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8)

4.

“없어. 여기에도 없네. 대체 어디에 떨어진 거지?”

사파이어가 줄줄이 박힌 팔찌가 사라졌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긴 유품이라 항상 몸에 차고 다녔는데 없어졌다.

“어떡해. 길에서 흘린 거면 찾을 방법도 없는데.”

하필이면 오늘 혼인신고를 하러 나갔으니. 방과 거실을 뒤지는 것으로 모자라 서린이 급하게 정원으로 나갔다. 샅샅이 뒤진 후 대문 밖까지 살펴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 차 시트에 남아 있을지도.”

전날 혼인신고를 하러 강남구청에 갔지만 차에서 내린 적은 없었다. 팔찌의 이음새가 살짝 불안정해서 맡겨야 했는데 내내 미룬 자신의 잘못이었다.

팔찌 하나를 찾겠다고 전화를 하는 것도 우습지만 할머니의 유품인 만큼 찾아야 했다. 점심시간 근처라 환성이 전화를 받을 것 같았다.

-어.

전화를 받는 것부터 잘못된 남자였다. 왜, 라는 물음조차 없는 환성은 서린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왜 매번 환성의 옆에선 시험받는 기분이 들까.

“혹시 차에서 제 팔찌 보신 적 있어요?”

-팔찌?

“네. 잃어버려서 찾고 있어요.”

-못 본 것 같은데. 급하면 한 번 찾아봐. 차 키는 집 안에 그대로 있어. 업무용 차는 다른 거니까.

“아, 그래도 될까요?”

-이제 당신 집이기도 해.

서린은 ‘우리 집’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환성과는 그 어떤 유대감도 없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과 같은 분위기가 생긴 것 같아서.

“그럼 가 볼게요.”

-간단한 속옷도 좀 챙겨오고.

“네? 속옷이 왜 필요해요.”

-자고 갈 수도 있잖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환성이 말했다. 서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환성의 침실은 키가 190cm에 가까운 그만을 위해 꾸며져 있었다.

침대는 장신의 키에 맞춘 제작 상품일 텐데 왠지 서린은 그곳이 불편했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누워도 딱딱하게 경직되어 그곳에서 자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뇨, 외박해 본 적은 없어서요.”

-노팬티도 여자 몸에는 좋다니까 나쁠 건 없지. 어쨌든 저녁 시간은 비워 둬.

아슬아슬한 위험 수위의 말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나 보다. 서린은 귀를 씻어 내고 싶었지만 그 대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일단은 팔찌를 찾는 게 먼저였다.

* * *

차 키는 환성의 말대로 서재에 있었다. 책상 근처 탁자에 나란히 놓여 있는 다섯 개의 스마트 키를 보니 수집용 자동차가 여러 대 되는 모양이다.

서린은 구청에 갔을 때 환성의 차를 기억했다. 같은 엠블럼이 새겨진 키를 찾았다.

“아…!”

마호가니 책상 서랍의 가장 아랫단이 덜 닫혔다. 방을 나가려던 서린의 발목이 조금 긁혔다. 살갗이 조금 까졌지만 피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서랍을 닫으려는데 서류철 하나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제대로 닫으려면 파일부터 꺼내야 했다. 그냥 둘까 하다가 환성도 자신처럼 넘어질까 싶었다.

“이건….”

파일 제목을 확인한 서린이 그대로 굳었다. 설마, 그녀가 서둘러 내용을 확인했다. 설원 그룹을 인수하기 위한 자료들이었다. 내부 정황을 아는 사람이 넘겼을 내용까지 들어있었다.

“말도 안 돼.”

서류를 쥔 서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환 그룹이 설원 같은 작은 사업체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고 서린은 확신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간 듯했다.

“몰랐어요. 설마 돈 때문에 이 결혼이 결정됐다고 생각하세요?”

“왜? 자존심이 상했어?”

“그렇다기보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요.”

“설명이 필요해? 경영에 문제가 있으니까 투자금이 필요한 거고, 가치 있는 회사니까 투자하려 한 거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환성이 호텔에서 말했던 게 기억났다. ‘투자’했으니 그는 곧 환수할 계획을 세웠을 거다. 어디 이환 그룹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한 적이 있던가.

찰칵, 찰칵.

서린이 핸드폰으로 서류를 사진으로 찍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글자가 자꾸 희미하게 촬영됐다. 몇 번이고 다시 찍는 동안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외동딸인 서린은 어차피 설원의 후계자였다. 아버지는 원래 데릴사위 생각까지 했던 분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환성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수, 합병되어 그의 몫이 될 수 있는 자리였다.

“결혼 생활이 유지가 된다면… 그렇겠지.”

급하게 결혼 시기를 당긴 것도, 심지어 혼전 임신을 요구한 것도. 꺼림칙 했던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적당한 상대인 서린과 아기를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요구할 게 분명했다.

“호텔에서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당신 말을 듣는데 믿을 만했어.”

“…어떤 점에서요?”

“결혼은 결혼. 뒷구멍에서 노는 건 따로. 다들 그러니까.”

“…….”

“서로 다른 사람 생기면 말하는 게 어때? 대신 결혼을 정리하기 전에는 섹스는 안 해야 뒤탈이 없겠지.”

이제야 그 말이 이해가 됐다. 환성에게는 이 결혼이 그랬듯 이혼 또한 쉬웠다. 그저 한마디.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말하면 종료될 결혼 생활이었다.

300억을 그대로 돌려받고 그것에 얹어서 설원까지 손에 넣으려고 하다니. 서린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환 그룹이 유일하게 손대지 않은 분야가 식품업이었다.

식품 쪽은 재벌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큰돈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요즘에야 유통이 좋아져서 외식산업만큼 매출이 커지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환성이 욕심 낼 줄은 몰랐다.

“왜 이 남자를 믿었을까.”

환성이 조금 잘해 줬다고 해서 첫인상을 잊은 게 어이가 없었다. 서린은 소문을 떠나서 환성과의 호텔에서 만남을 돌이켜야 했다.

결혼조차 그에게는 게임에 불과했다. 서린의 임신을 조건으로 걸었던 게 민환성의 본성이었다. 더 이상 흔들리면 안 된다고 서린은 결심했다.

“이혼 계약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들키지 않도록 서류를 정리한 뒤 서린이 서랍을 닫았다. 민환성의 약점이 있다면 윤서린을 순진하게만 알고 있다는 거였다.

곱게 자라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그래서 쉬운 여자라고 착각할 게 뻔했다.

“일단 팔찌부터 찾아야겠어.”

가벼운 현기증이 나 서린은 방을 나가다 말고 잠시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지만 부모님까지 끌어들인 게 마음에 걸렸다. 서린은 철석같이 민 서방이라 부르며 환성을 믿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맺혔다.

이 서류를 조 비서에게도 보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안다면… 건강도 좋지 않으실 텐데 더 이상의 충격을 드릴 수는 없었다.

* * *

“팔찌는 찾았어?”

“네.”

조수석을 샅샅이 살펴보고 바닥을 매만지니 다행히도 팔찌를 찾았다. 헐거워진 이음새가 끊어져 있어서 수리가 필요했다.

“잠깐.”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환성이 서린을 내려다봤다. 그가 서린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울였다. 가볍게 숨을 들이켜자 바람에 돋아난 솜털이 간지러웠다.

“왜, 왜요.”

“담배를 끊은 뒤로 후각이 좀 예민해졌어.”

개라도 되는 듯 서린의 몸 냄새를 맡던 환성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킁킁거렸다. 개라기보다는 늑대를 닮아서인지 이 행동조차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냄새는 안 나네.”

“…무슨 냄새요?”

서린은 이 순간에도 땀 냄새를 신경 쓰는 자신이 싫었다. 환성에게 잘 보일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당신한테서 내 냄새가 나. 여기에 오래 있었나 봐?”

민환성은 윤서린이 한주혁을 정리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걸까? 집착적으로 서린의 체향을 확인하는 시선이 곧 그녀의 옷을 벗기고 취조라도 할 것 같다.

“그런데 왜 짐이 없어?”

“…….”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 치약이나 칫솔 여벌이 있긴 한데. 씻으면 옷은 내 거 입어. 티셔츠 입으면 원피스처럼 보이겠어.”

환성은 소파에 놓인 서린의 핸드백을 확인했다. 이미 머릿속에서 환성은 서린의 알몸에 흰 티셔츠를 입히고 있었다. 빳빳한 천보다는 부드러운 천이 젖꼭지를 꼬집기에 편했다.

“계약서를 쓰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아서 기다렸어요.”

“계약서?”

넥타이를 푸르다 말고 환성이 서린을 쳐다봤다.

투둑,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천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타이가 성가신지 환성이 인상을 썼다.

“이혼 계약서요.”

어느새 와이셔츠 단추는 세 개나 풀려 있었다. 별 반응 없이 환성이 셔츠부터 벗었다. 완전히 드러난 상체의 위압감은 굉장했다. 왜 환성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부터 벗는지 알 것 같았다.

남들보다 두 뼘은 더 넓은 듯한 어깨. 두꺼운 팔뚝과 대조적으로 기다란 팔. 탄탄한 가슴 근육 밑으로는 잘 짜인 복근이 있었고 선명하게 패인 장골은 그가 얼마나 운동 중독인지 여실히 드러났다.

“혼전 계약서 말하는 건가? 이혼 조항도 들어가긴 하지만.”

이혼을 원하는 건 환성이면서 불만이라는 듯 그가 물었다. 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이혼 계약서라고 말해 버렸다. 정식 명칭조차 잊을 정도로 서린도 얼이 빠졌다.

“네. 뭐든요.”

“이미 혼인신고서 쓴 건 알고 하는 말이지?”

며칠 전만 해도 혼인신고에 서린이 구걸하듯 매달렸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있냐는 말이었다. 환성이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사태가 심각해질지도 몰랐다.

“남자 조심하라면서요.”

윤서린의 인생에서 단 한 가지 조심해야 되는 게 있다면 남자라고, 환성이 분명 그랬다. 서린이 대답에 환성이 하하하,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서린은 어떤 관점에서 웃긴지 전혀 모르겠지만, 환성은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웃었다.

“남자로 봐서 다행이네.”

“…….”

“뭐, 난 상관없어. 당신이 어떤 조건을 걸어도 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어 줄 수도 있어.”

“…그럼.”

“대신 집으로 들어와.”

할 말을 마친 환성이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서린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쫓아갔다.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환성은 수트 바지를 벗은 채였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근육질의 엉덩이며 허벅지가 드러났다. 아, 놀란 서린의 손이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반쯤 닫고 뒤돌아서 벽에 기댔다.

“왜 도망가.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옷 갈아입을 때는 문을 닫으셔야죠.”

“이제 다 입었어.”

다시 문을 열었지만 환성은 아직 티셔츠를 몸에 꿰고 있었다. 그가 옷을 입느라 비틀어진 상체의 근육들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집으로 들어오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이미 혼인신고도 했잖아. 당신이 집도 여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고. 이사 갈 일도 없을 텐데 살면서 천천히 살림 채워 넣어.”

한마디로 결혼식 전에 동거를 하자는 소리였다. 역시 환성이 쉽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줄 리 없었다. 서린이 조건을 걸 때마다 환성은 더 큰 무리수를 두었다.

“말들이 많을 텐데요.”

“나 좋자고 하는 짓인가?”

혼인신고보다 확실한 방법은 결혼이었다. 아마도 같이 살게 된다면 부모님은 물론 설원의 임원들까지 한숨 돌릴 게 눈에 보였다.

“좋아요. 혼전 계약서에 쓸 제 조건은….”

“됐어. 그런 건 나중에.”

서린의 팔을 확 잡아끌며 환성이 말했다. 화려한 드레스룸은 수트가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통유리로 된 진열장은 명품샵의 매대처럼 억대를 호가하는 시계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아무리 봐도 서린의 옷을 놓을 자리는 없는데 당장이라도 들어오라니 환성의 저의를 모르겠다.

“오늘 뭐 했어?”

“네?”

“아침에 일어나서 팔찌 찾고, 점심은 뭐 먹었지?”

그런 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다. 환성은 거칠게 끌어온 것과 다르게 서린의 손을 조물거렸다. 부드러운 손바닥과 기다란 손가락을 살살 긁으며 시선을 맞췄다.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냥 뭐 대충 먹었어요.”

서린이 서류를 본 것은 모르는 눈치다. 혼전 계약서의 조항에 환성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서린은 속지 않기로 했다.

“잘 챙겨 먹어야지. 앞으로 저녁은 계속 같이 먹는 게 좋겠어. 그런데 몸이 좀 차가운데?”

은근슬쩍 올라온 손이 서린의 아랫배를 감쌌다. 자신도 모르게 서린은 배에 힘을 주었다. 확인해야겠다는 듯 옷 안으로 환성이 손을 넣었다.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요?”

그의 팔목을 잡은 채 서린이 물었다. 여자에 익숙한 건 익히 들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결혼한 이상 당신 몸이 내 몸. 내 몸이 당신 몸이라고.”

서린이 지적하면 그만둬야 되는데 환성의 손은 오히려 브래지어 속으로 파고들었다. 제 것인 듯 젖가슴을 주물렀다. 섹스 전 분위기를 잡는다기엔 손놀림이 노골적이었다.

“그, 그만요….”

“통계적으로 여자 가슴에 생긴 물혹을 남편이 먼저 찾는다는 거 알아?”

양쪽 가슴을 움켜쥐며 환성이 물었다. 앞에 달린 후크를 그가 풀었다. 옷 속에서 가슴이 쏟아져 나오고 흰색 블라우스에 유륜이 비쳤다.

환성이 밑가슴을 그러쥐고 젖꼭지 쪽으로 가슴을 짜내듯 밀어 냈다. 몽우리가 작고, 부드러운 지방이 꽉 들어찬 가슴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거의 매일 만지니까, 알 수밖에 없겠지. 부부가 된다는 건 그런 거야. 서로의 몸을 자신보다 잘 알게 된다고.”

손수 서린의 블라우스를 위로 당기며 그녀의 가슴을 드러냈다. 옅은 빛의 젖꽃판은 가슴 크기에 걸맞게 번져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돋아난 돌기를 환성이 머금었다.

“흐윽.”

환성을 밀어 낸다는 게 오히려 허리가 뒤로 꺾였다. 서린은 완전히 가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자꾸 빨아야 커지지.”

서린의 작은 젖꼭지를 환성이 슬쩍 씹었다. 젖샘까지 자극할 기세로 깨물고, 빨고를 반복한다. 최대치로 부풀리고 타액을 머금어 퉁퉁 불어 버릴 정도로 빨았다.

“으응….”

환성의 머리카락이 서린의 쇄골이며 가슴 근처를 간지럽혔다. 쪽, 소리를 내며 튕겨 나온 유두 끝이 저릿했다. 아기는 젖꼭지가 떨어져 나갈 만큼 빤다는데 환성도 그에 못지않았다.

“읏… 가슴, 아파요.”

“아파? 살살 주물렀어. 이거보다 힘 더 못 빼.”

젖꼭지 안쪽이 쑤셔 왔다. 살갗이 벗겨져 따갑고 쓰린데 환성의 침에 젖자 쾌감만이 살아났다. 정말 젖이라도 터질 것처럼 가슴이 홧홧했다.

멈추라고 하려는 순간 환성이 서린을 들어 진열장 위에 앉혔다. 반대쪽 가슴을 빨며 크기가 커진 유두를 환성이 비틀었다.

“아윽… 거긴 이제 그만!”

“기껏 키워 놨는데? 이렇게 안 만지면 금방 죽는다고.”

젖꼭지가 작은 서린의 탓이라는 듯 환성이 가볍게 유두 끝을 문질렀다. 물러질 새도 없이 꼿꼿하게 선 유두가 비명을 지르듯 딱딱해졌다.

“…으응… 아아응!”

반대편 가슴을 혀로 깔짝거리는 순간, 서린이 허리를 비틀며 교성을 질렀다. 학, 밭은 숨을 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젖꼭지만으로 간 거야?”

뻔히 알면서도 환성은 서린의 대답을 요구했다. 자극에 약한 이런 몸으로 그동안 어떻게 성욕을 해결했는지 궁금했다. 섹스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가슴만으로 절정에 이르다니 지나치게 음란한 몸이었다.

“보지 속이 울컥거리는데. 안에 싸 준 것도 없는데 벌써 뱉지 마.”

환성이 서린의 팬티를 허벅지 반쯤에 걸쳐 놓았다. 다 벗기는 동안 보지가 식을까 봐 마음이 급했다. 그가 굵직한 손가락 두 개를 음부에 꽂아 넣었다.

진득한 애액이 밀려 나오며 도톰하게 부푼 음순을 적셨다. 찌걱찌걱, 환성이 일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액을 밖으로 긁어냈다. 이 좁은 보지 속에 정액을 채울 자리도 모자랐다.

엉덩이가 짓눌린 유리 위로 투명한 애액이 뚝뚝 떨어졌다. 굵은 손가락에 내벽이 빠듯해 서린이 다리를 진열장 위에 올렸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았다.

“입술만큼 여기도 도톰한 거 알아?”

엄지로 대음순을 문지르며 환성이 말했다. 서린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크기가 비슷했다. 어릴 때는 명란젓이라고 친구들이 놀리기도 했었다.

“대음순에 살집이 있는 편이야. 아무래도 당신은 여성 호르몬이 나오는 부위에 살이 붙나 봐.”

뭉텅이 진 살덩이를 환성이 문지르며 말했다. 안에서 단단히 느껴지는 뼈와 박을 때마다 반기듯 달라붙는 밑보지가 마음에 들었다. 퍽퍽 올려치며 박을 때 쿠션처럼 불알에 달라붙는 살점이 귀여웠다.

“으읏, 그럴 리가 없…!”

“키스할 때도 입술이 두꺼우면 좋다잖아. 보지 빨 때도 그렇거든.”

그냥 하는 말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이 신경 쓰인 것처럼 음부도 그랬다. 남들과 많이 다른 모양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난 좋은데. 벌릴 때도 더 야하고.”

헤 벌어진 구멍 위. 서린의 음핵이 얼마나 솟아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환성이 다른 손으로 벌렸다. 서린이 싫다는 듯 아랫배에 힘을 줘 환성의 손가락을 밀어 냈다.

“또 해 봐.”

“으응… 하읏…!”

“밑구멍으로 씹어 보라고.”

격렬한 씹질에 서린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발작하듯 튕기는 안쪽 신경에 빠른 템포로 밑이 조였다 풀어졌다. 서린이 가기 직전에 손을 빼낸 뒤 환성이 남은 애액을 좆 끝에 펴 발랐다.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성난 귀두가 질구를 갈랐다. 퍽, 진열장을 잡은 채 환성이 허리를 들썩였다. 무릎에 닿은 진열장이 흔들렸다.

“하윽… 그, 그만. 흔들려요.”

진열장이 쓰러져 와장창 깨지기라도 한다면 두 사람 모두 살갗에 유리 조각이 박힐 것이다. 하지만 환성은 불이 난 듯 뜨거워진 성기를 식히는 게 더 중요했다.

“이게 쓰러질까 무서우면 여기 손 올려.”

환성이 서린의 팔을 끌어와 목 뒤에 감게 했다. 긴장하면서도 몸을 내맡기듯 서린이 환성을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그가 서린의 양다리를 두 팔로 단단히 받쳐 들었다. 좆을 꽂은 채로 공중에 서린을 붕 띄웠다.

“읏…! 이, 이게 뭐 하는…!”

“무섭다며.”

이런 체위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었다. 철퍽, 철퍽 소리를 내는 마찰의 박자가 더뎠다. 하지만 그네에 매달린 듯 활짝 다리가 벌어진 채로 콱콱 박혀 드는 내벽의 쾌감에 서린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흑! 하윽! 흐으윽!”

핏대 선 서린의 목덜미가 안쓰러우면서도 환성의 피스톤질은 더욱 과격해졌다. 좆 기둥에 실린 서린의 체중 때문에 더 깊이 물렸고, 내벽 안은 진공이 된 듯 조여와 요도 끝까지 쭙쭙, 빨아 대니 미칠 지경이었다.

아마도 아래쪽 근육을 쓰는데 서린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듯했다. 척, 처억, 농도 짙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진자운동을 하듯 움직이느라 환성의 허벅지 근육이 타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평소 몸을 쓰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서 그는 쉽게 지치지 않고 질기게 박아 댔다.

“하아… 좆 끊어지겠네.”

고환은 이미 서린이 싸 댄 물로 흥건히 젖었다. 질질, 끈적한 점액이 환성의 허벅지까지 적셨다. 밑에서 받아 보니 서린이 먹고 마셨던 게 모두 보지물이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으응! 아으으응!”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이었다. 격한 섹스에 자지러지듯 지른 비명으로 목은 쉬어 있었다. 서린이 오르가즘으로 바싹 환성을 조이자 그에 맞춰 사정했다. 아니, 정액을 서린이 뽑아낸 것에 가까웠다.

벌컥거리며 몇 번이나 좆 기둥이 안에서 움직였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사정액 양이 많아 환성은 요도 끝이 따끔거렸다.

“피가 왜 또 나지?”

겨우 환성이 바닥으로 서린을 내려놓았다. 귀두 끝에 피가 섞인 애액이 거품처럼 묻어 있었다. 옅은 분홍빛이라 피의 양은 많지 않아 보였다. 설마 찢어진 건가, 그렇게 안을 들쑤셨나 싶어 환성의 가슴이 철렁했다.

“안이 찢어졌어? 아프면 말을 해야지.”

서린이 고통에 둔감한 건 안 좋은 버릇이었다. 그녀가 처음일 때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그렇다니.

발정 나기는 했지만 또다시 쓰레기 짓을 한 것 같아 환성의 얼굴이 그늘졌다.

“아니에요. 예정일보다 생리가 빨리 시작된 것 같아요.”

환성이 들쑤실 때마다 자궁이 뻐근한 게 이상했다. 분명 환성의 귀두가 경부에 닿았음에도 더 깊이, 라고 생각을 하면서 서린은 미쳤다고 생각했다.

애액의 양이 많은 것도 생리 직전이라 더 심했을지도 몰랐다. 얼마 전 첫 경험을 해서인지 잘 어긋나지 않는 생리 주기가 앞으로 당겨졌다.

“하. 놀랐다고.”

안심했는지 환성이 얼굴이 풀어졌다.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서린이 다치는 건 싫은 듯했다. 이상한 체위를 하지나 말 것이지.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었다.

“다리가 아픈 이유가 있었네요.”

생리 때는 드물게 성욕이 드는 시기였지만 서린은 다리가 더 아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쑤셔 와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오래 걷지도 못했다.

“늦었으니까 그냥 자고 갈게요.”

어차피 환성의 저의가 뭔지 알아야 했다. 빨리 알수록 손해를 막을 수 있으니 그의 곁에 꼭 붙어 있는 편이 설원을 지키는 길이었다.

“생리대는 있어? 없으면 사 올까?”

여자라면 한 달에 한 번은 누구나 하는 건데 환성은 어려운 문제라도 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서린은 그가 직접 편의점까지 가서 여성용품을 사다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예정일 근처에는 탐폰을 가지고 다니니까 괜찮아요.”

무심하게 티슈를 뽑아 든 환성이 서린의 음부를 닦았다. 약간 부은 듯한 음순이 흠칫 떨렸다.

“그래도 필요하면 내가 가서 사 오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이혼 시 양육권은 저한테 주세요.”

“그 말을 왜 지금 해?”

그에게 안기면서도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서린은 고민했다. 순식간의 환성의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좁혀진 미간과 서늘한 눈동자가 서린을 내려다봤다.

“그럼 언제 해요?”

“…….”

“제가 낳은 아이니까 적어도 양육권은….”

“내 정자는 거들기만 했다 이건가?”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싸우고 있는 부부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못난 것 같지만 서린에게는 절박했다.

“그건 이혼할 때 얘기고.”

“그때를 대비하는 게 서로 좋잖아요.”

“정 날 못 믿겠다면 좋아. 당신 뜻대로 해.”

환성의 차가운 저음이 서린의 폐부를 찔렀다. 의심받는 일은 불쾌했으니 당연했다. 한동안의 적막이 두 사람의 사이에 자리 잡았다. 서린은 순간 이 남자에게 결혼 계약 이상의 감정이 있는 걸까, 착각이 들었다. 환성이 감정을 눌러 참듯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계약서에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뭔데요?”

“3일에 한 번은 민환성의 정액을 안에 채울 것.”

혼전 계약서는 서로의 변호사도 확인할 텐데. 환성은 최소한의 수치심도 없는 듯했다.

앗, 하는 사이에 그가 서린을 안아 들었다. 성큼성큼 시원한 걸음으로 환성이 욕실로 들어갔다.

“혼, 혼자 씻을 수 있어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쏴아, 환성이 샤워기를 틀어 따뜻한 물의 온도를 확인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서린의 음부에 곧바로 물을 뿌렸다. 흰 거품이 남아 있는 음모가 씻겨져 내려갔다.

“생리 전에 섹스하면 빨리 터진다는 게 진짜였네.”

“…으응!”

“예정일 당기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환성이 부드럽게 보지를 문지르며 서린을 씻겼다. 결국 파고든 손이 버거워 서린은 다리를 벌렸다. 아랫배 근처가 다시 저릿저릿하고 발끝이 간지러웠다. 이번에는 엉덩이를 문지르려는 환성의 손을 서린이 찰싹 내려쳤다.

“됐어요.”

“한 번 더 안 돼?”

“생, 생리가 시작됐다고 했잖아요.”

“앞으로 일주일은 못 하잖아.”

서린의 배에 닿는 환성의 좆이 꺼덕거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물론 방금도 했었고, 바로 피가 많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여길 긁는… 아흑!”

갈고리처럼 휜 손가락이 내벽 안을 긁어내렸다. 뭉텅이 진 하얗고 맑은 정액은 피를 머금어 옅은 분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손가락에 엉겨 붙은 정액을 환성이 물로 씻었다.

“탐폰 들어갈 자리는 만들어야지.”

환성에게는 그게 나름의 배려였나 보다. 안을 꽉 채웠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그곳에 갑자기 공기가 들어와 기분이 이상했다.

환성은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짜 거품을 낸 뒤, 아직도 어깨를 떠는 서린의 몸에 가볍게 문질렀다.

“다 됐어.”

환성이 커다란 바디타월로 서린을 감쌌다. 툭툭, 물기를 말려 주듯 큰 손으로 등이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환성이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린은 자신에게 아직도 받아갈 게 남았나 싶었다.

“먼저 나가 있어. 난 이것 좀 처리하고.”

아직도 딱딱하게 서 있는 자신의 성기를 가리키며 환성이 말했다. 샤워기를 틀어 놓고 가득 차 있는 정액을 혼자서 빼낼 모양이었다.

이왕 배려하는 거 좀 모르게 하면 좋을 텐데 서린에게 똑똑히 보라는 듯 성기를 내보였다. 서린은 서둘러 욕실 문을 닫았다.

“…가운을 못 찾겠어.”

서린은 허리가 너무 뻐근해 옷을 챙겨입을 정신도 없었다. 욕실 근처에 가운이라도 있으면 몸을 가리려고 했는데 없었다. 수건을 몸에 두른 채로 서린이 급하게 탐폰부터 안에 넣었다.

평소보다 안이 부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급격한 피로감에 서린이 침대 위에 잠시 누웠다.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서린의 눈이 감겼다. 금방 잠이 들은 그녀의 고른 숨결이 시트 위로 퍼졌다.

* * *

“음… 무거…워.”

눈을 뜬 서린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팔을 내려다봤다. 길게 뻗어 나온 팔이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환성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채였다.

설마 여기서 잔 거야? 아직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지도 못했는데.

환성이 서린의 등을 감싸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든 건 처음인데, 서로 마주 본 채였다면 풀어진 자신의 얼굴을 들켰을 것이다.

정신이 든 서린이 바스락거리며 시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뭔가 이상해 몸을 내려다보니 나체 상태였다.

분명 수건으로 몸을 가렸는데 환성이 벗긴 듯 보였다. 푹신한 이불로 목 끝까지 덮어 줬지만 어디까지 그가 자신의 몸을 감상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옷이 어딨지?”

침실을 찾아봤지만 서린의 옷은 없었다. 환성이 입혔는지 팬티는 입은 채였다. 부끄러움에 서린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드레스룸에 정리되어 있는 환성의 티셔츠를 하나 찾았다.

입어 보니 다행히도 거의 원피스 길이였다. 거실로 나가 서린은 가방부터 찾았다. 부재중 통화가 열 통 넘게 와 있었다. 서린은 어머니에게 전화부터 드렸다.

-서린아!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죄송해요. 깜빡 잠들어서 미처 전화 못 드렸어요.”

-혹시 민 서방이랑 같이 있니?

어차피 혼인신고까지 올린 마당이었다. 환성과 밤을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귀 끝에 열이 올라서 서린의 대답이 늦어졌다.

“네. 그렇게 됐어요.”

-호호호. 그럴 것 같았어. 편하게 둘이서 아침 먹고 들어와. 아버지께도 말해 놓을게.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문영이 전화를 끊었다. 서린은 태어나서 한 번도 외박을 해 본 적 없었다. 남편의 힘이 대단하기는 했다.

고지식한 문영이 환성의 집에 가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아, 조 비서님께 전화도 왔었네.”

아버지인 윤 회장 모르게 조 비서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있었다. 서린은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환성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가 들으면 안 될 만한 내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린이 드레스룸을 잠근 뒤 전화를 걸었다.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몇 번이고 씹었다. 다행히도 통화는 금방 연결이 되었다.

“조 비서님. 제가 말씀드린 대로 진행하셨나요?”

한껏 목소리를 죽인 채 서린이 말했다. 어제 차트를 확인하니 주가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며칠 전 환성과 서린이 혼인신고를 했다는 기사가 터졌기 때문이다.

이환 그룹의 이름만으로 이렇게까지 주가가 치솟다니 놀라웠다.

-예. 아가씨 말씀대로 보유주식 퍼센테이지를 좀 더 늘렸습니다. 윤정혁 씨가 전에 처분한 설원의 주식 절반 정도 더 매수에 성공했습니다.

“감사해요. 아버지가 걱정하실 것 같으니까 비밀로 해 주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린이 소유한 타사 주식을 처분한 뒤 설원에 대부분의 투자금을 넣었다. 주가 회복에도 당연히 도움이 됐지만 배신한 삼촌의 몫을 뺏어와서 다행이었다. 이제 아버지를 뒤에서 든든하게 서포트를 해 줄 수 있었다.

“마요네즈 라면. 베트남과 러시아에 반응이 좀 괜찮네. 전략적으로 한 번 제품 밀어 보면 좋을 텐데.”

그제 조 비서가 넘긴 자료를 훑어보다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식품업에 주력하고 있는 설원도 이제 수출로 발돋움을 해야 할 시기였다.

“아무래도 수출 루트를 더 확실히 알아봐야겠어.”

Rrrrrr―

달칵, 드레스룸의 문을 조심히 열고 나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서린은 환성이 깰까 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다시 문을 닫고 잠갔다.

“여보세요.”

조 비서인가 하고 확인하니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서린은 요즘 결혼 준비로 바빠져 여기저기서 오는 연락이 많았다.

웨딩 촬영이며, 드레스며, 혼수며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3개월로 단축된 결혼 날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린아.

한때는 익숙했던 목소리였다. 서린은 주혁의 전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의외였다. 더 이상 그와 할 말이 없어 전화를 끊으려 했다. 심지어 지금 여기는 환성의 집이었다. 이제 결혼한 사이니 숨길 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발… 끊지 마.

“…….”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무슨 의도로 전화를 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주혁을 만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서로가 이별을 인식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선배. 이제 와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서린아.

“나 선배 이해해. 내 말에 고민이 많았겠지. 연락하기 힘들겠지, 그렇게 생각했어. 원망 같은 거 없어 나.”

-난 그게 아니고….

하, 낮은 한숨을 쉬며 주혁이 말했다. 조금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라 서린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이별은 돌이킬 수 없었다.

서린은 주혁이 회사의 연락을 급하게 받고 떠났을 때를 기억했다. 마지막까지 그는 솔직하지 않았다. 주혁은 전화로조차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서운한 게 있다면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어. 사귀기 이전에도 우린 선후배 사이였으니까. 이만 끊을게. 잘 지내. 선배도.”

-너 결혼한다는 거 들었어.

주혁은 서린이 환성과 혼인신고 했다는 기사를 본 듯했다. 설원의 경영난을 순식간에 잠재워서 다행이었지만 주혁에게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그거 보고 연락한 거야?”

-서린아, 그동안 연락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어. 한 번만 내 얘기 좀 들어 줘.

하, 서린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주혁은 눈치를 살피듯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서린은 한 달 만에 연락한 전남친에게 더 이상 들을 말은 없었다.

“지금 와서 들을 말은 더 없어. 선배, 난 알고 싶지도 않아.”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쿵, 놀란 심장이 밑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주혁의 무거운 목소리는 며칠간의 피로가 겹쳐진 탓이었다. 눈가를 꾹 누르며 매만지던 주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린은 그가 지쳤을 때마다 하던 버릇을 기억했다.

-그래서 연락 못 한 거야. 어머니 충격으로 쓰러지시고, 중환자실에서 간호하느라.

“…….”

-너 집안이 복잡한 상황이라 내 일까지 알면 더 힘들 것 같아서. 입이 안 떨어지더라.

“…….”

-알아. 내가 잘못한 거. 너 결혼한다고 해서 원망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한 번만. 딱 한 번만.

“선배.”

-얼굴 보고 얘기하자.

간절한 주혁의 목소리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가장 괴로운 순간에 연인까지 떠났으니 그럴 만했다.

“그건… 안될 것 같아.”

-…서린아. 제발.

“미안해, 선배.”

탁, 종료 버튼을 누른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서린이 입을 틀어막았다. 놀랍게도 서린은 그 순간 아직 자고 있을 환성이 신경 쓰였다.

환성이 이런 전화를 그의 집에서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몰랐다.

차라리 몰랐다면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을 텐데. 뒤늦게 전화를 한 주혁의 의도가 잔혹하게 느껴졌다.

“나였으면… 말 안 했을 거야.”

역지사지로 생각해도 그랬다. 이미 혼인신고를 마친 상대라면 그냥 놓아주는 게 맞았다. 모든 일은 타이밍이었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헤어지는 연인이 한둘은 아니었으니까.

“선배가 괜찮은 건지 걱정하지 않는 나도 참 나쁘다.”

자신의 이기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매정하게 전화를 끊은 것 또한 예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린이 이제 와 결혼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주혁을 만나 봤자 진창이 될 거고 구질구질해질 것이다. 서린이 아는 주혁은 이런 방법으로 매달릴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배려심이라는 게 있다면.

[오늘 우리가 자주 갔던 카페에서 기다릴게. 너 올 때까지.]

때마침 서린의 핸드폰이 빛났다. 주혁이 보낸 메시지였다. 그답지 않은 통보식의 문구였다. 서린은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난 거짓말 안 해.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서린은 환성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린은 환성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생겨 버렸다. 그건… 생각보다 불결한 기분이었다.

엄연히 남편이 있는데 외도를 한 것 같은 기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그의 공간에 있는 동안은 더더욱.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환성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왜 거기서 나와?”

“…아.”

서린이 드레스룸 문을 닫고 나왔다. 하필이면 주방 근처의 방이었는데 환성과 마주쳤다. 겨우 파자마 바지만 입은 환성이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옷이 없어서요.”

“그래서 겨우 티셔츠 하나 찾아서 입은 거야?”

“네. 그런데 제 옷은 어디에….”

“맡겨 놨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아무래도 처음부터 벗고 한 게 아니라서 다시 입기는 그렇잖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환성의 상체에 햇빛이 부서지듯 내려앉았다. 아침에 일어난 터라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앞머리가 내려와 있었다. 평상복을 입으니 꼭 대학생처럼 보였다.

“와서 먹어.”

“이걸 설마 다….”

“차리기만 한 거야. 내가 요리까지 잘하면 사기지. 가정부가 주 3회 와서 음식이랑 청소도 해 주셔. 당신이 신경 쓸 건 전혀 없어.”

적절히 잘 조려진 갈비찜. 전자레인지로 데우기만 한 계란찜과 아침 메뉴로는 적절하지 않은 메로구이. 환성은 상차림에 익숙한 느낌은 아니었다. 꽤 부담스럽고 기름진 메뉴에 서린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영 안 먹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서린은 옆에 놓인 톳나물 무침을 먹었다. 초장으로 양념을 해서인지 그나마 입맛이 돌았다.

“맛이 없어?”

“아뇨, 맛있어요.”

“아니면 무슨 일 있나?”

서린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만큼 얼굴에 모든 게 드러나는 사람은 없었다. 환성은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신경이 쓰였다.

살이 좀 붙으라고 공들여 먹여야겠다. 식탐이 강한 편이 아니니 알아서 먹진 않을 거고, 환성이 챙겨 주는 만큼 여린 몸에 살집이 생길 것이다.

“고기도 좀 먹어.”

환성이 손수 젓가락으로 집은 갈비찜을 서린의 밥그릇에 내려놓았다. 꽃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는 당근까지 올려놓자 어쩔 수 없이 서린이 밥을 한술 떴다.

“그게,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연락 왔어? 전 애인한테.”

“…어떻게 아셨어요?”

서린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맞췄다. 환성이 말했던 것처럼 서린도 그에게 솔직하고 싶어서 숨길 마음은 없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연락하겠지 싶었고.”

“…….”

“기사가 났으니 설원에 문제가 없다는 걸 알 거고.”

충분히 불쾌할 수 있음에도 환성의 표정은 미동이 없었다. 오히려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서린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었다.

“누가 아팠다고 하지? 아마 부모님 걸고넘어졌을 테고.”

서린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거짓말까지 할 정도로 주혁이 바닥이라고 여긴 적은 없었다. 아직 주혁을 매도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환성의 말이 틀린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했어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나?”

그래도 잠시나마 연인 사이였기에 주혁이 불행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도 좋은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고 무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걱정되기는 하죠. 하지만… 만날 마음은 없어요.”

서린의 곁을 지키는 환성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환성과 결혼한 이상 그를 배신하는 행동은 단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해?”

“아,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더 이상 선배에 대한 감정은 없어요.”

신뢰는 이미 한 번 깨졌다. 서린이 바보도 아니고 주혁의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건 사실이겠지만, 그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건 분명 거짓말이었다.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은 이상 서린에게 연락했어야 했다. 그녀가 힘든 것을 원하지 않아서 아버지 일은 숨길 수는 있어도.

“풋사랑이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요.”

“과거라고는 생각 안 해.”

첫사랑이었지만, 주혁과는 소꿉놀이에 불과했다. 환성은 쿨한 건지, 포용심이 넓은 건지 모르겠다. 그는 지금도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린을 완전히 믿는다기보다 주혁이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느끼는 듯했다.

“선배와는 오랫동안 서로 알았어요. 남자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고마워서 사귀게 되었구요.”

주혁이 사귀자는 말에 참 많이도 거절했었다. 선후배 사이 이상의 관계는 부담스럽다는 서린의 대답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제외한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 공세가 이어졌다. 불면증이 도진다는 서린의 말에 잠이 잘 올 만한 티 세트와 아로마 향초를 선물했고, 날씨가 좋으면 꽃을 보냈다.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그에게 미안해질 즈음 주혁이 재차 고백을 했다. 2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에 결국 서린은 마음을 허락했다.

“편안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

지나치게 불편한 쪽은 환성이었다. 서늘한 눈동자에 자꾸만 심장이 뛰는 것도. 아마도 처음 만남이 너무 강렬했기에 더 그랬다.

“착각이라면….”

“난 남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적 텐션이라고 보는데.”

환성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밥그릇을 보니 어느새 비어 있었다. 별로 많이 먹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언제 식사를 끝낸 건지. 하여간 신기한 남자였다.

옆에 있던 물병을 들어 환성이 생수를 컵에 따랐다.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 매너와는 다르게 물을 따르는 손이 거칠었다. 검은 대리석 식탁에 사방팔방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그런 종류의 불편함이라면 환영이고.”

호선을 그린 입술이 서린의 질문의 뜻을 알았다는 듯 올라갔다. 환성이 네 살 연상이기는 했지만 서린의 속내를 낱낱이 아는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 남자 앞에서는 그 어떤 말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남자.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어?”

“…….”

“솔직하게 말해도 돼. 숨기지 않기로 했잖아.”

질책하지도 심문하지도 않은 채 환성이 물었다. 서린의 전남친에 대해서 환성은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어른 남자 특유의 여유로움이었다. 아무리 서린이 도망치려 애쓴다 해도 그의 손바닥 안이라는 뜻이었다.

“만나진 않을 거예요. 통화는 한 번쯤 하겠지만요.”

“…….”

“안 그래도 아버지가 아프다고 하니까요.”

주혁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보다 사실이라면, 하는 가정이 마음에 걸렸다. 서린도 아버지가 잠깐 쓰러졌을 때 미치도록 힘들었으니까. 잘 버텨 내라고 주혁에게 말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숨기지 않는 거 잘했어.”

만약 서린과 함께 있는 환성이 우연히라도 주혁을 본다면 개싸움이 날지도 몰랐다. 환성이 일성 그룹 장남 전현우를 반 죽도록 팬 것을 이쪽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일방적인 폭력에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끼어들어 봤자 같이 맞기만 할 뿐이었다. 환성이 주먹으로 가격할 때마다 반지를 낀 것도 아닌데 피와 살점이 튀었다.

실신해 뻗은 전현우에게 깽값, 하면서 수표를 뿌린 일화는 유명했다. 아직도 전현우의 볼에는 깊게 팬 상처가 남아 있었다.

전치 5주가 나온 일성 그룹 장남은 고소도 하지 못했다. 이환과의 관계를 끊지 않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다.

“전화 내용이 필요하시다면 보내드릴 수 있어요.”

“됐어. 믿을 테니까.”

집착적인 성격에 도청이라도 할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믿는다는 환성의 말에 서린은 묻고 싶었다. 설원을 인수하겠다는 서류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남자 조심하라는 환성의 말에 민환성만큼은 자신을 속이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에게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적의 의도를 모르는 채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됐다.

“오늘 집에 들렀다가 간단히 짐 챙겨서 들어와. 아버님께는 내가 통화하지. 먼저 같이 살기로 했다고.”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정에 서린의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환성의 곁에 있는 편이 설원의 인수 건을 제대로 알 기회였다. 서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출근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들어.”

아침을 먹지 않은 환성이었지만 서린 덕분에 든든한 식사를 마쳤다. 드레스룸으로 사라진 그가 얼마 되지 않아서 말끔한 수트 차림새로 나왔다. 깔끔한 포마드형 머리를 하자 환성의 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올 거 없어.”

“아니에요. 그래도….”

현관으로 나간 서린이 그를 올려다봤다. 이 남자는 어떤 목적으로 자신과 결혼한 것일까? 전남친 일에도 서린의 탓하지 않는 배려심이 진심인지, 설원까지 탐내는 게 이 남자의 본성인지 서린은 알고 싶었다.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는 거. 나쁘지 않네.”

옆 머리카락이 서린의 입술에 붙어 있었다. 환성의 손이 입술 근처를 문질러 떼어 냈다. 신혼부부다운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생겼다.

“다녀오세요.”

자신도 모르게 뱉은 인사말이었다. 서린이 애써 시선을 돌렸다. 환성을 의심하면서도 왠지 친밀해진 이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다녀올게.”

스스로도 대답이 웃긴지 환성이 피식 웃었다. 먼저 등을 돌린 그가 문을 열고 나가자 도어락이 잠겼다. 휴, 하는 한숨을 쉬며 서린이 벽을 짚었다.

이미 서린은 환성의 아내였기에 그는 주혁의 일을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서린이 연락을 받아 버렸으니까.

하지만 환성은 서린을 압박하지 않았다. 호텔에서 혼전 임신을 요구했던 그 남자가 본성인지, 이후로 겪은 환성이 진짜인지 서린은 알 수 없었다.

* * *

본가로 돌아와 서린은 가지런하게 신을 벗었다. 환성의 말대로 옷은 깨끗하게 세탁되어 배달되었다. 말끔해진 차림새였지만 아직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 몸이 쑤셔 왔다.

“저 왔어요.”

“서린이 왔니?”

문영의 표정이 오늘따라 밝았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민환성이 윤서린을 아끼는 게 기분 좋았다. 정작 서린은 환성의 의도를 밝히기 위해 동거하기로 한 거지만, 문영은 둘이 살림까지 합치니 안심이 되었다.

“민 서방이 연락했어.”

“벌써 전화 받으셨어요?”

“며칠 안으로 짐 정리 금방 하자. 새살림 차리는데 가구 같은 거는 민 서방이랑 마음에 드는 거 사는 게 좋을 거구.”

“아, 제가 정리하려고 했는데요.”

“모레 사람 오라고 했어. 옷가지만 옮기면 되니까 신경 쓸 건 별로 없을 거야. 요즘 결혼 전에 혼인신고 하는 게 흠도 아니구.”

보수적인 부모님이 환성에게는 관대했다. 부모님은 혼전 동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었다. 27년을 함께 살았어도 이런 문영의 반응이 낯설었다.

“저 씻고 일단 좀 쉴게요.”

“참, 민 서방한테 말했니? 다음 주에 청담동 웨딩샵 약속 잡힌 거.”

문영이 서린의 귀가 닳도록 얘기했지만 까맣게 잊어버렸다. 일정을 잡기 힘든 곳이니 절대 시간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꼭 환성과 함께 가라고 당부했었다.

“아마 바쁘실 거예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요. 알아서 할게요. 엄마, 나 일단 씻어요.”

문영이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서린이 계단을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 이 많은 옷들과 서린의 짐을 어떻게 다 옮긴다는 건지 싶었다. 문영은 계획적인 사람이었는데 환성의 말 한마디면 뭐든 들어주려고 해서 문제였다.

서린은 방 근처의 욕실로 들어갔다. 라탄 바구니 안에 옷가지를 벗어 넣었다. 건식으로 되어 있는 욕실 안, 샤워부스로 들어가기 전 문득 거울을 바라봤다.

“하. 몸이 엉망이네.”

환성이 빨고 씹었던 가슴이 울긋불긋하게 변해 있었다. 젖꼭지 위에 생긴 울혈과 쓰라린 유두 끝의 감각이 선명했다.

“피 색깔이 왜 이렇지?”

탐폰을 빼내는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극히 양이 적었고 피가 갈색빛을 띠었다. 스트레스로 생리를 건너뛴 적은 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럴까?”

아무래도 예민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격한 섹스에 시달리느라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며칠 지나 상태를 보면 알 것 같았다.

서린이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 냈다. 유두 근처에 손이 닿을 때마다 아픈데 꼿꼿하게 서는 게 이상했다. 옅은 자극에도 쉽게 반응하는 몸으로 바뀐 것 같았다.

“배 아파. 계속 아프네.”

한쪽 배가 쿡쿡 쑤시듯 아팠다. 신경이 쓰였지만 진통제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미약한 통증을 견디며 서린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래도 생리가 시작되어 아직 환성의 아기를 갖지 않은 걸 확인하니 안심이 됐다. 만약 그가 설원을 삼키려는 욕심을 가졌다면 임신은 독이 될 테니까. 체력이 다 해서인지 서린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 * *

“어디 가니? 밤늦게 여자 혼자. 급한 거 아니면 내일 가.”

“요 앞에 잠깐 편의점만 갔다 올게요. 필요한 게 있어서요.”

일어나니 벌써 밤 10시였다. 피곤했지만 이온 음료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가벼운 레깅스 차림의 서린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밖을 나섰다. 대문 밖을 나서 골목을 돌았을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만 같아 걸음이 빨라지는데,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순간, 누군가 서린의 팔을 잡았다.

“서린아.”

“선배?”

주혁은 서린의 집 앞에서 내내 기다린 듯했다. 몇 달 사이에 초췌해진 몰골은 수염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였다. 그제야 서린은 오늘 주혁이 카페에서 내내 기다린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왜 안 왔어.”

“선배. 나 답장 안 했잖아.”

“그래서 왔어. 네가 나와줄 거 같지 않아서.”

“하… 선배.”

서린이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힘없는 주혁의 손이 쉽게 풀어졌다. 어디 끌려가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주혁에게 그런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선배.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 나하고 상의도 없이 이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주혁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괴로움을 참는 목소리는 갈라져 쇳소리가 섞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었다.

“선배가 나를 생각해서 전화 안 했다고 했잖아.”

“…그 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미안해.”

“그건 솔직히 거짓말인 거 알지? 일주일 지났을 때 결국 연락 안 올 거 알았어. 선배 성격에 그럴 리가 없으니까.”

“나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아버지 그렇게 되시고….”

무슨 정신으로 출근을 했을지 주혁의 와이셔츠 단추가 어긋나 있었다. 퇴근을 하자마자 서린의 집 앞으로 찾아온 듯했다.

“우리 아버지도 회사 부도 날 상황에서 쓰러지셨어.”

“아버님이 아프셨다고? 넌 왜 그런 중요한 얘기를 나한테 안 했어!”

주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못난 자신을 탓하느라 목소리가 커졌다. 연약한 서린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 보였다.

“선배가 연락 줬으면 했겠지.”

차가운 서린의 태도에 주혁이 얼어붙었다. 반년을 사귀었지만 사소한 다툼 한번 없었다. 냉담한 서린은 더 이상 주혁을 믿지 않았다. 원래부터 주혁이 매달려서 만난 사이였으니 돌아서기는 더 쉬웠을 거다.

“…잘못했어.”

“…….”

“너도 좋아서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그냥… 상황이 이렇게 돼서 끌려간 거지? 응? 서린아. 그렇지?”

일말의 희망이 남은 얼굴로 주혁이 물었다. 고작 그 한 달 만에 민환성을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고. 감정에 무딘 서린이 집안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도망치자.”

“…뭐?”

“아니, 나 너 혼인신고 한 거 하나도 신경 안 써. 이혼 준비하면 되잖아. 나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주혁이 서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주혁의 말에 서린의 정신이 멍해졌다. 더 이상 주혁은 그녀가 알던 선배가 아니었다.

서린의 정신이 멍해진 틈을 타 주혁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품에 넣고 꽉 안았다. 그제야 서린이 발버둥을 치며 주혁을 밀어 냈다.

“뭐 하는 짓이야!”

“서린아. 내가 다 생각한 방법이 있어. 일단 우리 아이부터 갖자. 그러고 나면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실 거야. 네 남편도 다른 남자의 아이 가진 여자 결국 놔주게 될 거고.”

짝, 서린이 매섭게 주혁의 뺨을 내리쳤다. 옆으로 돌아간 고개가 한동안 멈췄다. 서린은 서린에게 손찌검을 당한 게 믿기지 않아 보였다.

“아기라고? 미쳤어?”

“그것밖에 방법이 없잖아.”

“그건 불륜이잖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었다. 대체 주혁은 자신의 격을 얼마큼 떨어뜨릴 생각일까? 이미 혼인신고를 올린 서린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면 설원은 더 이상 재기할 수 없었다.

재벌계에서도 이런 추문은 낙인이 찍혀 길고 오래도록 남았다. 더군다나 이환 그룹을 상대로 겁도 없었다.

“서린아. 흥분하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사업적인 것을 떠나서 주혁은 아버지로서의 자격도 없었다. 불륜을 해서 낳은 아이라는 오명을 평생 씻을 수 없을 텐데. 자기만 좋자고 뒷감당은 자식이 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주혁은 남자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최악이었다. 환성이 서린의 유전자를 돈으로 샀지만, 적어도 그에겐 아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자식 보기에 낯뜨겁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 혼외자는 생각도 안 할 사람이었다.

“네가 내 말을 지금 오해하는 것 같은데….”

“선배 정신 차려. 내 결혼이지만 회사 계약이기도 해. 남편과 약속 지킬 거고, 선배와 그럴 이유 없어. 착각하지마.”

서린은 아직 환성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설원의 인수 서류를 그가 해명해야 실마리가 풀린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불륜을 저지르자는 주혁보다는 믿음이 갔다.

“어떻게 우리가 불륜이야.”

“…….”

“우리가 먼저잖아.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단어를 갖다 붙여.”

주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흉흉하게 변한 기세와는 다르게 입은 웃고 있었다. 뱀처럼 사악한 얼굴이라 서린은 주혁이 맞나 싶었다.

“난 무서운 거 없어. 서린아. 널 잃는 게 두렵지.”

“…아, 아파.”

돌아서려는 서린의 손목을 주혁을 틀어쥐었다. 손목 관절이 시큰거리며 아팠다.

“서린아. 넌 무서워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넌… 내 옆에 있기만 해.”

“놔, 이거 놔!”

“내가 널 사랑한다고! 못 놓겠다잖아!”

골목이 울릴 정도로 주혁의 목소리가 컸다. 위협적으로 변한 얼굴이 서린을 매섭게 노려봤다. 이렇게 거친 주혁의 행동은 처음이었다.

“네가 나 사랑하지 않는 거 알아. 처음부터 선후배 사이라 거절하기 힘들어서, 나한테 미안해서 사귄 것도.”

“…….”

“그게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너 생각해 봤어?”

주혁의 눈은 돌아 있었다. 인적이 드물어 서린은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공포심으로 목이 잠기듯 아파 와 서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위협적으로 협박하는 주혁을 보니 아무래도 그동안 본성을 속인 듯했다.

“미안.”

맥없이 풀린 주혁의 손이 공중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주혁은 서린을 울릴 생각은 없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떨고 있는 그녀를 보자 정신이 들었다.

“쉽게 풀리진 않겠지. 네 기분 이해해.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것도 잘못했어.”

“…….”

“내가 다 잘못했어. 한 번만 기회를 줘. 제발. 서린아. 나 네가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게.”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주혁이 서린의 앞에서 무너졌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가 죄를 뉘우치듯 고개를 숙였다.

주혁이 뚝뚝, 눈물을 흘리며 제발 구제해 달라는 듯 서린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에 서린은 소름이 끼쳤다.

“그만해, 선배.”

“내가 어떻게 그만둬. 그럼 영원히 널 못 보는데.”

“결혼과 상관없어. 선배가 카페에서 나갔을 때부터 우린 끝난 거야.”

“…서린아.”

“가 볼게.”

여전히 꿇어앉아 있는 주혁을 내버려 둔 채 서린이 떠났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매만지니 약간 부어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얼음찜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갈증이 더 심해졌지만 서린은 굳게 대문을 잠가 버렸다. 환성에게 말한 것처럼 마지막 인사는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었는데.

“어머, 다녀왔니? 뭐 필요해서 나간다며. 왜 빈손이야.”

집에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문영이 서린을 의아하게 봤다. 금방 돌아오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 아무래도 몰래 누군가 만나고 들어온 것 같았다.

“가다가 그냥 왔어요.”

서린이 서둘러 빨갛게 변한 손목을 가렸다. 문영이 알게 되면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넘어진 상처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웨딩샵 말인데 네가 민 서방한테 말하기 좀 그러면 엄마가….”

“아니에요. 제가 전화할게요.”

문영은 대체 뭐가 걱정일까. 좋은 집에 서린을 시집보낸다는 소원을 이미 이뤄 놓고는. 환성과 서린이 좀 더 친해졌으면 싶은지 안달이었다.

이미 두 사람이 어젯밤을 함께 보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서린이 환성의 마음을 확 잡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방으로 돌아온 서린은 환성에게 메시지부터 보냈다. 편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곧장 전화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가 몇 시까지 일을 하는지도 알 수 없어서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보내자마자 통화음이 울렸다. 뭐가 이렇게 빠른가 싶었다. 환성이 서린의 연락을 기다릴 일은 전혀 없었지만.

“여보세요.”

-어. 할 말이 뭔데.

서린에게 할애할 시간은 정해져 있다는 듯 환성이 본론부터 꺼냈다. 서린은 웨딩샵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금요일에 미국에서 사업 파트너가 와. 직접 상대하고 돌아가기 전까진 접대해야 해.

“아, 네.”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그냥.”

바쁜 환성을 대신해 문영이나 서린이 결혼 준비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드레스야 중요한 것도 아니고 서린이 알아서 고르면 될 것 같았다.

시아버지며 시어머니, 환성의 동생과는 아직 식사도 전이었다. 서린이 먼저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냐는 말에 환성은 ‘상견례 정도면 할 도리는 다한 거지.’라며 신경 쓸 거 없다고 했다.

조건이 처지는 결혼이라 시댁에서도 서린의 흠을 잡을 것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그래서 서린도 환성을 충분히 배려하기로 했다.

-고민되는 일이야?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원활하게 대화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환성은 서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와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주혁의 일로 불안하고 기분 나쁘게 뛰던 심장이 점차 차분해졌다.

분명 별다른 위로의 말도, 다정한 말투도 아니었다. 질릴 만큼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남자인데, 환성의 조용한 기다림이 서린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린은 그가 설원을 인수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자료를 떠올렸다. 갑자기 목이 잠기듯 답답해졌다. 서린은 어떻게든 사실을 밝혀 내기로 했다.

“혼수나 같이 볼까 했던 거예요. 꼭 그 날일 필요는 없어요.”

-일정 뺄 수 있어.

“무리해서 그럴 건 없어요.”

-그래? 밥은 먹었어?

환성에게서 늘 식사했냐는 질문을 받는 듯했다. 서린의 아버지처럼 밥부터 챙기는 환성 때문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먹었어요.”

-늦었는데 그만 자.

끼니를 챙겼다는 대답에 환성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 시간을 보니 1분 남짓이었다. 환성과는 길게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다.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을 텐데.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다는 건 아무래도 착각이겠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서린은 옷방을 정리했다. 환성의 드레스룸이 꽉 차 있어서 서린까지 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방이 다섯 개 정도는 되니까, 손님방을 정리하고 서린의 드레스룸으로 꾸며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환성이 허락한다면. 그 얘기는 언제쯤 하는 게 좋을까. 서린은 새벽녘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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