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8)

2.

-파혼을 하겠다고?

“응.”

놀란 정연의 목소리가 서린의 방 안에 울렸다.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들릴까 봐 서린은 통화음의 볼륨을 줄였다. 주혁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마음이 심란했다. 가까운 친구인 정연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한주혁 때문에? 너도 참 미쳤다. 겨우 6개월 사귄 남자친구가 뭐라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해? 그냥 적당히 놀아. 걔가 결혼감은 아니지.

정연은 서린이 마음을 터놓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같은 사립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사이였다.

같은 부속이었던 사립학교는 알 만한 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는 곳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기에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고 진정한 조언을 아낌없이 해 주는 사이였다.

“적당히 놀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제대로 정리하고 싶었다. 더 이상 주혁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융통성 없는 서린의 성격은 원래 그랬다.

-네 나이에 연애 한 번 해 본 거? 어차피 정략결혼인데 결혼 전에 잠깐 만나는 정도는 서로 합의 된 거 아니야? 뭐 민환성이야 놀 만큼 놀았을 텐데.

놀 만큼 논 정도가 아니라 다른 남자와 할 때는 콘돔까지 쓰라고 하더라. 차마 서린은 그것까지는 정연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한테 예의도 아니고.”

-야, 이 언니가 뭐랬냐? 남자 다 똑같다고 했지. 얼굴 잘생기고 돈 있는 게 최곤데 민환성 둘 다 가졌잖아. 넌 민환성 보다가 한주혁 보면 남자로 보이기는 하니?

그 잘생긴 얼굴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얼마나 최악인지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300억, 임신, 콘돔 중 고르고 골라도 뭐 하나 덜 충격적인 게 없었다.

“민환성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야.”

-한주혁도 나쁜 외모는 아니지만. 글쎄. 너 우리 집 망하고 지금 나 고생하는 거 보이지? 남자는 능력이다. 이 언니는 사랑만 믿고 결혼했다가 이거 봐. 내가 아주 요즘 살 수가 없어요!

정연이 열여섯 살이 됐을 때, 설원과 비슷한 위치의 기업이었던 그녀의 부모님 회사가 부도가 났다.

그래 봤자 부자는 망해도 10년은 간다고 걱정 말라던 씩씩한 정연은 대학을 졸업 후 취업,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남편과 만나서 이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왜 그래. 사이 좋으면서.”

-사이가 좋긴 개뿔! 야근 피해서 허겁지겁 집에 들어오면 집구석이 아주 개판이야! 이 인간은 대체 왜 양말을 맨날 뒤집어서 벗어 놓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아니, 3년을 말했어. 그럼 좀 제대로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제는 완전히 주부의 모습으로 변한 정연이 불만을 말했다. 나 오빠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 하며 얼굴을 수줍게 붉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통화할 때마다 남편 욕이었다.

-어제는 양말 던지면서 싸웠다. 결혼은 실전이야. 이런 걸로 구질구질하게 안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줄 알아? 가사도우미를 쓰면 돼. 그럼 뭐가 필요할까? 응, 돈이 필요해.

“아기가 생기면 달라져?”

-야. 나도 오빠랑 신혼 때 얼마나 꽁냥거렸는데. 하민이 낳으니 하민 아빠, 이렇게 부르지 오빠라고도 안 해.

서린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단란한 세 식구를 꾸린 정연이 행복해 보였다. 인생이 꽃 노래도 아닌데 어떻게 하루 종일 하하호호 웃을 수가 있을까. 서린이 원하는 건 편한 남녀관계였다.

“가사도우미. 민환성과 결혼하면 쓸 순 있겠지. 그런데 같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까 모르겠어.”

-왜? 싸가지가 개싸가지야?

“너도 알다시피 불편한 사람이잖아.”

그 거친 성격에 여자를 안을 때는 또 얼마나 제멋대로일지. 단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은 서린은 잠시 몸을 떨었다.

넓은 집에 살아서 자주 마주칠 일이 아무리 없다고 해도 민환성 같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네가 아직 배가 불러서 그래. 민환성한테 한번 안겨 보겠다고 용 쓰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게. 고르고 골랐을 텐데 왜 하필 나인지 모르겠어.”

다시 생각해도 황당했다. 그 이유가 고작 유전자 때문이라니. 도저히 환성과 자신의 아이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조합이 괜찮다는 그의 말도 이해가 안 갔다. 언뜻 봐도 서린과 환성은 외모에서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너는 나처럼 고생하고 살지 마. 편하게 살려면 진짜 조건 꼭 다 따져서 결혼해라.

“조건?”

어딜 가나 그 얘기였다. 환성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정연까지 그러니 세상 사람 모두가 조건을 전제로 연애, 결혼을 하는 것 같아 자신이 이상한가 싶다.

-앗! 야, 나 된장찌개 탄다 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다급하게 정연이 전화를 끊어 버려 정작 중요한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환성이 혼전 임신으로 자신과 내기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면 정연은 뭐라고 할까? 아마 서린답지 않은 행동에 놀라서 뒤로 넘어갈지도 몰랐다.

“이제 전화를 해야겠지?”

머뭇거리며 서린이 주혁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봤다. 함께 바닷가에 갔을 때 사진이었다. 서로의 손이 겹쳐진 사진을 한동안 바라봤다.

주혁이 다정하게 사진을 찍자는 것을 낯간지럽다고 거절했었다. 괜히 더 미안해졌지만 정혼자를 정리하면 당당하게 연인을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서린은 결심을 다잡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주혁 선배. 지금 시간 괜찮아?”

-어, 서린아.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안 좋은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민환성의 제안대로 하기로 했지만 잠깐이라도 주혁을 속여야 하는 게 미안했다.

“선배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어디 아파? 며칠 전에도 너 몸살 났었잖아. 식사 거른 건 아니지?

“아픈 거 아니야. 선배가 걱정하는 만큼 몸이 약한 편도 아니고.”

진심으로 걱정이 묻어나는 주혁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이제 거짓을 말해야 하는데 주혁은 늘 그렇듯 서린의 몸 상태부터 걱정했다.

-네가 아프면 나는 더 아픈 거 알지?

“…선배.”

그걸 왜 모를까. 서린이 가벼운 몸살 기운만 있어도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새벽에 죽을 사 들고 찾아왔다.

아직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사이는 아니었기에 늦은 시간에 찾아올 때면 주혁은 근처 공원에 차를 대고 서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곳이 두 사람의 아지트였다.

서린이 어린애도 아닌데, 주혁은 죽이 심심한 것도 걱정스러운지 사탕까지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했다. 평소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서린이 거절하지 못할 만큼 다정했다.

-퇴근하고 바로 갈까?

“응. 얼굴 보고 얘기해야 될 거 같아.”

-알았어. 옷 얇게 입지 말고. 겉옷 꼭 챙겨서 나와.

통화가 끝나자 서린은 녹음을 종료했다. 어제 민환성과의 약속대로 주혁을 속여야만 했다. 환성이 조건을 운운하며 주혁을 그저 그런 남자로 치부했지만 서린은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공무원인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고 성실하게 자란 주혁은 지금 서린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전혀 모를 거다.

딱 한 번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속여야만 했다.

“미안해, 선배.”

핸드폰 주소 목록에서 환성을 찾은 서린이 통화를 녹음한 내용을 전송했다. 어제부터 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어서 빨리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겨우겨우 벽을 짚고 일어선 서린이 화장대에 앉았다. 핏기없는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목이 약간 잠겼지만 서린이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서린아.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다며.”

서린의 어머니인 문영이 들어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미음이라도 먹어야 안심일 텐데 오늘따라 안쓰러울 만큼 가녀려 보였다.

“괜찮아요. 속 안 좋을 때 먹으면 꼭 체해서요.”

“결혼문제 때문에 그러니?”

서린은 투자금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부모님이 서운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엄마가 아버지 설득하고 있어. 네가 싫다는데 아버지가 고집부릴 사람도 아니구. 아버지가 워낙 민석우 회장을 존경하잖아. 그게 조금 아쉬운가 봐.”

서린의 어깨를 토닥이는 어머니의 체온이 따뜻했다. 서린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감쌌다.

“들었어요. 회사 자금이 좀 힘들다는 거요.”

“…어디서?”

문영이 놀라며 되물었다. 서린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는데 끝까지 숨길 수 없었다.

“왜 저한테 말 안 하셨어요?”

“그렇다고 너 무리해서 결혼시킬 마음 없어. 아버지가 그럴 생각이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어머니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럴 때조차 믿음직한 자식이 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배려였지만, 서린에게는 배척이었다.

“중요한 일이잖아요. 회사… 어떤 상황인지 전해 들었어요.”

“…서린아.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엄마는 네 행복이 우선이야.”

문영이 화장대 위에 놓인 빗을 들더니 서린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숱이 많고 까만 머리카락은 염색을 한 적이 없었다.

풍성한 모발이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자신의 딸이었지만 자랑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드리워진 우울한 그림자조차 특유의 분위기로 느껴질 정도로 서린은 미인이었다.

“걱정하실 일 없을 거예요. 엄마, 저 나갈 준비 해야 하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알았어. 친구 만나서 기분 풀구, 저녁은 꼭 먹어.”

“네. 그럴게요.”

그동안 서린이 설원의 경영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아버지가 건재하셨기 때문이었다. 서린은 아버지의 수행비서인 조 비서에게 관련된 서류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서린은 명문대 경영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데 감을 잃지 않으려고 개인적으로 주식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영에 관한 실무 경험은 없었지만 뉴스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서린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 정도 금액으로는 턱도 없다니.”

하, 한숨을 내쉰 서린이 자신의 계좌를 확인했다. 주식보유량과 시황을 확인해도 답이 없었다. 부모님이 아신다면 혼자서 자본금을 20억 대로 불렸다고 대견해 하시겠지만 300억이라는 금액에는 발끝도 못 미쳤다.

Rrrrrr―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민환성’이라는 세글자가 떠올랐다. 이제는 그 이름 석 자만 봐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네.”

-녹음본까지 주진 않아도 되는데.

기본적인 인사도 없는 화법. 전화상에서 환성의 목소리는 호텔에서 만났을 때보다 한층 저음이었다. 서린의 귓가에 솜털이 돋아나며 소름이 끼쳤다.

“확실한 게 좋다면서요.”

-그 정도로 당신을 못 믿지 않아.

믿는다는데 서린은 그 말이 일종의 경고로 느껴졌다. 환성이 알아내고자 하면 그 어떤 일이든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순진한 주혁 선배는 속였으면서 환성에겐 그럴 수 없다는 게 우스웠다. 그것 또한 그가 의도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환성 씨가 사람 붙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하하. 내가 그럴 것 같아? 첫인상이 엉망이었나 봐?

시원하게 웃는 환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란 입매가 벌어지는 순간을 서린은 아직도 기억했다. 첫 만남에서 대뜸 조건과 임신을 말하던 그가 좋은 이미지일 수는 없었다.

“용건은 다 끝난 거죠? 굳이 전화까지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목소리가 지쳐 보여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환성이 대답했다. 뭐지, 이 남자가 왜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거지? 서린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런 내기를 걸어 온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지칠 수밖에 없잖아요. 누구 속이는 거, 기분 좋지 않아요.”

-속인다니. 그냥 테스트라고 생각해.

“…이게 그냥 테스트라고 생각하세요?”

서린을 조소를 띄우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환성의 위치에서는 여러 사람을 시험할 이유가 충분했다. 사업가는 앞과 뒤가 다른 사람들이 누군지, 그 사람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야 했다.

분명한 기만행위가 그에겐 당연할 뿐이었다. 그만큼 환성은 사람을 거르는 다양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남자의 입장에서는 테스트 한 번으로 윤서린을 얻는데 거저 아닌가?

“…….”

-사랑한다면 증명해야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뚝, 서린은 더는 대답하지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다시 벨이 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환성은 그러지 않았다.

“웃기는 남자야. 자신은 시험받은 적도 없으면서.”

민환성이 사랑을 증명한 적이 있기는 할까? 집안도 받쳐 줬지만 잘난 얼굴 덕분에 마음을 먼저 고백할 필요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가 가볍게 시선만 던져도 먼저 다가올 여자들이 줄줄이 있었다.

환성은 사랑을 알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결혼조차 유전자적 결함이 없는 반려자를 원하는 수준이었으니 애초에 연애 같은 것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삐빅. 서린은 스마트 키를 눌러 차 위치를 확인했다.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과하지 않게 잘 먹은 화장이었지만 굶어서인지 안색은 별로였다.

“구두가 좀 불편하네.”

오늘따라 발뒤꿈치가 신경이 쓰였다. 서린은 일부러 새 구두를 신었다. 오래된 징크스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약속 장소인 카페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도 늦지 않게 시간에 도착할 것 같았다.

* * *

“서린아. 여기.”

서린이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마중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의 곁으로 주혁이 다가왔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아, 에어컨 틀고 와서 그래요, 선배.”

“여기 나 앉았던 자리에 앉아. 일부러 에어컨 먼 자리로 맡아 놨어.”

주혁은 늘 이렇게 유난이었다. 서린이 찬 바람을 쐬지 않도록 어디를 갈 때마다 에어컨 위치를 파악할 정도였다. 서린의 몸이 차기는 해도 의외로 감기를 앓거나 몸살이 나는 편은 아니었는데 과잉보호였다.

“따뜻한 차로 마셔. 주문해 올게.”

“선배, 그래도 한여름인데?”

“넌 체온 낮아서 안 돼. 그런데 언제까지 나 선배라고 부를 거야?”

“아… 그게 서운했어? 미안.”

별다른 호칭 없이 주혁을 선배라고 부르는 건 단지 익숙해서였다. 남들처럼 살가운 호칭으로 부르는 게 아직 민망하기도 했다. 친구들 말로는 너무 딱딱하다고 했지만 서린은 이게 좋았다.

“서운한 건 아니야. 네가 편하면 됐지.”

이해심 넓은 주혁이 싱긋 웃었다. 카모마일 티가 나오고 한동안 서린은 말없이 머그잔을 매만졌다.

뜨거운 온기가 식으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해 주는 주혁에게 미안했다.

“…선배.”

“그래. 할 말 있다며. 편하게 해.”

“집이 좀 힘들게 됐어.”

힘겹게 운을 떼며 서린이 머그잔을 쥐었다. 안에서부터 휘몰아치는 자책감 때문에 애써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힘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기사가 난 건 아닌데. 부도가 나서 아버지 사업 정리하게 될 것 같아.”

거짓말을 하면 이렇게 침이 마르는구나. 목구멍이 달라붙은 듯 뻑뻑했지만 서린은 차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의도하지 않은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고 어깨까지 떨리고 있었다.

“…정리한다고?”

“빚은 70억 정도로 추산된다는데….”

“70억?”

믿을 수 없다는 듯 주혁의 표정이 굳었다. 평생 만져 보기도 힘든 금액이었다. 게다가 그게 빚이라니. 적잖이 충격을 받을 만했다.

“선배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주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놀란 듯 커진 눈, 당황한 듯 경련하는 눈썹 끝. 관찰하고 싶지 않은데도 지독할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갔다. 주혁의 입매가 굳어 버린 게 서린은 마음이 쓰였다.

“…정말이야?”

“…….”

“회생 가능성이 없을 리가 없잖아? 설원처럼 탄탄한 중견기업이.”

그런 표정의 주혁은 처음이었다. 검게 그늘진 눈동자와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 게다가 단 한 번도 설원에 대해서 묻지 않았던 주혁의 태도가 너무 낯설었다.

“공식적인 기사는 일주일 정도 뒤에 뜰 거야.”

서린은 준비된 대사를 다 읊었다. 여전히 핸드백 안에서는 핸드폰으로 녹음 중이었다. 카페 안은 조용했고 두 남녀는 말이 없었다.

괜찮냐고,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거냐고, 일단 밥부터 먹자고. 뭐라도 먹고 생각하자고. 서린은 주혁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심지어 그가 울 것 같아서 평소 챙기지도 않는 티슈까지 핸드백에 넣어 왔지만 주혁은 생각보다 차분해 보였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

“응. 가까운 사람한테는 선배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너 일은 할 수 있겠어?”

“일?”

“집 문제도 있으니 당장이라도 취업 자리 알아봐야 될 것 같은데.”

나쁘다고 할 수 없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래, 위로보다는 대안을 세우는 게 나았다. 주혁이 차갑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서린의 착각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지.”

“스펙은 좋지만 너 공백기가 커서 큰일이다. 이래서 내가 회사 들어가 보는 것도 경험이 된다고 말했잖아.”

왜 그 말이 가시 돋치게 들리는지. 서린의 무능력함을 지적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사정을 모르는 주혁으로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서린이 보유 중인 주식이 꽤 된다는 건 주혁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직장인인 주혁에게 거리감을 줄 것 같아서였다. 그의 연봉의 몇 배에 달하는 수익률을 올리고 있었으니까.

당장 서린이 가지고 있는 돈이 10억이었다. 곧바로 주혁과 결혼하기에도 문제가 전혀 없었지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선배. 나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네가 집에만 있어서 모르겠지만 말처럼 쉽진 않아. 일단 자소서부터 쓰고 채용공고 살펴봐야지.”

그동안 주혁이 서린에게 다정해서 잊고 있었다. 사실 주혁은 마냥 친절한 성격의 선배는 아니었다.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했고 워낙 성적이 좋았기에 후배들 사이에서도 어려운 선배였다.

특히 주혁은 조별과제를 할 때 무임승차 하는 것을 싫어했다. 고학번 선배의 이름을 발표할 때 빼 버렸을 때도, 그 선배는 주혁에게 항의조차 못 했다.

“알았어. 신경 쓸게.”

칼 같은 조언이 뼈아팠지만 이건 주혁을 속인 대가였다.

Rrrrrr―

테이블 위에 있던 주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자를 서린이 미처 확인하기 전에 주혁이 일어섰다.

“잠시만.”

“응.”

급한 전화였을까? 주혁은 카페 밖으로까지 나가서 통화를 했다. 단 한 번도 서린의 앞에서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다고 느껴서인지 오늘따라 주혁의 뒷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서린아. 나 가 봐야겠다.”

“응? 지금?”

“어. 미안. 업무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비상이야. 이따가 연락할게.”

주혁은 서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물끄러미 반대편의 음료를 보니 아직 반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차가 아직도 따뜻하네.”

서린이 핸드백 안의 휴대폰을 꺼냈다.

띵, 녹음을 종료하고 나서도 서린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녹음이 잘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어폰 한쪽을 꺼내 귀에 꽂았다.

“회생 가능성이 없을 리가 없잖아? 설원처럼 탄탄한 중견기업이.”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서린은 재생을 종료했다. 떨리는 손으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내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이어폰이 다른 테이블의 의자 밑으로 굴러 들어가 버렸다.

“하….”

속이 울렁거리는 게 자신의 거짓말 때문인지, 냉정한 주혁의 목소리 때문인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쉬며 서린은 이마를 짚었다. 이별 통보를 들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모르겠다.

“저, 손님 괜찮으세요?”

“…….”

“혹시 힘드시면 구급차라도 불러드릴까요?”

“아니에요. 잠시 현기증이 나서요.”

서린의 테이블을 지나치던 알바생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속이 뭉친 것 같아 테이블 위에 웅크리고 있어서 눈에 띄었나 보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서린은 거절했다.

“이어폰, 아니. 차 키….”

떨어진 이어폰을 주울 정신은 없었다. 서둘러 일어난 서린이 차 키를 겨우 찾았다. 허둥지둥하던 터라 핸드백이 쏟아질 뻔했지만, 놓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삐빅.

스마트 키를 눌러 차의 위치를 확인한 후 쿡쿡 쑤시는 배 속은 무시한 채 서린이 시동을 켰다. 그럴 리가 없는데 주혁의 뒷모습이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다. 마치 그게 마지막 장면이라도 될 것처럼.

* * *

사람이 너무 울면 눈물이 마르는구나.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벗어난 적 없는 서린은 열흘 만에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처음 봤다.

휴지로 눈물을 하도 닦아 내느라 눈두덩이에는 빨갛게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 충혈된 두 눈과 핏기가 하나도 없는 입술. 스스로 보기에도 창피할 만큼 망가져 있었다.

“설마 연락 한 통 안 올 줄은 몰랐는데.”

하루, 이틀, 사흘째까지는 일이 바쁘겠지, 주혁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겠지 생각했다. 70억이라는 빚의 무게가 그러하니까 주혁을 이해했다. 일주일, 열흘이 되고 나서야 서린은 깨달았다. 주혁이 자신을 잘라 버렸다는 것을.

“부모 빚은 상속 포기하면 되는 거 모를 정도로 못 배운 놈은 아니겠지? 요즘 세상에 대물림으로 빚 갚는 사람이 어딨다고.”

환성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똑똑한 주혁이 그 사실을 모를 일은 없었다. 며칠째 없어지지 않은 톡의 숫자를 보니 주혁은 서린을 차단한 듯했다. 통화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린은 그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제대로 이별을 말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짧은 기간 동안 주혁을 만났지만 잠수 이별을 할 줄은 몰랐다. 주혁에 대한 실망감보다도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환성이 말했던 조건, 그 조건 때문에 서린을 사랑한 척했다는 사실이 아팠다.

쿵,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렸다. 누가 온 건가 싶어 서린이 방에서 나와 거실로 내려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너 같은 놈을 동생이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형이고 나발이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주식의 내 몫! 설원이 부도라도 나면 휴지조각 되는데 내 멋대로 처분하는 게 뭐가 어때서!”

“이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격노한 윤 회장이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삼촌인 정혁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바닥으로 떨어진 재떨이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진짜 던져? 아무리 형이라지만 이거 살인미수야!”

“윤정혁! 해결할 수 있다고 했지! 주주 중 한 명인 네가 주식 다 팔아 버리면 설원은! 휘청일 거 안 보여? 아버지가 세우신 회사야. 아버지가 하늘에서 지켜보실 거 생각 안 해?”

정혁은 한 번도 형인 윤혁수 회장에게 거스른 적이 없었다.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이었고, 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윤 회장에게 설원의 경영권이 주어졌어도 불만이 없던 그였다.

“…삼촌.”

2층에서 계단 아래로 내려온 서린이 정혁을 바라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릴 적부터 그녀를 예뻐했던 삼촌이었다.

정혁은 해외에 갔다 올 때마다 다른 건 잊어도 서린의 선물은 꼭 사 왔다. 그 다정한 삼촌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형이 어떻게 해결해? 암암리에 도는 소식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니, 어떻게 지금까지 나한테 말을 안 해 줄 수 있어? 난 애가 셋이라고! 설원을 떠나서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들은?”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상황을 보니 대주주 중 한 명인 삼촌이 설원의 부도가 기사화되기 전에 주식을 손절하려는 것 같았다. 여느 때와 다르게 서린을 보고도 정혁은 반기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환 그룹의 민환성? 두 번이나 파혼했는데 세 번은 못 할까. 형 그거 믿고 이러는 거유?”

“…….”

“뭐 소문을 보니 결혼해도 문제겠지만, 설원 이렇게 되는 거 이환 쪽은 모르나 보지? 그럼 파혼될 텐데.”

삼촌은 아직 투자금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저렇게 태도를 바꿀 리는 없었다.

“너… 너! 이 금수만도 못한 놈!”

“여, 여보!”

윤 회장은 혈압이 오르는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문영이 겨우 부축해서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해도 해도 너무하세요!”

문영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눈물을 참았다. 서린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난 주식 한 번은 정리해야 했어. 그간의 정을 봐서 일주일은 기다리겠지만, 그 안에 해결 못 하면 나도 방법 없어. 난 분명 말했다고!”

차가운 인사를 문영에게 남긴 채 정혁이 대문을 쾅, 닫고 나갔다. 서둘러 구급차를 부른 서린이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신을 잃었지만 호흡은 고르게 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 서린아. 흐윽.”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구급차 불렀고 아버지 괜찮으실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가족이라는 사람이 뒤통수를 치고!”

기가 막힌지 문영이 가슴을 내려쳤다. 안 그래도 협업했던 회사들마저 설원을 등지고 있는데 정혁까지 저 난리니 큰일이었다. 보안이 생명인데 가족들조차 관리가 안 되니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뻔했다.

“으윽. 구급차 부르지 마라.”

“괜찮으세요?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라도 가셔야….”

“당장 전화해서 취소해!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잠깐 현기증 난 거야. 쉬면 나아.”

휘청거리며 윤 회장이 일어났다. 힘들 텐데도 늘 그렇듯 강인한 모습을 보여 준 윤 회장은 문영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침실로 이동했다.

“하… 대체.”

윤 회장과 문영이 말하지 않았지만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사업에서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서린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더 약해지기 전에 어떻게든 서린이 도와야 했다.

“누가 다치겠어. 이것부터 치워야지.”

바닥에 깨진 채 흩어져 있는 크리스털 조각이 날카로웠다. 거실의 나무 바닥에 깊은 상처가 패였다. 무심코 손을 뻗은 서린이 맨손으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

조심했지만 손끝이 베여서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대충 수습한 서린이 청소기로 나머지 작은 조각들을 처리했다.

“아버지는요?”

“아무도 들이지 말래. 잠시 누워 계신다구.”

방 안에서 울다 왔는지 문영의 눈시울이 붉었다. 서린은 잠시 엄마를 끌어안았다. 사랑이니, 조건이니 그런 것을 내내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이기적으로 굴었던 스스로가 미워졌다. 부모님이 고생하는 동안 서린은 자기 인생만을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 결심했어요.”

서린의 말에 놀랐는지 문영이 그녀를 바라봤다. 구차했지만 절실하게 이환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혼만큼 끈끈하게 두 집안을 이어 주는 도구는 없었다.

“아버지한테도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는, 네 뜻을 존중하기로 했는데.”

“괜찮아요. 이제는.”

결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태어나서 지금껏 걱정 없이 부모님의 아래에서 편하게 살았다. 이제는 자신이 가족을 위할 차례였다.

Rrrrrr―.

방 안으로 돌아와 서린은 환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왜 이 남자가 열흘 내내 연락을 주지 않았는지 생각했다.

채권자처럼 빚을 갚으라고, 졌으니 당장 대가를 치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결국 서린이 먼저 연락을 할 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 말해.

주혁과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은 그에게 그날 저녁에 보내 주었다. 이제는 환성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었다.

“…해요.”

-…….

“결혼.”

모래를 씹어 삼킨 듯 서린의 목소리가 버석거렸다. 서린은 자신의 조건이 남들보다 좋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환성처럼 기업의 CEO 위치였다면 보는 눈이 높았겠지만, 설원은 그 정도의 기업은 아니었으니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걱정 없는 유년기를 보낸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뿐.

경계하지 못해서 주혁에게 속았고, 온전히 믿었던 가족마저 이제 등을 돌리려 했다. 세상이 이렇게 차가운 곳인 줄 서린은 미처 몰랐다.

-집에 있나?

“그런데요.”

-밖으로 나오지?

“네? 밖에는 왜….”

-왜겠어? 20분만 기다려.

설마, 곧바로 오겠다는 뜻일까. 20분 후, 창문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닫힌 대문 근처에 낯선 차 한 대가 섰다. 아마도 환성의 차인 것 같았다. 가볍게 겉옷을 챙겨입은 서린이 정원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타.”

서린이 나오자마자 환성은 옆좌석의 문을 열었다. 초췌한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그에게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화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어쩔 수 없이 서린은 차에 탔다. 호텔에서 맡았던 환성의 스킨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알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담배 향인 것 같았다.

수컷의 페로몬까지 뒤섞인 민환성의 체취 때문에 호흡이 불편해졌다. 날이 선 신경줄이 온통 환성에게로 쏠렸다.

“지금 뭐 하시는….”

차에 타자마자 불온하게 뻗어 온 환성의 손에 서린이 화들짝 놀랐다. 조수석으로 훌쩍 기울어진 환성이 곧바로 입술이라도 부딪쳐 올 것 같았다.

서린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단단하고 다부진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안전벨트.”

“…….”

“여기서 덮칠 정도로 급하지는 않은데. 게다가 당신 집 앞이고.”

철컥, 의외로 환성은 얌전히 안전벨트를 채워 준 뒤 곧바로 차의 시동을 걸었다. 호텔에서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서린은 그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지금 어디 가시는 건데요?”

“호텔.”

부웅, 차체가 낮아지며 환성은 속력을 냈다. 서린은 역시 이 차를 탄 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환성이 섹스를 원할 줄은 알았지만 만나자마자 호텔로 직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표정 풀어. 식사하러 가는 거니까. 밥은 먹었어?”

왜 환성이 주혁과 같은 소리를 하는지. 속에서 뭔가 울컥거렸지만 서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가 자신을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전 입맛… 없는데요.”

“그래도 죽 같은 건 챙겨 먹었나 봐? 내 생각보다는 얼굴이 덜 상했어.”

운전에 집중하며 환성이 서린을 곁눈질했다. 가늘어진 눈매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 내기에서 이긴 것이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 흘렀고 서린은 철저히 패배했다.

“네. 챙겨 먹었어요.”

처음 며칠 동안은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했지만 문영의 걱정에 결국 미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서린이 밥을 굶으면 같이 식음을 전폐하는 어머니였기에 억지로라도 챙겨 먹었다.

속이 더부룩하면 소화제까지 먹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 사는 게 다 그랬다. 억지로 자고, 먹고 하다 보면 시간은 지나 있었다.

“그런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게 다행 아닌가?”

“…….”

“결혼하고, 몇 년 살고 그 이후에 내쳐지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

“당신처럼 다 가진 여자가 조심할 건 하나뿐이지. 바로 남자.”

다 가졌다니,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환성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게 칭찬인지 위로인지 몰라서 서린은 혼란스러웠다.

“환성 씨는 특히 여자를 조심하고 사셨나 보죠?”

놀 만큼 놀아서 질려 버렸으면 모를까. 환성의 행동거지에 깊이 스며든 저질스러움을 이미 확인하지 않았는가.

깎아 놓은 듯한 콧날과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 유난히 도드라져 있는 목울대 밑으로는 단추가 시원하게 두 개나 풀려 있었다.

수트에 와이셔츠 차림이었지만 껄렁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고가의 수트를 차려입었음에도 운동선수처럼 거대한 몸 때문인지 위협적으로 보였다.

새하얀 셔츠는 기지개라도 켜면 찢어질 것 같았다. 바지가 작은 사이즈도 아닌데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불거진 허벅지 근육이 선연하게 도드라졌다.

“여기저기 씨 뿌리고 다녀서 족보 복잡하게 꼬는 거 질색이야.”

난잡하게 놀아 본 적 없다는 뜻일 텐데 저렴한 단어 선택에 수긍이 되진 않았다. 환성의 얼굴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미간을 잔뜩 구긴 그가 거칠게 차선을 변경했다. 순식간의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당신 말대로 돈 있는 게 다는 아니지. 족보를 어디서 사 왔는지 근본을 개나 줘서.”

“…네?”

“아, 이환 그룹 말이야. 당신도 알잖아? 우리 집 개족보인 거.”

환성의 조부는 결혼을 네 번이나 했다. 자식은 모두 다섯이었고, 추가로 혼외자식이 파악된 것만 여덟이다. 초반에 이환 측에서 여러 번 기사를 막았으나 결국 그 재력에도 언론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재벌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가계도가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환 그룹을 여럿이서 찢어 먹은 것은 아니었다. 민 회장의 정계, 장남인 환성의 친부를 중심으로 상속되었다. 여느 귀족보다도 더 귀족적으로 승계 문제에 철저했다.

“노인네 죽을 때 볼 만했지.”

그 말을 하면서 환성은 웃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가관이라는 듯 비웃는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한 몫 더 뜯어 보려고. 듣지도 못하는 노인네 앞에서 아이고 아버지, 하면서 울고 달려오는데. 결국 끝맺음은 사업이 힘드네, 자식이 아프네. 그러고 싶을까?”

“…….”

“죽을 때 그렇게 가는 것도 우습지. 민 회장 업적에 비해선.”

환성의 조부인 민인덕의 임종 직전 찾아온 자식들은 1인실이 꽉 찰 정도로 북적거렸다. 저마다 오열하며 눈물을 찍어 내고 있었다.

아쉽게도 더 먹을 만한 재산을 누구도 줄 마음은 없었다. 환성의 아버지인 민혁호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병문안을 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혼외자에게는 딱 거기까지. 요새처럼 견고한 이환 그룹의 내부자로는 스며들 수 없었다.

“너무 어두운 얘기를 했나?”

“아뇨.”

결벽적인 반응에 약간의 신빙성은 생겼다. 그의 말대로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굉장한 영향을 끼치니까. 아마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지독하게 놀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저열한 소문들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로 결정해.”

“결정이라면….”

“다른 남자 더 봐서 뭐 하겠어? 시간 낭비지.”

서린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남자를 눈앞에 두고 뭘 고민하냐는 뜻이었다.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환성의 표정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거 아닌가요.”

“하하,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강요라도 한 것 같잖아.”

“충분히 강요하셨는데요.”

“그래? 난 우리가 큰 거 한 판 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박도 적당히 하는 거지 이렇게 인생을 내건 내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환성은 300억을 걸었지만 서린은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 뭐가 더 값진 건지는 지금으로선 모르겠지만.

“당신은 재미없었어? 나는 오랜만에 활력이 생겼는데.”

쾌락의 끝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환성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개라더니, 그 말이 어쩌면 딱 맞는지도 모른다고 서린은 생각했다.

쫓아가면 도망가고, 도망치면 쫓아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환성은 서린이 파혼을 선언한 그때부터 심기가 뒤틀린 게 분명했다. 그의 것이라고 여긴 것은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나중에 질려서 버리게 되는 소모품조차 환성은 빼앗긴 적이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제안한 이 게임이 설명되지 않았다. 가진 게 많을수록 욕심이 많은 법이었다.

“하나 약속할 수 있는 건 난 투명하다는 거야.”

“…대체 어디가요?”

“난 거짓말 안 해. 그럴 필요가 없거든.”

처음부터 대뜸 혼전임신 얘기를 꺼낸 남자였다. 평생 남의 눈치를 본 적이 없어 굳이 타인을 속일 이유는 없을 테지만. 그런 점에서 환성은 투명하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전에 말씀하셨던 평생 사랑한다는 허울뿐인 약속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환성의 말처럼 결혼상대자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서린은 결과에 승복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환성을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 첫인상이 엉망이었나 봐? 뭐, 그건 차차 알아 가면 되는 문제고.”

“…….”

“난 증명했잖아. 윤서린에게.”

기분이 좋은지 울림 있는 저음의 목소리는 첫 만남과 전화통화 때와는 달랐다.

“우리가 뭔가를 증명할 관계인가요?”

“서운한데. 나는 당신을 선택한 것만으로 증명이 된다고.”

서로 마음을 나누지 않아도 결혼 생활은 유지될 수 있었다. 작은 기업체를 운영해도 집안에 도움이 될 만한 전략적인 혼인을 하는 일은 흔했으니까.

서린은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철없이 굴었나 싶었다. 설원에서 태어난 이상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것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당신이 가진 돈이나 배경이 아니라, ‘윤서린’이라는 여자한테 관심이 있는 거니까.”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이환 그룹의 CEO인 환성은 그런 위치의 사람이었다. 환성이 선택한 아내가 그보다 부자일 수는 없었다.

“저에게 관심이 있으신 줄 몰랐는데요.”

“충분히 표현했는데. 당신 유전자가 필요하다고.”

“그런 사람이 콘돔 쓰라는 말을….”

“콘돔?”

환성은 서린에게 다른 남자와 할 땐 콘돔을 쓰라고 했었다. 서린은 남자를 잘 모르지만 적어도 좋아하는 여자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무례한 것을 떠나서 적어도 질투심이라는 게 있다면.

“…아니에요.”

“애인이랑 할 때 콘돔 쓰라고 한 거?”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화끈거렸다. 서린은 성 경험이 없어서 콘돔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체온이 높아졌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었다.

“다른 남자랑 잤던 건 딱히 상관없어.”

“…….”

“내가 태어나서 자지 크기로 져 본 적이 없거든.”

“…네?”

“아, 참고로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래서 호텔에서부터 속궁합을 운운했는지도. 정수리부터 꽉 차 있는 수컷으로서의 본능과 자신감. 환성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뒀어도 떡정이라도 붙여 차지하고야 마는 타입이었다.

“크, 크기가 다는 아니죠.”

서린은 환성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그는 표현을 순화시키는 법이 없어서 서린까지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랑 별로 안 자 봤지?”

“…전 교감에 대해서 말하는 건데요.”

때마침 빨간불이라 도로에 차가 멈췄다. 환성이 조수석 쪽으로 향하던 에어컨 바람을 껐다. 서린의 몸이 떨고 있는 게 추워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운전에 신경 쓸 때보다 서린의 마음이 한층 불편해졌다.

“작지? 그 남자.”

“네?”

“섹스는 좆이 크면 다른 이유가 필요 없더라고. 뭐 교감이니, 정신적 만족감이니 덧붙이는 게 변명 같아서 웃기던데.”

“…….”

“하긴. 남잔데 배포가 그거밖에 안 되니 좆도 작겠지.”

대체 말 한마디에 좆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들어간 건지. 서린은 입 밖으로 저런 비속어를 꺼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너 하나 먹여 살리는데 얼마나 든다고.”

쯧, 환성이 혀를 차는 순간 차가 다시 출발했다. 환성의 입에서 낱낱이 정리되는 사실이 따갑게 느껴졌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꼬리를 말고 도망간 주혁이 얼마나 한심한 남자인지 드러났다.

“전 이해해요. 큰 빚이니까요.”

주혁에게 큰 충격을 받았지만 미운 감정은 없었다. 서린이 주혁을 속였을 때 오한이 들 정도로 속이 얹혔던 게 떠올랐다. 주혁도 차마 연락을 하지 못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었다. 그에 대한 실망으로 이미 끝나 버린 풋사랑에 미련은 없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잘하는 복어 집이야. 보아하니 끼니도 대충 때운 것 같으니 몸보신 좀 하라고.”

청담동에 자리한 가게는 내부 인테리어가 꽤 고급스러웠다. 매니저가 프라이빗한 룸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평소라면 코스를 시켜서 초밥이나 회를 먹일 텐데. 체할 것 같으니 나중으로 하고, 따뜻한 복지리로 하지.”

서린의 몸 상태를 유심히 살피며 결정한 메뉴였다. 세심해 보이지 않는 남자였는데 의외였다. 서린은 얼큰한 매운탕이 취향이었지만 며칠 동안 흰죽을 먹어서 고춧가루가 들어간 건 짜게 느껴질 것 같았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닫혔다. 환성은 식전에 나오는 뜨거운 녹차를 잔에 채워 건넸다.

“결혼식은 앞당기는 게 좋겠지?”

“네?”

“왜 놀란 표정이야. 어차피 1년 안에는 결혼할 예정이었잖아?”

정확히 날짜를 잡은 것 아니었다. 1년이라는 시간도 짧게 느껴지는데 그보다 더 앞당긴다니. 서린은 예정에 없는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급하게 할 필요가 있나요?”

“배불러서 드레스 입는 거. 불편할 것 같은데.”

무신경하게 턱을 매만지며 환성이 말했다. 아직 예식장도, 드레스도, 혼수도 알아본 것이라곤 한 개도 없는데. 혼전에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서린은 그제야 자신이 임신이라는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빨리 아기가 생길 리가 없을 텐데요.”

“만에 하나. 대비부터 해 놓는 게 좋잖아?”

환성이 서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다. 그려 놓은 듯한 얼굴은 현실감이 없었고 멋지게 넘겨 올린 머리는 어른 남자 그 자체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뛰어서 서린은 황급히 눈을 돌렸다.

“유전자에 끌린다는 말, 이상해요.”

차분히 차를 마시고 있는데 왜 환성이 야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각진 어깨며, 선이 굵은 목 때문인지 항상 편하기만 했던 주혁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몸에 끌린다는 말보다는 고급스럽지.”

서린은 어서 빨리 식사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환성이 혼전임신이라는 단어를 내뱉기 전에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고 한 것뿐인데 왜 지뢰를 밟은 기분일까.

“당신 얼굴 보자마자 든 첫 번째 생각이 그거였어.”

“…….”

“이 여자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애는 어떨까? 여자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게 처음인데.”

열렬한 사랑 고백이 아니었다. 내기에서 이겼기 때문인지 환성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면 상견례 자리일까? 그게 아니라면…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서린은 기억할 수 없었다.

“윤서린 예쁜 거야 이 바닥에선 유명하고.”

“…제가요?”

“얼굴도 취향이지만, 솔직히 그거보다 더 매력적인 부분이 있는데 말해 줘?”

환성의 시선이 느른하게 서린의 얼굴을 훑었다. 언제나 무감정한 그와는 다르게 표정이 참 다양한 여자였다. 순수한 얼굴로 놀랄 때마다 토끼처럼 눈동자가 커지는 게 볼 만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환성에게 끌려오지 않을 정도의 강단을 보였다. 그의 말에 긴장하면서도 받아치는 게 괜찮은 스쿼시 파트너를 만난 것처럼 즐거웠다.

“아뇨. 그만하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서린은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부터 민망해졌다.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외모를 칭찬받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환성이 할 말은 아니라고 느꼈다.

“순산형 엉덩이.”

환성이 남아 있는 차를 소리 없이 마시며 기어이 그 단어를 뱉었다. 물을 마시다 사레에 들려 서린이 콜록거렸다. 환성은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것뿐인데 서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게 무슨!”

탁, 들고 있던 잔을 놓치는 바람에 테이블 위로 녹차 물이 쏟아졌다. 서린의 의자 옆으로 흘러내린 물은 잘못 그린 그림처럼 확 하고 번졌다.

“본능적으로 느낀 감상을 말하는 건데. 솔직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랑이라고 하는 것보단 덜 가증스럽지.”

“그렇다고 그런 표현을 하시면….”

서린은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환성은 사랑보다 더 선명한 감정이 욕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자를 경계하는 그에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환 갤러리에서 처음 인사했었지? 기억해?”

“아, 그때였어요? 길게 대화를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요.”

반년 전 환성의 어머니가 취미로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윤서린을 처음 만났다. 간단히 통성명한 게 다였지만 그 기억이 일주일이 넘도록 머릿속에 맴돌았다.

특히나 환장하겠는 건 코끝을 스쳤던 윤서린의 향기였다. 샴푸와 살 냄새가 섞인 은은한 향이었다.

“혹시 향수 쓰나?”

“아뇨.”

아마도 그녀의 몸에서 줄줄 흐르는 페로몬 냄새일지도. 갤러리에서 마주쳤을 때 서린의 차림새는 지나치게 단정했다. 흰 치마는 종아리를 넘는 길이였고 위로 틀어 올린 머리는 깔끔했다.

기다랗고 하얀 목, 뒷덜미에 부드럽게 돋아난 솜털을 보자 환성의 아래가 뻐근해졌다. 단추를 푸르고, 속옷을 헤쳐 버리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들자 좆부터 반응했다.

인상적인 건 악세사리를 한 개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유일하게 빛나고 있던 건 서린의 두 눈동자였다.

“반지는 낄 수 있어? 결혼반지.”

“네. 괜찮은데요. 왜 그걸 물어보세요?”

“갤러리에서는 귀걸이도, 목걸이도 하지 않았던 거 기억하거든. 알러지 같은 건 없나 보네.”

의외였다. 그날 문영이 호들갑을 떨며 이환의 사모님이 저기 계시다고, 빨리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었다. 그때 마침 환성이 갤러리에 등장했다. 살면서 평생 마주칠 일 없을 것 같던 이환의 장남이었다.

“귀는 안 뚫었고 목걸이는 신경이 쓰여서요. 좀 간지러워서 싫기도 하고요.”

“잘 웃지도 않던데.”

“원래 잘 웃는 편은 아니에요.”

서린은 그와 마주쳤을 때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통의 여자라면 환성을 보는 순간 미소부터 짓는 게 제대로 된 반응이었다.

사심이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인사한 뒤, 그 이상의 대화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서린이 환성에게서 뒤돌아 걸어갔을 때,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허리가 환성의 눈에 띄었다.

그 밑으로 하얀 치마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엉덩이가 도드라졌다. 마른 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볼륨감까지. 완벽히 환성의 취향이었다.

“알겠지만 내가 해외 지사에 반년간 있었잖아? 그래서 상견례 자리 마련하는 게 좀 늦어졌지.”

해외 사업만 아니었으면 서린이 딴 남자에게 한눈파는 일은 없었을 거다. 환성의 성격대로 순식간에 결혼을 치르고 싶었지만, 때마침 해외에 몇조 원을 투자한 사업이 진행되어 도저히 빠질 수가 없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환성은 결혼 문제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윤서린한테 먼저 침부터 발라 놓는 소유욕을 보였다.

사실 정혼자라는 명목을 내세우면 그대로 서린이 따를 줄 알았다. 순진한 얼굴로 이미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밝힐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랬으면 벌써 맞춰 봤겠지 속궁합.”

때마침 상이 차려졌다. 따뜻한 탕과 복어 튀김, 복껍질무침 등이 나왔다. 지리탕의 고소한 향이 퍼졌다. 정갈하게 차려진 한 상이 먹음직스러웠지만 서린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러니 제가 밥이 넘어가겠어요?”

“나한테는 중요한 얘기야.”

환성이 복어껍질무침을 한입 가득 넣었다. 시원하게 입을 벌리고 먹는데도 참 깔끔하게 먹었다. 어쩐지 남자가 먹는 모습을 보자 서린도 입맛이 돌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정연이 남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섹스라고 했지만 서린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잘 통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아껴 주는 마음이라면 잠자리가 불만족스러워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정략결혼 할 거면 육체적으로 끌리는 상대와 하는 게 좋잖아?”

“…왜죠?”

보통 이상형을 말할 때 그것만 콕 집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환성이 얼마나 난잡하게 놀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야성적인 몸을 보니 충분히 그럴 만해 보였다. 게다가 그는 말할 때조차 자제심이라고는 없었으니까.

“일단 내가 성욕이 세고.”

“…….”

“결혼 기간 동안은 충실해야 되니까 일종의 제어장치라고.”

그래서 그나마 입맛이 동한 게 윤서린이라는 뜻일까. 아내에 대한 배려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답변이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환성에게는 최소한의 장치였지만.

“노력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요? 서로 믿는 상대라면 당연히 그럴 일은 없겠죠.”

“엊그제 배신당한 여자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날카로운 팩트에 서린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내기에 져서 환성과의 결혼이 결정이 된 마당에 비난까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 일이 그래.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 같은 사람도 등에 칼을 꽂거든.”

“…….”

“그게 남녀관계만 그럴 거 같아? 부모 자식도 똑같지.”

부모, 자식이라. 순간 환성의 말에 어느 정도 가시가 돋쳐 있어 서린은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여자를 믿지 못하는 건 그렇다 치지만 부모까지 의심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란 것일까?

“부모 자식이라면….”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난히 더 아픈 손가락이 있겠지. 왜 이쪽 사람들이 그렇게 정략결혼을 못 시켜서 안달일까? 내 자식이 편하게 잘 살았으면 싶은 마음이라고 봐? 고대부터 가문과의 결합으로 쓰이는 게 정략결혼이야.”

냉정하지만 사실이었다. 서린 또한 아버지 사업이 걱정되어서 이런 선택을 했으니. 하지만 그의 말처럼 자신에게 자식이 있다면 더 아픈 손가락을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수정될 때 우성과 열성 중에 열성 인자를 더 강하게 물려받기도 하니까. 난 불확실한 것에 시간 투자 안 하거든.”

나이가 찼고, 어차피 후계자는 필요했다. 원래 성격이 급한 환성은 투자 대비 최고 효율을 노리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투자라고 하니까 기분이 좋진 않네요. 300억이라는 돈이 크긴 하지만….”

“그 정도는 해야지.”

“…….”

“명색이 민환성의 아이인데.”

서린을 돈으로 샀다는 말을 환성은 부정하지 않았다. 설원에 투자한 금액이 얼마든지 상관없었다. 이환 그룹과 연결된 이상, 그 어떤 기업이라도 환성의 손을 거치면 회생이 가능했다.

“당신을 어르고 달래서 쉽게 몸을 열게 할 수 있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거절한 여자는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여자를 쉽게 현혹하는 법을 알면서도 환성은 서린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번번이 비껴가듯 그녀를 자극했다. 그의 말처럼 투명했고, 지나치게 오만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민환성은 윤서린을 차지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그건 기만 아닌가?”

서린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웠다. 환성이 다른 무엇보다 싫어하는 것이 사람을 기만하는 일이 아닐까? 그가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윤서린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지. 다 고만고만한 집안의 자제들일 거야. 비슷하게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할거고, 처음 몇 년 동안은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겠지.”

“…….”

“슬슬 지겨워지면 딴 살림 차리기 바쁠 거고. 두 집 살림하다 들키면 혼외자식이 나올 거고, 이쪽 집안 돌아가는 꼴이 다 그게 그거잖아. 개망신 한 번 당해도 누가 신경 쓰지?”

뭐 그건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불륜과 바람은 너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문영과 윤 회장은 유난히 금슬이 좋았다. 서린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난 추상적인 사랑 대신 더 가치 있는 것을 약속하지.”

“…….”

“당신이 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이환의 주인이 될 거야. 딸이든 아들이든. 아버지 노릇은 누구보다 잘하겠지. 내가 원한 아이니까.”

차후에 그가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되더라도 서린과 낳은 아이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겠다는 환성의 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만약 부득이한 사정으로 서로 이혼하게 되더라도 윤서린은 이환 그룹 후계자의 어머니로서 대접을 받을 거고.”

서린과 태어날 아이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 그건 결혼 계약이 종료되든, 아니든 상관없이 주어지는 그녀의 권리였다.

남편감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환성은 아이의 아버지감으로는 최고의 상대였다. 책임감이 있는 위치에 물려줄 게 많은 금 탯줄.

태어나면서부터 비단길이 깔린 것은 물론, 다른 혼외자식은 낳지 않을 생각이라니 모두가 횡재라고 했을 거다.

“서로 다른 상대가 생길 수도 있겠지. 당신도 나도. 영원한 건 없으니.”

환성은 이미 한 번의 생을 살아 본 사람처럼 말했다. 그의 세계에서는 영원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래도 꽤 괜찮잖아? 나중에 닳아 버릴 감정보다 당신을 존중하겠다는 이 약속이 난 더 값지다고 보는데.”

프로포즈는 아니었지만 사업적으로는 최고의 계약이었다. 어차피 설원을 살리는 데는 환성이 필요했다.

“호텔에서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당신 말을 듣는데 믿을 만했어.”

“…어떤 점에서요?”

“결혼은 결혼. 뒷구멍에서 노는 건 따로. 다들 그러니까.”

“…….”

“서로 다른 사람 생기면 말하는 게 어때? 대신 결혼을 정리하기 전에는 섹스는 안 해야 뒤탈이 없겠지.”

환성의 성격이라면 굳이 다른 여자가 생겨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서린에게 구차한 변명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환성은 도망치지 않았다. 숨기지 않았다. 서린을 속이지 않았다. 차라리 가시 같은 말로 그녀를 찌르며 칼날 같은 진실을 쥐여 주는 게 민환성의 방식이었다.

계약에 추가되는 사항이 하나 더 생겼을 뿐. 그의 말대로 집안을 위한 정략결혼 상대 중에 가장 좋은 건 민환성뿐이었다.

“약속할 수 있으세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속는 건 싫었다. 환성의 말대로 그녀의 평탄한 인생에서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남자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살면서 거짓말해 본 적 없다니까.”

계약 체결이 기분 좋은지 환성이 피식 웃었다. 가랑비에 젖어 들 듯 서린도 환성의 방식에 적응해 갔다.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리면 돼?”

“뭐가요?”

“애 만드는 거.”

환성은 그나마 ‘섹스’라는 표현을 돌려서 말했다.

신경 써 주며 좋은 것을 먹이고, 위로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 비슷한 것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섹스를 위한 단계에 불과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건.”

“시간 끌면 달라져? 그럼 기다리고.”

서린의 피드백을 기다리며 환성이 물었다. 항상 직원들에게 브리핑을 받을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달라질 건 없겠죠. 하지만 제가 아직이라고 말씀드리면 파혼하실 건가요?”

“…….”

“제 유전자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서린은 반항하려는 의도보다는 환성의 태도를 보고 싶었다. 그가 한발 물러서 준다면 어쩌면 이 관계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다리지. 익숙하지는 않지만.”

환성은 계약 불이행이라고 채근하는 대신 서린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 순간 서린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그건 아마도 섹슈얼한 분위기 때문이 아닌, 그가 미묘하게 입매를 당기며 웃는 게 시선을 끌어서였다. 평소의 분위기와 완전히 달랐다. 아직 청년 티를 벗지 못한 그의 나이에 걸맞은 미소였다.

* * *

약간 운전이 거칠다는 것만 빼면 괜찮은 저녁 시간이었다. 서린의 집 앞에 차를 댄 환성은 주차를 하고서도 한동안 차에서 내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저…, 무슨 할 말이라도 남으셨어요?”

“생 고문이군.”

탁, 차 문을 열고 내린 환성이 안주머니에서 은색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불을 붙이려는데 조수석에 아직 남아 있는 서린이 보였다.

하, 겨우 욕설을 참은 환성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서린은 그가 먼저 일어난 게 놀랐는지 얼떨떨하게 차에서 내렸다.

“들어가.”

“환성 씨는요?”

“난 담배 좀 피우고.”

줄담배가 피우고 싶은지 환성의 미간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서린은 무엇이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는지 몰라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피곤하세요?”

팅, 맑은 쇳소리가 들렸다. 라이터를 켜자 시퍼런 불이 담배 끝을 잡아먹었다. 환성의 남자다운 볼이 깊게 팼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손으로 라이터를 가리지 않았다. 깊이 필터를 물고 빨다가 환성이 신경질적으로 깨물었다.

“괜히 연기 맡지 말고 가서 쉬어.”

환성이 바람을 등진 채라 서린에게 담배 연기는 오지 않았다. 초조한 만큼 담배는 급속도로 타들어 갔다. 폐활량이 좋은 탓인지 어느새 반이나 재로 변했다.

왼쪽 허벅지의 정장 바지가 타이트하게 죄어들었다. 지나치게 풀발기 된 좆이 내보내 달라는 듯 꿈틀거렸다. 겨우 옆으로 비켜서 서린에게 보이지 않도록 했지만 환성의 불안정한 숨소리를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서린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순간 가슴 안쪽이 슬쩍 보였다. 실크로 된 민소매를 입은 탓에 훌렁, 하고 안이 드러났다. 깊게 팬 골에 환성의 시선이 꽂혔다.

서린은 딱히 저의가 없어 보였지만 이런 걸 보여 주고 도망치는 건 반칙이었다. 당장이라도 손목을 끌어와서 차에 태우고 호텔로 끌고 가고 싶었지만, 환성은 전 스스로 내뱉은 말을 기억했다.

기다리겠다고. 그딴 말은 왜 뱉었을까.

환성의 팔보다 가는 다리로 여자는 참 잘도 걸었다.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어깨선이며 하늘거리는 팔목이 눈에 띄었다. 대문 벨을 누른 뒤, 가정부가 서린임을 확인하자 주택 문이 열렸다. 잘 가꿔진 정원 속으로 서린은 사라졌다.

자지의 열감을 식히는 동안 환성은 반 갑도 더 되는 담배를 피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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