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화 > 기자회견 (4)
이호연은 아이린 엘리스 자매와 잡담을 나누다가 컨벤션 센터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아이리스 길드를 부려 먹은 일은 어떻게든 넘겼다.
"그래. 내가 아이리스 길드에 해준 게 얼만데. 그만큼 부려 먹는 거잖아."
아이리스 길드가 세계 최고의 정보 길드가 아닌 세계 최고의 길드가 된 데에는 이호연의 공이 꽤 컸다.
엘리스와 아이린 자매를 화해시켜 후계자 구도를 깔끔하게 정리했고, 아이리스 길드의 후계자 엘리스의 장애를 고치고 재능을 개화시켰다.
판데믹의 테러에 대한 정보를 꾸준하게 넘겨 원래는 막지 못했을 테러도 많이 방지했다.
그 외에도 돈이 될 만한 정보나 이득이 될 만한 걸 엄청나게 나눴으니, 이 정도면 명예 임원이라도 시켜줘야 한다.
'그리고 엘리스랑 아이린이 내 애인인데 좀 부려 먹으면 어때.'
방금도 아이린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온 길이었으니,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다.
이호연은 아이린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
"…?"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마법사 학회의 아서 학회장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룬의 결계를 뚫고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회장님? 제가 나중에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또 만나게 되네요."
"흥. 마도구를 양산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자마자 연락도 없던 놈이 말은 잘하는구나. 이거나 확인해봐라."
탁-
이호연은 아서가 던지는 마도구를 잡아챘다.
스마트워치와 비슷하게 생긴 마도구는 꽤 멋있는 외형이었다.
────[ 지옥의 마력 주입기 ]────
▶ 상등급
▶ 무한의 엔트로피에 담긴 마력을 흡수한 마도구.
▶ 무한의 엔트로피에서 흡수한 지옥의 마력을 사용자의 몸에 일정 주기로 주입합니다.
────────────
"오… 괜찮게 나왔네요. 역시 협회장님입니다."
"당장 오늘부터 판매할 예정이다. 네 말대로 마도구를 팔아서 얻는 이득은 최소화할 생각이야."
"제가 뛰어난 연구와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아, 깔끔하게 원가나 제작 과정도 전부 공개하시죠? 돈 벌 생각도 없는데 장사한다고 욕먹으면 억울하잖아요."
"… 그래. 그래야지."
아서 학회장은 마도구를 이리저리 돌리며 확인하는 이호연을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지옥의 마력 주입기]에 대한 권리는 이호연에게 있다.
양산하고 유통하는 건 마법사 협회지만, 마도구를 설계한 건 이호연이었으니까.
지옥의 괴수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이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삶에 파고들었고 마법사 협회에서 만든 [지옥의 마력 주입기]가 없다면 그들과 싸울 수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욕심이 생길 법도 한데, 이호연은 마도구 양산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필요 없다고 했다.
오히려 그 돈으로 더 많이 생산해서 전 세계에 공급하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늘 기자회견은 정말 인상 깊었네. 내 생각보다 자네가 아는 정보가 많더군."
"아이리스 길드와 인연이 있어서요."
"흐음…. 난 자네를 믿고 있네. 이호연 마법사. 혹여나 이상한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네. 솔이를 봐서라도 말이야."
평생 마법사 협회 내부에서 정치싸움을 하던 아서에게 이호연의 행동은 이질적이었다.
건실한 청년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괜히 불안감이 들었다.
특히 임솔과 깊은 관계인 남자다 보니 조금 더 걱정이 되곤 한다.
아서에게 임솔은 피가 이어지지 않은 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서의 말을 들은 이호연은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학회장님. 제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에요. 이 세상을 구하는 거요. 학회장님도 협조해 주실 거죠?"
"… 걱정말게. 이미 한배를 탔는데 이제와서 발을 뺄 수는 없으니까."
"누가 보면 범죄라도 저지르는 줄 알겠네. 마도구 양산 잘 부탁드립니다. 학회장님. 일이 마무리되면 솔이랑 한 번 찾아갈게요."
이호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던 아서는 입맛을 다시고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구하든, 중요한 건 서로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건실한 청년과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솔이가 이상한 놈에게 잡히진 않았을 테니… 쯧. 늙어서 그런 건 지 쓸데없는 고민이 많아졌군."
임솔은 어릴 때부터 행동이 똑 부러졌다.
그녀가 선택한 남자였으니 자신도 최대한 밀어줘야겠지.
그는 걸음을 옮기며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지금부터 전 세계에 물량 풀어. 그리고 제작 과정이나 비용도 정리해서 언론에 뿌려. 그래. 천재 마법사 이호연 이름 넣는 거 잊지 말고."
*
이틀 뒤.
이호연은 거실 소파에 누운 채 뉴스를 확인했다.
- 커, 커으윽. 카, 아아악….
이틀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유명 인사가 TV에 나와서 세뇌어를 말하고 검은 안개를 내뿜는 게 일상이었다.
아이리스 길드가 조사한 명단이 전부 맞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맞았으니 아이리스 길드의 능력에 다시 감탄하는 날이었다.
- 충격적인 속보입니다. 중국의 국가주석이….
"그래. 저 사람은 관상부터 쎄했어. 쯔쯔."
물론 세뇌가 걸린 정치인이 욕을 먹는 과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도 곧 적응하겠지.
"이래서 무력시위가 최고라니까."
무력시위 덕분에 자신의 기자회견이 각 국의 헤드라인에 걸렸다.
기자 회견장에서 실시간으로 세뇌에 걸린 사람을 잡아냈으니, 이호연의 말에 굉장한 무게감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있어하던 고위직들이 공개적으로 검은 마력을 내뿜고 쓰러지는 게 생중계될 때마다 이호연의 말에 대한 신뢰도는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무죄추정의 원칙이고 뭐고, '안 하면 나쁜 놈'을 만들어 버린 거다.
"역시 대단하네. 애기 아빠. 우리 애들도 그렇게 똑똑하고 강단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 밤에 꼭 노력해 볼게요. 후우."
이호연은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레베카가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계속 누워있으니까, 몸에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기분이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정말? 기대하고 있을게. 아, 내 허벅지에 누울래?"
그때, 레베카가 원피스를 돌돌 감아올려 허벅지를 드러냈다.
이호연은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잇, 간지러워."
"크흠."
부드러운 촉감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비빌 뻔했다.
헛기침한 이호연은 고개를 돌려 TV로 시선을 고정했다.
- 보시다시피 외눈박이 거인의 약점은 정수리에 있는….
지옥의 마력을 익힌 S급 헌터들이 피해 없이 괴수를 토벌하는 영상이었다.
공략법에 익숙해진 헌터들은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었다.
이호연의 의도대로였다.
"근데 이렇게까지 했는데 판데믹에서 반응이 없네?"
"그러게요. 사실 꽤나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지옥의 마력에 익숙해지며 지옥의 문을 감시하는 장비도 발전했다.
하지만 지옥의 문에서도 큰 변화를 감지하진 못했다.
새로운 괴수가 습격하는 것도 아니고, 마인들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뭐 하는지 모르겠네.
- 전문가들은 지옥의 괴수의 시체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 위 어둠의 새로운 생태계에도 주목을….
지옥의 문에서 튀어나오는 지옥의 괴수들은 더 이상 목숨을 위협하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곧 그렇게 될 거다.
이호연이 만들어준 공략집과 지옥의 마력에 익숙해지는 순간, 지옥의 괴수도 게이트나 던전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이제는 지옥의 괴수들을 죽이고 어둠을 탐험했을 때 얻을 부와 명예가 눈에 들어오는 거다.
지옥의 문에서 얻을 수 있는 보물은 왠만한 던전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이고, 괴수들의 시체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소재가 된다.
참으로 인간다운 방식이었다.
잡다한 생각을 하며 레베카의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맞다. 애기 아빠. 아이린이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걸 도와달라던데 가도 돼?"
"굳이 저한테 허락 맡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이런 중요한 일은 남편에게 보고해야지."
"흐흐."
저런 말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호연은 레베카의 허벅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와 입을 맞췄다.
"애, 애기 아빠. 여긴 거실인데…."
잠깐의 입맞춤이었지만, 레베카의 귀가 빨개지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레베카 씨. 릴리아나랑 스칼렛도 데려갈 거죠?"
"… 응. 릴리아나는 방송을 못 해서 우울해하니까. 해외 구경이라도 시켜주려고."
검은 기둥을 부수러 다니다 보니 너무 유명해진 릴리아나는 그날로 삶의 의욕을 잃었다.
방송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소 행동부터 엄청나게 달라졌다.
"마침 저기 있네요."
데굴데굴-
릴리아나는 펑퍼짐한 츄리닝을 입고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엔 갑자기 치킨을 끊겠다고 난리를 치던데, 가끔 저런 이상행동을 할 때가 있다.
"릴리아나 님? 왜 그러십니까?"
"리, 릴리아나 씨. 바닥에서 굴러다니면 더럽다니까요. 다희가 보고 배우면 어떡해요."
"으어… 아으…."
때마침 주방에서 나오던 스칼렛과 남다은이 깜짝 놀라며 릴리아나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바닥에 붙은 껌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릴리아나.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같이 쉬자."
"흑… 이제 움직일 힘도 없어."
"방송이 그렇게 중요하면 그냥 하면 되잖아."
"그치만 시청자 말고 이상한 놈들 밖에 안 오는 걸…."
"아. 그렇긴 하겠네."
이호연은 바닥을 굴러온 릴리아나에게 클린을 써주고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릴리아나는 곧바로 힘을 쭉 뺀 채 이호연의 가슴에 기댔다.
루시루미 쌍둥이들도 기자들의 연락 때문에 귀찮다고 했으니, 릴리아나도 비슷한 상황이겠지.
이미 얼굴이 알려진 이상 방송 같은 걸 할 순 없을 거다.
- 검은 기둥을 부수는 방법은 임솔 마법사의 특별 강연이 곧이어….
"… 저건 임솔 마법사님이 아니라 애기 아빠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가면 기자들만 몰릴걸요."
자기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기자회견 이후로 유명해져도 너무 유명해졌다.
특히 아서 협회장님이 마도구에 대한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내 이름을 언급해 줘서 헌터들에게 이미지가 좋았다.
어제도 현장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으니까.
덕분에 오늘은 쉬고 있는 거다.
- 소, 속보입니다. 지옥의 문에서 나오는 괴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새로운 종류의 괴수들이 굉장히 많이….
"응?"
멍하니 TV를 보던 이호연은 눈가를 좁혔다.
무인 드론에 찍혀있는 괴수들.
그 사이에, 릴리아나와 비슷한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