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620화 (620/648)

< 620화 >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29)

텅텅 비어있는 마도관의 로비.

나는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리며 팔짱을 낀 채 고민을 이어갔다.

'일단 솔이한테 마도구를 보여주고… 그다음에 검은 기둥 이야기를 해야겠네.'

레베카와 임솔은 검은 기둥을 부수는 계획의 중심이었다.

지옥의 마력을 가장 잘 사용하는 게 그 두 명이었으니, 그만큼 그녀들이 맡은 역할이 중요했다.

띵-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는 팔짱을 풀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우리 교수님이 연락을 안 받는 걸 보니 마법을 연구에 빠져있는 것 같다.

오늘부터 검은 기둥을 부수자고 분명히 말했는데, 마법 연구에 집중하다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일단 솔이 얼굴 한 번 보고… 미국에도 한 번 가야 하나?"

임솔을 만난 뒤 일정을 생각했다.

히로인들이 검은 기둥을 부숴주면 그만큼 내게 여유가 생긴다.

마도구 보급을 위해서 마법사 협회에도 한 번 들려야 할지도 모른다.

띠링-

'시간이 남으면 미국 주변의 검은 기둥을 부수는 것도 괜찮으려나. 나름대로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 에피소드가 코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 움직여야 효율적인지 고민하며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언제 와도 조용한 임솔의 연구실.

조교가 없는 걸 보면 임솔은 사무실에 있는 모양이다.

"임솔 교수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존댓말을 하며 사무실로 다가갔는데, 역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사무실에는 눈을 찌푸린 임솔이 마법진을 째려보고 있었다.

"교수님. 제자가 왔습니다."

"응? 아, 우리 제자 왔구나?"

임솔은 날 보자마자 째려보던 마법진을 접었다.

마법보다 나한티 집중해주는 모습이 참 좋긴 한데, 그럼 연락도 좀 받으면 좋겠네.

난 임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교수님이 연락을 안 받으셔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오늘부터 검은 기둥을 부수기로 했잖아요. 왜 연락을 안 받으세요."

"응? 그랬나?"

임솔은 마력을 갈무리한 뒤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는 말에 큰 관심을 안 두고 있는 듯, 응접용 소파에 앉아 턱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서 있지 말고 빨리 앉으라는 뜻이다.

난 임솔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찌푸렸다.

설마 진짜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솔아. 검은 기둥 부수는 거 진짜 잊어버린 거야?"

"아니. 학생회장이랑 다른 생도들과 오늘 오후에 보기로 했어. 우리 제자는 내가 까먹었을까 봐 직접 찾아왔구나. 스승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임솔은 피식 웃으며 날 바라보곤 핫초코를 홀짝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보니 주전자와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내 앞에도 커피 한 잔을 내왔다.

"아… 다행이다."

나는 커피잔을 들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우리 교수님이 그래도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안심하는 거 보니까 진짜 그것 때문에 왔나봐?"

"아니에요. 다른 용건이 있죠. 근데… 혹시 그 옷 그대로 나가실 거예요?"

나는 임솔의 옷차림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핑크색 오버사이즈 무지티와 검은색 레깅스.

어깨에는 흘러내린 푸른색 로브가 걸쳐져 있었다.

저 복장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사무실에서 입는 건 그렇다 쳐도 외출용으론 너무 자유분방한 거 아닌가?

그래도 아카데미의 교수인데 품위가 있어야지.

"이게 왜? 엄청 편한데. 겉으로 티는 안 나도 마력 저항이 높아서 나름 비싼 거야."

임솔은 옷을 이쪽저쪽 들추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점을 모르다 보니 지적해줄 수도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난 임솔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가 마법사 학회에 갔을 때 입었던 정장 차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교수님은 꾸미면 참 예쁜데 왜 그 미모를 낭비하고 있을까.

"저번에 보니까 다른 옷들도 많더만, 왜 안 입는 거에요. 제가 선물이라도 해줘요?"

"아영이나 예지가 많이 사줬어. 하지만 이거 말고는 불편한 걸 어떡해."

"… 으음."

임솔은 남의 시선이나 품위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니다.

자기가 불편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검은 기둥 일은 교수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제 용건은 따로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거든요."

"물어보고 싶은 거?"

"마도구를 만들려고 해요."

나는 이번에 만드는 마도구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 세계에서 제대로 된 지옥의 마력을 인지하고 각성하려면, 자신의 마력과 닿아야 한다.

그것이 이 세계에 걸려있는 제약이다.

지옥의 마력을 담은 루시퍼의 시체를 조각내어 전 세계 곳곳에 뿌리긴 했지만, 그 수가 적다 보니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옥의 마력 중독자 같은 병이 나오는 것이다.

지옥의 괴수가 지구를 덮친다면, 가장 위험한 건 일반인과 약한 능력자들이다.

그 사람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선 지옥의 마력을 좀 더 보급해야 한다.

난 마법진의 구성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지옥의 마력을 계속 공급하는 마도구… 괜찮네. 아영이도 최근에 이것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했었어. 잘될 거 같은데?"

임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녀의 기준에서 신선하고 좋은 마법을 봤을 때 보여주는 반응이다.

일단 임솔의 기준을 통과했다면 마법 자체는 최상급이라고 봐도 되겠지.

"팔아서 돈을 벌 생각은 없고요. 대량으로 만들어서 싸게 보급할 생각에요. 교수님이 보기엔 괜찮을 것 같아요?"

"당연하지. 굳이 나한테 보여주려고 온 거야?"

"네. 그래도 혼자 하는 것보단 교수님하고 고민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흐흐. 큼, 흐음."

임솔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급히 표정을 고쳤다.

인정받는 게 기쁘면 기쁘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마도구 보급은 어떻게 하려고? 아이리스 길드?"

"아이리스 길드는 좀 바빠서요. 마법사 협회장님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마법사 협회의 아서 협회장.

그 아저씨한테 받을 빚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내 말을 들은 임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서 아저씨는 요즘 엄청 바쁘다고 들었어."

"지옥의 문 때문에요?"

"그것도 그렇고, 뭐였지? 마력이 엄청 많은 아티팩트를 찾는다고 하던데."

"…… 아, 네. 그래요?"

마력이 엄청 많은 아티팩트.

그게 무엇인지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그치. 얼마나 꽁꽁 숨겼는지 나한테도 안 보여줬거든. 한 번 정도는 실제로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요즘 그 아티팩트를 찾느라 시간이 없대."

"아하, 하하하…."

"그래도 제자랑 내가 부탁하면 시간은 내주려나? 맞아. 이 마도구는 어떻게 양산할 거야? 마법은 좋은데 우리 제자의 마력이 필요하잖아."

나는 임솔의 말을 들으며 아공간 주머니를 꽉 쥐었다.

마도구의 양산을 설명하기 위해 [무한의 엔트로피]를 챙겨왔기 때문이다.

"…… 크흠. 운 좋게 마력이 많은 아티팩트가 생겨서요."

짧은 시간, 수많은 말이 머리를 스쳤지만, 굳이 속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공간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렸다.

내가 개발한 마도구를 설명하는 데에 [무한의 엔트로피]를 빼먹을 순 없다.

게다가 [무한의 엔트로피]에 새기는 마법진도 임솔에게 봐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니 아예 숨길 순 없다

나는 곧바로 [무한의 엔트로피]를 꺼냈다.

주머니에서 나온 성배를 본 임솔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야?"

"이게 무한의 엔트로피에요."

"무한의 엔트로피... 응? 으음? 아서 아저씨가 찾는 아티팩트 이름이 분명...."

"네. 그거 맞아요. 전에 에이든의 거처를 습격했을 때 기억하시죠? 그때 슬쩍 챙겼어요. 죄송합니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이호연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임솔에게 용서를 받아야 자신을 도와주겠지.

그런데, 임솔의 다음 말은 이호연의 예상과 달랐다.

"역시 우리 제자. 자신의 몫은 직접 챙기는구나. 굳이 챙겨줄 필요도 없었네."

"네?"

*

아이리스 길드 건물 뒤편,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터.

잔잔한 바람이 나뭇잎을 바스락거리고, 멀리서 새들이 지저귄다.

바깥에서 보기엔 나무와 결계로 가려져 있지만, 공터 안쪽은 생각보다 공간이 넓었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금발을 귀 뒤로 넘긴 엘리스는,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봤다.

'이 정도로 조용할 리가 없는데….'

최근 아이리스 길드가 생각하는 문제는 당연히 태평양 한가운데에 떡하니 생겨난 지옥의 문이다.

점점 불길한 어둠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고, 실제로 조업 중 실종당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 전문가들을 초빙해 매일같이 위험성을 강조했지만, 이상하게 대중의 관심이 없었다.

"이건 국가적인 언론 조작이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이 미친놈들이 단체 최면이라도 걸린 건가?"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바라본 엘리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마에스트로였다.

하지만 아이리스 길드의 정보원을 풀어도 쓸만한 정보가 들어오질 않았다.

'호연이가 말해준 계획이 있긴 하지만… 확률이 100프로는 아니니까.'

엘리스도 이호연이 해결해주길 기다릴 생각은 없다.

그의 이미지를 사용해 이득을 본 만큼,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보답해야 한다.

물론 그런 비즈니스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호연을 도와줄 생각이….

"엘리스. 미친놈들이라니. 그럼 못 써. 그런 말은 품위가 떨어지잖아. 그리고 정보원들은 이번에 레베카에게 부탁해볼 생각이야. 레베카는 마에스트로의 세뇌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대."

"… 언니.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같이 들었잖아. 그리고 미안한데 내 스마트 워치 화면은 그만 훔쳐보면 안될까?"

"아, 으응… 미안. 걱정스러운 표정이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

엘리스는 기가 팍 죽은 아이린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한마디 했다고 저렇게 시무룩해지면 엘리스도 왠지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잘못한 건가…?'

아이린은 원래도 조금 이상했지만, 이호연이 프랑스에서 2주나 머무른 이후부터 더욱 이상해진 것 같다.

'그 사람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애꿎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비행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언니. 오늘은 같이 잘까?"

"정말?!"

"아니, 다시 생각해볼게.

"에, 엘리스… 왜 그래…."

"기다리던 사람들이 왔잖아."

엘리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응시했다.

아직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엘리스의 미세한 감각이 마력을 잡아냈다.

잠시 후, 하늘 저편에 작은 점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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