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5화 > 악마 (3)
이호연은 [현월의 전당]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않았다.
공간 전체를 꿈으로 만들어 버리는 [현월의 전당]은 이 세계의 법칙을 위반하고 신의 경지를 침범했다.
그 경험에서 힌트를 얻었다.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신뿐이다.
인간의 마법은 자기 자신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미래 예지』 ──
▶ 고유 마법
▶ 개안을 통해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를 해석해 다음 순간에 일어날 현상을 관측합니다. 상대가 마력을 사용하는 존재라면 예지는 절대 틀리지 않습니다.
─────────────
자신은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관측할 뿐.
이호연의 예상대로, 이 세계의 법칙은 [미래 예지]에 간섭하지 못했다.
- 크륵?! 크르륵…!
스파이럴에 튕겨 나간 카르쿠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금방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부터 땅에 처박히고, 입에 고운 모래가 들어왔다.
카르쿠스는 그제서야 당황하며 자신의 앞다리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얇은 팔 대신 어깻죽지와 팔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앞다리가 뜯겨나가는 건 지옥에서 긴 세월을 살았던 카르쿠스도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는 너무나 강했기에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 인간. 인간… 죽인다. 먹는다… 먹, 먹는다….
"…."
저벅.
이호연은 말없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에는 카르쿠스가 뒤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 크륵. 크르륵….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친 마르쿠스는 눈앞에 있는 정체 모를 생명체를 보며 몸을 떨었다.
인간? 저 존재가 과연 인간인가?
욕구와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카르쿠스의 가슴 속에 묻혀있던 감정이 천천히 떠올랐다.
공포.
지옥의 지배자 마왕.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눈 앞의 존재에서 느껴졌다.
눈앞에 보이는 생명체가 사냥감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카르쿠스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도망. 도, 도망….
키륵. 끼기기긱. 끼긱….
몸을 돌려 도망치려 해도 앞다리 하나가 없어 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화르륵-
어떻게든 몸을 돌렸지만, 곧바로 눈앞에 나타난 불길이 카르쿠스의 얼굴을 그을렸다.
카르쿠스는 곧바로 무릎을 굽히며 측면으로 뛰었다.
- 크르, 크르륵...?
그러나, 그곳에도 뜨거운 태양이 타오르고 있었다.
카르쿠스가 당황하며 눈을 돌리고 있을 때.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갈 생각이구나?"
- 크, 크륵. 크르륵….
저벅. 저벅.
인간 특유의 가벼운 발소리.
카르쿠스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두려웠다.
마왕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공포였다.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는 마왕은 카르쿠스에게 주인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눈앞의 생명체는 달랐다.
- 인간…? 이, 인간이… 아니었어….
"지랄하고 있네. 그럼 넌 벌레가 아니냐?"
이호연은 모랫바닥을 허우적거리는 카르쿠스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김새는 여전히 역겨웠지만, 겁먹은 모습을 보니 쌓였던 짜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카르쿠스의 주변에 수십 개의 이클립스가 떠오른다.
놈은 어디로 도망치려 해도 자신에게 움직임을 읽혔고, 스피드를 극복한 이상 카르쿠스는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
먼저 남은 팔다리를 찢어서 반항할 수 없게 만들어야한다.
카르쿠스는 지옥의 마력을 억제하는 특제 밧줄에 포박당한 채 미국 마법사 학회에 악마 연구 샘플로 제공될 것이다.
이 정도로 강한 악마의 몸은 연구자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자료다.
카르쿠스는 전 세계에 조금씩 몸을 뜯기다가 비참하게 죽게 되겠지.
미래 예지를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광경은 예상할 수 있었다.
피식-.
벌벌 떠는 카르쿠스를 보며 이호연은 미소를 지었다.
"때릴 땐 좋았지? 걱정하지 마. 난 너랑 다르게 금방 끝내줄 테니까."
- 크륵. 크르륵….
카르쿠스의 본능이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항상 사냥꾼의 입장이었던 악마는, 처음으로 사냥감의 기분을 느꼈다.
*
안젤라 길드의 길드장 안젤라.
그녀는 어느 날 찾아온 이호연과 만났다가 '진심'을 주입받았다.
그 이후로 어쩔 수 없이 이호연을 도우며 미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하고 짜증이 났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밝혀진 진실에 의하면 이호연은 정의였고, 그의 연구 결과는 전 세계를 뒤집었다.
매일같이 판데믹의 세뇌에 당한 정치인들이 튀어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부터 이호연을 지지한 그녀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녀로선 오히려 이호연에게 감사할 입장이 되었다.
공개선상에서 어둠을 구토한 사람들은 자신의 입지를 되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했으니까.
오늘 안젤라 길드가 C 구역으로 지원을 나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C 구역에 있는 헌터들은 물론 지원을 나간 이호연까지 연락이 두절됐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호연과 친분이 있는(정확히는 있다고 알려진) 안젤라 길드장이 지원을 나왔다.
"기, 길드장님. 저건…?!"
"… 전투 준비해."
C 구역에 지원을 나올만한 가치는 있었다.
이호연은 실제로 정체불명의 괴수와 마주 보고 있었다.
얇은 팔다리를 가진 괴수는 이호연과 대치하며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끼긱- 끼기기기기기기긱-
안젤라 길드가 전투에 지원하려는 순간.
괴수가 움직였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호연의 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안젤라가 인지한 것은 순식간에 둘이 한 합을 교환했다는 것.
그녀의 실력으로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싸움이었다.
"길드장 님! 곧바로 지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카아아앙-!
안젤라가 입을 열려던 찰나에 다시 둘이 충돌했다.
이번에는 이호연이 우위를 가져간 것처럼 보였다.
"… 모두 그 자리에서 대기해."
"예?! 하지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안젤라는 정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길드원들은 저 괴수가 이호연을 향해 돌진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S급 헌터 안젤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들은 방해에 불과하다.
눈 앞의 수준 높은 전투에 끼어들어서 이호연의 집중력을 깨트리면 안 된다.
"안젤라 길드는 이호연 마법사가 괴수를 제압할 때까지 대기한다."
안젤라는 눈을 크게 뜬 길드원들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기, 길드장님!"
"닥치고 추가 지원이랑 의료팀이나 불러. 지금 동원 가능한 병력은 전부 데려오라고 해."
안젤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력을 일으켰다.
지원이 오기 전에 이호연이 쓰러진다면… 자신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아…."
괴수의 앞다리가 떨어지는 걸 본 안젤라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놈의 몸 주변에 수십 개의 검은 태양이 떠올랐고, 괴수는 도망치지 못했다.
"길드장님! 곧 지원과 의료팀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래.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는…."
그때, 안젤라의 시선에 길드원 하나가 걸렸다.
실력은 좋지만 SNS에 관심을 갈구하는 글을 자주 쓰는 바람에 길드 차원에서 몇 번이나 경고했던 길드원이었다.
그는 스마트 워치로 정면을 찍고 있었다.
"제임스? 너 설마 이호연 마법사를 찍고 있는 거야?"
"아,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지금 당장 삭제하겠습니다!"
"…… 아니. 잘했어."
긴급 상황에 스마트 워치로 동영상을 찍는 건 징계로도 모자른 사안이지만, 전황을 살핀 안젤라는 제임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촤악-
괴수의 다리 하나가 더 뜯겨나갔다.
이미 이호연이 괴수를 제압하기 직전이었다.
지금은 화를 내기보다 어떤 영상을 찍었는지 확인해야 할 때다.
"제임스, 정확히 언제부터 찍었어?"
"기, 길드장 님이 대기하라고 하셨을 때부터…."
"징계는 봐줄테니까 그 영상 sns에 올리지 말고 나한테 넘겨."
"아, 알겠습니다!"
안젤라는 자신의 눈으로도 제대로 담지 못한 전투를 되새겼다.
이호연이 상대한 괴수는 지금까지 나타난 놈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놈과 전투하는 동영상은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저게 공개되면 또 난리가 나겠지.'
안정화에 가까워진 지옥의 괴수에 대한 공포감이 다시 살아날 것이고, 이호연 마법사의 강함은 전 세계에 충격을 가져다줄 것이다.
털썩-
그때, 괴수를 제압한 이호연이 모래사장에 쓰러졌다.
"모두 대기하고 있어. 의료팀이 오면 곧바로 이호연 마법사에게 보내고."
안젤라는 조심스럽게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기세를 드러내고 적의가 없다는 걸 표현했다.
- 크, 크르륵… 크륵….
끼긱- 끼기기기긱….
정체불명의 괴수는 마력 밧줄에 묶인 채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젤라는 놈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이호연 마법사. …괜찮으십니까?"
이호연은 바닥에 누운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온 몸에 힘이 빠지긴했지만,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느껴졌다.
"… 의료팀 좀 불러주세요. 안젤라 씨."
"의료팀은 곧 도착할 겁니다. 그, 죄송합니다. 저희가 전투에 끼어들었다가 오히려 방해가 될까봐…."
"좋은 판단이네요. 돕겠다고 끼어들었으면 다 죽었을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호연을 뺀 나머지가 전부 죽었겠지.
카르쿠스의 시선이 다른 곳에 끌렸을 테니, 이호연의 입장에선 더 편했을 수도 있다.
"의, 의료팀! 여기에요! 긴급 환자 이송 준비해요!"
안젤라가 손을 흔들며 도착한 의료팀을 불렀다.
탁탁탁탁-
모래사장을 밟으며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이호연의 긴장이 탁하고 풀렸다.
[전투 감각]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극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분비된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서서히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전투 중에 무시하고 있던 몸의 고통이 한 번에 쏟아졌다.
"커흑… 아. 씨발…."
온몸의 마나 회로가 비틀어지고, 마치 눈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감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이호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잃으면 안되는데….'
카르쿠스의 사지를 찢고 묶어놓긴 했지만, 일반 헌터들이 건드렸다가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호연의 몸은 더이상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호연 마법사!"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요. 병원으로 옮기고 그 분에게 연락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의료진들을 눈에 담으며, 이호연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