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04 8명을 다 먹여 살리려면?
* * *
김준은 은지에게 곧 돌아오겠다고 한 다음 1층 창고에서 쓸 물건들을 챙기고 천천히 들어왔다.
그때 혼자 온 김준을 보고 공포에 질려있던 톱스타들이 조용히 물었다.
“저기… 은지는요?”
“맞아요. 은지 언니 괜찮아요?”
가야나 인아의 물음에 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 있어. 뭐, 금방 들어 올 거야.”
그리고는 창고에서 챙긴 모포와 베게들을 내려놓고 열흘 넘게 머물고 있던 그녀들에게 말했다.
“자~ 일단 좀 씻어라. 안에 비누하고, 샴푸랑 수건 다 있어.”
김준이 욕실을 가리키며 가서 씻으라는 말에 가야가 대표로 나서 조용히 물었다.
“저기… 차례대로 가면 될까요?”
이 집이 아무리 넓어도 욕실 하나에 7명이 우르르 들어갈 수는 없었고, 순번대로 씻으려고 할 때 김준이 그녀들에게 말했다.
“딱 셋만 따라와. 위에도 욕실 있으니까 거기서 씻으면 되겠다.”
“아, 네….”
그렇게 2층에 있는 욕실에 네 명이 들어가고, 남은 셋은 김준을 따라 복도를 타고 올라가서 3층 옥탑방으로 향했다.
김준은 문을 열어주고, 아직 물이 나올 때 씻으라면서 올라온 셋을 집어넣었다.
“갈아입을 옷이 있을지 모르겠네, 한번 걸칠 거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3층에서는 언니들 대신해서 막내 라나가 연신 감사를 표했다.
아무리 TV너머로 여신급 포스를 냈던 톱스타들이라도 몇 주간 씻지도 못해 퀴퀴한 냄새에 꾀죄죄한 비주얼이었다.
그녀들이 욕실에서 찬물 더운물 신경 쓸 거 없이 샤워를 할 때, 김준은 애들 먹일 걸 생각해서 주방으로 걸어갔다.
일단 단체로 먹일 음식이 뭐가 있을지 찬장을 열어 살펴보다가 가루수프를 찾아 꺼내고 냄비에다가 물을 담았다.
“일단 이걸로 먹여야겠다.”
대형 냄비에 정량보다 물을 잔뜩 부어서 수프를 묽게 만들면서 양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그리고 수프가 끓는 동안 김준은 주방에 있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김치냉장고 두 개에, 냉장고 여기 하나, 위에 하나… 미니 냉장고 하나….”
그래도 혼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죄 쓸어온 음식들을 그 안에 넣고서 보관한 상태였다.
일단 음식은 풍족했지만, 지금 애들에게 먹일 수 있는 건 지금 끓는 수프 정도였다.
열흘 넘게 굶어서 사탕과 초콜릿 몇 개를 허겁지겁 먹는 애들인데, 밥이다 김치다 고기다 줬다간 바로 위장에 탈이라서 큰일 날 수 있었다.
“며칠 동안은 가볍게 먹이고, 남은 음식들 체크하면….”
1층 창고에 쌀 가마와 그리고 소주.
2층 김치냉장고에 김치, 냉동실에 쑤셔넣은 고기와 생선 종류, 그리고 세입자가 떠난지 오래였지만, 좀비 사태에 다급하게 살 집으로 꾸민 3층에도 있는 냉장고에 음식들.
김준 혼자 먹기에는 굉장히 풍족했지만, 이제 먹을 입이 8명이나 됐으니 계산을 해 봐야했다.
조금 빡빡하겠지만 그래도 죄다 여자애들, 그것도 여리여리한 아이돌들이다 보니 군인 사병 기준에서 딱 절반의 식사량으로 계산해봤다.
“일단 먹을 건 그렇다 치고, 입을게 문제인데….”
김준은 일단 자기가 자는 안방 옆의 미닫이 방으로 들어갔다.
2층의 집 중 유일하게, 닫이로 된 이 방은 과거 옷장과 2인 침대로 친척들 올 때 쓰던 방이었다.
철컥
욕실 문이 열리면서 샤워를 마친 톱스타 하나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두리번거리다가 방 안에서 옷을 찾는 김준을 발견했다.
“헤이~”
“야이 씨!”
아무리 개방적인 서양이라도 다 큰 여성, 그것도 톱 아이돌이 가슴을 출렁이면서 다가와 김준 옆에서 장롱을 제집 물건인 양 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며 등줄기를 타고 엉덩이까지 내려가자 김준이 화끈거려 외쳤다.
“옷 좀 입어라!”
“그 걸레 쪼가리를 어떻게 입어요? 게다가 나 아까 팬티랑 브래지어 몸수색할 때 던져줬잖아?”
“….”
“입을 거 있어요? 아! 혼자 사시는 거 같은데 여자 팬티 같은 건 없나?”
김준은 한숨을 쉬면서 뒤적거리다가 숏팬츠와 작업복을 발견해서 던져줬다.
“자~ 이거 고무줄 있으니까 꼭 묶어라.”
“오~ 땡스.”
에밀리는 벗은 몸을 아무렇지 않게 김준 앞에 보이면서 노팬티와 노브라 차림으로 숏팬츠를 입고, 티셔츠를 걸쳤다.
그나마 작은 건데도 남자용이라 소매 너머로 가슴골이 드러났다.
“입을 만하네?”
김준은 아까 자신이 옷을 벗으라고 해서 확인했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다니는 에밀리를 보고 고개를 젓다가 다른 애들 입을 것도 챙겨서 욕실 앞에 놨다.
어린 시절 입었던 95 사이즈의 티셔츠들, 통풍 잘된다고, 대량으로 샀다가 살쪄서 못 입은 츄리닝과 7부 면바지들.
그걸 본 아이돌들은 문을 열고 밖에 놓인 옷을 하나둘씩 눈치껏 챙겨입었고, 김준이 3층으로 올라가 세 명이 씻는 욕실 앞에도 놔서 어떻게 알몸을 가릴 가리개 정도는 만들었다.
“저, 저기요?”
김준을 부른 여성은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한 마리라는 여배우였다.
꾀죄죄하고 떡진 포니테일 차림이었던 그녀가 갓 씻고 와서 젖은 머리를 말릴 때, 확실히 비주얼이 달라 보이긴 했다.
“어, 뭔데?”
“저희가 오랫동안 굶어서 그런데…”
“그래서 먹을 거 준비하고 있어.”
“아니요, 그… 급하게 음식을 먹는건 소화 문제가 있어서 최대한 국물이 있는 게….”
“응~ 알아, 그래서 수프로 준비했어.”
김준이 냄비를 열자 노란 크림 빛깔의 수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아, 이거면 충분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다 될 때까지 거기 앉아있어.”
마리는 김준이 가리킨 곳에 식탁 의자를 빼고 조용히 앉았다.
김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서 물었다.
“의사라고 했지?”
“일반의에게서 그만뒀지만요.”
“의사 그만두고 배우라….”
“그래도 기본적인 처방 정도는 가능해요. 다른 애들 건강에 문제 있다면 바로 케어할게요. 물론 그 아저…아니, 오빠!”
아저씨라고 말할 뻔했다가 입을 확 막는 마리였다.
김준은 수프를 다 끓이고 그릇을 챙기며 말했다.
“됐어. 거기 식탁의 수저통 가지고 밥상 펼쳐라.”
“아, 네!”
씻고 나온 아이들은 눈치껏 밥상을 펴고 각자 수저를 세팅했고, 김준이 그릇에 수프를 가져오자 오랬동안 굶었던 톱스타들이 허겁지겁 먹었다.
“야, 천천히 먹어라. 혓바닥 덴다.”
그녀들에게 있어선 얼마 만에 먹는지 모를 따뜻한 요리였다.
급기야 몇몇은 먹다가 눈물까지 주룩주룩 흘렸고, 눈치를 보다가 김준이 빈 그릇을 다시 채워줬다.
할 수만 있다면 빼빼 마른 일곱 소녀들에게 맘껏 음식을 주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상 여기까지 주고 말했다.
“다들 들어.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자. 나는 이 집 주인 김준이야.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이 동네에서 사냥꾼 하고 있어.”
김준이 소개를 하자 그녀들은 일단 그 이름부터 숙지했다.
“우리 동네서 예능 촬영한다길래 만나러 왔는데, 이렇게 다 보네?”
“….”
7명 모두가 조용히 있을 때, 김준은 일단 서열 정리부터 하기로 했다.
“여기 애들 대충은 알고 있는데, 일단 제일 나이 많은 게 가야인가?”
“아, 네.”
“일단 네가 다른 애들 좀 맡아줘.”
“네… 그럴게요.”
김준은 겨우 수프로 속을 달랜 톱스타들을 뒤로 하고 아까 창고에서 챙겨온 것들을 가져와 애들에게 나눠줬다.
군용담요, 커버 없는 낡은 베게, 방석 등이었다.
그녀들은 일단 모포와 베게를 하나씩 챙겼고, 김준은 그녀들에게 잘 곳을 안내했다.
“일단 여기 나 쓸 거 하나 빼고 방이 여기 두 개, 그리고 3층 옥탑방에 두 개야. 여덟 명이니 편한 대로 방 잡으면 될 거야.”
“…네.”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마다 차 타고 바깥에 다녀와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천천히 말하자.”
앞으로 살아가면서 바쁠 것이다.
김준은 그 외에도 룰을 몇 가지 정했다.
“지금 원래 너희 옷과 속옷들은 빨고 있어. 밖에 말리긴 힘드니 거실에 저 건조대 펼쳐서 알아서 말리고, 이 옆에 이거 사이클이랑 런닝머신은 달릴수록 전기가 차는 거거든? 하나씩 해라!”
“네. 오빠.”
“목소리 힘차게!”
“네! 오빠!!!”
힘껏 목소리를 낸 아이돌들을 보고 김준은 피식 웃으면서 엽총을 어깨에 걸치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럼 지금 세탁기 돌아가는 거 확인하고 10분 있다가 너희 옷 널어라. 안에 행거도 있으니 쓰면 돼.”
“아, 네! 그건 제가 할게요!”
김준이 일어나자 가장 연장자이자 통솔하라고 명했던 가야가 바로 손뼉을 치며 모두를 모았다.
“자~ 자~ 다들 주목! 김준 오빠 말 들었지? 이제부터 움직이자! 에밀리하고 나니카! 그릇 들고 설거지! 그리고… 어 저기 빗자루랑 걸레 보이네, 인아랑 마리가 여기 치우자. 그리고 라나는 옥탑방에서 샤워했지? 도경이랑 언니랑 같이 위층도 치울 준비 하자. 우리가 쓸 방이라잖아?”
마치 분대장 같이 움직이는 가야 덕분에 김준은 통제는 빠를 것 같다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물과 남은 수프를 가지고 차로 1층으로 내려와 캠핑카로 향했다.
벽 너머에는 아까 까놓은 화염병의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고, 좀비 소리는 안 들렸다.
“휘유~”
담장 위에 깔아놓은 유리와 쇳조각 부비트랩 역시 침입 흔적은 없었다.
똑똑
“….”
조수석을 두들기자 힘없이 고개를 든 은지가 있었다.
“자~ 뭐라도 좀 먹어야지.”
작은 생수병과 후추를 풀어 데운 수프를 받은 은지는 조용히 그것을 보다가 겨우 한술 떴다.
따뜻한 맛이 입안에 들어갈 때, 은지는 두 눈이 벌게졌다가 이내 눈물을 떨어트렸다.
“흑….”
“먹어야 기운 내고 앞으로 살아가지.”
이 상황에서 센 척해도 어디까지 버티겠는가?
김준은 울면서 수프를 먹는 은지를 향해 문을 열어줬다.
“이거 먹고 안에 들어가자.”
“그, 그게… 저기… 흑.”
“괜찮아~ 괜찮아. 다른 애들은 다 씻고, 욕실 비어있으니까.”
그 말에 은지는 드디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일곱 톱스타들은 마지막으로 은지가 들어오자 모두 안도했다.
은지는 씻은 다음 내복용으로 입던 긴팔 내의로 갈아입고 나왔고, 모든 것을 정리한 톱스타들은 각자 방을 정하고서 모포로 몸을 덮으며 이른 잠에 들었다.
그동안 공포 속에서 지내왔던 애들이 씻고 배를 채우니 피로가 뒤늦게 몰려오나 보다.
2층에 네 명, 3층에 네 명.
이른 저녁부터 잠자리에 든 아이돌들을 확인한 김준은 잠시 나갔다 오려고 했다.
***
그날 김준은 새벽 늦게야 도착했다.
이번에도 발치에는 찐득한 피가 잔뜩 묻어있었고, 총알도 공기총 다섯 발, 엽총을 두 발이나 발사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감염된 경찰 좀비를 받아서 루팅한 리볼버 총탄 열 발, 그리고…
“나중에 써야지.”
더블백에 통조림과 생수등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김준은 보루로 좀비 잡다 튄 피를 싹싹 닦은 다음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불빛 하나 없는 집 안에는 새근거리는 아이돌들의 숨소리만 들렸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여자들을 보고서 김준은 피식 웃고 안방의 문을 열쇠로 열었다.
그곳에는 각종 무기와 생존장비들이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근 김준은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유일하게 방 안에 화장실과 세면대가 있는 곳이었지만, 개인용으로 말하지 않은 곳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가야가 가장 먼저 일어나 씻고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아, 준이 오빠!”
만난 지 하루 차.
그녀는 공손하게 준이 오빠라고 인사하면서 걸레로 거실과 주방을 싹싹 닦아놨다.
나이도 있고 눈칫밥도 있는지, 먼저 움직이는 가야를 보고 김준은 음식 준비를 했다.
“오늘은 죽이야. 앞으로 사흘 동안은 니네들 위장 회복할 때까지 죽하고 수프만 먹어야 할거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가야가 그릇 하고 수저를 챙겼고, 김준은 밥솥 안에 있는 밥들을 모두 냄비에 남고 물을 잔뜩 부은 다음 참치 한 캔 넣어서 슬슬 끓였다.
그리고 기름이 동동 뜨는 죽이 되자, 참기름과 소금 살짝 넣어서 준비하자 가야가 냄비 하나를 들었다.
“오빠, 이것 좀 쓸게요.”
“두들기지 마라.”
“네?”
“소리 웬만하면 내지 마.”
“아, 네!”
좀비에 대해 모르는 상황이라 가야는 곧바로 냄비로 두들겨 깨우는 걸 포기하고, 애들을 흔들어 깨웠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돌들은 부스스한 머리에 세수만 겨우 한 쌩얼 차림인데도 그 미모가 어디 가지 않았고, 졸지에 그녀들과 밥을 먹으니 확실히 보기에는 좋았다.
“자~ 천천히 먹어라.”
“네~”
“얘들아! 잘먹겠습니다라고 해야지?”
안 그래도 되는데 김준에게 인사부터 하라는 가야의 말에 그대로 따르고 수저를 든 아이들.
그렇게 8명의 톱스타와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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