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0화 > 기자회견 (3)
"협회장님. 제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해주시겠습니까?"
"…."
한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은 눈앞의 청년을 보며 생각했다.
천재 마법사 이호연.
그에 대한 평가는 듣기 싫어도 꾸준히 들려왔다.
마법이라는 게 원래 재능만으로 정해지는 분야라지만 이호연은 그 정도가 특히나 심했다.
- 셀 수 없이 많은 테러를 진압했다.
- 어린 나이에 마법사 학회에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았다.
- 전투력이 현역 헌터를 뛰어넘었다.
등등….
심지어 웬만한 S급 헌터들과 맞먹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협회장은 현역 헌터가 아니라 이호연을 마주할 기회가 많이 없었으니,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고 해도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이호연의 마력을 피부로 체감한 지금.
협회장은 그것마저도 과소평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천재 마법사'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괴물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가 덤벼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컨벤션 센터를 채운 이호연의 마력은 무력시위, 혹은 도발이었다.
이 장소엔 이호연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들도 많이 모여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고위 인사들도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파급력이 강했다.
이 정도로 크게 일을 벌였으니, 이호연의 말에는 무게감이 실렸다.
'이 아저씨는 왜 말을 안 해?'
하지만 협회장의 생각과 다르게 이호연은 누군가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각국의 인사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급은 나뉜다.
프랑스의 아이리스 길드장.
그리고 미국의 안젤라 길드장.
싸울 수 있는 사람 중엔 이 두 명이 가장 발언권이 강했다.
그런데 그 두 명이 자신과 한 편이었으니, 무력시위를 펼쳐도 자신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들과 '진심'을 알아준 사람들에겐 마력을 전혀 보내지 않았으니 더 편하기도 했다.
"협회장님. '투 아르마 마에스트로.'입니다."
"…."
한국 협회의 협회장은 이호연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찾아온 것인 지.
대체 저 문장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떳떳했다.
가끔 뇌물을 받거나 누군가의 뒷조사를 하긴 했지만, 테러 집단 판데믹과 손을 잡은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특히 이호연을 굳이 적대하거나 언론을 통제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 투 아르마 마에스트로. 이걸로 됐나?"
협회장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세뇌어를 입에 담았다.
주변 인사들까지 긴장하며 기다렸지만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협회장은 그제서야 안심하며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협회장의 입에서 검은 마력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호연 마법사.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가… 크, 크읍. 컥…?!"
"물러서세요."
이호연은 굳이 마에스트로의 마력을 갈무리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법을 사용했다간 괜히 다른 말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꺼억… 그, 그읍…. 커, 커거걱…."
협회장은 바닥에 엎드린 채 몸 안에 있는 것들을 게워 냈고, 이호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협회장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마력을 보며 주변 인사들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협회장 정도 되니까 세뇌가 강했나 보네.'
강한 세뇌라도 이호연이 직접 세뇌를 풀었다면 깔끔하게 마력을 흡수했겠지만, 세뇌어를 통해 세뇌를 풀게 되면 저런 흉한 꼴이 된다.
세뇌가 강하다면 뒤따르는 후유증도 분명 존재하겠지.
"커으윽…."
모두가 이호연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이호연은 협회장이 정신 차리길 기다렸다.
1분 정도가 지나자 협회장은 기침하며 고개를 들었다.
"크흡, 후우…. 응? 뭐야. 내가 왜 여기에… 앗, 기자회견! 기자회견을…. 어, 으응? 이건 뭐야. 여긴 어디고?"
협회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전 세계의 인사들과 기자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정신이 드십니까. 협회장님."
"으음? 이, 이호연 마법사.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협회장님에게 걸려있던 세뇌를 풀었습니다. 기억이 흐릿하시겠지만, 천천히 떠올려 보시죠."
"아, 아…?"
이호연의 말에 협회장은 눈을 찡그리며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세뇌가 워낙 강했던 탓에 곧바로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호연은 옆에 서 있는 보좌관에게 협회장을 맡긴 뒤 몸을 돌려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이것이 판데믹의 세뇌입니다. 하지만 협회장님 한 분으로는 당연히 못 믿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호연도 협회장 한 명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23명인가?'
마천궁 내부에서 느껴지는 더러운 마력은 확실히 잡아낼 수 있다.
마에스트로의 세뇌가 고위직에게만 걸려있는 걸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많이 왔다.
아이리스 길드와 마법사 협회, 미국 헌터 협회 등이 직접 얼굴을 들이밀어 준 덕분이다.
이호연은 협회장에게 했던 것처럼 한 명 한 명 천천히 세뇌를 풀어나갔다.
각국의 인사들이 똑같이 검은 마력을 내뿜는 걸 보며, 이호연을 의심하거나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커, 커읍… 흐읏?! 여, 여기는…?"
마지막 한 명의 세뇌까지 풀어낸 이호연은 다시 주변을 바라봤다.
고위 인사들과 기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호연을 못 믿는 게 아닌,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랐다고 보는 게 맞겠지.
'이 정도면 된 것 같네.'
이호연은 주변을 장악한 마력을 회수하고 단장으로 올라갔다.
모두가 자신이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기자회견과 동시에 아이리스 길드에서 각국 언론에 세뇌 위험자들의 명단을 발표할 겁니다. 그들을 공식 선상에 세워서 세뇌어를 말하는 국가에게만 제 연구 결과를 공유하겠습니다."
이호연이 검은 기둥을 부술 때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고위직들.
이번 기자회견을 위해 아이리스 길드에게 그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인류의 존속과 미래를 위해 제 연구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내놓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위험인자를 감싸는 나라에겐 절대 협조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목숨을 내놓으란 말이 아닙니다. 공식 선상에 나와서 한 문장만 말하면 됩니다. 겨우 그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저도 그 나라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 이상입니다."
이호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기자 회견을 바라보던 인사들은 급하게 각국에 연락을 보냈고, 기자들은 언론에 속보를 전달했다.
그 중 일부는 질의응답을 요청했지만 이호연은 이미 단상 아래로 내려간 뒤였다.
[아, 아. 이것으로 기자회견을 마치도록…. ]
*
기자회견이 끝난 뒤.
이호연은 컨벤션 센터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들어오자, 소파에 앉아있던 아이린이 물병 하나를 던졌다.
"고생했어. 여기, 물이라도 마셔."
"고마워요. 아이린 씨. 긴장돼 죽을 뻔했네. 후우…."
이호연은 긴장한 어깨를 풀고 냉수를 들이키며 소파에 몸을 맡겼다.
[뚜렷한 정신력]을 의식하며 특전을 없애자마자 곧바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소시민의 삶은 쉽지 않다. 이따가 아영 씨가 준 약이라도 먹어야겠네.
"5분 전까지만 해도 눈에 독기가 가득했는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지?"
"정신력으로 견딘 거예요."
"하."
이호연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이린은 다리를 꼬며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 '세상아 덤벼라. 내가 이호연이다.'라며 자신 있어 하던 남자가 저러는 걸 보니 또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게 뻔했다.
"아이린 씨. 고마워요. 아이리스 길드 덕분에 기자회견이 훨씬 편해졌어요."
"… 당연하지. 우리가 엄청나게 고생했으니까."
아이린은 이호연의 얄미운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이번 기자화견을 준비하느라 아이리스 길드가 개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근데 너 말이야. 아이리스 길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부르는 도우미가 아니야. 기자 회견을 발표하자마자 '저를 이유 없이 비판했던 전 세계의 고위인사를 조사해 주세요.'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잠시만, 아이린 씨. 아, 아야."
쿡. 쿡.
아이린은 검지 손가락을 세워 이호연의 가슴을 찔렀다.
주먹으로 때릴 순 없으니, 분풀이로 이런 거라도 해야 했다.
"언니, 너무 화내지 마. 하지만 언니 말에는 나도 동의해."
옆에서 스마트 워치로 바깥 상황을 보던 엘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 회견이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기에 망정이지, 아이린이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급한 일이라면 하루 전에 말해도 괜찮다.
이호연은 아이리스 길드의 VIP였고, 웬만한 부탁은 아이리스 길드의 정보망 내에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유 없이 이호연을 비판했던 전 세계의 고위인사' 같은 주제는 넓어도 너무 넓었다.
조사할 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
"될 거 같아서 부탁한 거였어요. 그리고 엘리스. 오늘까지 조사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명단은 며칠 뒤에 발표해도 늦지 않을 거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빛은 제발 오늘 안에 해달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 뭐. 오늘 안에 되면 더 좋으니까."
이호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엘리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대기실에 설치되어 있는 홀로그램 모니터를 바라봤다.
- 아이리스 길드에서 발표한 명단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떠들썩대고 있지만, 저런 말 하나 못하는 정치인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엄청나게 난리네요. 아이린 씨."
"말 돌리지 말고. 지금까지는 무료로 도와줬지만, 오늘 일은 외상에 달아놓을 테니까 알아서 해."
이호연은 슬쩍 눈을 돌려 아이린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안부도 묻지않고 갑작스럽게 부탁한 게 섭섭했던 모양이다.
"아이린 씨. 조금만 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게 아니잖아요. 세상을 위한거에요. 이번 일만 해결하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요."
"… 뭐든지?"
"그럼요. 아이린 씨. 이건 세상을 위한 거에요."
"으, 으음…. 세상을 위해서."
아이린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다소곳이 앉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 꼴을 보고있던 엘리스는 설마 하며 한 마디를 던졌다.
"언니. 저런 말에 넘어가지 마."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엘리스. 음…. 그래도 이번 일로 아이리스 길드가 얻는 이득이 꽤 많아. 전 세계적으로 우리의 발언권이 더욱 강해지기도 했고… 로비로 받는 금액도 무시할 순 없으니 너무 화를 낼 필요는 없어 보여."
"… 언니?"
엘리스는 시선을 피하는 아이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분명 저 남자 때문이겠지.'
엘리스는 맞은 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이호연은 볼을 붉히는 아이린을 보며 야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니처럼 되지 않으려면 자신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 저 남자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
이호연이 부탁한 자료를 확인하며, 엘리스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