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07 예민해진 그녀들.
* * *
조용히 안방에서 나온 가야는 김준이 잠들었는지 문에 슬쩍 귀를 내밀어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김준이 잠든것을 확인하고는 입 안에 아직 정액 냄새가 나는 것을 씻지도 않고 살금살금 걸어가서 냉장고를 조용히 열어봤다.
안에는 낮에 김준이 만든 햄과 통조림, 진공 포장된 음식들이 있지만 빈 곳이 보였었고, 냉동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8명이 계속 먹기에는 부족했다.
“….”
아까 김준이 냉장고 앞에서 말한 ‘밖에서 음식 못 구하면 문제 생기겠다.’라고 중얼거린 게 계속 떠올랐다.
가야는 냉장고 음식들을 손가락으로 센 다음 옆에 있는 김치냉장고를 열어 김치는 얼마나 남았는지도 확인했고,마지막으로 라면을 꺼냈던 세탁실 안으로 들어가 찬장 위에 박스를 확인했다.
“휴우우”
가야는 한숨을 쉬면서 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한두 명도 아니고… 결국은 점점 신경이 쓰일 텐데.”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결국 부족한 음식을 가지고 경쟁이 생길 것이고, 우릴 구해준 저 김준이 모든 것을 컨트롤 할 것이다.
가야는 그것을 예상하고 먼저 움직였다.
어떻게든 저 사람의 눈에 들어서 남은 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처럼 입이나 손으로 계속해주던, 콘돔 없이도 섹스해주건 뭐라도 해서 호감도를 올려야 했다.
가야는 자기 몸 하나밖에 안 남은 처지에 한숨을 쉬면서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
“와, 밥이다!”
죽과 가루 수프만 먹던 밥상에 드디어 따끈따끈한 쌀밥이 올라왔다.
거기에 김치도 크게 썰고, 찌개도 끓이고, 저번에 만든 스팸도 구워서 오늘은 정말 풍족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릇에 담긴 밥을 신나게 먹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오빠~ 한 그릇 더 될까?”
에밀리가 몸을 배배 꼬면서 하는 말에, 김준은 주걱으로 한 그릇 더 퍼줬다.
그러자 너나할 것 없이 앞다퉈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했다.
“아, 밥이 부족한데? 다시 해야 되나?”
금방 동난 밥을 보고서 하나둘씩 아쉽다는 듯이 그릇을 내려놨다.
단 한 명, 은지만 제외하고 말이다.
“주세요. 치울게요.”
그녀는 누가 시키지도 않고 청소 담당을 맡아서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장 까칠했고, 따뜻한 수프에 마음이 잠깐 열린 것 같았지만, 다시 쿨시크한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각자가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일 때, 밥 두 그릇을 먹은 에밀 리가 런닝머신 위로 올라갔다.
그 뒤로 도경도 자전거에 올라타서 아침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 그거 돌아가면서 열심히 하라고. 하나하나가 다 에너지야.”
사이클과 런닝머신에 달린 배터리를 보고서 김준은 저것만으로도 최소 냉장고나 전기밥솥은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루팅을 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가야, 오늘 나갈 수 있겠어?”
“네? 아, 네!”
다시 생존을 위한 루팅이 시작됐고, 잘 빨아놨던 아대를 차고, 좀비를 몰아낼 지팡이를 잡았다.
나서기 전 먼저 스마트폰과 셀카봉으로 밖을 확인한 김준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차 문을 연 다음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문을 닫고 그대로 출발했다.
좀비 생존 한 달이 되어갈 때.
아직 좀비들은 밖에 돌아다니고 있고, 슬슬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해, 차량 내에 방향제를 최대한 뿌렸다.
“우웁!”
조수석에서 견디다 못하는 가야에게 김준이 칸막이를 두들겼다.
“거기 다시방 보면 마스크 있어, 그거 써.”
“네, 오빠.”
김준은 다시 주변을 보면서 적당한 루팅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좀비 수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더 퍼져서 안전한 길 찾기가 힘들었다.
띵
멀리서 공기총으로 저격을 해서 좀비를 세 마리를 잡았을 때, 뒤에서 계속 몰려오는 좀비를 보고 김준은 혀를 찼다.
“젠장, 이쪽 길도 못 가겠네!”
재래시장이 안 돼서 공판장 거리로 향했는데, 그곳 역시도 좀비 떼를 헤집고 가기엔 너무 위험했다.
“오빠, 여기는 어때요?”
대쉬보드 안에서 마스크 꺼낸 김에 주변 지도를 꺼낸 가야는 지금 길을 보면서 한 곳을 가리켰다.
김준은 그곳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거기가 고가 밑이야.”
“고가 밑 …아!”
이미 한 번 루팅을 한 곳이었고, 그 일대를 한 번 헤집은 기억도 있었다.
“이쪽 길은 내가 잘 알아! 그리고, 그거 따로 표시하지 마.”
“아, 네!”
뭔가 계속하려는 모습이 기특하긴 한데, 지금은 이곳에서 살아온 김준의 경험으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2시간의 수색 끝에서 오늘은 좀비의 수가 너무 많아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 곧바로 연료부터 채워 넣은 다음, 남은 기름을 체크했다.
“아이고, 루팅 꽝은 처음이네?”
김준이 혀를 차면서 담배를 물자 가야는 불안 불안한 얼굴로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되는건 아니겠지? 계속 실패하면… 후우우.’
편의점을 털었다면, 콘돔이라도 챙기려고 했는데 이렇게 꽝으로 끝나서 점점 더 염려하는 가야였다.
김준이 안에 들어오자, 이번엔 무슨 물건이 올까 기대했던 아이돌들도 빈손이라는 것을 알고는 씁쓸해 하며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도경과 에밀리, 나니카는 하던대로 냉장고랑 밥솥이라도 돌릴 전기를 만들었고, 인아랑 은지는 빨래, 청소.
라나는 몸이 안 좋다고 해서 마리에게 청진기도 없이 직접 귀로 심폐음을 들었다.
“괜찮아. 미열이 조금 있는데, 이 정도는 병도 아니야.”
“정말요? 괜찮은 거죠?”
“그래, 비타민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은 참자.”
각자가 움직이고 있을 때, 김준은 식사 준비를 했다.
그때 운동에 지친 아이돌 셋이 심심한데 뭐 없냐면서, TV를 보다 VCR을 발견하고, 영화를 돌렸다.
“뭐야? 야한 거야?”
“언니!”
틀어보고 무슨 영화인지 보려고 했는데, BGM이 거실까지 울렸다.
[빠바바 빰~ 빰~ 빠빠빠~ 빠~ 밤~]
“오, 저거 명작이지.”
“뭔데요?”
거실에서 식사를 돕던 가야가 물었다.
“[지옥의 묵시록]. 저기 VCR에 있는거 전부 전쟁영화인데, 저거 틀었구나.”
원래 8명을 구하기 전에는 좀비물을 잔뜩 봤는데, 혹시나 해서 애들 경기라도 할까 봐 치운 상태였다.
오늘은 감자와 당근을 썰어서 야채 조림을 만들려고 해서 손이 많이 갔는데, 영화에 점점 더 빠져든 아이돌들이 보였다.
“훗.”
방 안에만 있는 스트레스 중 뭐라도 해서 풀어야 하니, 앞으로 VCR을 마음껏 이용하라고 놔뒀다.
하지만 거기에서 일이 터졌다.
갑자기 격한 영어가 오가고,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신음소리.
[꺄아아앗~ 아학~ 학~ 오 마이 갓~ 아임 크레이지~]
“!”
[오 갓~!]
“야이 씨! 뭐야?”
김준이 그걸 듣고 황급히 거실로 왔을 때,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월남전 위문공연을 온 플레이보이들, 흥분한 군인들. 그 속에서 헬기 불시착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베트남 정글에서 탈출하기 위해 연료 두 통으로 플레이보이 걸들과 2시간 놀 수 있는 매춘의 장면.]
[아학~ 학~]
군인 밑에 깔려 신음하는 쇼걸과 들썩이는 헬리콥터.
김준은 그걸 바로 꺼버렸다.
“….”
“이런 거 보지 마.”
일곱 명의 아이돌이 할리우드 명작 영화라고 해서 틀어놓은 걸 봤다가 굉장히 분위기가 싸해진 순간이었다.
“아~ 순간, 영화에 몰입돼서, 메소드 할 뻔 했어.”
에밀리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티셔츠를 김준 앞에서 올리려고 했다.
“내가 저 플레이보이 쇼걸보다 가슴은 큰데.”
“…아, 시끄러.”
김준은 어색한 분위기를 웃음으로 환기하면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 뒤로 냉장고를 확인할 때, 이제 슬슬 빈칸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자~ 내일 한 번 더 가볼 테니까 기다려 봐, 이번엔 꼭 챙겨올게.”
김준이 약속하고 그녀들을 달랬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오늘의 루팅 실패에도 8명은 절대적으로 김준을 믿었고, 아직 식량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날 역시도 똑같았다.
동네에 완전히 흩뿌려져 도저히 조심조심 움직여 루팅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김준은 그 날 햄을 구워서 애들에게 먹이면서 달랬다.
그리고 며칠 뒤 세 번째 루팅에도 실패했을 때… 슬슬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
“이런 젠장….”
“오빠, 그래도 성과는 있었잖아요?”
지난번 갔던 주유소와 총포상 일대를 돌아 공기총과 엽총의 새 탄들은 잔뜩 챙기고, 주유소에서 말통에 담은 기름도 가득 채웠고, 물도 잔뜩 준비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식량에 대해 구비하지 못했다.
작은 노점을 발견해 혹시나 했지만, 이미 다 썩어버린 떡이나 옥수수 등이었고, 아이스박스에 담긴 생수만 챙긴 것이었다.
“젠장할….”
으어어 으어으어으어!
열받는 상황인데 그 앞으로 좀비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는 네다섯 마리 정도로 김준은 어금니 꽉 깨물고 그대로 돌진했다.
콰드드득 콰직!
아예 밟고 지나가면서, 무쇠로 된 충돌범퍼에 좀비들의 몸이 박살나며 차바퀴로 깔렸다.
김준은 분노의 질주를 했고, 집까지 돌아갔을 때, 퀴퀴한 피냄새와 좀비의 잔해를 락스를 뿌려서 닦아내고, 긁어내 밖으로 내던졌다.
김준과 가야가 들어왔을 때, 실망감이 가득한 톱스타들.
그리고 그날밤 사건이 벌어졌다.
“Oh! Fuck!”
“한국말 써! 씨발 양키 년아!”
“뭐? 이 년이 어따 대고 양키래?”
도경과 에밀리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냉장고가 점점 비어가고, 규정 시간 외에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는 것을 보고 ‘네 입만 생각하냐?’라고 도경이 한마디 했다가 싸움이 난 것이었다.
“트레이닝 하고, 햄 하나 꺼내 먹은 게 그렇게 문제냐? 너도 까먹던가!”
“단체 생활하는데, 언니만 신경 써? 음식 다 떨어지면, 직접 나가서 구해올 거냐고?”
“헹~ 그럼 네가 나가 사냥이라도 하던가? 전봇대같이 키만 큰 게…”
“이, 썅년! 그 노란 머리 다 뜯어버린다!”
서로 날카로운 손톱을 앞세우고 달려들 때 서로가 말렸다.
그때 옥탑방에서 냉장고를 확인하고 내려온 김준이 그 광경을 봐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김준의 외침 속에서 달라붙은 두 여자를 붙잡아 힘으로 떼어놨다.
여자배구선수 출신이고, 서양 피지컬이고 간부 출신 예비역한테는 손쉽게 제압당했다.
“니네 둘… 따라와!”
김준은 곧바로 안방으로 둘을 불렀다.
단 그러기 전에 가야에게 말했다.
“너희 둘 2층 같은 방 쓰지? 방 바꿔라.”
“제가 바꾸죠.”
“!”
3층에 있던 마리가 조용히 와서 둘 중 도경의 짐을 챙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오늘 2층에서 묵기로 했다.
“가야.”
“네, 오빠.”
“찬장에 컵라면 있어. 각각 나눠줘.”
“아, 네!”
“그리고 여기 안방에서 먹을 거 봉지라면 세 개 끓이고.”
먹을 것 때문에 예민해졌으니, 일단 먹을 것으로 풀기로 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들은 서로를 흘겨봤다.
김준은 베란다에서 소주를 꺼내 따고 물었다.
“술 못 먹는 사람?”
“….”
“못 먹어도 잔은 채워 놔.”
라면 3개 끓인 것을 안주로 김준은 두 아이돌을 앉혀놓고 잔을 따라줬다.
그리고 원 샷으로 쭉 들이킨 에밀리가 흰색 티셔츠 칼라 부분을 어루만지다가 일단 눈앞에 라면부터 비웠다.
“니들 뭐 그런 걸로 싸웠냐?”
김준이 햄 한조각 가지고 서로 이년저년 하던 둘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자 도경이 먼저 답했다.
“오빠, 저희 그동안 오빠 따라서 규율을 서로 지켰거든요.”
“어, 그렇지.”
“근데… 멋대로 음식 빼먹는 거, 그거는 아니잖아요? 아홉 명이 다 같이 사는데!”
김준은 지금까지 냉장고에 자물쇠 안 채워도, 알아서 지켜나간 것에 대해 사실 고맙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 차례에 걸친 루팅 실패로 점점 두려워하고, 그 속에서 분열이 생긴 것을 김준은 확실히 깨달았다.
“다음은 에밀리. 말해봐.”
“나 진짜 억울해요. 하루종일 냉장고 돌아간다는 배터리 내가 런닝으로 뛰고, 자전거 해서 힘 뺐어. 근데 그 속에서 햄 하나 꺼내먹은 게 문제에요? 그것도 내가 만들었잖아.”
“정확히는 다 같이 만들었지.”
에밀리는 그러면서 종이컵으로 소주를 쭉 들이켜고 말했다.
“진짜 고기 반찬 얻어먹으려면 한 번 하면 돼?”
그러면서 또 티셔츠를 열자 커다란 가슴이 출렁였다.
“아, 이 미친년… 진짜!”
“왜? 너도 하던지?”
“야!”
“이 판국에 뭘 못해? 살려면 섹스라도 해줘야지.”
“….”
도경 역시 욕은 하지만, 그러면서 에밀리의 가슴을 보고 제지하지 않는 김준을 보고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한 번 벗어서 보인 몸’인데, 진짜 시간 지나고 절박한 상황이 되면 몸이라도 바쳐서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는 게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농담 아니야. 난 언제든지 할 준비 됐다니까?”
“…너 아이돌이야. TV나오던 연예인이라고”
“휴우우~ 지금 그게 중요해? 굶어 죽게 생겼는데!”
김준은 그 말을 듣고 저번에 입으로 해줬던 가야를 떠올렸다.
안 그럴 거 같던 녀석이 술 반 병 마셨다고 급발진이라 생각했는데, 혹시 얘들보다 먼저 그런 걸 생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
김준은 생각을 정리하고 소주를 마시면서 말했다.
“옷 제대로 챙겨 입어!”
“흐음~ 진짜?”
“아, 닥치고 둘이 화해나 해!”
김준의 말에 소주를 들이켜고 아직까지 서로 불편한 기색의 그녀들이었다.
그렇게 대치하다 결국 에밀리가 손을 내밀었다.
“Shit… 그래. 내가 한 살 더 언니니까 참아야지.”
“데뷔는 내가 먼저 했거든?”
“아~ 시끄럽고, 일단 이걸로 화해다!”
결국, 둘은 악수를 하고, 김준은 빈 병을 치웠다.
“음식 가지고들 싸우지 마, 자준다는 헛소리 하지 말고, 니들 몸 관리 해라!”
김준은 그 말을 해준 뒤로 조용히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베게 안에 숨겨 놓은 창고 열쇠를 조용히 꺼냈다.
‘쌀이야 문제는 없어도 반찬이 문제인데….’
뭐, 일단은 봉합했으니 다음 루팅 때는 반드시 먹거리를 잔뜩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한 김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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