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8)

7.

“청첩장 나왔어.”

서린이 단정한 화이트 톤에 생화로 장식된 청첩장을 내밀었다. 오늘은 같은 사립중학교를 나온 친구들 다섯 명이 모인 자리였다.

“예쁘다. 모바일 청첩장은 나왔어?”

“그건 아직이야. 그래도 이건 너네한테 제일 먼저 주는 거야.”

대부분 일하느라 바빴고,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 중인 친구도 있어서 자주 보지는 못했다. 서린 역시 3개월 안에 결혼 준비를 하면서 청첩장까지 전달해야 돼서 정신이 없었다.

다음 주에는 대학교 친구들을 만나야 했다. 서린은 테이블에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음식을 여러 개 시켰다. 호텔로 예약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웃고 떠들 것 같아서 일부러 캐주얼한 장소로 정했다.

“뭘 이렇게 많이 시켜?”

정연이 과하다는 듯 서린에게 말했다. 제일 친한 정연을 오랜만에 만났기에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싶었다. 서린이 대접하는 자리인데도 정연은 그새 살림꾼이 다 됐는지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여기 레스토랑 한번 오고 싶었어. 예약 잡기 어렵다는데 서린이 덕에 먹는다. 우리 와인도 시켜도 돼?”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아직 미혼인 다희는 음식이 나오기 전에 술부터 시켰다. 서린의 청첩장보다 요리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낮부터 무슨 술이야.”

“넌 마시지 마. 아줌마 다 됐다. 박정연.”

눈을 흘기며 다희가 테이블 위에 턱을 괬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대학 친구들보다 더 편했다. 서로의 가정사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특별한 친구들이었다.

“서린아. 병원은 가 봤어?”

“아직. 결혼 준비가 급해서 병원 갈 시간이 안 났어.”

임신 테스트기를 두 번이나 더 해 봤지만 결과는 역시 두 줄이었다. 임신이 확실해 보였지만, 급박한 일정을 대강 처리하고 나서야 병원을 예약할 수 있었다. 바로 다음 주였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걸 미뤄? 언니가 인생 선배로서 말하는데 원래 초기에 조심해야 되는 거야. 알아?”

“왜? 서린이 어디 아파?”

“넌 가만있어. 어른들 대화에 애가 왜 껴?”

정연의 으름장에 다희는 기가 죽은 채 입을 삐죽거렸다.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에 다들 웃었다.

“다음 주로 예약했어. 그러니까 정연아. 걱정하지마.”

그 말에 정연이 한결 마음을 놓은 듯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입이 무거운 정연이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결혼하니까 서린이 너 더 예뻐졌다?”

“그러니까. 남편한테 사랑받는 티가 확 나네. 안색도 좋고. 안심이야.”

사랑받는다니. 서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왠지 웨딩샵에서 환성이 서린을 품에 안고 나온 게 기억났다. 자신이 유리로 된 장식품도 아닌데 깨질 듯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 행동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뭘 민망해하고 그래. 서린이 남편 될 사람 잘생겼던데. 좋겠다?”

환성에 대해 알고 나니 그는 소문과 달랐다. 서린이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말에 화를 내지도 않았고, 서류 문제로 오해했을 때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말버릇이 사나워서 그렇지, 애초부터 그가 서린을 나쁘게 대한 적은 없었다. 돌고 돌아서 환성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게 신기했다.

“아무튼 축하해. 다들 짠 하자.”

모두가 와인 잔을 들고서 가볍게 부딪쳤다. 축하한다는 인사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여럿이서 떠드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결혼식보다 서린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주혁이었다.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다는 그 말이 사실인지, 소문에 불과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혁에게서 더 이상 연락은 오지 않았다.

띵.

서린에게 첫 번째 문자가 도착했을 땐 대화 소리에 묻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연이어 문자음이 띵띵띵띵, 울리자 흐름이 끊겼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친구들이 두리번거렸다.

“서린이 너 핸드폰 울리는 것 같은데?”

무음으로 해 놨어야 했는데. 대화를 방해한 것 같아 서린이 핸드폰을 끄려고 했다. 오늘 중요한 일정은 더 이상 없었다.

“…이게 뭐지?”

“왜. 뭔데?”

옆자리에 있던 정연이 고개를 빼고 서린의 폰을 함께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였다.

[행복하니?]

연이어 수십통으로 쏟아지는 문자는 같은 내용을 길게 복사한 것이었다.

[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행복하니?]

띵띵띵띵띵!

핸드폰이 잠시 버벅거릴 정도로 문자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름 끼친 서린이 어찌할 줄 몰라 굳어 버린 사이, 정연이 대신 폰을 채갔다.

“뭐야, 이거. 웬 미친놈이야.”

“왜, 왜 그래? 뭔데, 뭔데?”

심상치 않은 정연의 목소리에 다들 식사를 멈추고 정연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씩씩거리며 정연이 핸드폰 화면을 모두에게 보여 줬다. 행복하냐는 긍정적인 물음이 징그럽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잘못 온 거 아닐까?”

“번호가 없어서 다시 전화도 못 걸어 보겠어.”

스토커, 스토킹.

서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구역질이 일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서린의 등에는 식은땀이 났고 공포심에 손에 힘이 빠졌다. 현기증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자신도 모르게 서린은 옆에 앉은 정연의 손목을 움켜쥐며 떨었다.

“뭐야, 무서워.”

“좋은 날인데. 누가 이러는 거야? 소름 끼치게.”

끊임없이 쏟아지던 문자가 다행히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탁. 걱정 말라는 듯 정연이 서린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정연이라도 담담한 척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군지 몰라도 참 찌질하네. 전화도 아니고 문자로.”

“하하. 그러니까. 공포영화라도 보는 줄 알았네.”

공포영화라면 질색하는 다희였지만 억지로 웃고 있었다. 서린은 더 이상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서린아. 이거 아무 일도 아니야. 요즘 이렇게 번호 조작해도 다 잡는다. 신고하면 돼.”

“잘못 온 거겠지. 몇 번 더 이러면 그때 신고할게. 음식 다 식겠다. 정연아, 어서 먹자.”

정연이 다른 친구의 근황을 물으며 분위기를 전환하자 방금 전 사건은 금방 잊혀졌다.

옆에서 친구들이 웃고 떠들자 서린의 심란했던 마음이 점차 진정되었다.

“잘 먹었어. 서린아. 결혼식 준비 잘 하구.”

“그래, 다들 잘 들어가고. 그때 보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모르게 식사 자리가 끝났다. 서린은 와인을 마시지 않았지만 대부분 한 잔씩 술을 한 상태였다. 친구들을 마지막까지 챙기며 집에 보내고 나니 어느새 서린은 혼자 남았다.

“아, 빈혈이….”

세상이 핑 도는 듯한 느낌에 비틀거리던 서린이 겨우 계단의 난간을 잡았다. 영양제를 챙겨 먹고 있는데도 임신 초기의 빈혈 증상은 자주 나타났다.

“요즘 자주 이러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병원에서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린은 배 속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가 무리한 것 같아서 아랫배를 잠시 쓰다듬었다. 얼른 집에 가서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택시 타려면 이쪽으로 가면 되겠지?”

빈혈이 심해져서 서린은 요즘 직접 운전을 하지 않았다. 현기증이 나아지자 서린이 대로변으로 나가기 위해 걸었다.

“윤서린.”

날카로운 목소리가 서린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려는 순간 저쪽에서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온 주혁이 서린의 손목을 낚아챘다.

“읏…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서린이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서린의 물음에도 주혁은 대답 없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연약한 서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겨우 이제 혼자 있네. 계속 기다렸어.”

“아파! 이거 놔, 선배.”

서린이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주혁의 악력이 엄청나 악, 하는 비명이 나왔다. 무리해서 빼내려 한 탓에 아무래도 인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아니라고 애써 생각했지만… 조금 전 모르는 번호로 쏟아지던 문자는 역시 주혁이 보낸 듯했다.

“행복하냐?”

“…….”

“식사 내내 너 웃고 있더라. 뭐가 그렇게 좋아서.”

“선배가… 보낸 거 맞아?”

“장난 좀 쳐 봤지. 그러니까 표정 관리 좀 하지 그랬어. 청첩장 나온 게 뭐라고 그렇게 들떴는데?”

심기가 뒤틀린 주혁의 표정이 기이했다. 시커멓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찢어질 듯 웃는 입. 그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만큼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내 문자, 전화 먼저 다 씹은 건 너잖아. 그렇게 안 봤는데 윤서린, 너 참 잔인하다. 우리 사이에 아직 치러야 될 계산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아, 아파….”

서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도 대로변이라 주변에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주혁과 서린을 번갈아 보며 수군거렸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치정 싸움으로 보일 뿐이었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나 오늘 너 안 보낼 거니까.”

“…놔! 이거 놓으라고!”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정도가 있어. 이러려고 너 나랑 안 잔 거냐? 비싼 척해 놓고 그 새끼한테는 줬을 거 아니야.”

주혁이 잠자리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성급하게 굴기 싫다면서 서린을 배려한다는 말을 믿었는데. 그녀가 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줄 알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도, 도와주세요!”

“그 새끼랑은 잤어?”

“…….”

“그래도 결혼 전인데 다리를 쉽게 벌리면 안 되지. 더군다나 나랑 헤어진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상관이야? 이거 놓으라고!”

“네가 나랑 잤어 봐. 그렇게 쉽게 딴 남자한테 대 줄 생각했겠어?”

더러운 말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씻어 내고 싶었다. 주혁이 대로변에 세워 놓은 차 앞으로 거칠게 서린을 끌고 갔다.

서린은 잡힌 팔 때문에 어깨가 빠질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반항했다. 구두 굽이 끌리며 사나운 소리를 냈다.

서린이 악쓰듯 비명을 지르며 아득바득 주혁이 쥔 손목을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다 주혁의 손등을 할퀴어 패인 살갗에 피가 났다.

“미친년이 감히 어디에 손을 올려.”

서린의 손목이 풀린 것도 잠시였다. 짝, 두꺼운 주혁의 손이 서린의 뺨을 갈겼다. 머리가 울릴 정도의 타격에 뺨이 얼얼했다. 입술 끝이 터져서 따끔거리고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얼어붙은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속에서 역겨움이 치밀어 올라서 서린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제, 제발 도와주세요!”

“뭐야, 저 여자, 큰일 난 거 아니야?”

비틀어 짜내듯 서린이 소리를 질렀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서린을 바라봤다.

주혁이 서린의 입을 그대로 틀어막았다. 한때는 주혁의 성격만큼 고운 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녀를 강제로 납치하려고 하는 흉악한 손일 뿐이었다.

“하하. 여자친구예요. 좀 싸워서요.”

입이 틀어막혀 서린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주혁이 사람들에게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서린이 알던 그 친절한 가면을 쓰고서 상식적인 것처럼 굴었다.

“치정 싸움이겠지.”

“그래도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야? 저 남자 좀 폭력적인 것 같던데.”

“아까 저 여자가 선배라고 하던데?”

“안 되겠어. 일단 112에 신고부터….”

두서없는 말소리에 서린도 정신없었다. 뒷문이 잘 열리지 않는지 주혁은 “씨발, 씨발”하며 욕설을 지껄였다. 그의 이중인격에 놀라면서도 서린이 주혁의 손을 깨물고 밀쳐 냈다.

“이런 개 같은! 야! 씨발,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안 와?”

얼떨결에 뒷좌석에 처박힌 주혁이 아직 일어나지 못한 틈을 타 서린이 달아났다. 사람이 많은 쪽으로 뛰었는데 구두가 삐끗해 서린이 고꾸라졌다.

“…!”

넘어지면서 손으로 바닥을 짚어야 했다. 하지만 서린은 그 순간 배 속의 아기를 생각했다.

아기, 아이가 위험해서는 안 돼.

순간적으로 서린이 배를 감싸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보도블럭에 순식간에 무릎의 살점이 갈려 나갔다. 하지만 서린은 아픈 줄도 몰랐다.

“이게 도망을 쳐? 한 번 맞은 걸로는 성에 안 차지?”

저벅저벅, 천천히 다가오는 주혁의 발걸음이 무서웠다. 일어나야 되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뛰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팔다리가 서린을 돕지 않았다.

퍽!

갑작스러운 마찰음에 서린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흘러나온 건지 모를 눈물에 그녀의 얼굴이 온통 젖어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서린은 자신이 우는 줄도 몰랐다.

“…환성 씨?”

흐린 시야 사이로 이제는 익숙해진 환성의 몸이 보였다.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지나치게 큰 키에 다부진 몸 때문이었다.

단번에 주혁의 얼굴을 가격한 환성이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풀었다.

철컥철컥, 차고 있는 시계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주먹을 재차 쥔 환성이 입가에 맺힌 피를 문질러 닦는 주혁을 바라봤다.

“윽… 민환성!”

주혁의 이가 덜그럭거렸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주혁이 뱉어 내자 두 개의 이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앞니 두 개가 빠진 자리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이, 이가 빠졌어!”

여러 대 맞은 것도 아니라 고작 한 대였다. 그런데도 주혁은 머리가 쪼개지듯 아팠고 귀에 이명이 들렸다. 비척비척 일어나 중심을 잡은 주혁이 환성을 노려보았다.

환성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서린이 신경 쓰였지만 주혁을 죽사발부터 내놔야 했다. 환성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것을 다스리고 겨우 힘 조절을 했다. 대로변에서 사람을 패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이거까진 안 꺼내려고 했는데.”

주혁이 바지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밀리터리 나이프의 날카로운 칼날이 선득하게 빛났다. 식칼처럼 길지는 않지만 장작 정도는 간단하게 팰 정도로 강력한 무기였다.

자세를 고쳐 잡은 주혁이 위협적으로 환성에게 칼을 겨눴다. 주혁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게 잡아도 자신보다 15센치는 더 큰 상대였다. 키 차이 때문에 주혁은 위축이 되었지만, 다행히 상대는 맨손이었다. 틈을 노려 환성의 얼굴부터 그어 버릴 생각이었다.

“칼을 써 보긴 했나?”

“…남의 여자 도둑질한 주제에 뻔뻔하게. 서린인 내 여자야.”

“찔러.”

“…뭐?”

“아가리만 놀리지 말고 찌르라고.”

체급 차이가 확실했지만 주혁에게는 칼이 있었다. 안된다고, 당장 피하라고 서린은 환성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잠겨 버렸다.

아무리 환성이 싸움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다칠 위험이 더 컸다. 서린은 그가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모습이 상상되자 미칠 것 같았다.

“안 찔러?”

“씨발, 가만 있어!”

환성을 노리는 칼이 공중에서 몇 번 죽죽 그어졌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살벌해 서린의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환성의 과격한 성질을 이제는 잘 알았다. 그는 절대로 피하지 않고 주혁과 맞설 생각이라는 것도.

“안, 안돼! 환성 씨. 제발…!”

울음이 섞인 서린의 목소리가 드디어 터져 나왔다. 환성에게 들렸을 텐데. 그의 드넓은 어깨가 한 번 움직이더니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칼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크윽… 민환성! 이거 놔.”

잘 벼려진 칼날이 환성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은빛 칼날을 타고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잿빛 보도블럭에 검붉은 자욱을 남기며 피가 고였다. 새된 비명을 서린이 속으로 삼켰다.

“사람 죽이기엔 이 칼은 짧아.”

분명 아플 텐데도 환성은 칼을 잡은 채 가볍게 손목을 꺾었다. 손바닥에 더 깊이 날이 파고들었지만 여전히 여유로웠다. 드디어 바닥 위로 피범벅이 된 칼이 떨어졌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가지고 있던 무기가 사라지자 주혁의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재벌 4세라고 해서 민환성을 만만하게 생각했다. 주혁이 칼을 들고 위협하면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찌르라고 말하는 환성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냉기가 흐르는 검은 눈동자가 뱀처럼 가늘었다. 주혁은 살면서 저런 눈깔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 환성에게 가격당한 턱이 빠질 것 같았다. 주혁은 긴장한 채 터진 입 안에서 새어 나온 피를 삼켰다.

“이제 내 차례지?”

퍽, 명치에 꽂힌 주먹에 주혁은 악, 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대로 쓰러진 주혁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환성이 바닥을 기며 콜록거리는 주혁의 복부를 걷어찼다.

“엄살은. 피 토하기 전인데.”

가볍게 손을 든 환성이 주혁의 팔 한쪽을 잡고 비틀었다. 우두둑,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주혁의 팔이 반대로 돌아갔다.

“아악!”

“이걸로 칼 들고 설친 오른쪽 어깨는 못 쓸 거고.”

환성이 자비 없이 엎어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주혁을 구둣발로 뒤집었다. 주혁이 죽기 직전의 벌레처럼 몸을 떨며 쿨럭, 속에서 터진 피를 뱉어 냈다.

“여자 얼굴을 때려? 개쓰레기 새끼.”

환성이 서린이 맞은 곳을 복수하듯 주혁의 광대뼈를 내려쳤다. 찢어질 듯한 주혁의 비명을 무시한 채 반대쪽 관자놀이에 주먹을 꽂았다. 수차례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주먹질에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린은 사람 얼굴을 때리면 저런 소리가 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두려운 광경에 다들 얼어붙었다.

“그, 그만. 그만해요!”

어느새 환성의 곁에 온 서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서린의 목소리에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폭력이 멈췄다.

이미 피범벅이 된 주혁의 얼굴은 삭제 퉁퉁 부어 있었다. 으, 하는 신음만 겨우 내고 있는 것을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죽일 뻔했네.”

그제야 환성은 상황을 인지했다. 옆에서 뒹구는 칼과 보도블럭을 적신 피, 너덜거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니 환성의 것인지 주혁의 것인지 불분명한 피가 엉겨 있었다.

환성의 흰색 셔츠의 소맷단이 피로 푹 젖어 있는데도 전혀 몰랐다. 그는 한 번 퓨즈가 나가면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심지어 환성은 주혁을 때리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서린은 이런 장면에 면역력이 없는 사람이라 환성을 두렵게 느끼는 듯했다. 그는 떨고 있는 서린을 보니 간만의 싸움에 흥분한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피,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피?”

“왜 자꾸 오른손으로 때려요. 이렇게 많이 찢어졌는데.”

“…….”

“이것 봐요. 상처가 더 벌어졌잖아요.”

벌겋게 찢어진 손바닥을 동여맬 것도 없었다. 서린이 환성의 팔목을 잡은 채 흐느꼈다. 얼마나 아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안 아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왜 칼을 맨손으로 잡아요!”

“그럼 왼손으로 때렸으면 그건 괜찮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올까? 언뜻 봐도 환성의 상처는 심각했다. 오른손은 온통 피투성이에 그의 잘생긴 얼굴은 핏방울로 얼룩져 있었다.

삐용삐용―.

가까운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신고자 덕분에 때마침 경찰차가 도착했다. 서둘러 내린 경찰들이 정황을 파악했고 주혁의 상태를 보고 119를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수고하십니다. 제 상처는 별거 아닙니다.”

“구급차 오면 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상처 부위가 깊어서 봉합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서린이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환성의 손을 감쌌다. 아이보리색 겉옷이 피로 금세 젖었다.

“신고 접수받았을 때 피의자가 칼을 먼저 들었다고….”

“제가 설명할게요.”

환자인 환성 대신 서린이 나섰다. 입술은 메말랐고 목소리는 버석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서린은 환성이 신경 쓸 일을 하나라도 줄여 주고 싶었다.

“선배는… 아니, 저 사람이 저를 막무가내로 어디론가 데려가려 했고, 겨우 빠져나왔는데 때마침 절 발견한 남편이….”

마음이 급하니까 남편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었지만 환성과 혼인신고는 이미 했으니 남편이 맞았다.

하지만 그 호칭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막연했던 환성과의 사이가 명확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남편이 막았지만 칼을 꺼냈어요. 위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찌르려고 했고, 맨손으로 그이가 칼을 잡는 바람에.”

“알겠습니다. 이제 근처 CCTV를 확보하고 파악하겠습니다. 영상 확보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병원으로 찾아뵙는 방법도 있고요.”

“…감사합니다.”

경찰의 친절한 설명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에 서린이 고개를 숙였다. 신고해 준 사람도, 사건을 정리해 주는 경찰도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했다.

광분한 환성이 자신의 말을 들어서 다행이었다. 주혁 같은 사람을 과잉진압한 대가로 환성이 형사 처벌을 받을 순 없었다. 아마도 주혁은 법대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구급차 곧 도착하는데 병원부터 가시죠.”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알아서 움직이겠습니다.”

환성의 거절에 경찰도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묵례하고 돌아갔다. 경찰이 증거물을 수집하고, 사람들을 정리하며 빠르게 현장이 수습되었다. 주혁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게 마지막이었다.

“병원부터 가요.”

서린이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피가 더 쏟아지지 않게 환성의 한쪽 손은 심장보다 높이 들도록 했다. 다행히도 택시는 금방 잡혔다.

“가까운 병원으로 가 주세요.”

그의 팔을 받치느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게 되었다. 두 사람의 상태를 보고 흠칫 놀란 택시기사가 내비게이션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검색했다.

* * *

상처는 상당히 심각했다. 총 스물여덟 바늘을 꿰맸고, 의사는 아마도 부분적으로 손가락의 신경이 손상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붕대가 풀리지 않도록 보호대까지 착용하고 나서야 병원을 나설 수가 있었다.

“당신은 괜찮아?”

“저야 다친 곳도 별로 없는데요.”

무릎이 까진 상처는 환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넘어지면서 배부터 감싼 탓에 아기도 이상이 없는 듯했다. 배가 당기는 느낌이나 통증이 전혀 없어 다행이었다.

“셔츠가 잘 안 벗겨져.”

환성이 하의는 한 손으로 벗었지만 단추를 푸는 게 힘들었다. 온전히 힘으로 잡아당기니 벌써 단추 몇 개가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아, 저한테 해 달라고 하시지 그랬어요. 제가 풀어 드릴게요.”

환성을 마주 본 서린이 그의 단추를 매만졌다. 하나, 둘 단추가 풀릴수록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손끝이 환성의 복근에 닿자 서린이 흠칫 놀랐다.

“다, 다 됐어요.”

환성이 피가 묻어 있는 소매가 보이지 않도록 접어 올렸다. 그에게도 긴 하루였기에 어서 씻고 자고 싶었다. 그가 드로즈만 입은 채로 욕실 문을 열었다.

“잠깐만요. 혼자 씻으려고요?”

“그럼?”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된다고 의사 선생님이 여러 번 당부 했잖아요.”

“아, 그랬지.”

서린이 주방에서 요리용 비닐장갑을 하나 꺼냈다. 환성의 오른손에 씌운 뒤 고무줄을 손목에 끼워 고정했다. 야무진 모습에 환성이 피식 웃었다.

“이제 됐어요.”

“당신도 같이 씻지?”

“…네?”

“무릎 상처. 씻고 약 발라야 되잖아.”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소독할 수 있어요.”

“그럼 내가 샤워하는 거 도와줘.”

환성이 가볍게 서린을 잡아끌었다. 생각해 보니 저런 상태로 혼자 씻는 건 힘들어 보였다. 가뜩이나 덩치가 크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서린도 옷을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앗…!”

천장에서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지자 서린의 무릎이 따끔거렸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환성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아파?”

“아뇨, 그냥 물에 닿아서요.”

아픈 사람은 환성이면서 서린을 걱정하고 있었다. 연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서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서는 안 됐다.

“뭐 해? 여기 샤워볼.”

뜨거운 수증기에 서린의 정신이 멍해졌다. 환성이 건넨 샤워볼을 받자 정신이 들었다. 바디워시를 짜서 거품을 내고 환성의 허리부터 문질렀다.

환성은 왼손만으로 머리를 감았다. 성가시다는 듯 거칠게 벅벅, 문지를 때마다 거품이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난 다 된 것 같은데.”

서린에게서 샤워볼을 뺏은 환성이 쭉, 거품을 짜냈다. 부드러운 거품이 가슴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움푹 파인 배꼽에까지 고일 정도였다. 젖꼭지에 매달린 거품을 환성이 집요하게 지워 냈다.

“왜 그렇게 사람이 무모해요?”

생각할수록 아찔한 상황이었다. 환성이 가슴이나 배를 찔렸다면 장기가 다칠 위험도 있었다. 아직도 서린은 주혁이 공중에서 칼을 휘둘렀던 장면이 생생했다.

“생각할 틈이 있겠어? 몸부터 나갔지.”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잖아요.”

또 이런 일이 생길 리 없지만 자신의 몸도 생각하라고,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건 위험하다고. 서린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보통 경찰은 대화를 유도하며 범죄자를 진정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환성은 오히려 주혁을 도발하는 듯 보였다. 찔러 보라는 말에 흥분한 주혁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니까.

“원래 사랑은 무모한 거야.”

“…….”

갑작스러운 고백에 서린이 굳었다. 환성에게서 사랑을 비웃고 멸시하는 말은 이미 여러 번 들었다. 그렇지만 이 남자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난 내 손보다 지금 당신 무릎이 더 신경 쓰인다고.”

다친 손을 하고서 환성이 근사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차가운 남자가 말하는 사랑의 온도는 지나치게 따뜻했다.

“그게 말이 돼요? 전 그냥 넘어진 거고 당신은 손가락의 감각이 없어질지도 모른다잖아요.”

아직 두고 봐야 했지만 걱정스러웠다. 가장 예민하고 많이 쓰는 부위가 손이라서 더 그랬다. 완벽한 환성의 육체에 서린이 흠집을 내놓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애무를 못 하게 되진 않아.”

왼손으로 환성이 서린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비누 거품이 묻은 유두를 엄지로 지워 내자 그대로 꼿꼿해졌다. 거품과 물기에 젖어 가슴 끝까지 미끄러졌다. 본의 아니게 젖을 짜 버린 것처럼 되어 서린이 신음을 삼켰다.

“안 돼요… 손에 무리라도 가면 어떡하려고요.”

환성의 눈빛은 이미 욕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땅히 서린을 구한 대가를 받아야겠지만 격하게 움직이다 꿰맨 상처가 덧날까 걱정됐다.

“내 손보다 난 이쪽이 더 걱정인데.”

발기한 환성의 성기가 서린의 엉덩이를 쿡 찔렀다. 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뭉툭한 귀두가 둔부를 짓눌렀다.

“하지만 상처가….”

환성을 자제시키고 말려야 했다. 하지만 배 속이 간질거리는 것은 서린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전희를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밑이 뜨거웠다. 아무래도 환성을 보기만 해도 젖는 것 같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나가야겠어.”

“잠깐만요. 머리부터 좀 닦고요.”

서린이 커다란 바디타월로 환성의 몸을 닦았다. 드넓은 어깨와 허리를 감싸는데 팔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환성을 직접 안아 본 적이 없어 그의 몸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이제 됐지?”

같은 수건을 쓰고, 같은 장소에서 잠이 드는 것. 평범한 신혼생활인데 그게 창피하게 느껴졌다. 서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침대 위에 먼저 누운 환성이 옆에 있는 서린의 몸을 끌어왔다. 한 팔로 가볍게 끌어안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복근 위에 손을 짚고 있었다.

딱딱한 복근이 신기해 서린이 매만지자 그의 성기가 반응하며 왼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원래 이렇게도 움직여요?”

서린이 신기한 듯 환성에게 물었다. 내벽을 툭툭, 쳐 대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자지의 움직임이 이토록 큰 줄은 미처 몰랐다.

“궁금하면 만져 봐.”

환성이 서린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성기를 잡게 했다. 한 손에 다 쥐어지지도 않는 크기, 쇠심줄처럼 질긴 핏줄. 놀란 서린의 손이 주륵, 흘러내리며 푹신한 고환에 닿았다.

의외로 성기의 표피는 부드러웠다. 흥분한 듯 붉어진 고환도 말랑거리는 게 신기했다.

“꽉 쥐면 안의 불알도 느껴져.”

작은 서린의 손을 끌어와 환성이 자신의 음낭을 쥐게 만들었다. 서린의 손 안에 양쪽의 알이 두둑하게 찼다. 아프지도 않은지 환성이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서린은 손으로 원형의 고환을 여실히 느꼈다.

“손을 잘 못 쓰니까 당신이 이리 올라와.”

환성이 한 팔로 서린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오른손을 제외하면 멀쩡하면서도 환성은 서린에게 색다른 체위를 요구했다.

“오늘은 하면 안 되는데….”

“왜? 생리 예정일도 멀었잖아.”

서린은 임신 초기였기에 괜찮을지 걱정이었다. 환성은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그녀를 올려다봤다.

오늘 같은 날 대체 왜 안 되는지,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서린을 채근하지는 않았다. 절절히 끓는 환성의 눈을 서린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게….”

“진짜 안 돼?”

환성이 멀쩡한 왼손으로 서린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민감하고 예민해진 몸이 금세 반응했다.

반응을 살피던 환성의 손이 과감하게 서린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쫙 달라붙는 살결이 충만하게 환성의 손 안에 찼다.

가슴보다 크고, 말랑한 엉덩이를 주물거리며 슬금슬금 애널 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서린이 애널을 만지는 건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손가락을 욱여넣어야 밑에서 보지가 딸려 나왔다.

반응을 보니 서린의 밑에도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환성은 옅게 난 음모에 애액을 펴 발라 위로 쓸어올렸다.

훤히 드러난 보지는 요도 구멍이 뻐끔거리는 것까지 보였다. 마침내 결심한 듯 서린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요, 허벅지가 너무 벌어져서….”

환성의 기골이 남다른 건 알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몸통 자체가 컸다. 한껏 벌려진 다리 때문에 서린의 음핵이 솟아 나왔다. 환성의 복근에 닿자 서린이 허리를 들썩이며 일어섰다.

“좀 더 뒤로.”

“으응, 이건 좀….”

“스스로 넣어 봐. 좆은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환성이 좆 기둥을 잡고 툭툭, 보지 끝을 쳐 대며 말했다. 겹쳐진 음순이 짓이기듯 비비자, 끝에 달린 클리토리스가 움찔 떨렸다.

“거기 아닌데.”

과감하게 주저앉지 못하는 서린은 환성의 좆 끝이 닿을 때마다 흠칫흠칫 놀랐다. 애꿎은 음핵만 툭, 툭 맞자 허리가 발작적으로 튀었다. 서린은 여태껏 삽입보다 괴로운 게 있는지 몰랐다.

“단번에 넣으려고 애액 발라 주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이제 흥건하거든.”

환성은 뻔히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짓궂게 굴었다. 번들거리는 귀두 끝은 오직 서린의 애액으로 젖어 있었다. 환성이 도와주듯 귀두 끝을 질구에 닿도록 조준했다. 어쩔 수 없이 서린이 좆 기둥을 잡았다.

“하으읏…!”

찐득한 음액과 보지 살을 밀어 내며 환성의 성기가 들어왔다. 아직 기둥의 중간도 채 들어오지 않았지만 서린의 등줄기가 곧게 펴졌다.

슬쩍슬쩍 서린이 허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미약한 움직임으로 서린은 삽입 과정을 즐겼다.

서린이 자연스럽게 환성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서로의 손이 완전히 맞물리는 순간, 환성이 허리를 쳐 대며 끝까지 들어왔다.

“아…!”

머릿속이 까맣게 점멸하며 서린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아기가 생긴 것 같다고, 그러니까 격한 섹스는 할 수가 없다고 이쯤에서 고백해야 맞았다. 그런데… 아득한 쾌감이 자꾸만 서린의 이성을 가로막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해도 되지 않을까.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린은 환성의 몸을 원했다. 음핵부터 자궁까지 찌릿거리며 애액에 절어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러고 보니 무릎 소독을 못 했잖아? 괜찮아?”

“…으응, 빼지 마요.”

서로를 탐하느라 상처 치료는 뒷전이었다. 새하얀 시트 위에 무릎에서 베어 나온 피가 묻었다. 하지만 서린은 지금 무릎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었다.

급하게 불붙은 몸에 혹시라도 자지가 빠질까 불안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환성을 내려다보자 눈치챈 듯 그가 웃었다.

“한 발 싸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자세를 바꿔야겠는데.”

환성이 서린을 올려놓은 채로 허리를 일으켰다. 학, 하며 서린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지만, 자연스럽게 서린의 등을 받쳐 든 환성이 자세를 정상위로 바꿨다.

침대 위로 풀썩 넘어가면서도 서린은 삽입을 한 채로 이렇게 원활하게 체위를 바꿀 수 있는 게 신기했다.

“무릎이 아픈 줄도 몰랐어?”

서린이 환성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드럽게 들어온 성기가 느리게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서린이 환성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의 체중에 눌리고 있는데도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으읏… 하윽! 아으응!”

서재에서 그가 자위를 했던 게 떠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괴로운 듯 파정한 환성은 상상 속에서도 서린을 안았다.

환성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깊은 우물을 좆으로 퍼내듯 내벽을 긁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허리 짓을 한다는 것을 밝은 조명 속에서 확인했다.

서린의 몸이 환성이 박을 때마다 위로 밀렸다. 침대 헤드의 반대편이라 서린의 고개가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매트리스 건너편의 배경은 보이지도 않았다. 환성이 서린의 목을 받치며 똑똑히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퍽, 퍽퍽!

환성이 박을 때마다 아슬아슬 밖으로 밀려서 서린은 떨어질 것만 같았다. 시트가 밀려 바닥으로 흘러내리자 불안감이 들었다. 침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윽! 잠, 잠깐만요.”

서린이 허리가 공중에 붕 떴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히려 음부가 꾹 죄어들며 환성의 사정을 재촉할 뿐이었다.

“떨어지게 안 해.”

이런 섹스가 처음인 서린만 몰랐을 뿐, 사실 머리와 어깨 정도만 침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서린이 공중에서 고개를 들 때마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기를 쓰고 몸을 세우자 좆이라도 잘라먹을 듯 내벽이 뻑뻑해졌다.

“아! 아아! 하으윽!”

교성을 내지르며 서린이 먼저 오르가즘을 느꼈다. 축축이 젖은 시트가 서린의 엉덩이에 달라붙었다. 뭔가를 싸 버리듯, 애액으로 범벅이 된 보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환성의 것을 꽉,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진공 상태의 음부가 심박수에 맞춰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정액을 갈구했다.

“하….”

환성이 낮은 숨을 토하며 사정했다. 좆이 길어서인지 그의 사정은 유난히 길었다. 죽죽, 울컥거리며 정액을 뱉어 낼 때마다 등골부터 고환까지 신경줄이 팽팽해졌다.

입으로 빠는 것보다 조임이 센 보지라 고환 밑에 남아 있는 정액의 끝까지 모조리 긁어 갔다. 가벼운 두통이 사라질 정도로 뇌가 풀리는 쾌감이었다.

서린의 고개는 매트리스 밖으로 넘어간 채였다. 기다란 목, 도드라진 쇄골과 양 가슴을 지나 움푹하게 팬 갈빗대 밑으로 가는 허리가 눈에 띄었다.

겨우 얕은 숨만 쉬고 있는 서린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끝나지 않는 흥분 때문인지 할딱이는 숨이 거칠었다.

“…죽는 줄 알았어요.”

“미안. 자제를 못 해서.”

환성이 서린의 몸을 끌어왔다. 시트 위에 편하게 누운 채 서린은 한동안 쾌감으로 멍해졌다. 질구 밖으로 흘러나온 정액을 환성이 손으로 닦았다. 티슈로 닦아 내기 아깝다는 듯 서린의 음부를 빤히 감상하고 있었다.

“사실….”

“어. 이제 소독하고 약 바를까?”

환성은 까진 서린의 무릎이 안쓰러운 듯 그 근처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오늘 하루가 길었고, 둘 다 지친 상태인데도 결국 또다시 짐승처럼 뒤엉키게 되었다. 환성만 원한 것이 아니라 서린도 섹스를 원하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임신 초기라는 것을 환성도 눈치챘을 것이다. 몸을 섞은 지 고작 두 달도 되지 않았으니까. 서린이 오늘 밤 환성을 원했기에 잠시나마 이 사실을 숨겼다는 게 부끄러웠다.

대답이 들리지 않자 서린이 환성을 바라봤다. 그는 그제야 제정신이 드는지 눈을 깜빡거렸다.

“괜찮아? 아까 넘어졌는데.”

환성이 아기가 이상이 없는지 물어보는데 눈동자가 지나치게 흔들렸다. 다행히 서린이 넘어졌을 때 배를 감싸서인지 통증도 없고 아랫배도 뭉치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섹스에 몸이 동한 것을 보니 확실히 이상은 없었다.

“…그러니까 하자고 했죠.”

그런 상황에서도 환성을 원한 듯해 서린은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리며 한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환성의 고개가 기울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서린의 아랫배를 간지럽혔다. 경이롭다는 듯 그가 그녀의 배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환성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진심이 녹아 있었다. 서린은 그가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건 막연하게 느껴지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와닿는 표현이었다.

새 생명을 기꺼이 품어 준 서린 덕분에 진정한 가족으로 맺어졌다. 둘 사이의 계약은 이미 불필요하게 된 지 오래였다.

서린이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환성도 나란히 침대 반대쪽으로 누웠다. 손은 다쳤지만 오른팔은 팔베개를 하기에 적당했다.

환성이 사랑스럽다는 듯 서린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지친 탓인지 그녀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환성은 서린의 가는 왼손의 약지를 매만졌다.

서린이 환성의 집에서 밤을 보낸 어느 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환성은 리본을 손가락에 묶어 반지 사이즈를 쟀다. 반지가 잘 나와야 될 텐데. 그 생각을 하며 환성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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