이 심하네요. 이거 빠지는 데 시간 좀 걸리겠는데….”
“약은 충분해?”
“살리실산 많이 챙겨서 치료에는 도움이 될 거예요.”
“살리살? 그게 뭔데?”
“그… 약국에서는 다른 성분하고 섞어서 안티푸라민이라고 하는데…”
“….”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불렀으면 될 것을 의약용어로 들었다.
마리는 살리실산 소염진통연고를 꺼내고 김준의 몸에 붙은 파스를 하나하나 떼어낸 다음 정성껏 바르고 관절 하나하나를 만졌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오밀조밀하게 스포츠 마사지를 하자 통증에 죽을 것 같아도 김준은 참고 견뎠다.
“다음은 앞으로요.”
김준이 돌아서서 상반신을 일으키려 할 때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침대를 잡고 일어났을 때, 마리는 차분히 상반신도 살폈다.
쇄골부터 눌러보며 주물러갈 때 두 팔은 잘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 확실히 골절은 없어 보였다.
그때 김준은 연고와 파스냄새 속에서 마리의 몸에서 술냄새가 살짝 나는걸 느꼈다.
‘얘, 술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나?’
아침 일찍 양치로 가린 거 같지만, 그래도 다 지우지는 못한 것 같다.
묵묵히 눈 앞에서 자신을 치료하는 마리를 슬쩍 바라봤다.
화장기 하나 없이 대충 씻고 나왔는데도 윤기 있는 포니테일에 갸름한 얼굴형, 웜톤의 피부는 잡티 하나 없었다.
오밀조밀한 손으로 계속 주물러진 김준의 몸은 한결 나아졌고, 그녀는 조용히 일어났다.
“이따가 다시 한 번 볼게요.”
“아, 그래. 고마워.”
“아니에요.”
그녀는 돌아가면서 살짝 미소를 짓고 어제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김준은 피식 웃으면서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새벽에 못 잔 잠이나 더 자려고 할 때 옆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비명이 따라왔다.
“으아아아악!”
“진정해! 그래도 많이 아물었어! 한번만 하면 돼!”
“자꾸 상처쑤시지마! 언니! 존나 아프다고!”
옆방에서 봉와직염 환자의 치료가 진행되나 보다.
***
그날 아침은 인아가 직접 주먹밥에 국을 해서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어제부터 굶어서 맛나게 먹은 다음 돌려주고 다시 누워있다가 좀이 쑤셔서 인아에게 부탁해 악력기를 가져다가 운동도 하고, 방 안에서 재떨이 놓고 끽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까지도 그렇게 보냈을 때, 점점 좀이 쑤셨다.
그때 밖에 아이들도 청소에 오늘치 빨래에 2층까지 내려와서 욕실과 물 사용으로 분주할 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
“문병왔어요!”
“어, 고맙다.”
“예스~”
에밀리가 들어와서는 김준의 몸을 살피다가 침대를 슬쩍 올렸다.
“몸은 괜찮아요?”
“죽을 거 같아. 여기저기 안 쑤시는데가 없네.”
“주물러 드릴까요?”
에밀리가 침대에 앉아서 몸을 들이댈 때, 편의점 향수 냄새가 확 났다.
“네? 살살 주물러 드릴게요.”
“아, 됐고. 거기 서랍 좀 열어봐라.”
김준은 TV 밑에 있는 서랍장을 가리켰고, 에밀리가 그곳을 열고 뒤적였다.
“여기서 뭘 찾을까나~?”
“그 안쪽에 보면 호랑이 그림 그려진 통 있을 거야.”
김준의 말에 서랍장을 뒤적인 에밀리는 그 안에서 진짜 그런 연고통이 있는 걸 발견했다.
“어? 이거 그거구나, 타이거밤.”
통칭 호랑이연고. 타박상, 무좀, 심지어 두통에도 쓰인다는 만병통치약 연고였다.
“이거 꼴보기 싫은 년이 연습 끝나고 방안에서 발라대서 개 싸웠는데….”
“그럼 줘. 내가 바를테니.”
“아니에요~ 특별히 서비스로 내가 발라드릴게요~”
에밀리는 김준을 뒤로 눕히고서 옛날이었다면 질색할 그 호랑이연고를 열었다.
“호랑이를 발랐어~ 연고를 뿌리고~ 마지막에 다짐하고~ 승부 준비 시작이야!”
“….”
분명 ‘립스틱을 발랐어, 향수를 뿌리고~ 마지막에 그를 향해 승부 준비 고!’였을 텐데 본인의 걸그룹 시절 히트곡을 기묘하게 개사해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쨌건 오밀조밀하게 아픈 곳들을 발라가니 이게 냄새는 좀 그래도 확실히 후끈거리는 게 좋았다.
“자~ 이 로션을 가슴에다 발라 등부터 훑어나가면….”
“….”
순간 고개를 확 돌린 김준은 위에서 단정한 옷차림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에밀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짓 한 번도 안 해봤거든요?”
“…너 아이돌이야.”
“3개월 전에는요.”
이미 자신들이 톱스타였다는 자각을 잊었는지 인방 여캠도 말했다간 위험한 행동을 여러번 저지르는 에밀리.
그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노크하고 들어온 마리는 호랑이연고를 바르는 에밀리와 김준을 보고 놀랐다.
“어머! 다른 연고 바른거예요?”
“아, 마리 언니!”
마리는 호랑이 연고가 덕지덕지 발라진 김준의 등과 허리를 발라도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이거, 효과가 좋다지만 너무 남용하면 안되는 건데….”
“오늘 발라보고 효과 있으면 이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럼 조금만 바르세요. 다른데는 어떠시고요?”
“반나절만에 어디가 달라지기라도 했을까봐.”
그래도 붓기는 어느정도 빠지고, 움직임도 적응이 됐다.
마리는 간단한 테스트만 하고 돌아갔고, 에밀리는 조용히 김준에게 속삭였다.
“파밍할 때, 마리 언니는 어땠어?”
“…제발 그런 것 좀 묻지 마.”
***
며칠간 누워있으면서 조금씩 움직이던 김준은 1주일이 지나자 남은 통증따위 일하면서 견디겠다며 일어났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한 것은 먼저 거실에 모여 다 같이 하는 식사.
그다음은 지난번에 하다 만 관정 공사를 시작했다.
“으랏차차!”
“오, 역시 근육몸!”
봉와직염을 딛고 완전 부활한 도경이 힘차게 연결한 쇠파이프를 들어올렸다.
발뒤꿈치에 딱쟁이가 지고 가렵다면서 긁어댔지만, 쌩쌩해진 모습을 보니 김준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오빠 쪽도 굉장하네요.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셨는데.”
“안 부러졌으면 됐지.”
김준은 관정 모터 설치를 끝내고서 임시로 고무 호스를 설치한 다음 가동 준비를 했다.
몸 다친 상황에서 방치했던 관정을 두고 김준은 종교는 없지만 가슴팍에 십자가를 그려보고 바로 외쳤다.
“눌러!”
가야가 바로 스위치를 누르자 모터 소리가 요란하게 돌아갔다.
이이이이잉
40m 안에 박혀 있는 관정 파이프로 지하 깊숙이 있는 물들이 끌어올려진다.
모두가 그간의 공사를 보고서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 위에 설치된 모터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촤르르르륵
“어머, 나온다!”
“오빠, 물 나와요!”
이미 호스 앞에서 김준이 물이 쏟아진 걸 확인했지만, 뒤에서 막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 물 색깔이?”
쪼르르 달려온 아이들은 지하수에서 신선한 물이 아닌 새카만 흙탕물이 나오는 걸 보고 웅성거렸다.
“제대로 된 거야.”
“네?”
“흙탕물인데 저걸 어떻게 먹어요?”
가야나 도경의 물음에 김준은 미리 준비한 대야에 흙탕물을 받으면서 말했다.
“원래 지하에 파이프 박고 끌어올리는 물이라 그 안에 있는 흙이 조금 섞인다. 물론, 이걸 다 퍼내야지 깨끗한 물이 나와.”
“얼마나 퍼내야 해요?”
“그건 장담 못 해.”
김준의 말에 그동안 보조하면서 힘을 썼던 아이돌들은 약간 실망한 눈이었다.
“자~ 자~ 이래서 미리 정수 기계 만든 거잖아? 내가 올라가서 그거 가져올게!”
마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로 2층으로 올라가서 낑낑거리며 자갈이랑 흙, 셔츠를 깔았던 그 정수기를 가져왔다.
그걸 가야나 도경이 달려와서 받았고, 에밀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팩 소주가 담긴 바케스를 쏟아버리고, 그걸 가져왔다.
“저거 두 개로는 안 되겠고 몇 개 더 만들어야겠다. 그죠?”
“어, 그러자.”
이제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고서 김준은 절로 미소가 생겼다.
그렇게 2층에서 가져온 안쓰는 옷들과 3층에서 자갈하고 흙을 담았다.
김준은 빈 드럼통에 각목을 잘라서 숯을 만들었고, 처음엔 2개였던 정수통은 이 자리에서 여러개가 만들어졌다.
안에 고인 흙탕물이 얼마나 쌓여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이 나오는대로 즉시 정수통을 만들었고, 내친김에 그것을 양수기 안 돌리는 두 개의 빗물탱크를 열고 입구에다 꽂아놨다.
이렇게 되면 관정에서 뽑아낸 흙탕물을 받아서 그냥 빗물탱크에 쏟기만 해도 밑에서 알아서 걸러져서 내려간다.
그 작업으로 인해 오늘도 해가 떨어질때까지 매달린 김준과 아이들이었다.
“휴~ 보람찼다.”
손 여기저기에 그을음이 묻은 에밀 리가 만세를 부르자 다른 애들도 서로 수고했다고 부둥부둥하고, 기분좋게 저녁을 먹으러 간다.
그때 에밀리는 아까 쏟아버린 팩소주들을 주섬주섬 주우면서 김준에게 보였다.
“오늘, 회식?”
“…어, 그러자!”
안 그래도 몸이 쑤셨는데, 소주나 진탕 마시면서 몸좀 달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저녁부터 갑작스런 회식 준비에 인아는 꽁치 통조림 꺼내고 김치찌개를 끓여서, 술 안좋아하는 애들 빼고는 남은 애들끼리 좋은 자리를 가졌다.
특히 마리가 의외였는데, 그동안과 다르게 소주 못먹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적응을 하고 있었다.
“자, 이렇게 두 잔을 따르고, 콜라를 부은다음 얼음 두어개를 담으면?”
“잭콕도 아니고, 쏘콜이야?”
“먹을만해. 내가 자주 해봐서 알지.”
탄산음료는 지난번 잔뜩 챙기고도 보관기한이 있으니 오히려 필요하면, 먹으라고 김준이 쿨하게 놔줬다.
거기에 지난번 빵집에서 털어온 조리기계들도 재료만 있으면 진짜 신선한 고기만 없다 뿐이지 없는 뷔페식도 가능할 것 같았다.
“진짜 여기서 크리스마스도 보내는거 아니야?”
에밀리의 말에 잠시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라나가 말했다.
“그때까지 간다면 다같이 쌀이랑 밀가루 빻고 빵 만드는 거 배울까요?”
“오, 막 야생동물 잡아서 농장도 만들어서 사육하고 말이지.”
“아! 미친, 우리가 무슨 원시인이냐?”
“그거 좋네? 우리가 새 역사를 만드는거야! 막 주신과 8대 여신 막 이래!”
“미친년아 만화 작작봐!”
에밀리, 가야, 라나 셋이서 농담도 하면서 넘어가는 유쾌한 생존이 되자 김준은 피식 웃으면서 잠시 끽연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나갔다.
캠핑카 앞에서 한 대 피는 김준을 두고 얼마 안 있어서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오는 마리가 있었다.
“휘유 안 추워?”
“이제 쪼금 쌀쌀해지긴 했네요.”
김준은 그 뒤로 지난번 좀비 깔아뭉개고 락스로 빡빡 닦은 차 밑을 살펴봤다.
마리는 그런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칵테일 만들어준 거 먹으면서, 자리에 애써 남아있고, 담배도 안태우면서 김준이 움직일때마다 그의 옆에 착 달라붙는다.
“어디 안 좋은데 없지?”
“몸은 멀쩡해요.”
“음….”
그날이 있었던 뒤로 먼저 ‘그런 일 없었다.’ 라고 넘겨버린 마리.
그 선택을 존중해서 김준 역시도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뭐, 어딘가에도 또 산 사람들은 있겠죠.”
“에밀리 같은 애는 진짜 우리만 남아있는줄 알고 말이지.”
김준이 다 핀 담배를 바닥에 비벼끄고 연달아서 한 대 물었다.
그만큼 둘이 나온 김에 할 말이 많았다.
“나중에 제가 따로 애들에게 이야기 할게요.”
“아냐, 지금은 그냥 입꾹닫는게 날거같아.”
“!”
김준 역시도 그 이후 1주일간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새로운 생존자를 발견했단 말을 하면 분명히 희망은 생길거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생존자가 별안간 자신들을 기습했고, 김준은 죽을뻔했으며, 마리는 끌려가 끔찍한 일을 당할 뻔 했다.’라는 말이 다른 애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물론 아이들은 위로해주고 같이 아픔을 공유할 거다.
하지만 위로는 하루 이틀이고, 그 뒤로 바깥에 대한 극심한 공포는 이 상황이 끝날 때까지 계속 갈 거다.
그전까지 총을 든 김준이 좀비를 하나하나 잡아나가면서, 생존물품의 양과 질이 점점 높아지고, 적응의 단계인데 여기에서 좀비 말고 법과 도덕이 없는 미친 살인마나 변태 강간범들이 튀어나와서 자신이 당할수도 있다는 게 다른 여자애들의 뇌리에 박히고 심할 경우 아예 루팅 조수석에 타고 나가는 것도 패닉에 빠질 애들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애들 멘탈 체크 때문에 지난번 은지의 돌발행동도 김준 자신이 넘기려 했지만, 그 일은 그냥 은지가 스스로 ‘바깥에 하천 물 마셨다.’라고 먼저 털어놔서 넘어간 일이었다.
일단은 좋은 일도 아니고 당사자가 애써 담담하니 이번에도 묻어가기로 했다.
“내가 웬만한건 넘겨도 여기 애들 동요하는건 또 그냥 안 넘기지.”
“저희도 노력해요. 그래서 수시로 2,3층 방바꿔서 자는 것도 하는거고요.”
“그래, 하여튼 또 다른 생존자 문제는….”
“또 모르죠. 나중에는 진짜로 좋은 사람도 살아있어서 도움을 받을지도요.”
“뭐, 그땐 진짜 생존자 소식을 알려야겠지.”
일단은 그렇게 봉합을 하고, 마리가 강하게 견디고 있어서 칭찬해주는 김준이었다.
그때 마리가 넌지시 김준의 등 뒤에 머리를 내밀었다.
“진짜 슈퍼히어로 같은 사람이라니까.”
“아냐, 한눈팔아서 너 위험하게 만들었는데.”
마리는 잘 못마시는 술에 취기가 올라 뜨거운 숨을 내쉬었고, 김준의 등을 간질겼다.
“자, 들어가자.”
김준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을 때, 그녀는 순순히 따르면서 넌지시 지난번 괴한들에게 채인 배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아랫 배를 만지는 손과 김준의 넓은 등짝을 연신 번갈아 보면서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준은 그것을 알지 못한채 들어와서 2차 하자면서 식은 찌개를 데우고 남은 소주를 까면서 회복기념 회식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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