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1화 >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30)
엘리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하늘에 보이던 점이 점점 커지고, 비행기가 되어 공터로 다가왔다.
두두두두-
땅으로 하강한 비행기는 부드럽게 착륙했다.
웅웅거리는 엔진이 멈추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뭐야. 이호연 마법사님이 없잖아…? 스칼렛, 약속과 다르잖… 앗, 안녕하십니까? 1팀장님!"
가장 먼저 내린 건 아이리스 길드 소속 비행사 빅터.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아이린과 엘리스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으어, 멀미가… 웁. 우웁…. 스카웃. 나 죽어…."
"빅터. 여기 미녀가 3명, 아니 5명이나 있는데 호연 님을 왜 찾는 건가요."
뒤이어 내리는 스칼렛과 릴리아나.
스칼렛은 멀미로 고통스러워하는 릴리아나를 챙기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고생했어. 릴리아나. 애기 아빠한테 도착했다고 연락 보냈으니까 잠시 쉬어."
마지막으로 내린 레베카는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 나 : 애기 아빠~. 프랑스로 날아왔어. 다은 양은 집 지키는 중!
- 애기 아빠 : 잘 부탁드릴게요. 레베카 씨. 다은이는 임솔 교수님한테 맡길 테니까 그쪽 일에 집중해주세요.
- 나 : 검은 기둥 하나 부술 때마다 아이 한 명씩 추가야!
마지막 메시지에 답장이 없는 게 좀 아쉬웠지만, 저쪽도 바빠서 그렇겠지.
"프랑스에서는 오랜만에 보네. 레베카."
"아이린.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아이린 님."
"어, 음. 릴리아나, 스칼렛. 안녕."
아이린은 오랜만에 보는 여자들과 인사하며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들은 볼 때마다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든다.
분명 심성이 나쁜 사람들은 아닌데, 첫 만남이 워낙 이상했다.
특히 한국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도 이 사람들을 보게 된다니 기분이 영 그렇다.
"다들 준비는 된 거지? 이호연이 말하기론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던데."
아이린은 이호연의 요청으로 프랑스에 있는 검은 기둥을 부수기로 했고, 그녀들은 검은 기둥을 부수기 위한 멤버였다.
"응. 애기 아빠한테 특훈도 받았어. 검은 기둥 부수는 법도 알아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 레베카. 애기 아빠 같은 호칭은 이호연의 평판을 생각해서 자제하는 게 어떨까?"
심지어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런 호칭을 하는 건지, 아이린으로선 이해할 수가 없다.
"아이리스 길드의 두 자매가 한 남자를 좋아하는 건 괜찮고?"
"…."
괜히 레베카에게 한 마디 던졌던 아이린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 붉은 머리 여자는 이상하게 기가 세서 이길 수가 없다.
"아이린 님. 프랑스 정부는 검은 기둥을 부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없나요?"
"그러게. 이 나라는 아이리스 길드에 잡혀 사나 봐. 마치 이호연과 나같은 관계네?"
다행히 스칼렛과 릴리아나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린은 크흠. 하고 헛기침한 뒤 대답했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닌데… 우리가 지금까지 해준 게 있으니까. 입 싹 닫고 모르는 척할 순 없지."
프랑스에서도 반대 여론이 있었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프랑스였다.
아이리스 길드의 본거지 프랑스에서 다른 세력이 여론을 통제할 순 없었다.
그 이유로, 다른 나라와 다르게 프랑스에선 검은 기둥을 부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거의 없었다.
"역시 아이리스 길드가 대단하긴 하네. 스칼렛 양. 대체 그런 길드에서 왜 짤린거야?"
"제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레베카 님. 잘린 게 아니라 길드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뒤 제 발로 직접 나온 겁니다. 여기 아이린 님에게 물어보시죠."
"아이린. 스칼렛 양이 하는 말이 사실이야? 정말 애기 아빠와의 사랑을 위해…."
"레베카 님!"
"스카웃… 소리 지르지 마. 멀미 때문에 머리 아파…."
"… 레베카. 다시 한번 말할게. 애기 아빠라는 호칭은 좋지 않아. 잘 생각해봐. 나와 엘리스가 이호연을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의 평판을 떨어뜨릴 순 없어. 하지만…."
4명의 여자는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고, 조용히 그 꼴을 보고있던 엘리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자신은 이 사람들을 데리고 검은 기둥을 부숴야 한다.
심지어 이 팀의 리더는 아이린과 싸우고 있는 붉은 머리, 레베카였다.
'망했네….'
임무의 난이도가 높아도 너무 높다.
차라리 자신 혼자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행사 빅터는 눈치를 보다가 도망친 지 오래.
공터에 남은 사람은 멀미 때문에 누워있는 릴리아나와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스칼렛.
이호연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아이린과 레베카.
그리고 두통을 느끼는 엘리스뿐이었다.
'내가 안 끝내면 내일까지 싸우겠어.'
이 중에서 유일한 정상인은 자신이었다.
그 말은 즉. 이호연과 격이 맞는 사람도 자신 뿐이라는 거겠지.
음음.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그만하고, 일하러 가자."
*
임솔의 연구실.
이호연은 [무한의 엔트로피]에 마무리 작업을 하는 임솔을 멍하니 바라봤다.
임솔은 이호연이 꺼낸 [무한의 엔트로피]를 보자마자 아티팩트를 이리저리 살폈다.
'실물은 이런 느낌이구나.'라고 중얼거리더니, 자신이 새긴 마법진을 보며 몇 가지 질문을 해왔다.
"흐음… 대충 알겠어."
자신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임솔은 곧바로 작업을 진행했다.
깜짝 놀란 이호연도 마법진 연성에 참여했다.
────[ 무한의 엔트로피 (개조) ]────
▶ 최상등급
▶ 무한하게 마력이 솟아나는 기적의 성배.
▶ 성배에서 솟아나는 마력은 아티팩트에 저장된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저장할 수 있으며, 사용자의 마음대로 마력을 꺼낼 수 있다.
* 개조 : 무한히 솟아나는 마력에 마법 시전자의 마력을 섞습니다.
────────────
약 한 시간 뒤, 결과가 나왔다.
이호연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결과물이었다.
"이 정도면 작동할 것 같아."
임솔은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오랜만에 집중할만한 일이 생겨서 머리를 썼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여기 안 찾아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호연은 결과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법에 대한 건 임솔에게 물어보는 게 최고다.
이걸 자신 혼자서 만들었으면 반나절 넘게 걸렸을 거다.
"역시 교수님한테 가져오길 잘 했네요. 마법은 교수님만 한 사람이 없어요."
"당연한 소리하지 말고 가져가.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재밌었어."
임솔은 작업을 끝낸 [무한의 엔트로피]를 이호연에게 들려줬다.
이호연은 아티팩트를 챙기며 생각했다.
[무한의 엔트로피]가 자신에게 있는 데도 별말이 없는 게 참 신기했다.
'생각해보니 에이든을 잡았을 때도 솔이가 붉은 마력구를 하나 챙겨줬었지.'
그때도 임솔이 에이든의 집에서 슬쩍 한 물건을 받았었다.
애초에 임솔에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임솔에게 도덕성이 없는 건 아닐 거다.
아마 아서 협회장에게 워낙 당하다 보니, 협회장과 일할 때 자신의 몫은 자신이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제 검은 기둥 일만 잘 부탁드립니다. 임솔 교수님."
"노력은 해볼게. 하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건 싫어."
"교수님만큼 마법이 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조금만 도와주세요."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긴 하지."
임솔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며 이호연은 [무한의 엔트로피]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 교수님은 다루기 쉬웠다.
"마력은 준비됐는데 마도구는 언제부터 만들 거야?"
"마법사 협회에 한 번 찾아가 보려고요. 마도구를 어떻게 만들지도 생각해놨으니까, 협회장님한테 양산을 맡겨야죠."
"나도 같이 가줄까?"
"아니요. 교수님은 검은 기둥을 부숴주세요."
아까 레베카가 프랑스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호연이 프랑스에 있는 검은 기둥을 많이 부수긴 했지만, 프랑스는 면적이 넓어서 한국보다 기둥이 많다.
한국과 프랑스의 작업은 얼추 비슷한 시점에 끝나겠지.
"그럼 내가 연락만 보내줄게."
"네. 협회장님한테 연락 하나만… 아니다. 제가 직접 할게요."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키고 협회장한테 연락을 보냈다.
직접 연락할 일이 워낙 없긴 해도, 협회장과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으니 괜찮겠지.
*
엘리스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여자들 때문은 아니었다.
두통의 원인은 지옥의 마력이었다.
지옥의 마력을 다루는 법을 배웠지만, 검은 기둥과 가까이 있다보니 엘리스도 편하진 않았다.
그나마 일을 시작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고뭉치인 그녀들도 이호연의 말은 잘 듣는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일부터 하자는 엘리스의 말을 귀담아들어 줬다.
일행은 가장 가까운 검은 기둥으로 향했고, 지금은 그 앞에 서있었다.
"지옥의 마력을 마나 회로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검은 기둥에 손을 얹은 스칼렛은 아이린과 엘리스에게 지옥의 마력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호연에게 배운 레베카나 스칼렛과 다르게 그녀들은 아직 완벽하지않았다.
몸에 들어오는 지옥의 마력을 갈무리한 스칼렛은 생각했다.
이호연의 말이 맞았다.
자신에게도 재능이 있었다.
지옥의 마력을 처음 익히는 게 어려웠을 뿐, 활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암살자로 활동하던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검은 기둥에서 나오는 지옥의 마력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건 스칼렛이 레베카보다도 뛰어났다.
"스칼렛… 너 대단하구나?"
아이린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스칼렛을 바라봤다.
자신도 아이리스 길드 내부에선 지옥의 마력을 가장 잘 다루는 인원이었다.
그런데도 스칼렛에게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러게. 레베카 씨보다 뛰어난 것 같아."
그건 엘리스도 마찬가지.
레베카와 릴리아나의 실력은 멍청한 행동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엘리스는 내심 스칼렛의 실력에 놀라고 있었다.
아이리스 길드에서 보던 모습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원래 이렇게 잘했어? 아이리스 길드에서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호연과 있으면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거야?"
"… 노력."
"응?"
"노력. 노력이 전부입니다. 아이린 님.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어, 응, 그래. 알겠어.
스칼렛이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 표정을 보니 아마도 훈련이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 괜한 걸 물었네.'
아이린은 미안함늘 느꼈다.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이 되기 위해 힘들게 훈련하던 기억이 생각났다.
그때의 기억은 아이린도 떠올리기 싫었다. 스칼렛도 그런 기억이 있는 거 겠지.
"스칼렛. 훈련에서 흘린 땀 한 방울이 실전에서 피 한 방울이라는 말이 있잖아. 난 네가 열심히 노력한 게 대단하다고 생각해.."
"땀 한 방울이…. 피 한 방울…."
아이린이 건넨 위로의 말을 들은 스칼렛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기분 좋은 기억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훈련에서 흘린 땀 한 방울만큼 피를 아낀 거라면….'
자신은 무적이 되는 건가?
아니, 이건 너무 멍청한 생각이잖아.
이런 생각을 하다니 자신도 주변인에게 동화된걸까.
스칼렛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 날 밤의 기억을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