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4화 > 협상하는 법 (1)
폐공장 가에 있던 검은 기둥을 부순 뒤, 이호연은 숙소로 돌아왔다.
딱히 쓸만한 정보를 얻진 못했지만 수상한 장부 하나를 챙길 수 있었다.
"하아… 힘들어 뒤지겠네."
이호연은 커피를 쪼옥 빨면서 소파에 몸을 눕혔다.
시원한 커피가 들어오자 머리가 조금은 차가워졌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한숨 자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있었다.
하품을 하며 폐공장가에서 주워온 장부를 펼쳤다.
장부엔 어디선가 들어본 유명한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 미국 헌터 협회, 에커먼 회장.
- 안젤라 길드, 안젤라 길드장.
.
.
.
스륵- 스륵-
장부의 페이지를 넘기자 그들이 언제 마인과 접촉했는지.
판데믹에게 협력하며 받은 대가는 무엇인 지가 전부 쓰여있었다.
이 정도만 봐도 이 장부가 무슨 용도인 지 알 것 같았다.
"이게 마인들이 말했던 VIP들이구나?"
판데믹에 접촉해 이득을 본 유명 인사들.
이건 그들의 이름을 정리해놓은 장부였다.
"혹시나 해서 가본 건데, 이런 걸 주울 줄은 몰랐네."
이런 장부를 별거 아닌 마인들이 가지고 있던 게 이상하긴 했지만, 그들의 대화를 떠올리면 이해가 갔다.
그들은 간부가 놓고 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마 간부 중 한 명이 보관하던 장부겠지.
"이야. 이런 건 왜 써있어?"
장부의 뒤에는 VIP들의 범죄 이력들이 쓰여 있었다.
탈세부터 시작해서 눈이 찌푸려지는 범죄까지.
마치 자신의 입으로 술술 불기라도 한 듯, 자세한 사항이 정리되어 있었다.
VIP들은 세뇌에 걸려있을 거다.
그러니 배신했을 때를 대비한 약점은 아닐 테고, 아마 꼬리를 자를 때 쓰기 위한 거겠지.
"… 이 사람들 세뇌를 풀어놓으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현재 이호연의 평판은 완전히 바닥을 기고 있었다.
권력자들이 마에스트로의 세뇌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꼭 평판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들이 나중에 이호연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마침 할 일도 없었는데 잘됐네."
아서 협회장이 말하길 마도구의 양산은 며칠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원래 계획은 며칠간 마법을 연구하며 검은 기둥이나 부수러 다닐 생각이었다.
하지만 할 일이 생겼으니 다시 움직여야한다.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조작해 전화를 걸었다.
"네네. 바쁘실텐데 죄송해요. 협회장님."
이호연은 장부를 바라봤다.
이들을 전부 만날 생각은 없다.
중요한 사람들을 골라서,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제가 말하는 사람들하고 자리를 만들어주실 수 있나 해서요."
*
미국 헌터 협회의 회장실.
한쪽 벽면에서 비추는 햇빛이 객실을 환하게 비췄다.
회장실에 앉아있던 중년의 남자, 에커먼 회장은 시계를 훑어보며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는 뒤에 서 있던 비서를 향해 물었다.
"이호연 마법사는 올라오고 있는 건가?"
"예. 회장님. 방금 로비를 지났습니다."
"방문 목적은 아직도 불명인가? 흥. 아서 그놈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호연을 소개해준다고 하는 거지?"
"확실한 건 없습니다. 다만 적의가 있는 건 아닌 듯했습니다."
"알겠네. 혹시 모르니 대기하고 있도록."
"예."
스륵-
비서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회장실엔 에커먼 혼자만이 남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고민을 이어갔다.
"천재 마법사 이호연이라…."
에커먼은 지금 회장실로 올라오는 동양인 청년에 대해 생각했다.
이호연은 나이에 맞지 않게 정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남들을 위해 희생하고 나설 줄 알며, 압도적인 마법의 재능으로 마법사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특히 호감상인 외모 덕분에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최근 평판은 꽤 떨어진 모양인데… 그것과 관련해서 도움을 받을 생각인가?'
평판이 떨어진 원인이 뭐였지?
아, 그래. 검은 기둥.
검은….
"크읍…."
눈앞이 시커메지는 기분.
에커먼은 고개를 저어 두통을 털어냈다.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이었다.
의사에게 물어도 원인을 모르는 두통은 그가 고민할 때마다 찾아왔다.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생각났다.
이호연 마법사.
그는 정직한 성격이었으니, 쓸데없는 회유는 안 하는 편이 낫다.
오늘 만남은 일단 친분을 만들어놓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겠지.
에커먼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호연은 에커먼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한 에커먼은 응접용 테이블에 앉았고, 이호연도 그의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헌터 협회의 에커먼 회장이다. 만나서 반갑네."
"처음 뵙겠습니다. 마법사 이호연입니다."
이호연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60대 정도인 것 같지만 마력으로 중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
점잖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커먼 회장에게서는,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다.
'… 마에스트로의 세뇌인가.'
헌터 협회의 회장이라는 자리는 중요한 자리였다.
다른 마인보다도 더욱 강한 세뇌가 걸려있겠지.
그렇기에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서 협회장의 맥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아서 협회장의 말을 들었네. 나를 꼭 만나고 싶었다고?"
"예. 미국 헌터 협회와 협업을 위해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호연은 준비한 말을 꺼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당장이라도 에커먼의 세뇌를 풀어주고 싶지만, 주변에 감시가 너무 많았다.
지금 작업을 할 수도 있지만, 굉장히 귀찮아질거다.
"그 전에… 듣는 귀가 없었으면 좋겠네요."
"…."
"아서 협회장님의 소개로 온 제가 설마 회장님에게 위해를 가하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니 믿고 내보내 주십시오."
"… 알겠다."
에커먼 회장이 슬며시 손을 휘젓자, 주변의 기척이 전부 사라졌다.
사라지는 척한 게 아니라 정말로 사라진 것이다.
VIP가 이런 요청을 하는 건 한 두번이 아니었기에 그들도 익숙하게 움직였다.
기척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이호연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룬의 결계를 펼쳤다.
결계를 펼치자 상대의 마력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에커먼은 자신을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야기를 해볼까. 이호연 마법사.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길래 결계까지 치고… 크, 크흡…?!"
"결계는 그냥 귀찮아서 쳤습니다. 쟤들도 같이 잡는 게 어려운 건 아닌데… 오늘 일정이 많아서 마력을 아끼고 싶거든요."
"가, 감히. 네 놈… 아, 윽…!"
에커먼 회장의 몸이 일시 정지를 누른 화면처럼 멈췄다.
그도 약한 헌터는 아니었지만, 이호연의 결계 내부에 들어온 순간 저항할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회장님."
"크, 크아. 아윽…."
에커먼 회장의 머리에 손을 올린 이호연은 그대로 마력을 쑤셔 넣었다.
이 정도로 깊은 세뇌를 억지로 끊어내려면 조금은 몸에 부담이 간다.
"아아악… 아, 크으읍…."
에커먼 회장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작은 구로 뭉치고, 이내 이호연의 손 위에 떨어진다.
그 마력구를 불태워버리자, 에커먼 회장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하지만, 이내 털썩하고 쓰러졌다.
반항하는 몸에서 억지로 세뇌를 뽑아냈으니 조금은 몸에 무리가 있을 거다.
물론 이호연이 알 바는 아니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큭. 윽… 자네는…?"
방금 세뇌가 풀려서 기억이 아직 흐릿할 때.
이호연은 에커먼 회장을 부축하며 자리에 앉혔다.
에커먼은 아직 당황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봤다.
이호연은 그가 방금 기억을 떠올리기 전에 몰아붙이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 이호연입니다. 회장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갑자기 쓰러지셔서 부축해드렸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 아아… 그랬군. 맞아."
기억이 흐릿한 에커먼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이호연은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마인과 만났다는 증거를 찾아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마에스트로의 세뇌에 걸린다고 해서 의지 없는 인형이 되는 게 아니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상함을 못 느낄 뿐이다.
예를 들면, 지금 같은 시국에 마인과 접촉하는 것.
헌터 협회의 회장으로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세뇌에 걸렸던 그는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마인을 만났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레베카가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살인에 관련된 업무를 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냈다.
에커먼 회장도 마찬가지.
그가 세뇌에 걸렸을 때의 기억은 이해가 안되더라도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을 거다.
"이, 이건…."
에커먼은 팔을 떨며 이호연이 챙겨온 장부를 바라봤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자신의 머릿속에도 기억이 남아있었다.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마인을 만났고, 그들과 거래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눈앞에 이호연 마법사만 처리하면 된다.'
에커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이호연을 바라봤다.
선해보이는 인상과 누구든 믿음을 줄 것 같은 눈빛.
이 멍청이는 이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도 혼자 찾아왔다.
천재 마법사라고 해 봤자 아직 꼬맹이인 것이다.
'어떻게든 경비원들에게 연락을….'
에커먼은 조심스럽게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으, 읏…."
탁-
에커먼 회장의 손을 붙잡은 이호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회장님. 제가 이런 정보를 들고 회장님에게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뭐겠습니까. 전 당연히 회장님의 편입니다.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방 안을 채우는 이호연의 마력.
피부가 오싹해질 정도의 압박감은 에커먼 회장을 맹수를 눈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만들었다.
에커먼 회장은 그제서야 입술을 벌벌 떨며 이호연을 바라봤다.
눈앞의 청년은 멍청이도 아니고 꼬맹이도 아니었다.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맹수였다.
"저를 도와주세요. 회장님. 그럼 이 일은 어디에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아, 알겠네. 뭐든 도와주겠네. 일단은 이 마력을, 크흡… 프하아, 하아. 하아…."
이호연이 살짝 압박감을 풀자, 에커먼은 그제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시네요."
"그래. 이, 이호연 마법사. 필요한 걸 말해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네. 그런데 그 전에… 안전장치를 조금 해야 할 것 같아요."
이호연은 손가락 끝에 마력을 모았다.
그리고 에커먼 회장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갔다.
에커먼 회장은 깜짝 놀라 몸을 빼냈지만, 이호연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에 닿는 게 더욱 빨랐다.
"자, 잠시만. 나는 절대 아무 말도… 크흡! 아아악…."
에커먼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신음을 흘렸다.
이호연의 마력이 몸 안에 파고든 뒤, 밧줄 같은 것이 자신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마력은 분명 자신의 심장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회장님의 심장에 안전장치를 해놨습니다. 회장님이 저한테 해가 되는 일을 하면 마력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아, 만약 제가 죽는다면 그 마력은 자동으로 터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회장님은 절 지키셔야 할 거에요. 임솔 마법사 정도가 아니라면, 마력을 건드리기만 해도 심장이 부숴질테니까 어디 말 할 생각은 하지 마시구요."
"자, 잠시만. 이호연 마법사. 내게 왜 이러는 건가. 난 자네에게 협력할 생각이었어…!"
"회장님이 저한테 하셨던 행동을 생각하세요."
"내, 내가 언제 그런 짓을…."
"검은 기둥에 대해서. 이래도 생각 안 나십니까?"
"검은 기둥… 어, 어…?"
하나 둘 씩.
자신이 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검은 기둥을 부수는 이호연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터뷰를 하고, 성명을 발표했다.
대체 검은 기둥이 뭐라고 이런 짓을 한 거지?
'감정 증폭.'
이호연은 천천히 마력을 움직였다.
증폭할 감정은 공포심.
에커먼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회장님이 한 짓을 추궁하는 건 아닙니다. 말했듯이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한 번이라도 더 그런 짓을 하시면…."
두근-
에커먼은 부들부들 떨며 심장부근을 감쌌다.
나중에 증폭된 감정이 사라지더라도, 심장에서 마력을 느낄 때마다 오늘의 일이 떠오르겠지.
'… 물론 그런 마법은 없지만.'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있다. 그런 데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을 뿐이다.
그래도 이런 위협 한 번에 내 편이 하나씩 늘어난다면 이 정도 연기는 해줘야지.
"아, 알겠네. 절대 자네에게 해가 가는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이 처신만 잘하시면 그 마력이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아…."
상황을 정리한 이호연은 주변에 남은 마력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경고까지 한 다음 바깥으로 나왔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목숨을 끔찍하게 아끼는 법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배신할 수 없겠지.
'조금 너무했나 싶긴 한데….'
세뇌에 걸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장부에 있던 VIP들의 죄만 봐도 이 정도 협박은 당해도 싸다.
그나마 회장은 탈세 정도가 끝이라 이 정도로 봐준거다.
"다음은 안젤라 길드인가?"
이런 건 미국에 있을 때 빠르게 끝내놔야지.
이호연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