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묘한 한기가 들었다. 늦여름이라 가디건을 챙기지 않은 탓에 서린의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호텔 카페에 도착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다행히도 민환성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결혼이 결정된 이후, 식을 치르기 전에 단둘이서는 처음 보는 자리였다. 약속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먼저 도착한 서린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오셨어요?”
커피가 미처 식기도 전에 나타난 환성이 인사 대신 의자부터 빼냈다. 의자의 다리와 대리석 바닥이 마찰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소음을 내기에 적당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환성은 힘이 조절되지 않는 듯했다. 지나치게 큰 남자가 의자에 앉았다. 자리가 비좁아 불편한지 바로 다리부터 꼬았다. 그의 긴 다리가 테이블 아래에 사선으로 뻗었다.
“호텔 룸으로 옮기지. 자리가 불편한데.”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남들 보는 눈도 있고요.”
환성은 뭔가 불만인 듯한 표정이었다. 운동선수 같은 몸에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인 그가 등장하자 힐끔 뒤돌아보는 여자들이 여럿이었다.
“혼전에 맞춰 보자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여자 쪽에서 먼저 말할 줄은 몰랐지만.”
“아, 식 준비하는 거 때문에요? 맞춰야 할 상황이 많긴 하겠지만 오늘 연락을 드린 건 사실….”
“그거 말고 속궁합.”
저음의 목소리가 로비에 굵직하게 울렸다. 서린은 누가 들었을까 봐 얼굴빛이 금세 사색이 되었다. 민환성이 안하무인에 입이 양아치처럼 거칠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번 상견례 자리에서 지나칠 정도로 어른에게 깍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만남에서 환성이 무례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확연히 차이 나는 조건의 결혼이라 부모님의 걱정이 많았지만 상견례 자리의 분위기는 의외로 제법 화기애애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커피 마시는 동안 생각 바뀔 수도 있으니까.”
탁, 환성이 테이블 위에 카드키를 내려놓았다. 서린은 한동안 말문이 막혀 카드키와 환성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감히 네가 거절할 수 있냐는 듯 환성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환성 씨를 보자고 한 건 그런 이유가 아닌데요.”
“…….”
“죄송하지만 더 늦기 전에 파혼하고 싶어서요. 오늘 그 문제를 상의 드리려고 만나자고 한 거예요.”
서린의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를 호텔의 카페로 부른 게 잘못이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장소가 그렇다 하더라도 면전에서 속궁합이라니 심했다.
물끄러미 서린을 바라보던 환성이 안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매끄러운 스테인리스 바디를 열어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저… 여긴 금연인데요.”
“심심해서 입에 물고만 있을 거야. 계속해.”
환성은 파혼 이야기에 놀라지도, 되묻지도 않았다. 그의 매끄러운 입매에 담배가 걸렸다.
근사한 몸을 뒤로 젖히며 마저 말하라는 듯 서린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잠시 말문이 막힌 건 오히려 서린이었다.
“아시다시피 파혼은 환성 씨 쪽에서 먼저 제안하는 게 덜 거북하실 것 같아서요.”
“이유가 뭔데?”
환성과의 정략결혼이 결정된 건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얼마 전, 싫다는 서린에게 가벼운 선 자리일 뿐이니 일단은 만나 보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부모님이 상견례 자리라는 것을 말해 주지 않은 탓에 서린은 굉장히 당혹스러웠었다. 서린은 더 늦기 전에 이 관계를 청산하고 싶었다.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사귄 지는 반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같은 대학을 나온 주혁 선배와 그런 사이가 될 줄은 서린도 예측하지 못했다.
아직은 사랑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는 곧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차피 환성도 더 좋은 조건의 여자와 결혼하는 게 이득일 테니까.
재벌인 민환성이 먼저 약혼식부터 치르자고 하지 않는 것도 서린은 일종의 시그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일이 바쁘고 여유가 없어도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재벌가였으니까. 그래서 서린은 환성과 합의할 지점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고작 그 이유로?”
환성은 시답잖은 얘기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화를 낼 가치도 없다는 듯한 싸늘한 얼굴이었다. 서린은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전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서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좋잖아요. 환성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에 그가 웃었다. 입매를 비튼 탓에 비웃음으로만 보였다. 이내 참기 힘들다는 듯 환성이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가 로비가 울릴 정도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환성은 덕분에 담배 필터까지 씹어 버렸다.
“아, 미안. 안 그렇게 생겨서 애 같은 소리를 하니까 웃겨서.”
차가운 인상의 환성에게 연인이나 아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닌 듯 보였다. 그가 적당히 구색을 갖춘 결혼 상대를 찾는다는 것을 서린은 모르지 않았다.
중소기업을 벗어나 이제야 중견기업으로 올라선 ‘설원’. 환성이 배우자감으로 서린을 택했다는 사실은 이 바닥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다른 대기업과의 합병도, 전략적인 투자도 받을 필요 없는 굴지의 대기업인 ‘이환’과 ‘설원’은 급이 맞지 않았다. 재벌들 사이에서도 서린의 존재가 의외라는 뒷말이 나돌고 있었다.
그 잘난 윤서린이 몸으로 환성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말까지 돌았고 그쯤 되니 서린 역시 그의 의도가 궁금했다.
왜 하필 자신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이 남자가 자신에게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이미 두 번이나 파혼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서린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잘난 얼굴에 그 배경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환성의 결혼 상대가 정해지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외모에 걸맞은 여성 편력. 수없이 여자를 바꿔 가며 놀아먹는 건 이쪽 세계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지만 환성의 소문은 심했다.
섹스에 환장한 걸레. 창놈보다 더한 성도착증 환자. 머리가 좋아서 큰 사고는 치지 않고 어른들은 모르게 뒤에서 굴러먹는다고 그렇게 들었다.
환성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는데 서린은 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렇게 차이 나는 결혼을 하려는 이유는 없었으니까.
결혼식을 마친 뒤 환성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 처음 보는 아이가 엄마, 하고 치맛자락을 붙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파혼한 주제니까 또 해도 괜찮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내가 파혼했다고 누가 그래?”
파다한 소문을 부정하듯 환성이 물었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뻔뻔한 연기에 서린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나요?”
“그건 소문이고.”
“…….”
“오피셜로 뜬 적 있어?”
없었다. 환성의 말대로 약혼식이 치러진 적도, 청첩장을 찍었는데 파혼한다는 소식도.
카더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공공연한 소문을 왜 환성이 바로잡지 않은 건지 서린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못 믿나 본데 사람들이 윤서린이 벌써 민환성의 애를 뱄다더라, 이렇게 떠드는 건 알아?”
“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서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경악할 만한 루머가 도는 줄은 전혀 몰랐다.
“이쪽 사람들이 다 그렇지.”
서린은 소문의 주인공이 된 건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남자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이쪽’ 사람들이 얼마나 음험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네 살이나 어린 윤서린은 얼마나 민환성에게 순진해 보일까? 애를 뱄다는 표현에 지레 놀라서 어깨까지 들썩였으니. 이미 한 수 진 것 같아서 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300억짜리 결혼인 건 들었나?”
“네?”
“내가 설원에 투자하기로 한 금액인데.”
전혀 들은 바가 없어서 서린의 몸이 굳었다. 며칠 전 그녀는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환성과 결혼할 수 없다고 밝혔다.
주혁의 존재는 아직 말할 수가 없었다. 서린이 맞선도 아니고 상견례를 했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처음에는 서린을 설득하던 부모님도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그렇다면 재고해 보자고 말이 나온 상태였다.
아버지는 누구라도 욕심이 날 법한 사윗감인 환성이 아쉬운 눈치였다. 늘 자애롭게 서린을 키운 어머니는 그녀의 편이어서 천천히 아버지를 설득해 보자고 했다.
일단 정혼자인 환성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꺼내 본 건데 현실은 달랐다.
“몰랐어요. 설마 돈 때문에 이 결혼이 결정됐다고 생각하세요?”
“왜? 자존심이 상했어?”
“그렇다기보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요.”
“설명이 필요해? 경영에 문제가 있으니까 투자금이 필요한 거고, 가치 있는 회사니까 투자하려 한 거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명쾌한 환성의 해석과 달리 서린은 걱정이 들었다. 투자받을 금액이 상당히 큰 게 마음에 걸렸다. 설원에 문제가 있다면 큰일이었다.
왜 부모님은 이런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은 건지, 서린의 가슴이 미어졌다.
파혼을 한다면 환성이 투자금을 빼 버릴 텐데. 한 해에 도산하는 회사가 한둘이 아닌데 묵직한 금액이 빠져 버리면 다른 투자자를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서린의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다. 어쩌면 이 결혼에 절박하게 매달려야 하는 건 그녀일지도 몰랐다.
“저… 여기 금연인데요.”
환성이 지포 라이터를 열자 팅, 하는 맑은 쇳소리가 들렸다. 망설임 없이 불을 붙인 그가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알아.”
환성이 깊은숨을 내쉬자 새하얀 연기가 입 주변에 그림처럼 퍼졌다. 매캐한 공기가 퍼졌지만 저지하러 오는 이는 없었다. 담배 냄새에 뒤돌아보던 카페 안 사람들도 환성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영화촬영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신분을 아는 종업원들은 심지어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호텔도 이환 그룹의 산하에 있다는 게 서린은 기억났다.
“그래서 파혼을 하고 싶다고?”
결정을 번복할 기회라도 주듯이 환성이 물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 때문에 그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잘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풍기는 분위기는 위압적이었다.
“돈은 무가치하다고 쳐. 하지만 부모를 저버리고 하는 결혼이 과연 행복할까?”
“…….”
“당신 곱게 자랐잖아. 그만큼 착할 테고, 독한 마음 먹은 것도 처음이지? 각오는 했냐고.”
“그건….”
“이번엔 다른 걸 묻지. 300억이 아니라 사랑한다던 그 남자의 가치에 대해서.”
조금 전까지 주혁과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미래가 불완전해졌다. 환성의 말대로 서린의 성격에 부모님의 위기를 모른 척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설원이 경영난이라고는 해도 좋은 투자자를 찾을지도 모르고.
배려심 깊은 아버지는 딸 가지고 장사한다는 소리는 못 견딜 테니 서린이 적극적으로 방안을 알아봐야 했다.
“그 남자가 당신에게 뭘 줬지?”
“전 연인 사이에 물질적으로 주고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평생 사랑한다는 허울뿐인 약속? 기약 없는 그 말이 당신이 지금까지 누려 온 행복보다 중요한가? 내가 발을 뺀 후 제때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설원은 부도 나는 거 피하기 어려워.”
환성이 금세 다 피운 담배를 대리석 바닥에 버린 뒤 구두 뒷굽으로 짓눌러 불씨를 껐다. 고급 수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행동거지였지만 환성이 하니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서린은 환성의 손목에 걸친 묵직한 시계와 다이아가 박힌 커프스에 시선이 갔다. 의외로 남자의 손가락은 기다랗고 매끄러웠다. 흉흉한 몸체와는 다른 섬세한 손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최악을 가정하면 그렇겠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서린은 환성과 파혼 후에도 어떻게든 부모님께 폐가 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사랑만 운운하는 걸 보니 당신보다 못한 처지의 남자겠어.”
가진 게 많은 남자였기에 그만큼 다른 이들의 인생의 가치를 제멋대로 판단했다. 아버지의 사업 성공 이후 서린은 종종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얽힐 수밖에 없었다.
환성과는 몇 마디 나눠 보지도 않았지만 뼛속까지 특권의식에 찌든 부류라고 느껴졌다.
“그 남자한테 이렇게 말해 봐. 그렇다면 나랑 파혼해도 300억 투자금 빼지 않을 테니까.”
“…네?”
“나도 궁금해졌거든. 당신과 그 남자의 사랑의 무게가 과연 같을지.”
그 말을 하는 환성의 눈빛이 드물게 이채를 띄었다. 한 번도 지는 게임을 한 적이 없는 듯한 태도였지만 서린의 머릿속엔 300억만이 맴돌았다.
민환성이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가 확언한 것처럼 설원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기업이었다.
“애인한테 이렇게 전해. 설원 그룹 부도났다고. 집 재산 전부를 날리고 빚까지 70억 생겼다고.”
“…….”
“당신 재산 노리는 게 아닌지 확인해야지. 돈 노리고 접근하는 일, 이 바닥에서는 굉장히 흔하잖아?”
아, 그제야 서린은 눈앞의 이 남자에겐 자신의 고백이 통속적이고 진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순간의 흥미로 300억을 내걸 만큼 자만하고 있었다.
“부모 빚은 상속 포기하면 되는 거 모를 정도로 못 배운 놈은 아니겠지. 요즘 세상에 대물림으로 빚 갚는 사람이 어딨다고.”
서린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손해가 될 만한 거래는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주혁이라면 그런 조건 때문에 자신과 사귀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남자가 도망가지 않는다면 파혼해 주지.”
환성은 전혀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는 유치하게 느껴지는 사랑을 믿을 마음도, 받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서린은 머지않아 사랑의 실체를 벗기겠다는 듯 확신에 찬 그의 태도가 거슬렸다.
“후회하실 텐데요.”
“했으면 좋겠군.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난잡한 소문과는 정반대로,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민환성은 재벌들 중에서도 신화에 가까운 이력을 갖고 있었다. 외국계 자본을 활용해 이환을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시킨 장본인이었으니.
서린은 자신만만한 환성에게 놀랄 만한 결과를 알려 주고 싶었다. 그것이 민환성의 인생에서 첫 번째로 겪는 패배가 될 것이다.
“강아지나 고양이 키워 본 적 없으시죠?”
“음?”
뜬금없는 서린의 질문에 환성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오늘따라 커피가 참 쓰다고 느끼며 서린이 커피잔을 매만졌다. 이미 차갑게 식은 커피의 온도가 꼭 민환성 같다고 생각했다.
“주기만 해도 아깝지 않은 감정.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이 세상에 조건이 붙지 않는 건 없어. 개나 고양이? 생긴 게 예쁘고 귀엽잖아. 그것도 조건의 일부지.”
환성의 그 말이 꼭 서린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예쁘고 말을 잘 들을 것 같아서 이 결혼을 결정하게 됐다고.
윤서린의 이미지가 그랬다. 갖고 놀기 좋은 인형같이 생겨서 부유한 집안인데도 한 번도 엇나간 적 없는 모범생.
재벌들끼리는 알음알음 누가 약을 하는지, 호빠에 빠졌는지, 알려진 편이니까. 그래서 서린의 순수함을 조건으로 환성은 결혼을 제안한 건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확실히 서포트 해 줄 말썽 없는 여자를 원할 것 같았다.
“저는 어떤 조건이었는데요?”
“당신 유전자 때문에.”
아직도 알싸한 담배 향이 환성의 주변을 감돌아서 그런지 머릿속까지 연기가 끼어 버린 듯했다. 어느덧 잔잔해진 잔향이 남자다운 체취처럼 느껴져서 서린은 혼란스러웠다.
“외모가 뛰어나기는 하지만 윤서린 정도 되는 얼굴이 연예계에 없는 건 아니지. 중요한 건 여기.”
톡톡, 환성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치며 서린을 바라봤다. 그는 얼굴만 보면 품위가 있어 보이는데 하는 짓은 다소 천박했다.
아니, 그것도 서린의 착각이 분명했다. 환성의 조폭 같은 태도를 가려 주는 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수트 덕분일 테니.
“머리 좋잖아? 당신.”
“…….”
“기여입학이나, 수상실적 조작으로 구차하게 만들어 낸 학벌 아니라서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든다, 라는 말을 내뱉는 환성의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지금까지 기함할 만한 거친 언사를 내뱉은 그답지 않았다.
“외모, 두뇌. 앞으로 태어날 내 자식한테는 최고만 물려주고 싶거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부성애가 넘치는 타입이었나? 하지만 차가운 환성이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남자답게 자식도 완벽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돋보였을 뿐이다.
“혹시 그런 이유로 결혼을 결정하신….”
“조합이 괜찮잖아. 우리 둘.”
환성이 물끄러미 서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결혼을 결정하는 게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유전적으로 끌린다는 말이라면 꽤나 유혹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텐데.
“조합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네요. 그리고 저 머리 좋지 않아요. 남들보다 덜 자고 노력하는 편이죠.”
“잘 맞네. 머리는 내가 좋아. 노력파는 아니지만.”
환성은 타고난 외모와 두뇌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은 1g도 없어 보였다.
서린은 환성에게서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감 없이 유전자론을 펼치자 당혹스러웠다.
“제가 머리가 좋을 거라고 예상했다면 잘못 짚으셨다고 말씀드린 건데요.”
“나에게 부족한 건 끈기 정도라서. 반씩 섞이는 편이 오히려 좋지. 난 좀 세상이 재미없는 편이라.”
민환성의 인생이 얼마나 쉬웠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치트키를 쓴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 그 자체인 삶.
물질적인 풍요를 떠나서 저 외모만 가지고도 배우를 하든 모델을 하든 이름 꽤나 날렸을 거다. 다소 재수 없게 느껴졌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요.”
“어차피 유전자를 남길 거 최상의 상대면 서로 좋잖아?”
서린이 돌려서 지적해 봤지만 아무래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단조로운 환성의 시선 밑으로 왠지 열망이 들끓는 듯한 눈동자가 있었다.
서린은 맨살이 드러난 팔이며 쇄골이 보이는 옷차림이 불편해졌다. 환성은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당장이라도 옷을 벗길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때마침 테이블 위에 있는 호텔 카드키가 불온하게 눈에 들어왔다. 만약 파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이 남자와 자게 됐을지도 몰랐다. 물론 서린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런 이유로 결혼하는 건… 동물적이라고 생각해요.”
서린 또한 2세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사촌의 조카만 봐도 이렇게 예쁜데 자기 자식이면 더하겠지, 싶은 감정이었다.
민환성이 말했던 것처럼 유전적으로 우월한 아이를 낳고자 하는 생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인간도 동물이야.”
서린은 적어도 동물은 구애라도 한다고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새는 날갯짓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육식 동물은 먹이라도 바쳤다.
인생을 날로 먹는 민환성은 윤서린에게 공들일 생각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가 지게 된다면….”
서린이 본론으로 돌아가자 환성이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하루는 분 단위가 아닌 초 단위로 움직일 테니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을 비껴간 낮이었다. 대낮이었지만 상당히 피곤한 대화에 서린도 어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원하시는 대로 결혼해 드리죠.”
서린의 말문이 잠시 막혔던 건 상상만으로 숨이 막혀서였다. 충분히 친절하고 매너 있게 말을 할 수 있음에도 환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린을 무시해서는 아니었다. 호텔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웠던 것처럼 아마 타고난 성격이 그 모양일 것이다.
우습게도 개차반이라고 재벌계에서도 소문이 파다했지만 민환성이라는 이름에 흠집 하나 내지도 못했다.
실제로 서린이 환성과의 결혼이 결정된 순간 설원의 주가지수는 오름세를 보였다. 기사가 난 것도 아닌, 암암리에 퍼진 소문의 위력이 그 정도였다.
그렇기에 남들은 미쳤다고 할 만한 파혼이었지만 서린에게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이 내기에서 이길 경우 결혼을 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투자금은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결혼이야 당연한 거고 그 전에.”
“…….”
“혼전 임신.”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시공간이 멈춘 것처럼 서린이 정지했다. 정신이 멍해져 도저히 그 단어가 해석되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결혼 전에 임신하자고.”
뼛속까지 깊이 박힌 상스러움을 환성은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린은 결코 민환성에게 근사한 프로포즈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낯뜨거운 단어 선택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서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귀까지 달아오른 열기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분명 호텔에 들어왔을 때는 한기까지 느꼈었는데.
“내가 좀 무례했나? 하지만 서로 패널티가 있는 편이 재밌잖아?”
하지만 환성의 표정에서는 후회와 반성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낮이었고, 주변에는 비즈니스 차 온 사업가들이 미팅을 하고 있었다. 하던 대화를 동시에 멈추고, ‘임신’이라는 단어에 무슨 일일까 싶어 귀를 기울이는 테이블이 한둘이 아니었다.
“뭐, 당신은 정혼자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끌린다고 파혼하자고 했으니. 그거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무례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따지고 보면 환성의 말이 맞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파혼하자는 말이 불벼락처럼 들렸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타입일 거다. 사소한 것이라도 예정이 틀어진다면 철저히 상대방에게 보복할 남자였다.
“확실히 하는 게 좋잖아? 이런저런 수 써 가면서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하면 내 입장에서는 시간 낭비니까. 당신이 몰래 피임약이라도 먹으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방법이 없지.”
“…….”
“내가 당신을 결혼 상대자로 원하는 건 2세 때문이라고.”
마시고 있던 커피를 그대로 끼얹어 버릴까, 서린은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쉽사리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지나치게 차분한 민환성의 얼굴 때문이었다.
성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사업 계획서라도 읊는 것 같은 표정은 금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제안도 윤서린의 사랑이 완전하다면 소용없는 얘기겠지.”
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환성이 남은 커피를 마셨다. 잠시간의 침묵. 그는 더 이상 서린을 채근하지 않았다. 단지 끈질긴 시선으로 어서 결정하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을 뿐.
애써 견디던 서린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환성의 눈동자가 유린하듯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을 훑었다.
그러다 얌전한 옷을 입었음에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가슴에 멈췄다. 입 안에 고인 타액만큼 맛있어 보이는 몸이었다.
“할게요.”
“…….”
“어차피 당신과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결정한 듯 서린이 환성과 눈을 맞췄다. 손끝이 떨렸던 건 그의 무뢰한 같은 임신 제안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의 말대로 주혁의 배신이 아니라면 환성의 아이를 가질 일 또한 없었다.
“단정 지을 거까진 없잖아? 서운하게.”
환성은 하나도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서린은 그에게 잠시 말려 들어갈 뻔했지만 눈앞의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파혼과 투자금.
환성에게는 300억이라는 돈이 혼자 융통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금액일 테지만, 서린에게는 부모님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결혼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편이었다.
게다가 저 완벽한 환성의 얼굴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순간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럼 나가지.”
환성이 일어나자 키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서린은 위압감에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의외로 그는 매너 있게 에스코트를 하며 로비를 빠져나갔다.
성질머리처럼 급하게 걷지도, 다소 걸음이 느린 서린의 손목을 잡아끌지도 않았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린은 갈증이 나서 기침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데려다주고 싶지만 일정이 있어서.”
발렛 되어 있던 서린의 차가 나오기 전까지 환성은 그녀의 옆에서 기다렸다. 자기 할 말이 끝나면 휑 하니 자리를 바로 뜰 것 같았는데 예상외였다.
“바쁘실 텐데 이만 가 보셔도 되는데요.”
나란히 선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 남자였다. 서린은 긴장한 등이 뭉쳐서 오늘 저녁은 먹지 못할 것 같았다. 벌써 체한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왔네.”
발렛 요원에게 차 키를 대신 받은 환성이 서린에게 키를 내밀었다. 그의 손끝이 서린의 손바닥에 잠시 닿았다.
불에 델 듯 체온이 뜨거워 재빨리 손을 떼었다. 운전석의 문을 연 환성이 어서 차에 타라는 듯 눈짓했다.
서린이 천천히 그의 아래로 내려섰다. 환성의 체격이 지나치게 커서 비켜섰는데도 위압감이 들었다.
“가 볼게요.”
“잘 들어가.”
환성이 문을 닫아 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그가 훅, 들어오더니 싱긋 웃었다.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듯했다.
“섹스할 때 콘돔은 꼭 쓰고.”
그 말을 남긴 채 환성이 탁, 문을 닫아 주었다. 핸들을 잡은 서린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새하얀 손등에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서린이 평소보다 거세게 액셀을 밟았다.
“하, 미친놈.”
주혁과는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남들은 서린에게 늦되다고 했지만 서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순수하게 단계를 밟아 나가는 이 관계를 민환성 같은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또라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환성은 주혁에 대한 질투심 하나 없이 무감한 눈이었다. 네까짓 게 남자랑 어디서 굴러먹든 결국에는 내 새끼를 낳게 되겠지, 라는 표정이었다.
기가 찬 상황에 서린은 헛웃음도 나지 않았다. 뭐 하나 정상이랄게 없어서 서린은 운전대를 잡았어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비게이션이 몇 번이나 경로를 재탐색했다. 초보운전이었을 때도 이런 적이 없던 서린은 그나마 딱지를 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