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4화 > 악마 (2)
악마 카르쿠스.
놈은 지능이 낮기에 원작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한다.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외형은 게임으로 봐도 눈이 찌푸려질 정도였지만, 실제로 보니 더했다.
소금쟁이처럼 생긴 몸에는 얇고 긴 팔다리가 붙어있는데, 움직일 때마다 녹슨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저놈의 전투법은 지능이 낮은 만큼 간단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그리고 그 속도에서 나오는 힘.
- 악마…? 인간…? 크륵… 둘 다 맛있다….
눈 앞의 생명체를 분석하던 카르쿠스는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팔다리를 쭉 폈다.
이호연이 인간인 지 악마인 지는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끄끼이이이익-
카르쿠스의 팔에 있던 손가락이 사라지고, 마치 사마귀의 앞다리처럼 변했다.
이것이 강자를 사냥할 때 카르쿠스의 모습이었다.
카르쿠스는 악마였다.
악마는 지능이 낮다고 해서 전투력이 낮은 건 아니었다.
낮은 지능으로 생기는 문제를 힘으로 전부 부숴버렸기에, 지옥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끼기긱-
기분 나쁜 기계음이 해안가를 채운 그 순간.
카르쿠스의 몸이 이호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씹…!"
콰아아아앙!
눈으로 보고 반응할 수 없는 속도.
룬의 결계가 부서짐과 동시에 굉음이 귀를 때린다.
소리보다 빠른 공격은 룬의 결계를 가볍게 부숴버렸다.
탓-
마력을 이용해 몸을 뒤로 튕겨낸 이호연은 카르쿠스와 거리를 벌렸다.
놈은 첫 공격에서 살아남은 자신을 보며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악마는 검은 기둥이 없어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가?'
주변에 검은 기둥이 없는 건 이미 확인했다.
그런데도 카르쿠스는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아니야. 분명 지옥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어.'
이호연은 개안을 통해 놈이 흡수하는 마력을 주시했다.
놈은 가까운 곳에서 마력을 받고 있었다.
지금 이호연이 서 있는 곳은 해안가였다.
그리고, 바다에 덮인 불길한 어둠은 지옥의 문에서 나온 지옥의 마력이다.
평범한 괴수라면 모를까.
악마 정도의 생명체라면 전력을 내기 충분한 환경이다.
'전력의 루시퍼보다는… 확실히 약해.'
이호연은 방금 공격을 기준으로 놈의 힘을 분석했다.
상대가 지옥의 최상위 포식자인 악마라지만, 루시퍼는 마왕의 후계자였다.
그가 보였던 전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르쿠스가 루시퍼보다 만만한 상대라는 뜻은 아니었다.
루시퍼와 전투는 혼자가 아니었다.
남다은과 스칼렛, 아이린과 엘리스라는 든든한 전위가 있었고, 루시와 루미 그리고 임솔이 마법을 지원했다.
상처를 치료해 주는 백아영이 있었고, 전장을 조율하는 레베카와 문수린, 그리고 릴리아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는 상대방이 가진 살의.
루시퍼는 자신과 릴리아나를 생포하기 위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결국 방심을 틈타 중상을 입힐 수 있었고, 히로인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에 가짜 던전 마법진의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카르쿠스는 다르다.
- 인간… 악마… 강하면 맛있다….
침을 뚝뚝 흘리는 카르쿠스는 핏발이 선 눈으로 이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쿠스는 자신을 생포하려 하지 않는다.
포식자인 카르쿠스가 행하는 것은 사냥.
먹잇감이 살아있냐 죽어있냐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끄드드드드드드득!
콰앙-!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카르쿠스의 앞다리가 룬의 결계에 부딪혔다.
아까보다 두껍게 설치했는데도 결계가 부르르 떨렸다.
"무슨 힘이… 큽!"
이호연은 룬의 결계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와 동시에 마력을 주입해 놓은 아크가 빠르게 회전하며 마법진을 그려냈다.
'스파이럴.'
바람의 마력이 담긴 스파이럴은 빠르게 회전하며 카르쿠스의 목을 노렸다.
카르쿠스의 시야 바깥에서 만들어 낸 마법이었기에, 놈은 스파이럴이 목덜미에 닿기 직전에서야 공격을 인지했다.
- 크륵… 끄그극?
파사사사삭-
그다음 순간.
스파이럴은 무서운 기세로 해안가의 모래를 파냈다.
카르쿠스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고, 놈은 어느새 원래 서 있던 위치에서 해골을 쪽쪽 빨고 있었다.
"… 저거 진짜 어이없는 새끼네."
카르쿠스의 몸에는 찰과상 하나 없었고, 얇은 다리에서는 여전히 기괴한 소리가 났다.
솔직히,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카르쿠스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공격을 피해냈다.
전의가 꺾일 정도로 압도적인 속도 차이.
한 단계 진화한 개안으로도 카르쿠스의 움직임은 제대로 쫓을 수 없었다.
개안은 눈에 안력을 집중해 보이는 마력을 읽어내는 것.
카르쿠스에게도 마력은 있었지만, 놈의 전투방식은 마력에 근간한 것이 아니었다.
까드드드드드드득.
놈의 무릎이 굽혔다 펴질 때마다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말해서 '종'의 차이였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악마, 카르쿠스.
놈은 순수한 각력으로 물리법칙을 뛰어넘었다.
카르쿠스의 속도는 마력을 사용한 힘이 아니었기에, 개안으로 읽어낼 수 없다.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놈이다.
그에 반해 이호연은 인간.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춰도 자신은 인간이었다.
- 크륵. 강한 인간… 잡아먹을 수… 있다….
악마 카르쿠스는 이호연을 보면서 생각했다.
몇 번 마력을 맞대고 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눈 앞의 사냥감은 인간이다.
악마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인간이지만, 자신보다 느리다.
저 정도 속도로는 자신을 절대 잡을 수 없다.
이 사냥은, 성공이었다.
"… 미친 새끼. 누가 먹혀준대?"
자신은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두근. 두근.
카르쿠스의 강함을 인지할 때마다 [전투 감각]이 몸을 감싸고,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뛴다.
이호연은 이를 악 물고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사고를 가속하며 저 괴물을 죽일 방법을 생각했다.
정면 승부? 속도에서 밀린다. 마법을 발현하기도 전에 몸이 찢어질 거다.
페이크를 주면서 동시다발적인 공격? 놈은 마법이 목에 닿는 그 순간 도망쳐 버린다.
룬의 결계를 펼친 뒤 공간 이동? 이호연이 공간을 이동하는 것보다 놈이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게 더 빠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카르쿠스는 이호연이 생각을 이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파아앙-!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다가온 카르쿠스가 눈 앞에서 앞다리를 휘둘렀다.
카르쿠스의 날카로운 앞다리와 부딪힌 룬의 결계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박살 났다.
'가속.'
이호연은 룬의 결계가 부서지는 걸 인지하자마자 몸을 가속하고, 마력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섰다.
"… 하."
하지만 이번에는 운이 안 좋았다.
뚝. 뚝.
해안가의 모래에 피가 스며든다.
'가속'까지 사용했는데도 놈의 앞다리를 피할 수 없었다.
이호연은 너덜너덜 거리는 오른팔을 흘깃 살핀 뒤, 정면을 노려봤다.
카르쿠스의 팔에 잠깐 스쳤을 뿐인데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 크륵. 크르륵… 맛있다. 강한 인간…. 맛있다…!
카르쿠스는 싸우는 도중이라는 걸 잊은 듯이 앞다리를 핥고 있었다.
자신의 피를 게걸스럽게 핥아대는 카르쿠스를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지능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본능만 남아있는 벌레 새끼에게 죽는 건 인간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카르쿠스를 상대하는 건 정공법 밖에 없어.'
이호연은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강제로 잠재웠다.
그 대신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상대는 잔꾀를 부린다고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카르쿠스를 잡으려면, 결국 놈의 움직임을 읽어야 한다.
끼긱. 끼기기긱…
사냥꾼은 다친 사냥감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피를 맛본 카르쿠스가 더욱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날카로운 앞다리가 룬의 결계를 강하게 후려쳤다.
이호연의 몸에 그 힘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높은 치유력 덕분에 아물기 시작한 오른팔에서 다시 피가 터져 나왔다.
'… 더 집중해야해.'
이호연은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 끝까지 카르쿠스를 노려봤다.
놈은 지능이 낮았고, 패턴이 단순했다.
빠른 속도로 돌진해서 팔로 후려친다.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인지할 수 없다는 것.
끼기기기이이익-
카르쿠스가 다시 무릎을 굽혔다.
놈은 돌진하면서 온몸의 힘을 팔로 집중한다.
카아아앙-!
소리보다 빠르게 전달되는 충격.
이번에는 룬의 결계가 버티지 못했다.
"크윽…!"
이번에도 다급히 물러났지만, 왼팔이 카르쿠스의 다리에 긁혔다.
다행히 왼 팔은 가볍게 긁혔을 뿐 오른팔만큼 심하진 않았다.
- 인간… 맛있다…
끼릭. 끼기이이익.
카르쿠스가 관절을 비트는 소리는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이호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
이호연은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개안으로는 놈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없다.
이호연은 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개안은 마력만을 담아낼 뿐,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지 못한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건 마력이 아니라 카르쿠스의 움직임이었다.
'카르쿠스를 보는 게 아니야. 이 공간 전체를 바라보는거야.'
검사들은 어깨의 움직임으로 상대방이 노릴 곳을 예측한다.
상대의 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서 움직여봤자 이미 늦기 때문이다.
서로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봐야 할 것이 늘어난다.
고수의 영역에선 걸음걸이부터 숨소리까지 상대방에게 정보를 주는 행위가 된다.
'마법사도 똑같아. 모든 것을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어.'
주르륵-
금빛으로 빛나는 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호연은 마력을 집중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 고통은 높은 치유력이 해결해 줄 테니까.
결국 전투의 본질은 똑같다.
상대방의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 크륵. 크르륵…? 인간….
이호연의 눈이 밝은 금빛으로 빛났다.
상대가 강할수록 [전투 감각]은 이호연의 한계를 끌어냈다.
'마법사는 더욱 빨라야 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고 맞춰갈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버려.'
이호연은 마법사 중에서도 특이한 편이었다.
상대가 근접해 오더라도 반격할 수 있는 마법을 많이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쿠스는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과 달랐다.
마법사인 이호연이 '가속'을 사용해봤자 카르쿠스만큼 빨라질 수 없었고, 직접 때려박아야 효과를 보는 '스파이럴'은 놈에게 닿지 않았다.
'처음부터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아니, 그 이상이 필요해. 상대방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해야해.'
[전투 감각]이 몸을 가득 채운다.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에 힘을 부여하고, 핏줄이 터진 눈동자를 억지로 부릅뜨게 했다.
그만큼 전투가 끝난 뒤에 후유증으로 찾아오겠지만, 이호연은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감각을 확장한다.
다른 정보는 모두 차단하고, 모든 신경을 카르쿠스에게 집중한다.
이 공간에 깔려있는 마나의 움직임으로 상대방이 다음에 할 행동을 예측한다.
- 크르르륵…? 인간… 피….
카르쿠스는 이호연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이해한 것은 사냥감이 갑자기 눈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는 것뿐.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면, 사냥감이 피를 흘린다는 건 사냥에 거의 성공했다는 뜻이다.
- 맛있다…. 강한 인간…. 크륵…
끼기기기기긱-
카르쿠스는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사냥감을 향해 돌진했다.
그 광경이 마치 슬로우 모션 처럼 이호연의 시야에 펼쳐졌다.
카르쿠스는 무릎을 굽혔다 피며 자신에게 쇄도했다.
단순히 무릎을 굽혔다 피는 것만으로 소리보다 빠르게 돌진한다.
그것이 카르쿠스였다.
눈동자를 굴려 사냥감을 확인한 카르쿠스는 강한 각력에서 나온 속도를 그대로 앞다리에 전달한다.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돋아있는 앞다리는 사냥감의 몸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나약한 인간의 몸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카르쿠스는 비명을 지를 시간도 주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다가온 앞다리가 이호연의 가슴팍을 베어냈다.
가시 하나하나가 사냥감의 살결을 뜯어내고, 카르쿠스가 파먹기 좋은 형태로 만들었다.
제대로 된 공격 한 방을 허락했을 뿐인데 이호연의 정신이 아득해진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노렸지만, 카르쿠스는 사냥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냥감의 목을 떨어뜨리고, 아직 싱싱한 사냥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 하지만, 이호연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이호연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분명히 가슴이 뜯겨나가는 걸 봤는데 자신의 가슴은 아직도 멀쩡했다.
정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카르쿠스는 이제야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이호연은 이 현상을 곧바로 이해했다.
방금 본 것은 현실이 아니다.
이 공간의 정보를 해석한 자신의 눈이 그려낸 미래의 예측이었다.
'스파이럴.'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이호연은 지체없이 가슴 앞에 바람의 회전을 만들어 냈다.
카르쿠스가 베어냈던 가슴팍과 조금 떨어진 곳에 나선으로 회전하는 마력구가 생겨난다.
끼기기기기긱-
카르쿠스가 뛰어든 찰나의 순간.
룬의 결계마저도 포기하고 '스파이럴'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예측하지 않으면 자살에 가까운 도박수.
하지만 이호연은 확신했다.
자신의 예측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아니, 이 현상은 이미 예측의 영역을 벗어났다.
방금 자신이 본 것은 예측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신의 경지에 오른 마나 감응과 마력 제어 능력.
전투 상황에서 발휘되는 막대한 집중력.
[전투 감각]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센스.
이호연의 파괴적인 재능은 정확도 높은 예측을 '예지'로 격상시켰다.
[미래 예지]
콰지지지직-
스파이럴에 중심으로 파고든 카르쿠스의 다리가, 소금쟁이의 다리처럼 뜯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