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2화 > 서큐버스 퀸
'… 릴리아나? 아니. 조금 달라.'
릴리아나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여자는 아주 잠깐 화면에 스쳐 지나갔다.
일반인이라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찰나였지만, 이호연은 기억해 낼 수 있다.
'얼굴은 비슷했지만, 분명 다른 점이 많았어.'
어깨 위까지 올라와 있던 긴 꼬리와 머리 위로 솟아있는 우람한 뿔.
완전히 서큐버스의 생김새였다.
그러나 그녀의 뿔과 꼬리는 릴리아나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저게 지옥의 문 주변에서 발견된 새로운 괴수들인가요? 무섭게 생겼네요."
"… 응. 하지만 지옥의 마력을 익히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저 놈들의 상대법도 연구해 봐야겠지."
이호연은 스칼릿의 말에 대답하며 생각했다.
사실 저놈들을 상대하는 방법도 공략집을 만들어놨다.
괴수들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상대법을 공개하는 건 너무 의심당할 것 같아서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다.
"머야머야? 지옥의 괴수들? 나도 볼랭."
"릴리아나. 쟤들 보면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음… 어? 예전에 저 새의 알로 프라이를 해 먹은 기억은 있는데."
"그래.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릴리아나는 언제 바닥에 누워있었냐는 듯 초콜릿을 먹으며 TV를 바라봤다.
다행히 릴리아나와 비슷한 서큐버스는 못 본 것 같았다.
"야. 허벅지 아프다. 내려와."
"으악!"
릴리아나를 소파에 눕힌 이호연은 부엌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손가락으로 스칼렛의 손을 툭 건드렸다.
"후우."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휘감는다.
릴리아나와 닮은 서큐버스.
사실 곧바로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다.
릴리아나의 어머니.
'서큐버스 퀸.'
어머니라기엔 너무 젊은가 싶다가도, 서큐버스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게 없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엔 가능성이 높았다.
꿀꺽꿀꺽.
이호연은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시원한 물을 한 잔 비우고 나니 조금은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 일을 굳이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생명체가 있으니까.
"스칼렛."
"예. 호연 님."
스칼렛은 자신의 뒤에 선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리스 길드에 연락해 봐. 케이론하고 알베도 연결 좀 해줘."
*
태평양 한가운데에 나타난 지옥의 문.
인간은 아직도 그 내부를 제대로 탐사하지 못했다.
몇천 몇만 대의 드론 중 운좋게 살아남은 드론이 내부의 영상을 바깥으로 전달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지옥의 문에서 나온 어둠은 이미 태평양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지옥의 문과 가까운 구역.
지옥의 괴수들이 아닌 마인들이 모인 이곳에, 한 남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무지해야 행복한 법… 차라리 포기해 버렸다면 편했을 텐데요."
마에스트로는 피 묻은 성서를 넘기며 읊조렸다.
주변의 마인들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당장 목숨을 끊으라고 해도 주저 없이 자결할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마인들이다.
인간 세상에 뿌려놓은 세뇌가 대부분 사라졌으니, 마인들에게 세뇌를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흐음."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신기했다.
전 세계에 뿌려놓은 세뇌로 마왕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검은 기둥을 유지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기둥이 부서지고 있었다.
대척자 이호연의 행동으로 마왕님이 온전하게 강림할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가 뛰어나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마에스트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일에도 끝이 존재한다는 것.
"마지막에 남는 것이 나라면."
내가 정의겠지.
누가 정의일지는 운명이 정해줄 거다.
지옥의 문에서 나오는 마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마에스트로는 고개를 숙여 기도를 이어갔다.
*
이호연은 홀로그램 모니터를 띄운 채 방에 앉았다.
케이론과 알베도와 화상 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스칼렛을 통해 아이리스 길드에 연락하자마자 아이린에게 전화가 왔다.
사실 아이린한테 한 소리 듣기 싫어서 아이리스 길드에 직통으로 연락한 건데, 어떻게 바로 듣고 연락한 모양이다.
다행히 새로운 괴수의 상대법을 아이리스 길드를 통해 발표한다고 하니까 금방 연결을 도와줬다.
"이 사람은 통화만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까탈스러운 거야."
혹시 개인적인 연락 대신 공적인 연락만 해서 그런가?
엘리스랑 좋은 일 하자는 약속으로는 부족했나보다.
나중에 아이린도 챙겨줘야겠네.
- 치지지지지직. 아아. 오랜만이군. 인간.
- 아, 안녕하십니까.
그때, 홀로그램 모니터가 밝아지며 두 괴물의 얼굴이 나타났다.
잘 먹고 잘살아서 그런지 두 놈의 얼굴이 참 밝아 보였다.
"오랜만이다. 케이론, 알베도.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했어."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었으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조작해 자신이 봤던 뉴스를 상대 화면으로 전송했다.
릴리아나와 닮은 여자가 뉴스에 나온 장면을 캡처한 것이었다.
"내가 지금 보낸 사진 확인해 볼래? 이 여자가 누군지 알아?"
서큐버스 퀸.
원작에 나오지 않은 존재는 이호연도 알 방도가 없다.
하지만 지옥에서 자란 그들에겐 익숙한 존재겠지.
사진을 확인한 케이론과 알베도는 눈을 크게 떴다.
특히 알베도의 눈동자는 호랑이를 만난 토끼처럼 파르르 떨렸다.
저 반응만 봐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베도. 이 사람이 서큐버스 퀸이 맞아?"
- …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만 봐도 저 미친년의 기세가 느껴집니다. 저, 저 긴 꼬리와 거대한 뿔이. 으, 으음….
- Killer Queen의 전성기와 똑같은 얼굴. 긴 꼬리와 큰 뿔은 서큐버스로서 그녀의 권위를 상징하지. 확실하군. 지옥 최고의 창부 Death's Empress다.
"뭐?"
- Death's Empress. 죽음의 황후라는 말이다.
- …서큐버스 퀸의 이름입니다.
이호연의 생각이 맞았다.
릴리아나와 닮은 서큐버스는 서큐버스 퀸이었다.
그녀가 지구에 나타났다는 건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케이론, 알베도. 그녀가 지구에 나타났다는 건 마왕도 지구에 나타날 거라는 얘기야? 서큐버스 퀸은 마왕의 정부라고 했잖아."
- 확실히… 서큐버스 퀸이 홀로 몸을 드러내는 건 굉장히 이질적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지옥이 아니다 보니 확신할 순 없습니다.
- 아니, 마왕이 올 가능성은 굉장히 높다. Strange Nightmare. 인큐버스로서 성욕을 거세당한 너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나의 몸에 지옥의 마력이 돌아오고 있다. 루시퍼보다 더욱 강한 지옥의 마력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겠지.
"… 야. 니가 더 강해지면 안 돼. 혹시 탈출할 생각은 아니지?"
케이론이 강해진다고 해서 제압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번처럼 도망 다니기라도 하면 정말 귀찮아질 거다.
- 걱정하지 마라.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용병의 삶도 힘들었지만, 지옥의 삶은 더욱 지긋지긋하다. 보아라. 저놈들은 마왕의 명령을 기다리며 목줄 잡힌 개처럼 바닥에 누워있어야 하지.
케이론은 화면에 비추는 마수들을 바라봤다.
마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그들은 본능을 억제당하고 있었다.
마수는 본래 서로를 사냥하고 죽이는 존재.
상대를 죽이고 강해지며 지옥의 윗 계층으로 올라가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 본능을 거세당한 채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옥에서 태어난 자로서 버티기 힘든 일이었다.
"마왕의 명령…. 지옥의 생명체라면 거절할 수 없다고 했었지?"
- 정확히는 마왕성의 마력이다. 마왕이 된 후 마왕성의 마력을 몸에 받아들인 순간. 지옥의 생명체라면 저항할 수 없는 강한 위엄이 생겨난다. 마족과 마수의 본능을 유일하게 억제할 수 있는 힘이지.
케이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왕은 지옥의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괴수들은 전부 마왕의 명령에 따라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거다.
즉, 저 괴수들이 공격을 시작한다면 마왕이 나타났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 잠시만. 릴리아나한테 소문이 하나 있었잖아.'
이호연은 알베도를 바라봤다.
그는 성욕을 거세당한 탓인지, 케이론처럼 마력이 돌아오는 것 같진 않았다.
"알베도. 저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해? 릴리아나에게 있는 힘 말이야."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 지… 아, 칼리오페에 대한 수상한 소문 말이군요.
"그래. 그거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봐."
- 자세히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지옥의 사교계에 잠깐 돌았던 가십거리니까요. '마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지옥의 질서를 위해선 이레귤러를 빠르게 제거해야 한다.' 이런 소문이었습니다.
- Killer Queen은 확실히 돌연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서큐버스 답지 않게 강했고, 매혹의 힘을 쓰지 않고도 지옥에서 세력을 만들어낸 서큐버스는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이호연은 알베도와 케이론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저걸 처음 들었을 때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릴리아나의 금제에 대한 정보가 많은 지금은 조금 다르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고, 그것이 릴리아나라고 가정해 보자.
릴리아나에겐 금제가 걸려있다.
그것은 릴리아나의 어머니인 서큐버스 퀸이 건 금제다.
'만약 릴리아나에게 마왕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마왕이 릴리아나를 내버려 뒀을까?'
마왕은 지옥의 신이나 마찬가지.
신의 입장에서, 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를 굳이 내버려 두진 않았을거다.
'그럼 서큐버스 퀸이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금제를 걸었다는 건가? 사교계에 퍼진 소문이 마왕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릴리아나의 목숨을 지키려고?'
이호연은 미간을 주무르며 침음을 내뱉었다.
어찌저찌 가닥이 잡히는 것 같기도 한데, 결국 가설에 불과헀다.
서큐버스 퀸을 붙잡고 물어보지 않는 이상 진실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후우. 그래.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더 아는 건 없는 거지?"
- 내가 아는 건 이미 다 전해줬다. 친우여.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어. 나중에 또 연락할 테니까 수고해라."
틱-
이호연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연결을 끊었다.
릴리아나에 대한 일은 아직 의문이 많지만, 처음 목적이었던 서큐버스 퀸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 이제 진짜 마왕이구나."
마왕.
이 세계의 신.
처음 빙의했을 때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이 드디어 눈앞까지 다가온 기분이다.
"더욱 더 강해져야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 한 걸음을 망칠 순 없다.
이호연은 굳은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