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밤의 톱스타-19화 (19/374)

〈 19화 〉 19­ 지루했던 집안 일상.

* * *

김준은 최근 파밍, 루팅을 안 했다.

넘쳐나는 물자 속에서 굳이 갈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농담이 아닌 게, 지난번 에밀리와의 루팅 이후로 냉장고 2개와 김치냉장고 2개에 레토르트 식품하고, 통조림이 꽉 찬데다가 옷 쌓아놓을 방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물자가 넘쳤다.

지금 여기서 한 번도 안 나가도 9명이 먹고 자고 하면서 석 달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김준은 일단 기존에 쌓인 썩기 직전 식품부터 어떻게 처리하고, 공간이 생길 때 다시 가기로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9명이 부대끼는 분위기가 되었는데, 영화도 한두 번이지 원초적인 심심함에 부딪혔다.

“지랄같이! 뭣도 없어~!”

“그만해.”

“아, 심심해 죽겠다고!”

그중에서도 뒹굴뒹굴하는 금발의 처녀 에밀리.

처음에는 섹스! 오 섹스!!!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는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른다.

하루에 전기 생산을 위해 2시간씩 러닝머신하고 사이클을 해서 허벅지랑 엉덩이만 더 탱탱해지고, 헐거운 티셔츠에 레깅스 차림으로 뒹굴뒹굴하니 유혹하는 것 같았다.

어쨌건 지금의 위기는 이제 먹고 살만하니 지루함 속의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이다.

이미 김준도 고민했던 먹거리와 잘거리가 있는 상황의 아포칼립스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상황이었다.

김준은 그것을 보고 뭐 없을까 방안을 뒤지다가 안방 서랍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어우 씨! 이게 여기 있었네?”

자신만의 아지트라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의 유품이 아직도 남은 안방.

장롱을 청소하다가 나온 게 화투와 트럼프 카드였다.

그동안 살다 가도 몰랐던 청소 하다 나온 카드들을 보고 김준은 그것을 들고 피식 웃으며 애들에게 갔다.

“야, 다들 모여봐!”

식사 외에는 루팅, 파밍이 없으니 각자 어떻게든 지루한 시간을 멍때리던 톱스타들이 모두 모였고, 김준은 거기서 두 카드를 꺼냈다.

“니들 담요가 내가 준 그 군용이잖아? 혹시 화투나 포커 칠 수 있는 애들 있어?”

먹을 것도, 잘 곳도 아닌 심심해 죽을 것 같은 애들에게 이건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와, 고스톱이나 포커에요?”

연장자인 가야가 물어볼 때 칠 줄 아는 애들이 마리, 도경, 인아였다.

그리고 트럼프 카드를 가졌을때도 에밀리나 나니카, 라나 등이 나왔다.

그 상황에서 또 은지는 어느쪽에도 안 속했지만, 룰은 안다면서 조용히 구경의 자리가 되었다.

“자, 우린 돈도 없고, 칩도 없어. 손목 맞기로 하자? 응?”

“네, 그래요.”

“족보 뭐라고 하면 진짜 때린다?”

“그러면 룰을 처음부터 잡아!”

아이들이 그것으로 신이 났고 김준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시간 지나가는 데는 카드 게임이고 그중에서도 동양화랑 서양화다.

자기들끼리 내기로 쩜당 손목 맞기 하자고 하는 것을 보고 김준은 저 상황이면 구경만으로도 재미나고, 시간이 확실히 빨리 지났다.

그리고 카드 게임을 하다가 문득 아이들의 과거 이야기가 나왔다.

“옛날 생각나네. 니들은 진짜 연예계 생활, 복 받은 거야.”

“네? 그게 무슨?”

가야는 화투를 치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 우리 연습생으로 들어올 때 있지? 어디 고속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폐가 같은 숙소에서 지내게 했어. 물하고 전기 빼고 아무것도 없는데, 비 오면 천장이 새.”

“…그거 감금이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김준이 한마디 하자 가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사회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소속사 사장이 그런데 집을 구한 거래요. 그래서 종일 춤하고 노래 연습, 휴대폰은 아침, 점심,저녁 식후 딱 30분만. 통금시간은 저녁 8시.”

휴대폰 하는 거 빼고는 완전 군대 독립중대 내무반 같은 곳인가 보다.

거기서 3년을 버티고 청춘을 보낸 다음에야 겨우 데뷔 조로 편성됐지만, 그 기간에도 이어지는 수많은 행사 뺑뺑이.

“갑자기 지금 지내다 보니 그 생각났어. 비만 오면 물 떨어지던 그 숙소.”

가야의 이야기에 같이 화투를 치던 마리가 말했다.

“저도… 6년 동안 학교 내에서 공부만 한지라 하루도 못 쉬었는데, 거기에 배우 공부한다고 또 새로운 공부 했네요?”

“맞다. 마리 너 의대였지? 실제로 의사 공부는 어때?”

“그냥 뭐…2년간은 기초 생물학 이런거 배우고, 실습생전 교육이 이어지거든요?”

마리의 이야기에 어느새 도경이 ‘고!’ 를 부르는데도 이야기에 몰두했다.

“해부 실습할 때요. 시체는 다들 입을 안 다물고 있어요. TV랑 다르게 이렇게 ‘헤~’ 하고 살짝 벌려져있단 말이야. 그걸 손가락으로 누르면….”

“어우, 끔찍해!”

“히이익!”

마리는 지옥같이 힘들었다면서도 의대생 시절의 썰을 막 풀고 있었다.

“한번은 실습을 나갔는데, 응급환자를 처음 봤죠.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구급차에 30분 동안 달려와서 왔는데… 다리가 이렇게 세 동강으로….”

“으하아악­”

“그 박살 난 다리를 자르네, 마네 이야기 나왔는데, 때마침 당직이 외상외과 던트 선생님이셔서 기적적으로 절단은 안 갔지. 장애는 생겼어도요.”

김준은 그 이야기를 듣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군대 생활 하면서 어디 부러지고, 깨지고 엄청나게 봤다.”

“아, 군인이셨다고 했죠?”

“계속 있었으면 지금쯤 애들 이끌고 좀비 잡으러 다녔으려나?”

생각해보니 별다를 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꽃순이들은 못 본 다 해도 땀내 나는 전우애 속에서 전쟁영웅 놀이는 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나씩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벌써 몇 판을 하면서 손목들이 시뻘게진 아이돌들이었다.

“하, 한판 더해요!”

도경이 손가락을 들자 가야나 마리나 어깨를 으쓱하면서 화투를 들었다.

“퉁!”

능숙하게 화투를 섞는 가야, 그리고 패를 확인하는 마리와 도경, 인아였다.

그때 옆에서는 환호성이 크게 울렸다.

“으하하하! 꺄하하하하하!!!”

“하이씨! 완전 사기네!”

“봤어? 에이스 포카드야! 너 팬츠 한 장 안남기고 오링시킬 수 있었다고!”

“진짜 벗어요?”

“뭐~ 설마 그러겠니? 여자끼리 그런 놀이 취향 아니야.”

포커를 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에밀리가 A포카드가 떠서 나니카와 라나를 탈탈 털었다고 한다.

동양화고 서양화고 아이들끼리 즐겁게 노는 모습.

이렇게만 견디면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것 같았다.

단 한 명을 빼고 말이다.

“….”

주은지.

그룹 에잇틴의 리더.

그리고 김준이 애청하는 걸스 스피릿에서도 레귤러 캐릭터였으며, 가장 좋아했던 멤버.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고 신데렐라처럼 혼자 일만 묵묵히 하다가 김준이 다른 아이돌하고 한 거 알아차리고 더 거리를 벌리는 중.

게다가 이 상황에서 거의 웃지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으며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다.

김준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일어났다.

“…은지야.”

“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한 은지를 데리고 김준은 뭔가 해 보기로 했다.

“할 거 없으면 작업이나 할까?”

“네, 그러죠.”

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순히 김준을 따랐다.

***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창고를 뒤적거리는 김준은 뭔가를 만들기 위해 원하는 것을 찾았다.

“이게 어디 모아놓은 게 있었는데.”

“….”

그 와중에 난잡하게 잡동사니가 쌓인 창고를 은지는 묵묵히 치우고 있었다.

각종 공구에, 몇몇은 어디에 사용하는건지 모를 모터나 펌프등도 있었다.

그러면서 지난번 먹었던 전투식량 박스, 소금, 식초, 꿀, 말통 등을 보고는 진짜 먹는 거 하나만큼은 2,3층이 아니라 꼬불쳐진 게 여기저기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긴… 믿는 구석이 있으니 우릴 전부 데려온 거겠지.’

그러면서 캠핑카 내에서 잔뜩 발견한 사용한 콘돔을 보고 에밀리를 떠올렸다.

‘사실 걔야 세상만사 편한 애지. 어느 쪽이 유혹했어도 둘이 좋다면 상관할 바 아니고….’

그때 한참을 뒤적거리던 김준이 그것을 찾았다.

“아우! 여깄었네.”

“!”

김준이 가져온 건 널찍한 널빤지, 그리고 톱이랑 철제 자였다.

“나가서 이것 좀 만들자.”

“아, 네.”

김준은 널찍한 나무판을 가지고 일단 은지에게 건네줬다.

“거기 빼파 있지? 그걸로 얼룩같은거 안 보이게 싹 갈아줘.”

“아, 빼파…이건 사포 아닌가요?”

“같은 표현이야. 한곳으로만 계속 문지르면 장갑 껴도 물집 잡히니까 손 번갈아가면서 쓰고.”

“…네.”

은지는 묵묵히 김준이 시키는 대로 합판을 말끔하게 갈아댔다.

그리고 김준은 가위로 하드보드지를 같은 사이즈로 일일이 잘라냈다.

“오빠, 다 했어요.”

“그래, 그럼 이제 교대하자.”

김준은 말끔하게 깎인 합판을 보고서 가루를 털어내고 매직과 자를 들었다.

“내가 오려놓은 거 있지? 같은 사이즈 모아서 세 개씩 뭉쳐서 거기 본드로 붙여.”

“네.”

그리고 김준은 합판에다가 자를 대고 매직으로 쭉 그었다.

“어디 보자, 사이즈는 이 정도면 되고, 가로로 9칸에 세로로 10칸. 차(?), 상(?), 마(馬), 사(?), 궁(?)… 그리고 포(?).”

김준이 만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장기판이었다.

화투랑 트럼프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놀이기구라 해도 이런 건 다양하게 있어야 앞으로 우울감이나 스트레스가 사라질 거다.

생존에 필요한 의, 식, 주가 갖춰졌는데, 막상 그것만 있어도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었다.

‘다음 루팅에는 장난감들을 좀 찾아볼까?’

김준이 그것을 생각하며 딱 장기판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장기 말이 될 하드보드지 조각이 접착제로 두껍게 뭉친 것을 김준이 가져다가 딱 두 갈래로 나뉘었다.

“빨간색하고, 초록색 중에 뭘로 할래?”

“빨간색이요.”

김준은 일단 남은 하드보드지에 한자로 각각 한나라, 초나라 방식의 장기말 글자를 그렸다.

“자, 그럼 정자체로 이걸 따라 그리면 돼. 작은 거는 ?, 큰 거는 ?라고 써야 한다.”

“…아, 네.”

은지는 시키는 대로 묵묵히 했는데, 그 사이에 서로의 대화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잡담 없이 묵묵하게 작업해서 순식간에 뚝딱거리다가 그럴듯한 장기판과 말을 만들었다.

그리고 장기 말이 부딪칠 때 효과음을 위해 마지막은 니스칠로 장기말을 완성시켰다.

“다 됐다! 수고했어.”

“네, 오빠.”

“장기 둘 줄 알아?”

“아니요.”

다시 침묵… 하지만 그다음 은지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가르쳐 주신다면 한번 해 볼게요.”

“그래.”

김준은 처음으로 그녀의 반응을 보고서 씨익 웃었다.

***

그날 밤.

딱­

“포장이다!”

“이거 뭐야? 언제 여기 있었어?”

“그냥 포장도 아니고 외통수야! 왕게임이니까 세 대지? 이마 딱 대라! 배구선수야!”

“야이씨! 거기 있었던 거 맞아? 언니 장기 말 옮겼지?!”

거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고, 김준은 상을 펼쳐놓고 여닫이 방에서 다른 애들과 술 한잔하고 있었다.

“한번 가르쳐 주니 잘하네?”

요새 애들은 장기는 고사하고 체스도 룰 모르는 애들이 많아서 할수 있을지 몰랐는데, 벌써 리그전까지 열릴 기세였다.

“후우~ 장기라… 선배들이 많이 했었죠. 피곤해 죽겠는데, 그 와중에 잠 깬다고 커피 내기 장기 했었는데.”

마리는 옛 생각을 하면서 소주를 들이켰다.

“장기 말고 쇼기라면 어느 정도 아는데, 그건… 못 만들겠죠?”

“쇼기라면 일본 장기? 음, 만들라면 만들 수야 있는데.”

“아, 아니에요! 그냥 제가 한국 장기에 적응할게요.”

김준에게 폐를 끼친다 생각하고 나니카가 손사래를 쳤다.

가야는 소주를 마시면서 지금 분위기가 좋은지 김준에게 살짝 기댔고, 김준은 조용히 머리를 돌려줬다.

“흐음~ 가야 언니가 오늘 신호왔어요?”

“얘, 얘가 못 하는 말이 없….”

라나의 돌직구에 화들짝 놀라는 가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입으로만 한 자는 노콘으로 한 자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분위기 좋네요. 마치 외딴 별장에 다 쉬러 온 느낌이야.”

“나는 그럼 별장관리인이니?”

“꺄핫! 말이 그렇게 되나요?”

술기운에 모두들 꺄르르­ 웃는 모습이 김준의 눈에는 그저 다들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은지가 들어왔다.

낮에 비하면 상당히 나아진 얼굴의 그녀는 술상 위에 직접 만든 술안주들을 올려놨다.

“맨날 술안주로 컵라면 먹지 말고 이건 어떤가요?”

“우왓? 대박!”

통조림 꽁치를 밀가루 발라 튀김으로 만들고, 옆에는 골뱅이 통조림을 깐 다음, 소면을 삶고 농사지은 야채로 골뱅이 소면을 만들어왔다.

“직접 만든 거야? 대박이다!”

“이제껏 여기 반찬… 나하고 인아가 만들었잖아.”

“아차차! 그랬지. 언니가 영 요리체질이 아니어서.”

어쨌건 오늘은 포장마차 나는 분위기로 은지가 만든 안주를 먹어봤다.

“으음, 꽁치튀김 진짜 잘됐네.”

겉은 바삭, 속살도 촉촉한 맛이 간장에 겨자 타서 찍어먹으면 딱이었다.

“골뱅이 소면도 대박이에요.”

“으음, 새콤달콤한게 딱 내입맛이다.”

김준은 이렇게까지 신경써준 은지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너도 한잔 할래?”

“….”

이번에도 거리를 두고 피하나 싶은 은지.

하지만 조용히 그 잔을 받았다.

“딱 한 잔만 받을게요.”

“얼마든지!”

그렇게 점점 그녀의 마음도 열릴 것 같았다.

한편 거실에서는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마, 말도 안 돼?! 상이 왜 거기서….”

“자, 외통수입니다. 에밀리 언니?”

“야, 서인아! 한 수 물러! 한 수만 물러!”

아까는 에밀리가 기뻐 날뛰더니, 이번엔 인아가 그 에밀리를 상장으로 잡은 것 같았다.

“얘들아! 좀만 조용히 장기 둬라!”

그렇게 오늘은 새로운 놀잇감들로 애들이 아주 재미나게 보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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